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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신씨 시조 묘 아주신씨 시조의 묘는 거제시 아주동 당목(堂木) 마을 뒤 산 주령에 있었다. 대우조선소가 들어오면서 이장을 해 갔다. 아주지역은 1971년 대우조선소가 들어 올 당시 탑골, 용시골, 안골, 배골, 간송, 장터몰, 당목 등이 있었다. 지형이 바닷가 평지이고 농토가 많고 물이 좋고 주위에 울창 한 산이 있어서 농경지대는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대우조선소가 들어오면서 간송, 용시골, 장터몰, 당목, 탑골 일부 480세대가 이주를 했다. 그때 묘지도 이장을 해야 했다.묘지 지형 아주신씨 시조 묘가 있었던 곳은 옥녀봉(玉女峰)이 좌우로 내려와서 아주앞 바다에서 묘지가 있는 쪽을 향해 감싸고 있었다. 묘지는 옥녀봉 중간 지맥(支脈)을 따라 내려와서 당목 뒤쪽 산록에 있었다. 당목은 옥녀봉이 아주 앞(玉浦港) 바다로 내려오다가 낮아진 곳이다. 그 끝에 오리 머리 같이 생긴 당산이 있었다. 그 곳을 당등산(堂嶝山)이라 한다. 그 줄기 당등산목에서 옥녀봉 쪽으로 약 60~70m 지점에 신영미의 묘가 있었다. 지형적으로 볼 때 오리가 양쪽 날개를 펴고 북쪽을 향해서 비상하는 형국이다. 그래서 이 지역 이름을 오리아(鵝: 거위아) 고을주(州) 아주라 하였다고 한다. 묘는 거위의 어깨위에 있는 대명당지다. 필자(李哲承)는 당시 거제군 문화공보실에 근무하면서 문화재를 담당하였다. 그래서 대우조선소가 들어 올 때 그 지역에 매장되어 있는 문화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항시 그곳에 살다시피 하였다. 아주신씨 시조 신영미(申英美)의 묘지 이설 때는 필자와 당시 거제군 보건소 장이었던 신용와(申容完=거제시 하청면 하청리 출신)소장과 아주동 당목 마을 유지인 김문규(前 장승포읍 직원)씨와 그곳 주민들이 참석하였다.묘지 형태 아주신씨 시조 묘가 이장된다는 소식에 필자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이장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묘지 이장 시기는 1972년 늦은 봄인지, 초가을 인지 날씨가 화창했고 포근했다. 아주신씨 시조 묘지는 봉분이 큰데 윗부분은 펑퍼짐하고 축대는 자연석 돌로 쌓아 놓았다. 비석은 없고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상석(床石)은 있었는데 그 앞쪽에 있는 글자는 판독이 어려울 정도였다. 이 묘 주변 약 10 ~ 20m 떨어져 오래된 묘지가 있었다. 그 묘지는 대부분 무연고 묘지였다. 묘지를 이장하기 위해서 묘지를 팔 때는 아래 마을(당목) 노인들이 와서 일을 거들어 주었다. 묘지를 팠는데 흙은 황토색이고 유골의 흔적은 없었고 숟가락, 젓가락, 동조(銅造) 밥그릇과 술병이 나왔다. 밥그릇은 부식이 많이 되었고 술병은 주둥이 부분이 깨어져 있었다. 문화재적 가치나 역사적인 유품으로 남겨둘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고 필자는 사진을 찍었다.주민들의 증언 당시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 묘는 신장군 묘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주신씨 시조 묘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마을에 사는 무속 할머니는 그 묘가 신장군 묘인데 사람이 병이 나서 아프거나 우환이 생기면 장군 묘에 가서 고사를 지내면 낳는다고 하였다. 아주동 당목 마을 김문규씨의 말에 의하면 6.25전쟁이 나기 전에는 설, 추석 명절이나 묘사 때는 후손들이 말을 타고 왔다가 가는데 매우 귀하게 보이고 잘 사는 집안 같이 보였다고 증언한다. 6.25가 나고 나서도 묘지를 다녀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육지에서 거제를 오는 데는 교통 상 어려움이 많았다. 여간해서는 오지 못한다. 말을 타고 와도 이틀은 걸려야 했다. 기성반씨 시조 묘는 아주동, 국사봉에 잘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거제를 본관으로 하는 아주신씨 시조에 대해서도 이곳이 묘지가 있었던 곳이라 하는 내용을 옥녀봉 아래 만들어 역사적인 유적지로 조성하여 관광자원화 하였으면 하는 필자의 의견이다.(국사편찬사료조사위원·거제향토사연구소장 이승철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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