1600(선조 33)~1673(현종14). 본관(本貫) 아주(鵝洲). 자(字) 망구(望久). 호(號) 고송(孤松). 부(父) 지제(之悌). 거(居) 의성(義城). 1627년진사에 입격하고, 1639년 별시(別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함. 주서·지평·정언·풍기군수(注書·持平·正言·豊基郡守) 등을 역임함. 1652년司憲府持平 재임 시 탄핵 되어 2달간 벽동으로 유배됨. 1659년풍기군수로 부임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교육에 힘씀. 저서로는고송집(孤松集)이 전함.[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대중(大中), 호는 정봉(鼎峰). 신수(申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신원복 (申元福)이고, 아버지는신엄(申儼)이며, 어머니는충순위(忠順衛) 선산 김씨(善山金氏) 김윤덕 (金潤德)의 딸이고, 부인은 안동 김씨(安東金氏) 김응용(金應鏞)의 딸이다.
신홍도(申弘道)[1558~1612]는 6세에『대학』, 9세에 『논어』를 읽었으며, 20세 때에 집 동쪽 5리에 위치한 선암사(仙巖寺)[현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치선리]에서 공부를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난중잡록(亂中雜錄)』에따르면, 1592년 경상도 예안현(禮安縣)에서 김해(金垓)가 창의를하자 그는 의성에서 창의하여 김해의 통솔을 받았다고 한다. 전란 초기 첨사(僉使) 배경남(裵慶男)이 패주를 거듭하며 도망치자 그의 죄상을 순찰사에게 알리고, 장사진(張士珍)으로 교체를 청하여 허락을 받기도 했다. 1593년 명나라 원병들이 인근으로 남하해 오자, 그들의 군량을마련하는 데 힘을 썼다. 1598년 명나라 유격 장군(遊擊將軍) 엽방영(葉邦榮) 부대의주둔지가 안동에서 의성으로 옮겨졌는데, 병졸들의 횡포가 심하여 고을의 많은 백성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섭엽방에게 편지를 보내 보급 문제에 대해 논의한 뒤 그들의 횡포를 진정시켰다.
1600년(선조 33) 관찰사가 유일(遺逸)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한 뒤 선암사 아래에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주력하였다. 1603년에는 관찰사로부터 임진왜란 때의 사적을 지어 올리라는 명을 받았다.
1608년 광해군 즉위직후, 대북(大北) 세력이서인(西人) 학통을 공격하자, 서인의 유생 고경리(高敬履)가정철(鄭澈)과 성혼(成渾)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상소문 가운데 오현(五賢)을 언급하면서, 이언적(李彦迪)을 누락하자 상소문을 올려 그 잘못됨을 논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배척을 요구하는 ‘회퇴변척(晦退辨斥)’의 논의를 일으키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김언기(金彦璣)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장현광(張顯光)과 서사원(徐思遠) 등 퇴계 학파의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향촌에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주력하였는데, 인조 연간 척화론을 주창하였던 신적도(申適道), 신달도, 신열도(申悅道) 형제도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서인 『성리휘언(性理彙言)』, 예학서인 『상례고증(喪禮考證)』, 선대의 장갈문을 엮은 『영모록(永慕錄)』을 지었다고 하나 산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아주 신씨 대동보』에는유고(遺稿)만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는 현 경상북도의성군 의성읍 오로리오토산(五土山)에 있다.
경상북도 의성군사곡면 매곡리의 매강 서원(梅岡 書院)에 신원복(申元福), 신류(申瑠)와 함께 배향되어 있다. 『아주 신씨 대동보』에 의하면, 신홍도의 위패는 1817년(순조 17) 배향되었고, 유심춘(柳尋春)이 봉안문(奉安文)을 찬(撰)하였다. 2009년에는의성의 유림 김창회(金昌會)가 묘갈명을 찬(撰)하였다.
1731(영조 7)~1812(순조 12).본관(本貫) 아주(鵝洲). 자(字) 자장(子長). 호(號) 회병(晦屛). 부(父) 도만(道萬). 거(居) 의성(義城). 김락행(金樂行)‧임필대(任必大)‧리상정(李象靖)의 문인. 어려서부터 독서에 몰두하고, 30세 전후에 경전과 천문지리‧의술 등을 두루 통달함. 이후출사의 뜻은 버리고 敬하나로 거(居) 경궁리(敬窮理)함. 금산서원(錦山書院)에 제향됨. 저서로는회병집(晦屛集)이 전함.[참고] <신종우(辛鍾友)의인명사전>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학자.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자장(子長), 호는 회병(晦屛). 신숙범(申叔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분구(申賁龜), 아버지는신도만(申道萬)이고, 어머니는의성 김씨(義城 金氏) 김민행(金敏行)의 딸이며 부인은 풍산 유씨(豊山柳氏) 유후원(柳後元)의딸이다.
신체인(申體仁)[1731~1812]은 3~4세 때 이웃집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리면 말도 없이 그 집에 가서, 글읽는 소리를 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질만큼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어려서 화장산(華藏山)[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일대]의 초당에서 공부하였고, 장성해서는 김낙행(金樂行), 임필대(任必大),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수학하였다. 30세 무렵에는 유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의술·병가·산수(算數)·복서(卜筮) 등 여러학문을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1761년(영조 37) 향해(鄕解)에 응시해서 장원하는 등 학문적 명성이 있었지만,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1782년(정조 6) 금산(錦山)[구미리]에 금연 정사(錦淵精舍)[현 금산 서원(錦山 書院)]가 완성되자 그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786년에는빙계 서원(氷溪 書院)의 교석(敎席)을 주도하며 통강례(通講禮)를 행하고자, 주자(朱子)의 월삭회약(月朔會約)을모방해 의절까지 정해 놓았으나 실시하지 못하였다.
1788년 눈병으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자, 존양(存養) 공부에 열중하였다. 1807년(순조 7) 경술과 문장이 모범이 된다하여 의성 현령(義城 縣令)이 천거하였고, 경상도관찰사가 연이어 신체인의 학행을 조정에 계청하였다.
이상정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280여 명의 인사들과 호문학단(湖門學團)을 구성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호문학단 중에서도 그는 학문이 뛰어나 호문육군자(湖文六君子)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의 문집으로는 12권 6책의 『회병집(晦屛集)』이 전하는데, 19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회병집』 권6에 수록되어 있는 「천학종지도변(天學宗旨圖辨)」은 천주교를 비판한 글로, 당시 천주교에 대한 영남 유림의 인식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 외에도 ‘경(敬)’의 요체에 대해 설명한 4권 2책의『숭경록(崇敬錄)』을 저술하였으며, 정만양(鄭萬陽), 정규양(鄭葵陽) 형제의 어록인 『훈지양선생어록(塤篪兩先生語錄)』도 산교(刪校)하였다. 한편, 『아주신씨 참판공 파보』에는 『징성록(徵省錄)』을 저술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화전리 동곡(凍谷)에 있다.
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산리에 있는 금산 서원에 신지제(申之悌), 신지효(申之孝)와 함께 배향되어 있다. 금산 서원은 신체인이 강학을 위해 1782년 건립한 금연 정사를 1977년 중건하고, 1981년 서원으로 승격한 것이다. 신체인의 위패는 신지제와 함께 1977년 배향되었다.
1610(광해군 2)~1672(현종13). 본관(本貫) 아주(鵝洲). 자(字) 자경(子卿). 호(號) 인재(忍齋) 삼모(三某). (父) 적도(適道). (居) 의성(義城) 현광(顯光) 인. 1646년 식년시(式年試) 등으로 진사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유학함. 장현광(張顯光) 의 문하에서 홍여하(洪汝河) 도의로서 사귀며 서로 학문을 토론 저서로는 인재유집(忍齋遺集)함. [참고] 『병술3월○일을유식년사마방목(丙戌三月○日乙酉式年司馬榜目)』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학자.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자경(子卿), 호는 인재(忍齋). 참의(參議) 신원록(申元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신흘(申仡)이고, 아버지는참봉(參奉) 신적도(申適道)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 첨정(僉正) 윤순조(尹淳祖)의 딸이고, 부인은안동 권씨(安東 權氏) 권익창(權益昌)의 딸이다.
