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서원(錦山書院)은 1782년(정조 6)에 신체인(申體仁)이 금연정사(錦淵精舍)를 창건하 여 금산언덕에 서당을 세워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며 시작되었다. 신체인이 세상을 떠난 뒤 132년 후인 1912년에 무너져 현판만 남아 전해왔던 것을 1977년에 새로 중건하고 1991년에는 유림의 공의를 얻어 금연정사를 금산서원으로 승격시켰다. 이때 신체인과 함께 신지제(申之悌)를 봉향하였다. 지금도 강당에는 금연정사 현판과 금산 서원 현판을 게시하고 있다. 2005년에 신지효(申之孝)를 추향하였다.
배향인물
1)신지효(申之孝, 1561~1592)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달부(達夫) 호는 응암(鷹巖)이다. 임진왜란이 급할 때 아우 지제(之悌)는 선성현령(宣城縣令)으로 있고 선생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집에 있다가 바위틈에 숨어 있더니 왜적이 쫓아와서 칼로 선생의 왼쪽배를 쳐서 피가 흔건히 흐르는 지라 선생이 목숨이 끊어질 때 칡을 입으로 씹어 붓을 만들어 가지고 혈서로 옷소매에 써서 아우에게 주기를 “나의 몸가짐이 주밀하지 못하고 효성이 없음이 이보다 더할 수가 있겠는가?, 늙은 부모는 여러 아우들이 있어 모시고 있거니와 군(君)은 이미 몸을 왕실에 맡긴 지라, 직수(職守)가 있는 터이니 마땅히 난에 임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어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죽음에 나갈 것이며, 내 시체를 찾지 못할까 걱정하여 다행히 발바닥에 선성(宣城) 두 자를 써서 알도록 하였노라” 하였다. 조선 때의 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2)신지제(申之悌, 1562~16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부(順夫), 호는 오봉(梧峰)·오재(梧齋). 경상도 의성 출신. 증창례원판결사 한(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공조참판 응규(應奎)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 몽득(夢得)이며, 어머니는 의흥박씨(義興朴氏)로 민수(敏樹)의 딸이다.
아버지는 몽득(夢得)이며, 의성(義城)에 살았다. 김성일(金誠一)과 김언기(金彦璣)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증광시(增廣試)에 갑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군대를 모집하여 항쟁하였고, 정언(正言)‧예조좌랑(禮曹佐郞)‧지평(持平)‧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창원부사로 나가 백성을 괴롭히던 명화적(明火賊)을 토평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인조반정초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예안현감 재직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집, 적을 토벌하였다. 간관으로 있을 때 직간하였고, 수령재임 때에는 치적을 남겼다.
그의 시문은 문집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의성에서 장대서원(藏待書院)을 세워 지방자제교육에 힘썼고, 죽은 뒤에는 김광수(金光粹)·이민성(李民宬)·신원록(申元祿)과 함께 그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조인 휘 영미(英美)의 20세손이고, 현조(顯祖)인 휘 지제(之悌)의 7세손이다. 아버지는 도만(道萬)이며, 의성(義城)에서 살았다. 김낙행(金樂行)‧임필대(任必大)‧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독서에 몰두하고, 30세 전후에 경전과 천문지리‧의술 등을 두루 통달하였다.
스승 이상정이 죽은 이듬해에는 향리에 돌아와 금연정사(錦淵精舍)를 짓고 집 이름을 왼쪽에는 주경(主敬), 오른쪽에는 집의(集義)라 쓰고 시와 기문을 스스로 지었다.이후 출사(出仕)의 뜻을 버리고 ‘경(敬)’ 하나로 거경궁리(居敬窮理)하였다. 금산서원(錦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회병집(晦屛集)』이 전한다.
어려서 화장산(華藏山) 초당에서 독서에 몰두하여 30세 전후에 경전(經典)과 천문지리(天文地理), 의술(醫術) 등 두루 통달(通達)하였다. 이후 호문(湖門)에서 도학(道學)을 연마하였으며 출사(出仕)에 뜻을 끊고 오직 경(敬)하나로 거경궁리(居敬窮理)하면서 숭경록(崇敬錄)을 저술(著述)하였으며 이대산(李大山)의 묘갈명을 채제공(蔡濟恭)에게 받았으며 채공(蔡公)이 이르기를, “공(公)이 진정 참된 글 읽는 선비로다)”라고 했다. 김천사(金川沙), 남손재(南損齋), 김구재(金苟齋), 이묵허(李默軒), 정입재(鄭立齋), 안순암(安順庵) 등과 상교(相交)하였으며 호문육군자(湖門六君子)로 금산서원(錦山書院)에 제향(祭享)되고 문집12책이 전한다.
건축물
금산서원은 강당의 서측면으로 사당이 배치되어 있는 병렬형태이다. 또한 독특하게 서재는 강당의 남측에 자리하고 있으나, 동재는 강당의 동측에 수평으로 자리잡고 있다.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모현사(慕賢祠)인 사당과 강당, 동재, 서재인 존성재(存誠齋), 누각, 숭교문(崇敎門)이라 쓰인 외삼문 등 총6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배경
금산서원(錦山書院)은 원래 회병(晦屛) 신체인(申體仁)이 세속의 명예와 탐욕을 멀리하고 1776년(영조 52)에 금연정사(錦淵精舍)를 지어 후학을 양성하고 학덕을 쌓던 곳이다. 1912년 금연정사가 무너지고 현판만이 남았는데, 신종기(申宗基)가 정사중건을 유언으로 남김에 후손과 유림의 공의(公議)로 1977년 강당을 짓고, 1981년에 서원으로 승격하여 신지제(申之悌), 신체인을 제향하였다.
