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옵건대 평소 지킨 깨끗한 마음, 지극한 효심으로 어버이를지극한 정성으로 모셨으니 한결같이 뜻을 키움에서 나온 것이라 살아서는 공경을 다하였고 돌아가신 후에는 크게 슬퍼하며 삼년간 여묘살이 하였는데 아침저녁으로 피눈물을 흘리었다. 이에 신명이 비추어 보고 임하였으며 그 지극한 뜻을 느끼게 되어 홀연히쌍죽이 문득 솟아났습니다. 그 지극한 효심을 식물조차 깨달아 신이한 효험을 보인 것입니다. 그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여 그 아름다움을 포상하게 되었고 돌에 새겨 효자리라 하게 되었습니다. 바람결에 그 내용을 듣고 일어나 경배하오며 용렬한 상이나마 갖추어 차립니다.
부군의 함자는 수, 자는 자기이다. 초야에 묻혀 사시면서 덕을 지켰고 벼슬하지 않으시고 가르침에 노력하시었다. 성화신축년[17년이니 성종조](1481)에 나시어 가정 계사년(1533) 2월 19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53세셨다. 주부 박자검의 따님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얻었다. 장남은원복으로 교수를 지냈다. 차남은 원록이며 참의에 추증되었다. 딸은박계수에게 시집보냈다. 선비는 성화 19년 계묘(1483)에 나시어 만력 3년 을해[선조조](1575) 6월 11일에 돌아가셨다. 팔지산 건향언덕에 합장하였다.
부군의 함자는 원록이며, 자는 계수, 호는 회당인데 다시 호를 도암이라 하였다. 널리 공부하고 힘써 행하였으며효성과 우애가 순수하고 지극하였다. 신재 주세붕 선생에게 공부하였고 또 남명 조식, 월천 조목 및 여러 뛰어난 유학자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학술을 연마하고 강구하여 순정한 명성이 자못 파다하게알려졌다. 어버이를 위하여 과업을 공부하여 여러 차례 거론되었으나 입격하지는 못하였고 부득이 훈도, 학관 자리를 구하여 어버이를 봉양하는 뜻을 이루었다.
妣星山李氏智源之女 耕隱先生之曾孫也
부인은 성산 이씨 지원의 따님이신데 경은선생(이맹전李孟專, 1392~1480)의 증손이다.
이는 우리 어머니 박씨의 영정이다. 어머니는 성화 19년 계묘년(1483)에 태어나셔서 금년 93세시다. 지금까지 살아계시니 인간 세상에서 드문 일이다. 머리는 아이처럼 터럭이 없게 되었고 등은 굽으셨으며 허리 아래가 편하지 못하시나 모습이나 말씀하시는 기운은오히려 강건하시다. 아들[원록]은 60살이 될 때까지 서로 의지가 되고 목숨을 서로 의지하는 지경이라한편으로 기쁘면서 한편으로 근심하는 마음을 스스로 이길 수 없다. 이에 아들[흘]을 시켜서 촛불 아래에서 본떠 그리도록 하고 색채를 넣어서 영정으로만들었다. 훗날 오랜 시간이 흐른 뒤라도 머리 속에 삼삼하도록 하고 마음 속에 담아두게 하여 슬하에서의즐거움을 따르는 것과 같으며 나의 공경하고 사모하는 것과 같았다. 이빨이 다 빠지도록 늙어도 그치지않으리라. 만력 3년 을해(1575)월 일 아들 원록이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