신채(申埰)[1610~1672]는어린 시절부터 총기를 보이며 학문에 뜻을 두었다. 1629년(인조 7) 향해(鄕解)에 응시하여급제하였으며, 1643년(인조 21)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향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1646년(인조 24)에는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는데, 성균관에서의 학업 활동이 뛰어나영남의 삼모(三某)라는 칭호를 받았다. 또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의명으로 「태학명(太學銘)」을 짓기도 했으며, 또 세자의 명에 의하여 「성학 도명(聖學 圖銘)」을 지었다. 1660년에 모친상을 당하고
1664년에 부친상을 당하자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사모하듯 지극 정성으로 전후 상례를 치렀으며, 그 후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실천의 공부에 전념하였다. 이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집 앞에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당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 하였다. 아울러팔지산(八智山) 아래에 별업(別業)을 개척한 뒤, 그곳의지명을 팔지(八智)[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로 고치기도 했다.
문집으로는 4권 2책의『인재집(忍齋集)』이 전하는데, 1931년 후손 신상하(申相夏)가간행하였다. 문집에 수록된 글들 가운데 「답대학문목(答大學問目)」, 「용학표리설(庸學表裏說)」, 「성학십도명(聖學十圖銘)」 등과 같은 성리학 논설들이 주목된다.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에 있다.
1858년(철종 9) 부친 신적도, 계부 신열도와 함께 단구 서원(丹邱 書院)[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에 배향되었다.
1561(명종 16)~1595(선조28). 본관(本貫) 아주(鵝洲). 자(字) 달부(達夫). 호(號) 응암(鷹巖). 부(父) 몽득(夢得). 거(居) 의성(義城). 김언기(金彦璣)의 문인. 효성이지극하고 학자로 명성이 높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부모님을모시고 피난하다 왜적에게 잡혀죽는 순간까지도 부모님을 모시지 못함을 한탄함. 저서로는 응암실기(鷹巖實記)가 전함. [참고] <신종우(辛鍾友)의인명사전>
조선 후기 의성 지역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달부(達夫). 호는 응암(鷹巖). 아버지는 증 좌승지(贈 左承旨)신몽득(申夢得), 어머니는 증 공조 참의(工曹 參議) 박민수(朴敏樹)의 딸인 증 숙부인(贈 淑夫人) 월성박씨(月城 朴氏), 할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역임한 신응규(申應奎), 증조할아버지는 부장(部將)을역임한 신한(申翰), 부인은 습독(習讀)을 역임한 김준창(金俊昌)의 딸 함창 김씨(咸昌 金氏)로알려져 있다. 신지효는 7형제 중 장남이다. 중제(仲弟) 신지제(申之悌)가 문과 급제하며 현달하였다.
신지효(申之孝)[1561~1592]는 1561년(명종 16) 출생하였으며, 경상도 의성현 신례동(新禮洞)[현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풍리리]에 거주하였다. 어려서부터용모가 수려하고 효우가 있었다고 한다. 18세 때 교임(校任)이 되었으며, 25세 때 고을 사람들이 교장(校長)으로 추대하였다.
임진왜란 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 5월 왜병을 피해 어머니 고창 오씨(高敞 吳氏)[아버지 신몽득의 후처]를 모시고 응동(鷹洞)[또는 천동(泉洞), 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길천리] 암혈(巖穴)에 피신하였다. 그러나쫓아온 왜병에게 발각되어 왼쪽 어깨를 칼로 베이고 말았다. 피를 흘리며 죽기 직전 신지효는 칡을 입으로씹어 붓을 만들었다. 이어 예안 현감(禮安 縣監)을 지내고 있던 중제(仲弟) 신지제에게주기 위한 혈서(血書)를 쓰고 난 뒤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혈서에는 “나의 몸가짐이 조밀하지 못하고 효성이 없음이 이보다더할 수가 있겠는가? 늙은 부모는 여러 아우들이 있어 받들어 모시고 있거니와, 군(君)은 이미 몸을왕실에 맞긴지라. 직수(職守)가 있는 터이니 마땅히 난에 임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고 실석(失石)을 무릅쓰고 죽음에 나갈 것이며, 내 시체를 찾지 못할까 걱정하여다행히 발바닥에 ‘선성(宣城)[예안의 다른 이름]’ 두 글자를 써서 알도록 하였노라![吾之藏身 不密不孝 孰甚焉 老親則有諸弟奉侍 君旣委身王室 有職守 當臨亂 授命而失石 赴死之日 恐無以尋屍 幸於足掌書宣城二字 俾識之]”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중제(仲弟) 신지제와더불어 김언기(金彦璣) 문하에서 수학하며, 퇴계학맥을 계승하였다. 별도로 남긴 유고는 없으며, 유문으로 『응암실적(鷹巖實蹟)』이있는데, 1817년 편찬한 1책 44장의 목판본과 1933년에 편찬된 1책 72장의 석인본이 전하고 있다.『응암실적』에 수록된 「혈서습록(血書拾錄)」은신지제의 후손 신체인(申體仁)이 작성한 것으로 신지효의 ‘혈서’가 작성된 경위와 그것을 기리는 의의 등이 언급되어 있다.
신지효의 유골을 수습한 후, 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읍 광현리에묘소를 마련하였다.
금산 서원(錦山書院)[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산리에 위치]에 중제(仲弟) 신지제(申之悌), 신지제의 후손 신체인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금산 서원은 신체인이강학을 위해 1782년 건립한 금연 정사를 1977년 중건하고, 1981년 서원으로 변경한 것이다. 신지효의 위패는 2005년 추향된 것이다. 추향 당시 봉안문은 류용훈(柳龍勳)이 작성하였다. 한편신지효가 왜군에 의해 죽은 응동[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길천리]에는재실인 응암재(鷹巖齋)와 유허비(遺墟碑)가 건립되어 있다.
1764(영조 40)~1827(순조27). 본관(本貫) 아주(鵝洲). 자(字) 경백(景伯). 호(號) 도와(陶窩). 부(父) 종인(種仁). 거(居) 의성(義城). 정종로(鄭宗魯)의 문인. 벼슬에는뜻이 없어 학문에 열중하며 성리학에 전심함. 「자경륙잠(自警六箴)」과「암실명(暗室銘)」을 지어 경계로 삼음. 1812년 구장지(龜庄誌) 과구미촌향약(龜尾村鄕約) 을 지어 주민 교화에 힘씀. 문장에 능하여 많은 저술을 남김. 저서로는 도와집(陶窩集) 이 전함. [참고] <신종우(辛鍾友)의인명사전>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학자.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경백(景伯), 호는 도와(陶窩). 신성구(申聖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도발(申道潑)이고, 아버지는 신종인(申種仁)이며, 어머니는 선산 김씨(善山 金氏) 김기대의딸이고, 부인은 김해 김씨(金海 金氏) 김원묵(金元黙)의 딸이다.
신정주(申鼎周)[1764~1827]는 3~4세에 글을 해독하기 시작해 7~8세에 『통감(通鑑)』, 10세에 『소학(小學)』과 사서(四書), 12세에 삼경(三經)을읽었다. 1779년(정조3) 옥련사(玉蓮寺)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족부(族父) 신체인(申體仁)에게 수학하고,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도 공부하였다.
1783년 향시(鄕試)에급제하고, 이어 1809년(순조 9)에는 영남의 명망 있는 여러 학자들과 더불어, 홍여하(洪汝河)가 편찬한 『휘찬려사(彙纂麗史)』 교정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구미[지금의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1812년 『구장지(龜庄誌)』와「구미촌 향약(龜尾村 鄕約)」을 지어 주민 교화(敎化)에 힘썼다.
1817년 대구의 팔공산(八公山)에가서 평산 신씨(平山 申氏)와 아주 신씨가 분파되는 사적(事蹟)을 고찰하였다. 이후호서(湖西) 지방을 두루 유람하며, 여러 시와 글을 남겼다고 한다. 만년까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오로지 학문 연구와 향약 실시 같은 향촌 교화에 주력하여 ‘학행(學行)’으로 고을에서 이름을 높였다.
문장에 능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만록(漫錄)」, 「호서 기행록(湖西紀行錄)」 등이 6권 3책의문집 『도와집(道窩集)』에 전한다.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자경육잠(自警六箴)」과 「암실명(暗室銘)」을지어 자신의 경계로 삼았으며 『구장지(龜莊誌)』는 지금까지아주 신씨가 세거하고 있는 구장(龜莊)[현 경상북도 의성군봉양면 구미리]의 지리지이다.