건축특징
당, 전사청, 솟을대문, 누대 등 건물들이 최근에 중수된 것으로 거의 온전하다. 숭경문(崇敬門)은 3칸의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으며, 존성재(存誠齋)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기둥만 있고 사방으로 뚫려있다. 모현사(慕賢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석단을 쌓아 4개의 돌계단을 두고 그 위에 지어졌다. 금연정사(錦淵精舍)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팔작지붕집으로 당 2칸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과 서쪽으로 1칸씩 협실을 두었다. 건물 정면 오른쪽에 ‘금연정사’, 왼쪽에 ‘금산서원’이라고 편액되어 있다. 당 건물 오른쪽에는 전사청역할을 하는 건물이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과 중간의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전사청 앞에는 잔디로 덮인 축대에 징검다리 식으로 돌계단이 있는데, 서쪽 밑으로 내려가게 되면 숭경루(崇敬樓)가 있다. 숭경루는 2층의 누대형식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팔작지붕이다.
건축구성
경내에서 가장 서편에는 숭경루가 있고, 경내 가장 동편에는 숭경문이라 편액한 솟을대문이 있으며, 문 앞에는 존성재가 있고, 가운데 당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모현사가 오른쪽에는 전사청이 위치하고 있다.
숭경루를 제외한 다른 건물들은 축대를 쌓은 그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숭경루만 다른 건물과 방향이 다르다.
누대 전면으로는 남대천이 흐른다. 전사청 건물 뒤편의 언덕으로 올라가면 ‘처사아주신공종기지묘(處士鵝洲申公宗基之墓) 배유인전주이씨(配孺人全州李氏) 부(祔)’라고 새겨진 비석과 분묘가 있다.
현판
금연정사중건기(錦淵精舍重建記)
庚申 학영(學泳), 光山 김택진(金澤鎭) 書
금연정사승금산서원기(錦淵精舍陞錦山書院記)
1985년 乙丑 11월 방예손(傍裔孫) 병철(炳哲) 書
금산서원기(錦山書院記)
壬戌 5月 光山 김헌수(金憲洙) 記
금연정사기(錦淵精舍記)
丙午 계춘 주인회병(季春 主人晦屛) 記, 己未 10月 義城 김용대(金龍大) 書
마을
이야기
의성 > 중남권 > 구산리
- 양지바른 기슭에 봉학의 모양과 같은 짓를 이루었다 하여 봉양면
금산서원이 있는 봉양면은 의성군 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의성읍, 서쪽으로 비안면, 동쪽으로 금성면, 북쪽으로 안평면에 접한다. 면의 북부는 100~300m의 산지를 이루고 북동쪽에서 흘러오는 남대천(南大川)과 남동쪽에서 흘러오는 쌍계천(雙溪川)이 면의 중앙부에서 합류하여 봉천(鳳川)이 되어 서쪽으로 흐른다. 그 유역에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경지 면적이 차지하는 비율이 다른 면에 비해 높은 편이다.
이 면은 신라 조문국 이래 하천면(下川面)으로 칭하였고 경주이씨와 김해김씨의 선비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개척하였으며 1911년 선방산(仙防山)의 마지막 봉우리의 덤에 아름다운 봉이 날아들었다 하여 봉덤이라 하였으며 선방산에서 내려다볼 때 남대천이 구비쳐 흘러 안평천(安平川)과 합류되어 봉양면의 소재지가 마치 봉학(鳳鶴)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서 양지바른 기슭에 봉학의 모양과 같은 짓를 이루었다 하여 봉양면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양면과 금뢰면(金磊面)이 병합되었으나 그대로 봉양면으로 불리게 되었다. 13개 동으로 개편했는데, 26개 행정부락으로 세분된다.
면소재지는 처음에 도원리(桃源里)에 있었는데 1920년에 교통이 편리한 화전리(花田里)로 시장과 함께 옮겼다. 예로부터 동서남북을 통하는 네거리였는데, 중앙고속도로 진입로까지 생기게 되어 교통의 심장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1919년 3. 1운동 때에는 군내에서 가장 격렬한 만세 시위를 벌렸던 곳이다.
면사무소에서 의성 방면으로 3.2km 지점에서 금성면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남대천을 건너면 구산리(龜山里)이다. 이 마을 뒤쪽에 있는 산이 거북이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구산(龜山)이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이에 연유한다. 아주신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마을 앞 하천의 모래가 깨끗하고 지세와 수목이 빼어나게 아름다워 그 경관을 찬탄하며 사구(沙邱)라고 이름지었다. 구산 1리는 산기슭에 일자형으로 길게 된 마을로 아주신씨, 김녕김씨, 진주강씨, 청주이씨, 함양박씨가 있다. 아주신씨가 주를 이루고 기타 성씨는 대를 이어 명맥만 이어가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