1691(숙종 17)~1742(영조18). 본관(本貫) 아주(鵝洲). 자(字) 경해(景楷). 호(號) 이치재(二恥齋). 부(父) 덕일(德溢). 거(居) 의성(義城). 이현일(李玄逸)의 문인. 1719년증광시(增廣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지평(持平)‧정언(正言)‧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거(居) 창부사(昌府使) 등을역임함. 1728년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이를 막지 못하여 군위에 유배되었다가이듬해 석방됨. 1735년다시 흥양에 유배되었다가 7년뒤 적소에서 사망함. 1864년복관됨. 저서로는이치재집(二恥齋集)이전함.[참고]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한국인물대사전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경해(景楷), 호는 이치재(二恥齋). 신채(申埰)의 증손으로할아버지는 신대석(申大錫)이고, 아버지는 신덕일(申德溢)이며, 어머니는 이성구(李星耈)의 딸 예안 이씨(禮安 李氏)이고, 부인은 안이순(安履順)의딸 순흥 안씨(順興 安氏)이다. 숙부인 신덕순(申德洵)에게출계하였다.
신정모(申正模)[1691~1742]는어려서는 중부(仲父)인 신덕호(申德浩)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장성해서는이만부(李萬敷)에게 수학하였다.
1719년(숙종 4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20년에 부정자, 1725년(영조 1)에 지평(持平)·정언 (正言)·사옹원주부(司饔院 主簿) 등에 임명되고, 1727년 병조 좌랑·강원 도사·병조정랑 등에 임명 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다가, 거창 부사에 임명되자 부임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난 때, 이를 막지 못하여 군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뒤 암행어사 이흡(李潝)이 전과를 재조사, 보고하는 과정에서 그 죄상을 과장하여, 1735년 다시 흥양(興陽)에 유배되었다. 이듬해충청도 충주로 이배되었다가 적소에서 죽었다. 1864년(고종 1) 복관되었다.
신정모는 귀양지에서 항상 나라와 부모에게 충효(忠孝)를 다하지 못한 점을 부끄러워하며, 그 호를 스스로 이치재(二恥齋)라 하였다. 문집으로는 6권 3책의 『이치재집(二恥齋集)』이 전하는데, 이 문집은 1899년(광무 3) 후손 신상헌(申相憲)과 신돈식(申敦植)이 편집·간행한 것이다. 저서로는 10권 3책의 『소행록(素行錄)』이전해진다.
1574(선조 7)~1663(현종 4). 본관(本貫) 아주(鵝洲). 자(字) 사립(士立). 호(號) 호계(虎溪). 부(父) 흘(仡). 거(居) 의성(義城)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의문인. 1606년식년시(式年試) 진사에 입격함. 47세 때 빙계서원(氷溪書院) 원장을 지냄.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창의했다가 난 후 공을 인정받아 상운도찰방(祥雲道察訪)을 제수 받음. 병자호란때 또다시 창의했다가 삼전도(三田渡)의 굴욕 이후 줄곧 명나라를 존숭하는 산림처사로 세월을 보냄. 1867년 호조참의(戶曹參議)에증직되고, 단구서원(丹丘書院)에 제향됨. 저서로는 호계집(虎溪集)이 전함.
본관은 아주(鵝洲). 호는호계(虎溪). 아주 신씨 의성읍 파조(派祖) 신광부(申光富)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신원록(申元祿)이고, 아버지는 신흘(申仡)이고, 동생은 신달도, 신열도이다.
신적도(申適道)[1574~1663]는청년기에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에게 배웠다. 학문과 효행이 뛰어 났다. 1606년(선조 39) 진사시에급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임금이 피난길에 나서고 국사가 어지러운데신하된 사람으로 산하에 묻혀 구차하게 생활을 도모할 때가아니다.” 하며 원근의 동지들과 의병을 모집하고군량을 준비하여 밤낮 달려가니 이미 화의를 맺어 적이 물러간 뒤라 어전에 소장을 올려 장한 일이란 비답(批答)을 받고 나라로부터 상운도 찰방(祥雲道 察訪) 벼슬이 내렸다.
병자호란 때에도 의성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오랑캐와 화친할수 없으며, 이를 배척한다는 뜻에서 “척화하는 것이 당연한일. 어찌 강화파들은 반대한단 말인가? 오랑캐가 겁나 두려워함이라. 망국꼴 보려는 왕손매의 심정이구나.” 라는 척화시(斥和詩) 읊었고, 군사와양곡을 나라에 바쳤다. 나라에서 건원릉 참봉(健元陵 參奉)의 벼슬이 내려졌다.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기 위해 서울에가서 사은(謝恩)의 예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경상북도 의성군옥산면 금학리의 학소대에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날마다 『춘추(春秋)』를읽으며, 비분강개(悲憤慷慨)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소주(韶州) 산곡에대명(大明)의 일월이 비친다고 했다.
신이행은 효성이지극하여 나이 겨우 9세에 혼정신성(昏精晨省)[아침 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살피는 것]과 공양(供養)의 절도를 배우지 않고도 능하였다. 성장하여 어머니가 병이 들자 옷에는 띠를 풀지 않고 입에는 이를 드러내지 않았으며, 남제(南齊)의 유검루(庾黔婁) 고사처럼 병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언제나 변의 쓰고 닮을맛보았다.
또한 어머니가 붕어를 드시고 싶어하였으나 개울과 못이 가뭄으로 말라 물고기를 구하지 못하였다. 슬피 울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고 이때한 자나 되는 붕어를 보내 주어 어머니께 드렸더니 병환이 나았다. 사람들은 하늘이 효성에 감응한 것이라하며 크게 칭송하였다.
본관은 아주(鵝洲). 첫 이름은 신원유(申元濡)이다. 부인은 성주 이씨(星州李氏)이다. 아주 신씨(鵝洲申氏) 의성 입향조이다.
신윤유(申允濡)는 생몰년 미상이며, 고려충렬왕 때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냈는데, 고려가 멸망하자 현재의 의성군 단밀면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그의고려에 대한 충성과 절의에 대해 당대 사람들은 당개(唐介)에버금간다 하였다. 초하루 보름마다 산마루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고 깊은 한을 풀었기에 산 이름도 망경산(望京山)이라 하였는데 나중에 만경산(萬京山)이라 변경되었다.
묘는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에 있었는데 실전하였고, 구천면용사리에 소단을 조성하여 해마다 봉향하고 있다.
1509(중종 4)~1584(선조 17). 본관(本貫) 아주(鵝洲). 자(字) 중수(仲綏). 호(號) 정은(靜隱). 부(父) 수(壽). 거(居) 의성(義城) 그의 동생 원록(元祿)의일대기를기록한 효우록(孝友錄) 이 전함. [참고] <신종우(辛鍾友)의 인명사전>
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 학자이자 효자.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중수(仲綏). 호는 정은(靜隱). 아버지는 참봉을 역임한 신수(申壽), 어머니는 주부(主簿)를역임한 박자검(朴自儉)의 딸 의흥 박씨(義興 朴氏), 할아버지는 훈도(訓導)를 역임한 신준정(申俊禎), 증조할이버지는의성 입향조로 알려진 생원(生員) 신석명(申錫命), 부인은 생원 이숭년(李崇年)의 딸 흥양 이씨(興陽 李氏)로알려져 있다. 동생인 신원록(申元祿)은 효행으로 이름이 높아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그 행적이 수록되었다.
신원복(申元福)[1509~1584]은 1509년(중종 4) 경상도의성현 남쪽 원흥리(元興里)[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서 출생하였다. 동생 신원록과 더불어 어릴 때부터 효우가 있어서, 이와 관련된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아버지 신수가 오랫동안 병환이 있었기에, 신원복은 동생과 함께정성껏 시탕(侍湯)을 하였다. 18세가 되던 어느 날 의원이 말하기를 팔공산(八公山)에 가면 약초가 있다고 하였다. 11세였던 동생 신원록이 혼자 약초를캐러 가겠다고 하자, 신원복은 이를 민망히 여기며 자기가 혼자 가겠다고 말했다. 이에 신원록이 말하기를 “부모를 위해 약초를 캐러 가는 것이니 하늘이반드시 도울 것이다”하고 말하며 떠나니, 과연 무사히 돌아왔다. 이후 8년 동안 동생과 더불어 성실히 주야로 간호하였지만, 1533년(중종 28) 부친은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친의 묘를 팔지산(八智山)[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아래에 마련하려 했으나, 주민들이 이를 금지하였다. 이에 신원복은 묘자리를 얻게 해달라고지성으로 울면서 비니, 주민들도 감복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하여신원복은 가족을 이끌고 팔지로 이주하였으며, 동생과 함께 3년간여묘살이를 했다. 여묘살이가 끝난 후에는 묘소 아래에 재실을 세웠다.
모친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직접 대변까지 맛보며 정성을 다하였으나, 결국 1575년(선조 8) 세상을떠났다. 부친 묘소에 합장하였는데, 장례 때 신원록과 더불어역부들이 해도 되는 온갖 집역(執役) 스스로 하였으며, 이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세 번씩 묘소에 가서 곡을 했다고 한다.
한편, 1543년(중종 38)에는 인근 고을로 부임한 풍기 군수(豊基 郡守)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을 지으려고 하자, 신원복은 동생 신원록을 보내어 그를 스승으로 받들게하였다. 풍기에서 돌아온 신원록은 의성에도 서원이 필요함을 건의하였고,형제가 의논한 끝에 김안국(金安國) 배향의 서원을 1556년(명종 11) 장천(長川)[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을 지나 흐르는 남대천 상류 지역] 위에 건립하였다. 1576년(선조 9)에는 장천 서원(長川書院) 으로사액을 받으니, 훗날 옮겨 지은 빙계 서원(氷溪書院)[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에 위치]의 전신이다. 동생 신원록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의 효성을 기리는 『효우록(孝友錄)』을 작성하였다. 1580년(선조 13) 천거를 받아 헌릉 참봉(獻陵 參奉)에 제수되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4년(선조 17) 세상을 떠났다.
저술로는 동생 신원록의 효성을 기록한 『효우록』이 전한다. 1책 8장의 등초본(謄草本)이서울 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가계부터 시작해서 신원록의 임종까지 그 일대기를 연대기식으로 서술한것이다. 이외 유집(遺集)이있다고 『교남지(嶠南誌)』에 기록되어 있다.
의성현 팔지산[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의 동생 묘소 아래에 장례를 지냈다.
1807년 건립된 매강 서원(梅岡書院)[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매곡리에 위치]에 배향되었다. 매강 서원에는 손자 신홍도(申弘道), 증손자 신류(申瑠)도 함께 배향되어 있다. 배향 당시 봉안문(奉安文)은 류심춘(柳尋春)이 작성하였으며, 1920년 서원 중건 후 복향 될 때에는 이돈유(李敦裕)가 봉안문을 작성하였다. 한편신원복의 묘갈명(墓碣銘)은 류규(柳氵+奎 )가 1799년(정조 23)에지었다.
1516(중종 11)~�1576(선조9). 본관(本貫) 아주(鵝洲). 자(字) 계수(季綏). 호(號) 회당(悔堂). 부(父) 수(壽).거(居) 안동(安東)‧의성(義城). 주세붕(周世鵬)‧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인. 이황이(풍기군수) 豊基郡守 로 재임할 때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머물면서 조목(趙穆)‧구봉령(具鳳齡)‧김팔원(金八元) 등과 함께 강론하면서 교유함. 학행으로 관학의 교수(敎授)를 지냄. 광해군때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 (戶曹參議)에증직됨. 장천에빙계서원(冰溪書院)을 창건하는데 앞장섰으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선조 때는 장천서원(長川書院)으로 사액됨. 의성의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됨. 저서로는회당집(悔堂集) 이전함. [참고] 퇴계문인록(退溪門人錄)
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계수(季綏)· 순보(順甫). 호는 회당(悔堂). 퇴재(退齋) 신우(申祐)의 6세손이다. 참봉(參奉)을 지낸 신수(申壽)의 둘째로 태어났다.
신원록(申元祿)[1516~1576]은 효성과 학문이모두 뛰어났다. 11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병이 들어 인근에서 약을 구할 수가 없어 집에서 수백 리가떨어진 팔공산까지 직접 가서 약을 구해 왔다. 그러한 정성으로 형인 신원복(申元福)과 함께 8년 동안아버지를 간호하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홀로 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연친곡(宴親曲)」 8규(閨)를 지어 불렀다. 어머니의상을 당해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 세 번 성묘를 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에게 먼저 나아가 학문을 닦다가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자 그곳으로 나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그리고 스승 주세붕이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 삼년을 지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풍기 군수로 재임할 때에는 백운동 서원에 머물며 구봉령(具鳳齡), 조목(趙穆), 김팔원(金八元) 등과 강론하며 교유하였다.또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을 종유하며 학문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1556년(명종 11)에는 서원을 세워 의성(義城)이 관향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배향하는데 앞장섰으며, 이 일로 “장천(長川)”이라는 사액을 받게 되었다.그 밖에 향리를 위해 스승 퇴계에게서 향약을 필사해 와 실행하고, 난민을 구제하기 위해진휼장(賑恤場)을 운영하고,고장의 발전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대소과(大小科) 출신인사들의 모임인 연계소(蓮桂所)를 설립하고, 문중 인사를 모아 사당에 참배하고 학문을 권장하는 모임인 월삭회(月朔會)를 조직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다.
세상을 떠난 지 39년 뒤인 1615년(광해군 7) 그의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그가 살던 마을에 효자문이 세워지고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曹 參議)에추서되었다. 그리고 장대 서원(藏待書院)에 배향되었다.
생몰년미상. 본관(本貫) 아주(鵝洲). 호(號) 퇴재(退齋). 부(父) 윤유(允濡). 거(居) 의성(義城). 고려말엽에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를 지내고 李成桂가 등극하여형조판서(刑曹判書)로 불러도 나아가지 않음.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하고 살던곳은 효자리(孝子里)라 일컬어짐. [참고] 의성군지(의성군지(義城郡誌))
고려 후기 의성 출신의 무신이며 효자.
본관은 아주(鵝洲). 호는퇴재(退齋). 아버지는 신윤유(申允濡)로 아주 신씨(鵝洲申氏) 의성 입향조이다. 부인은 약목 유씨(若木 柳氏)이다.
신우(申祐)는 생몰년미상이며, 고려 충혜왕 때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봉상(奉常)·사헌부 장령 (司憲府 掌令)을거쳐 호군(護軍)에 이르렀다. 일설에는 전라도 안렴사(全羅道 安廉使)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친의 3년상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그 자리에 대나무 두 그루가 자랐다는 것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내리고 살던 마을을 효자리(孝子里)라고 불렀다.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에게영향을 받아 고려 멸망 후 고려에 대한 충성심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조카 사위인 길재(吉再)와 고향에 은거하였고 이성계가 등극하여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행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삼강행실록(三綱 行實錄)』 에 실려 있다.
문집으로 『퇴재선생실기(退齋先生實紀)』 2권이 있다.
묘는 의성군 구천면 용사리에 있다. 용포재(龍浦齋)는 신우의 묘각으로 1956년건축되었다.
1509년(중종 4년) 의성군 단밀면 속암리에 있는 속수 서원(涑水 書院)에 손중돈(孫仲暾)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 단밀면 주선리에 있는 유허비각에는 3개의 비가 있는데 정경세는 묘표(墓表)를, 김응조(金應祚)는 봉안문(奉安文)을, 번암 채제공은 유허비명을 찬(撰)하였다. 비각은 최근 1992년에 중수되었다.
본관은 아주(鵝洲). 자(字)는 진보(晉甫), 호는 나재(懶齋). 신준정(申俊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신수(申壽)이며 아버지는 신흘(申仡)이고, 어버니는 순천박씨(順天 朴氏)로 박윤(朴倫)의 딸이며, 부인은 문소 김씨(聞韶金氏)로 김굉(金浤)의딸이다.
신열도(申悅道)[1589~1659]는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6년(선조 39) 진사가되고, 1624년(인조 2)증광(增廣)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서 관직을 시작하였다. 1625년에 박사(博士), 전적, 기사관을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그는형들과 더불어 호란 당시 척화(斥和)를 강력하게 주장하며화의론을 강력히 비난하였다.
1628년 형조 좌랑(刑曹 佐郞)이되었으며, 동지사(冬至使)의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禮曹)·병조(兵曹)·호조(戶曹)의 좌랑(佐郞)을 두루지내고, 1630년 지제교(知製敎), 1636년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 병조 정랑(兵曹 正郞), 사간원정언(司諫院 正言)을 지냈다.
병자호란 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병자호란때에도 화의론을 강력히 비난하며 동지들과 상소를 올려 끝까지 항쟁할 것을 주장했다. 이어 의병을 모집하는격문(檄文)을 초안하여 도내에 포고하고, 각 고을마다 의병을 모아 해서 부원수(海西 副元帥)의 진(陣)으로 보냈다.
이듬해 전란이 끝나자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1638년(인조 16) 울진 현령(蔚珍縣令)으로 나아가 민생에 대해 극언하였는데, 인조는 이를모두 받아들였다. 1645년 공조·병조의 정랑(正郞)에 제수고, 1647년장령(掌令)을 거쳐1649년 예천 군수(醴泉 郡守)로 나아갔다가 1652년(효종 3) 장령을지냈으며, 다시 능주 목사(綾州 牧使)를 지냈다.
1655년 사간(司諫), 성균관사성(成均館 司成), 종부시 정(宗簿寺 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때부터 고향에서 두문불출하며 병환을 다스렸다.
문집으로는 『나재집(懶齋集)』 9권 4책이 있으며, 『선사지仙槎志』와『문소지聞韶志』 등도 편찬하였다. 『문소지』는 스승인 장현광의 권유로 편찬한 의성현의 읍지이다.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희지(喜之), 호는 흥계(興溪). 증조할아버지는 훈도(訓導)를지낸 신준정 (申俊禎)이고,할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지낸 신수(申壽)이고, 아버지는 증호조 참의(贈 戶曹 參議) 신원록(申元祿)이고, 어머니는이병절(李秉節)의 딸 증 숙부인(贈 淑夫人) 벽진 이씨(碧珍李氏)이고, 부인은 사맹(司猛)을 지낸 장륜(蔣崙)의딸 의인(宜人) 아산 장씨(牙山蔣氏)이다.
신심(申伈)[1547~1615]은 1547년(명종 2) 경상도 의성현 남쪽 원흥리(元興里)[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재주와 효행이 뛰어났다고 한다. 성장함에 장현광(張顯光)·서사원 (徐思遠)과 도의를 맺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신흘(申仡)과 함께 경상도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에서 안동의진 병영의 영남의병대장 김해(金垓), 정세아(鄭世牙), 유종개(柳宗介) 등과 더불어 적을 토벌할 것을 결의하였다. 고을에 큰 흉년이 일어나자사재를 털어 백성들을 구휼하기도 했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했다고 한다.
1816(순조 16)~1881(고종18). 본관(本貫) 아주(鵝洲). 자(字) 덕문(德文). 호(號) 가헌(可軒). 부(父) 면위(冕瑋). 거(居) 의성(義城). 과거에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황조산 아래 봉정을 짓고 은둔생활을함. 단구서당을 지어 유생을 가르침. 1866년 유후조(柳厚祚)의천거로 경상도도유사(慶尙道都有司)에오름. 18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그 불가함을 상소함.저서로는가헌집(可軒集) 이 전함. [참고] 가헌집(可軒集)
본관은 아주(鵝洲). 자(字)는 극첨(極瞻), 호는 수은(洙隱). 신덕주(申德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신극모(申極模)이고, 아버지는신광병(申光炳)이며, 어머니는성주 도씨(星州 都氏)로 도이윤(都以潤)의 딸이고, 부인은의흥 박씨(義興 朴氏)로 박신조(朴信祖)의 딸이다.
신상교(申尙敎)[1812~1872]는 1836년(헌종 2) 별시(別試)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1864년(고종 1) 오위장(五衛將)에올랐으나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이유로 사임하였다. 이어 1865년에는충장위 위장(忠壯衛 衛將)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병환으로사임하였다. 1866년(고종 3)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이 병인양요를 일으켰을 때, 출정(出征)의 명령을 받았으나 도착하기 전에 난이 평정되어 전투에 참전하지는못하였다. 그러나 그 공이 인정되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832(순조 32)~1908(융희2). 본관(本貫) 아주(鵝洲). 자(字) 선장(善章). 호(號) 남헌(楠軒). 부(父) 석교(爽敎). 거(居) 의성(義城). 내석(內錫)의 5세손. 학문과 경륜으로 향리 사림의 추중을 받음. 1894년 갑오농민운동이일어나 민심이 술렁이자 이장회(李長會)의 격문을 지어 사방에배포하고 여러 제자들과 동네 장정들로 민보군을 조직하여 의성 지역의 위기를 구함. 서책과 자연을벗하며 여생을 보냈고, 저서로는 문집과 갑오동고록(甲午同苦錄) 이 전함. [참고] 의성군지(義城郡誌)
개항기 의성 출신의 학자.
신면형(申冕瀅)[1832~1908]은어렸을 때 총명하고 덕이 있었으며, 성장함에 따라 고을의 사림들이 명망 있음을 칭송하였으나, 과거에 뜻을 버리고 중년에 오목(梧木)[현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오목리]으로 이주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민보군(民堡軍)을 이끌었다. 의성 지역은
1894년 8월농민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의성의 전직 관료와 유생들이 민보군을 결성하여 이에 항거하였다. 그는 이때 격문을 돌리고 향리의 장정들을 모아 민보군을 결성하여 농민군들로부터 의성군 춘산면 일대를 방어하였으며, 장기현(張鬐縣)에서 장정들을이끌고 온 정치익(鄭致益)과 합류하였다. 이후 전열을 갖추어, 영남 지역에서의 활동이 미약했던 농민군을 퇴각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1902년(광무 6)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었다. 말년에는 시세가 난국이라 하여 고향에서 은둔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 때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활약을 기록한 『갑오 동고록(甲午同苦錄)』을 엮었다고 전해진다.
묘는 처음 사미동(思美洞) 구곡산(九曲山)에 있었으나, 뒤에금곡동(金谷洞)[현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금곡리]으로 옮겼다.
1996년 「남헌공 묘갈명(楠軒公 墓碣銘)」이 작성되었는데, 이태능(李泰能)이 지었으며, 김창회(金昌會)가 썼다.
1768(영조 44)~1845(헌종11). 본관(本貫) 아주(鵝洲). 초명(初名) 봉조(鳳朝). 자(字) 성지(成之). 호(號) 시남(市南). 부(父) 홍교(弘敎). 거(居) 의성(義城). 1798년 생원에 입격하고,1805년 문과에 급제함.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이조좌랑‧사헌부지평‧함경도도사(成均館典籍‧司諫院正言‧吏曹佐郞‧司憲府持平‧咸鏡道都事) 등을 역임함. 이상정의 학통을 이어받아 하늘과 인간의 진리, 사단과칠정의 본질 등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함. 1834년 순조의장례식에 봉폐관(封閉官)으로 참석함. 헌종즉위 이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漁父亭을 짓고후학 양성에 전념함. 저서로는 시남유고(市南遺稿) 가 전함. [참고] 사마방목(司馬榜目) 한국인물대사전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
본관은 아주(鵝洲), 초명은봉조(鳳朝), 자는 성지(成之), 호는 시남(示南)이다. 아버지는은 통덕랑(通德郞) 신홍교(申弘敎), 어머니는 풍창군(豊昌君) 류유(柳濡)의 딸인 공인(恭人) 풍산 류씨(豊山柳氏), 조부는 통덕랑 신황(申煌), 증조부는 신중모(申重模), 처는성언병(成彦秉)의 딸 숙부인(淑夫人) 창녕 성씨(昌寧成氏), 후처는 이제동(李濟東)의 딸 숙부인 진성 이씨(眞城 李氏)이다.
신면주(申冕周)[1768~1845]는 1768년(영조 44) 7월 22일 경상도 의성현 교전리(校前里)[현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학문에 두각을 보여 5세에 글자를 알았고, 7~8세에 글을지을 줄 알았으며, 14세 때에는 도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1791년(정조 15)에는 형 신면조(申冕朝)와 함께 어부정(漁父亭)을 짓고 강학하는 장소로 삼았다고 한다.
1798년(정조 22) 생원시에합격하여, 이미 생원시에 합격했던 신면조와 함께 형제가 나란히 성균관의 적(籍)을 가지게 되었다. 1805년(순조 5)에는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곧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에임명되면서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810년(순조 10) 율봉도 찰방(栗峰道 察訪)에임명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건강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818년(순조 18)에 다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병조 좌랑(兵曹 佐郞)에 임명되었으나, 형 신면조와 모친,그리고 외아들 신명협(申命協)의 상사가 잇따라일어나 고향에 머물러야 했다.
1821년(순조 21) 사간원정언(司諫院 正言), 1822년(순조 22)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었으며, 1825년(순조 25)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 선전관(宣傳官)을겸직하였다. 이어 1826년(순조 26)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함경도 도사(咸鏡道 都事)를 역임한 후, 1828년(순조 28) 홍문관 교리(弘文館 敎理)에임명되어 경연 검토관(經筵 檢討官)과 춘추관 기주관(春秋館 記注官)을 겸임하였으나, 당시대리청정 중이었던 효명 세자(孝明 世子)에게 병환을 이유로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1829년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며, 이어 시강원 필선(侍講院 弼善),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 홍문관 교리 등에 차례로 임명되며 세자와 서연(書筵)에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했다. 1830년(순조 30)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만장(挽章)을 지었다. 이어이듬해까지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홍문관 수찬, 홍문관 부교리, 다시 사헌부 집의 등에 임명되나 병환으로 오래 관직에있지를 못하였다. 한편, 신면주는 효명세자 사후 홍문관에있으면서 효명세자의 측근들을 공격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이 효명 세자 대리청정 때 전권을휘둘렀다는 이유에서이다. 우선 단독으로 상소를 올려 효명 세자의 최측근이었던 김로(金鏴)와 그와 체결한 이속들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또한김노경(金魯敬)의 국청을 요구하는 삼사(三司)의 합계(合啓)에 참여하기도 했다.
1834년(헌종 즉위년) 순조장례 때 봉폐관(封閉官)이 되었으며, 그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835년(헌종 1) 홍문관부수찬이 되어 헌종을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소학(小學)』을강론하였으며, 이어 사헌부 집의,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병환이 도져 사직을 요청하였고, 헌종은 사직하는 신면주에게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내렸다. 이 책은 당시 유행하는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 내린윤음을 기록한 것이다.
은퇴 후 고향으로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845년(헌종 11) 8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1656(효종 7)~1730(영조 6). 본관(本貫) 아주(鵝洲). 자(字) 중유(仲遊). 호(號) 롱아(聾啞). 부(父) 휴석(休錫). 거(居) 의성(義城) 1684년식년시(式年試) 생원진사에 입격함. 중국 고사‧시전(故事‧詩傳) 등에 밝았고 문장이뛰어남. 열녀 우소사의 행적을 기록한 우렬녀전(禹烈女傳) 을 지어 널리 알림. [참고]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갑자식년사마방목(甲子式年司馬榜目)』
본관은 아주(鵝洲). 자(字)는 형보(亨甫), 호는 만오(晩悟). 신준정(申俊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참봉 신수(申壽)이고, 아버지는신흘(申仡)이며, 어머니는박윤(朴倫)의 딸 순천 박씨(順天 朴氏)이고, 부인은이난수(李鸞壽)의 딸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다.
신달도[1576~?]는 어려서 족형(族兄) 신홍도(申弘道)에게 학문을 배우고, 16세에는 장천 서원(長川 書院)[의성 빙계 서원(氷溪書院)]에서 독서하였다.
임진왜란 이 일어나자 부친을 모시고 황학산(黃鶴山)에 피난했다고 한다. 1596년(선조 29) 안동의 도산 서원(陶山 書院)에있는 조목(趙穆)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고, 역동서원(易東 書院)에서공부를 하였다. 부친의 권유로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 되기도 했다. 1603년(선조 36) 장현광이 의성 현령(義城 縣令)으로 부임했을 때, 향교에서 수업을 받았고, 광해군 시절 선산(善山)과인동(仁同)을 수시로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1610년(광해군 2) 생원시에급제하고, 1623년(인조1)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하였으며, 그해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과성환도 찰방(聖歡道 察訪)에 임명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의난이 일어나자 국왕을 모시고 공주(公州)까지 따라 갔으며, 그 해 전주 판관(全州 判官)에제수되고 시폐(時弊)를 열 가지 조목으로 요약하여 「진시폐십조소(陳時弊十條疏)」를 올렸다. 이후 형조(刑曹)와 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거쳐, 1627년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예조정랑(禮曹 正郞), 시강원 문학(侍講院 文學)과 필선(弼善),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윤황(尹煌)과 함께 적극적으로 척화론을 주장했었다. 전란이 끝나고 4월에는 왕명으로 가도(椵島)에 머물고 있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찾아가서 후금(後金)과의 화의가 본의 아님을 피력하였으며, 조선인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것을 당부하였다.
척화를 강력히 주장함과 동시에 인조반정의 공신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그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공신들을 공격하였다. 특히인조반정의 유력한 공신 이귀(李貴)를 맹렬히 공격했는데, 이로 인하여 1629년 여러 대신과 중신들에게 배척당하기도 하였다. 1631년(인조 9) 홍문관수찬(弘文館 修撰)이 되었으나, 한양 아현(阿峴)[서울특별시마포구 아현동]의 거처에서 세상을 떠났다.
1927년 신홍기(申鴻基)가의성의 신석 기숙(申錫 基塾)에서 간행한 『만오집(晩悟集)』 10권 5책이 전하고 있다. 『만오집』 권5의「가도봉사시문견계(椵島奉使時聞見啓)」, 권7의 「강도 일록(江都 日錄)」등은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당시 정국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1611(광해군 )~? 본관(本貫) 아주(鵝洲). 자(字) 사패(士佩). 부(父) 지익(之益). 조부(祖父) 로(櫓). 거(居) 청주(淸洲). 병자호란에갑작스럽게적병을 만나 자신의 몸으로 부모를 막고 슬피 울며 살려줄 것을 청하니 적병들도 차마 어찌하지 못하였다.또한어머니의 병에 단지(斷指)하여 구완하였다.
[참고] 『청주지(淸州誌)』 『청주시지(淸州市誌)』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아주(鵝州)이며, 신심(申鐔)은 효자 신지익(申之益)의 아들이다.
병자호란에 갑작스럽게 적병을 만나 자신의 몸으로 부모를 막고 슬피 울며 살려줄 것을 청하니 적병들도 차마어찌하지 못하였다. 또한 어머니의 병에 단지(斷指)하여 구완하였다.
산외면(山外面) 송동리(松洞里) 삼효각(三孝閣)에 아버지 신지익, 사촌신협(申鋏)과 함께 숙종 때 효로써 정려되었다.
1588년(선조 21)∼1649년(인조 27).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거(舜擧), 호는양일당(養一堂). 승지(承旨)를 지낸 오재(梧齋) 신지제(申之悌)의 종제(從弟)로 학행(學行)이 있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였다. 어머니 병환에목욕재계 후 북두칠성에 빌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다. 상(喪)을 당해서는 호읍(號泣)하다 혼절하기도 하였으며, 최질(衰絰)을 풀지 않고 집상(執喪)하는등 효행(孝行)이 높아서 신지익과 사촌 신협(申鋏), 아들 신심(申鐔)과 함께 충북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솔골 삼효각(三孝閣)에 1703년(숙종 29) 효로써 정려(旌閭)되었다. 손자 신응태(申應泰)는우암(尤庵)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고, 『사서제요도설(四書提要圖說)』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행장(行狀)을 찬(撰)하였고, 공(公)에 대한 일이 『삼강록(三綱錄)』에 기재되었다. 청주(淸州)의 검암서원(儉巖書院)에배향(配享)되었다.
신응태(申應泰,1643〜1728)는 청주 미원에서 활동한 학자로 충혜왕 때 안렴사를 지낸 퇴재 (退齋) 신우(申祐)의 11대손이며 충효를 겸전한 양일당(養一堂) 신지익(申之益)의 손자이다. 효자 신심(申罈)의 아들이며 효자 신협(申鋏)의종질(從姪)이다. 효문에서태어나 어질고 효성스런 행실로 향유들의 신망이 높았다.
신응태는 천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성품과 행실이 높고 뛰어났다. 어린나이에 부친과 조 부를 여의었지만 집상(執喪)의 의젓함이성인과 같았다. 조금 자라서는 조모와 모친을 지극히 봉양하는 한편 사서를 읽으며 정미한 뜻을 구하였다. 부친의 명을 받들어 19세에 처음 과장에 들어갔고, 문학을 일찍 성취하여 20세에 연이어 두 과방에 참여하니 만주(晚洲)홍석기(洪錫箕) 가시권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그 후 대소과 초시에 여러 번 입격하였으나 시운이 돌보지 않 아 향리의처사로 지냈다.
25세에 회덕에 가서 우암 송시열을 뵌 후로 화양동과 회덕을 왕래하며 강문(講問)하였고,『주 서절요(朱書節耍)』와 『근사록(近思錄)』을 읽고 그 긴요한 것을 간추려 책을 만들기도하였다. 42세에 비로소 과업을 폐하고 화양동에 들어가 스승 송시열에게 집지(執贄)의 예를 올리고 오 로지 성리학에 전념하였다.1) 학력(學力)이 순수하고깊으며 조예가 정밀하였고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은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이렇듯 학업은 밝게 빛나고기절은 높아 스승 송시열이 특별히 추천하여 인정하였다. 그런 까닭에 김창협(金昌協)은 일찍이 '우암의고제(高弟)'로 추숭 하였고, 권상하(權尙夏) 는 '일대의 선사(善士)'라하였으며, 이수언 (李秀彦)은 '사람됨이 충후하 고 순수해서 고인의 풍모가 있다'고하였다.
신응태는 타고난 효성으로 부모를 지극히 섬겼고,『선세사실(先世事實)』을 엮는 등 계술(繼述)의 효를 다하였다. 또한 문학에 소질이 있어 칭찬과 인정을받았고,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의 글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깊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역학(易學)•천문(天文) •역수(曆數)에도 밝았다. 만년에는 후진 양성에 힘써 문하에서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고 타고난 문장으로 비 록 다작은 아니지만 시문도 적잖이 남겼다.
신응태(申應泰)는자(字)가 길래(吉來)の 호號)는 용애(龍崖)이며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고려 말 혼탁한 세상을 피해 경북 의성(義城)에 퇴거한 안렴사(按廉使)신우(申祐)가 그의 11대조이다. 이후 대대로 선조들이 살았던 의성으로부터 청주 문박리(文朴里)3)로 이거한 상의원(尙衣院) 직장(直長)신간(申幹, ?〜1539)이 그의5대조이다. 고조는 신천령(申 千齡)이고 증조는 문행(文 行)이있고 성품이 강직했던 생원 신노(申櫓, 1553〜1590)이다. 조부는학행과 효행으로 널리 알려진 참봉 양일당(養一堂)신지익(申之益, 1588〜 1649)이다. 부친은천성이 순하고 행의(行義)로 스스로를 지키며 효성이 깊었던처사 신심(申鑽, 1611 〜 1647)8)이고 모친은 광주반씨(光州潘氏)반봉익 (潘鳳翼)의 딸이다.
신응태는 1643년인조 21)청주 산동면(山東面)송곡리(松谷里)の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순 수하고 아름다우며 성품과 행실이높고 빼어났다. 5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7세에 조부상을 당하였다. 8세(1650년)에비로소 송곡공(松谷公)신응사(申應泅声)에게 배웠다. 12세인 1654년조모 평강전씨(平康全氏)12)를 모시고 괴산에 가서 감역공(監役公)으로부터 선조 안렴공 [申祐]의 효행사적을 듣고 돌아와 후에〈선세사실(先世事實)〉을 완성하였다.
13세에『맹자』와『중용』을 읽었다. 정미한 뜻을 이해하고자 송곡공에게질문하니 매우 기이 하게 여겼다. 17세에 산방에 들어가 가정공(佳亭公)14)과 함께『논어』를 읽었다. 19세에 처음 과 장에 들어갔고 20세인 1662년 풍산김씨(豐山金氏)를 아내로 맞으니 첨지 김시좌(金時佐)의 딸 이다. 그리고이해 향시에 입격하였다. 문학을 일찍 성취하여 연이어 두 과방에 참여하니 시골 의 오랜 친구들이 영광스러워하였다. 이때 만주(晚洲 홍석기(洪錫箕, 160〇〜1680)가 와서 시권 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또한 겨울에『주역』을 읽었다.
25세에 회덕에 가서 우암(尤庵)•동춘(同春)두 선생을 뵈었다. 이듬해 7월 조모 전씨 상을 당 하였다. 27세인 1669년『주서절요(朱書節要)』를읽었고, 29세인 16기년 홍석기에게 조부 양일 당공과 부친처사공의 사적을 적어 보내며 아울러 쌍죽도(雙竹圖)에 시를지어 달라고 청하여 오언시 10운을 받았다.15)한편 화양동으로우암 선생을 찾아뵈었다 30세인 1672년 여름, 괴산 소마사(小馬寺)16)에서과거 문장을 공부하였고, 별시 초시에서 부(賦)•책阑으로 입격하였으며, 식년초시에서 또 입격하였다. 그리고 회덕에 가서 동춘 선생을 곡하고 우암 선생을 뵈었다. 1673년 2월 회시(會試)에 낙방하였다. 모친의 병이 깊어 과거를 보지 않으려 했으나 모친이권 하여 부득이 본 것이다. 과거를 보고 돌아와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그 슬픔이 지나쳐 반나절을 기절하였다.
1674년 곽세건(郭世梶)이송시열을 모함하자 스승의 무고를 변론하는 논설을 지었다. 1675년 덕원(德原)적소에 계신 우암 선생께 편지를 올렸다. 1675년 11 월, 사사했던송곡공 상을 당하자 자신을 생장시킨 스승의 의리로써 가마(加麻)하였다. 1679년『주서절요(朱書節要)』와『근사록 (近思錄)』을 순환하며 읽고 그 긴요한 것을 간추려 2권을 만들었다. 38세인 1680년묵방(墨坊)19)에 계신 우암 선생을 찾아뵈었다. 1681 년 화양동에 가서 우암 선생을 뵙고 겨울 에 또 우암 선생을 뵈었다.이듬해 봄에도 우암 선생을 뵈었다. 41세인 1683년농계(聾溪) 이수언(李秀彦, 1636〜1697) 에게 편지를 보내 조부와 부친을 현양하는일을 갖추어 말하였다. 이해 5월 이수언이 회계(回啓) 하였고 10월 임금의특명으로 정포(旌褒)되었다.42세인 1684년 4월, 과거의 생각을 끊고 드디어 우암 선생께 집지倖丸贄)의 예를 올리고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685 년 3월에 화양동에 가서 우암선생을 뵙고 양일당의 묘표를 청하였다. 이때 화양동에서 하루 머 물며 파곶(巴串)에 모시고 가서 놀다 돌아와 환장암(煥章庵)에서 잤다. 4월에권상하(權尙夏, 1641〜 1721)•김창협(金昌協, 1651〜1708)을 만나 화양동에 가서 우암 선생을 뵈었다.
1686년 9월 화양동에 가서 우암 선생을 뵈었다.〈선세사실(先世事實)〉이편집되어 스승께 보 여 드리고 명명(命名)과 아울러 권두의글을 청하기 위함이었다. 송시 열은 서수(書首)에 '아주신 씨선세사실(鵝洲伸氏先世事實)'이라 쓰고 권말에 발문을 써주었다. 1687년화양동에 가서 우암 선생을 뵈었다. 이때가 스승 생전 마지막이었다.47세인 1689년 제주 적소에 있는 우암 선생께 편지를 올렸다. 5월 송시열이 제주로부터 상경하라는 명을 받자 천안에 가서 기다리다 드디어 대궐에 나가 스승을 신원하는 상소를올렸으나 전달되지 못하였다. 6월 스승이 정읍에서 후명 (後命)을 받자 연산(連山)에서곡하며 맞이하고 상여를 따라 수원에 이르러 글을 지어 제사 드리 고 병이 나 집으로 돌아왔다.
48세인 1690년 산방에 들어 독서하였다.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산방으로 피해 동방 제현의 문집을 모아 그 긴요한 것을 간추려 1권으로 만들어 때때로 펼쳐보다 몇 달 만에 돌아왔다. 그 후 용애(龍崖)로 이거하고 인하여 호로 삼았다. 1693년(51세) 민박사(民朴寺))를 중건하였고 1694년 3월 부인 김씨 상을 당하였다. 4월 우암 선생 복관(復官) 치제(致祭에 시를지었고, 1695년 만경대서원 (萬景臺書院)이 완성되어 시를 지어 원장[권상하]에게 올리고 여러 친구에 게 보였다. 55세인 1697년 이수언을 곡하였다. 이수언과는 지기지우(知己之友)였다. 이수언은일찍이 신응태의 문장을 칭찬하여, “당세의 전형이어서 적수가 되기 어렵다.”고 하였다. 1699 년(57세) 『사서제요도 (四書提要圖)』2권을 완성하였고,『사문서설(斯文序說)』1권을 지었다. 59세인 1701 년 직재(直齋) 이기홍(李箕洪, 1641〜1708)을 방문하였다.
1703년(61세)12월장암(丈巖)정호(鄭脂, 1648〜 1736)를 방문하였고, 1704년(62세) 신종황제 제사를 청하는 상소를 썼으나 올리지 못하였다.25)1705년(63세)2월 문산(文山)에 가서이기홍을 방문하여〈선세사실(先世事實)〉발문을 받았다.26)66세인 1708년 이기홍과 김창협의 부음을 들고 곡하였다. 1710년(68세)2월김정구(金鼎九)의 효행에 관한 글을 세 번 올렸다. 1711년(69세)3월가정공을 곡하고 1716년(74세)11월〈화양서원선액기 (華陽書院宣額記)〉를지었다. 75세인 1717년(숙종 43) 3월, 임금이온천에 행행 시 조부 양일당의 사적을 적은 글을 올렸다. 1719년 (77세)『사서제요도(四書提要圖)』를권상하에게 올리고 수정을 청하였다. 1721 년(경종 1) 권상하의 부음을 듣고 곡을 하고, 순찰사에게 정유년 온양 행차시에 상께 올린 말에 기초하여 양일당 현양의 일을 올렸다. 82세인1724년 여름에 병이 나 넉 달을 병석에 있었는데 장자 상록의 부인 이씨가 극력 구완하니 사람들이 모두 효부라 하였다.
1728년〈사론시비옥하사담(土論是非屋下私談)〉1권을 완성하니, 동서분당부터신임사화까 지 피차 사정득실(邪正得失)의 본말을 통쾌히 논변한것이다. 6월에 병이 나 8월 15일 86세로 송곡(松谷) 에서 생을 마쳤다.28)문인 송윤상(宋允相) 정후기(鄭星基) 신홍찬 (申弘燦)등이글을지어 제사지냈고, 청주 검암서원(儉巖書院)에배향되었다. 부인 풍산김씨와의 사이에 육남(六 男)을 두었으니, 상전(尙鏡) 상록(尙籤) 상첨(尙籤)상주倘籀)상범(尙範) 상림(尙彩)이다.
신응태는 조부와 부친이 모두 효행으로 정 려된 효문의 후손답게 타고난 효자였다. 어 린 나이 에 부친과 조부를 잃고도 조석제전(朝夕祭奠)에 성인 같은 의젓함을 보이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 하게 여겼다. 특히평소 기가 허한 모친을 위해 조섭에 세심하였고 위급에 미쳐서는 단지(斷指) 하였으며 마침내 돌아가시자 애훼(哀毁)가 극에 달아 예를 넘어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 러도 여막을 떠나지 않고 거상(居喪)을 거두지 않았다. 또한그의 효행은 계지술사(繼志述事)로 드러난바, 부친의 뜻을 받들어 과업에 힘쓰고 평생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선조사실기(先祖事實記)』를 완성하고 조부와 부친의 행적을 현양하기위해 노력한 것이 그것이다.
신응태는 학문을 좋아한 천생 학자였다. 부친의 명으로 과장에출입하여 대소과 초시에 일곱 번 합격하고도 시운이 돌보지 않아 이룬 바는 없었으나 그 또한 개의치 않았다. 모친이돌아가 신 후에는 과거를 폐하고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대개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은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당리무사(當理無私) 네 글자를 평생 공부로 삼았고, 스승 송시 열의 글[宋子之書]을가장 좋아하여 동정어묵(動靜語默)에 한 가지로 법 삼았다.3D 또한 남 는 힘으로 글을 배우며 문단에서 노니니 문장이 아름다웠다. 대개그 처음 뜻이 초월함을 벗어 나고 화려함을 씻어내며 오로지 실지(實地)에뜻을 두었다.
신응태는 청빈자수(淸貧自守)한 선비였다. 생계를 세우려 하지 않았고 재물과 이익에 대한 이 야기는일찍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화양(華陽)의 고족(高足)이 되어동문 한수(寒水) 농암(農巖) 농계(聾溪) 직재(直齋) 등 제현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용애 선생(龍崖先生)으로 일컬어졌으며 만년에 문인들이 사사하니 후학을 양성하는 보람이 있었다.
1691 1742(영조) 본관은 아주(鵝洲), 자(字)는지언(知彦), 호는 원재(元齋). 아버지는 신준(申埈), 어머니는 손지효(孫至孝)의딸 경주 손씨(慶洲孫氏)이고, 할아버지는 신흠도(申欽道), 증조할아버지는상호군(上護軍) 신한(申僩)이다. 처는장원준(蔣元浚)의딸 아산 장씨(牙山 蔣氏)이다.
신내석(申乃錫)[1691~1742]은 1691년(숙종 17) 경상도의성현원흥(元興)[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뛰어나, 이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13세 때에 부친이 병으로위독하여안동으로 직접 약을 구하러 갔는데, 낙동강 물이 홍수로 불어 건너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사공들에게 간곡히 부탁을 하자, 신내석의효성에 감동한 사공들이위험을 무릅쓰고 배를 저어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부모상으로여묘 살이 할 때에는 눈이오나 비가 오나 조석 (朝夕)으로곡(哭)을 하였기에, 그산을효려산(孝廬山)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의성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세기 후반 안동에서 편찬한 『무신 창의록(戊申 倡義錄)』에 따르면, 신내석은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1728년 3월 2일신렴(申濂), 신효(申涍) 등과 더불어 의성현의 여러 유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뒤, 창의를 계획하고 동지를 격려했다고 한다. 신내석은같은 고을 출신의 신덕기(申德沂), 이경재 (李慶載), 박사윤(朴師尹), 박계령(朴桂齡)과더불어 이 책의 「의성의병군문좌목(義城義兵軍門坐目)」에 수록되어있다. 1742년(영조 18)에사망하였다.
1683년(숙종 9)∼1724년(경종 4). 조선중기 유생. 자는 사범(士範)이다.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부친은 신렴(申濂)이다. 부인은 정랑(正郞) 이후영(李後榮)의 딸철성이씨(鐵城李氏)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훌륭하여 행동거지가 남달랐다.나부공(羅浮公)을 모시고 잠잘 때 자주 요강을찾으면 자다가 놀라 일어나 가져다드렸다.
일곱 살에 『십구사(十九史)』를읽었으며 눈에 보이는 대로 바로 외웠다. 부친의 성품이 엄하여아들이 하나임에도 조금의 여유를주지 않았다. 열두세 살에 이미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읽었다. 당시 현감 정상호(鄭相澔)가연회에 초청하자 어린아이가 왕래할 곳이 아니라며 거절하였다.
1707년(숙종 33) 부친이서울에 간 사이 모친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옷도벗지 않고 탕약을 달여 병구완을 하였으나 부친이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하였다.
처남 이훤(李烜)은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손자로 교유가 두터웠는데,1708년(숙종 34) 병으로 자신의 집에 와서병 조리를 하자, 의원을 맞이하고 약을 달여 마음을 다하여 병구완을 하였으나 끝내 죽자 애통해하였다.
몇 번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자 주변에서 뇌물을 쓸 것을 알려주었지만거절하였다.
1718년(숙종 44) 부인의병이 오래도록 낫지 않자 침식을 폐하고 목욕재계한후 하늘에 자신이 대신 아플 것을 청하였으나 부인은 결국 죽고 말았다. 평소 손발 마비 증상이 있었는데부인상을 당한 즈음에 더욱 심해져 마침내 고질병(痼疾病)이되어 고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