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 성은 신, 이름은 원록,자는 계수이며 스스로 회당이라 하였다. 본관은 거제도의 아주이다. 이분은 고려 때 전라도 안렴사를 지낸 우의 6세손이다. 안렴공은 혼탁한 세상에 처하여 청렴결백함으로써 절개를 지키려 하였다. 부친판도판서 윤유의 상을 당하자 삼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한결같이 예의와 제도를 지켰다. 대나무 두 그루가묘의 옆에서 자라났으니 당시 사람들이 효성에 감응하여 그리된 것이라 여겼으며 조정에 알려져 정려받았다. (이사실은) 나라의 기록 및 여지지에 실려 있다.
예전에 우리 선군께서 이른 나이에 풍질에 걸리셨다. 병술년에찬 기운이 들어 의약이 효과가 없었고 또 해소가 생겨 기침과 천식이 심하여 주야로 크게 고통을 겪으셨다. 군은나이가 겨우 10여 세였는데 팔공산에 올라 직접 약재를 채취하였으며 좋은 의사의 말대로 조제하여 밤낮으로달여서 올렸다. 눈조차 붙이지 않았고 옷의 띠조차 풀지 않은 채 8년을그리하였다.
癸巳仲春 君年十八 遂遭終天之痛 籲天叩地 五內崩摧 入則慰母 出則血泣
계사년 중춘에 군의 나이 18세였는데 지극히 애통한 친상을 당하였다.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고 땅을 두드리며 애통해 하였는데 오장이 찢어질 듯하였다.(그럼에도) 집에 들어가서는 어머니를 위로하였고 나오면 피눈물을 흘렸다.
至十一月己酉 葬于八智山 乾向之原 廬墓三年 構齋舍以爲永世奉先之所
11월 기유일이 되어 팔지산 건향 언덕에 장례지내고여막을 짓고 시묘살이 하기를 3년동안 하였다. 재사를 지어영원히 선조들을 모실 수 있는 곳으로 삼았다.
乙未春服闋 君年始二十 事親事兄無不極其誠
을미년 봄에 복상이 끝났을 때 군의 나이 스물이었다. 어머니를모시고 형을 섬기는데 그 정성을 이루 다 하지 않음이 없었다.
戊戌承老母旨 遊于國學 閱歲而還 自是硏精篤志 講習不怠
무술년에 늙으신 어머니의 뜻에 따라 국학(성균관)에 가서 공부하였으나 해 넘기지 않고 돌아왔다. 이 때부터 정진하여연구하고 뜻을 돈독히 하며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己亥秋與我同屈於漢城之發解還途 余構瘧疾 未克前路 間關跋涉
기해년 가을에 나와 함께 한성부의 시험에서 선발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갑자기 학질에 걸려 더 이상나아가지 못하고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었다.
至天民川時 秋水方漲 人言此水有毒螫之蛇 多害人致死 君不以爲惑 背負病兄 乃克濟水
천민천에 이르렀을 때 가을 물이 바야흐로 넘쳐흘렀다. 사람들이말하기를, “이 물에는 독을 가진 이무기가 있어 사람들을 많이 해쳐 죽이기도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군은 의심하지 않고 병든 형(필자)을 업고서 물을 건넜다.
庚子春 君娶星山李氏 花山公之後 正言諱孟專之曾孫女也 余喜得佳配 以悅親心
경자년 봄에 군은 성산 이씨와 혼인하였는데 화산공 후손이며 정언 이맹전의 증손녀시다. 나는 그가 좋은 배우자를 얻어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음을 기뻐하였다.
辛丑壬寅兩歲 飢饉連仍 君以奉養不稱爲憂 卒其細 君親臭菽水
신축 임인년 두해 동안 기근이 잇달았다. 군은 봉양을 제대로하지 못함을 걱정하였으며 끝내 그 세세하게 하였으니 군은 직접 콩물 냄새를 맡았다.
癸卯冬 聞豊基倅周愼齋始營書院于竹溪 士子坌集 君贄文往謁先生以客禮遇之
계묘년 겨울에 풍기군수 신재 주세붕 선생이 죽계에 서원을 지어 선비들이 많이 모여든다는 소식을 듣자 군은폐백문안을 지어서 가서 뵈었으며 선생은 객으로써 예우하였다.
며칠간 머물다가 논제를 내었는데.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였다. 군은 즉시 제술하여 제출하니선생은 덕이 있는 그릇이라 칭하였으며 그 글의 말미에 비답을 붙여주기를 “우리 서원에 사람이 있으니 그 마음이 옥과 같도다. 하늘이 그대를 옥과 같이 여기니 그에 합당한 녹을 거듭 주시리라.”하였다. 인하여 말과 행동으로 규찰하고 실질이 있도록 서로 권면하여 동방(우리나라) 도학의 길이 쌓이고 쌓여 게을러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辭歸之日 贈一絶曰 爲學師原水 論交取兇觥 相䂓唯十字 庶悉百年情 其眷顧也如是
마치고 돌아가는 날에 절구 한편을 써서 주기를 “학문은 근원을 스승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교분은 예의에맞도록 할 것이다. 서로 규찰할 것은 오직 이 열 글자이니, 모든것은 백년의 정이다.”라 하였다. 그 아끼고 신경써줌이 이와같았다.
其還謂余曰 豊川之有書院 乃是勝事 吾鄕獨無藏修之所乎 遂有營建之志
돌아와서는 내게 이르기를 “풍천에는 서원이 있으니 아주 좋은 일입니다. 우리지역에는 책을 보관하고 선비들이 배움을 닦는 곳이 없습니다.”하고는 서원을 세우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丙午國恤[仁廟喪]時人只擧義服之制 而君獨以素粲終三年 人或有問卽曰 我有功緦之服云
병오년에 (인종의)국휼을당하였는데 사람들은 다만 의리상 복제만 하였다. 그러나 군은 유독 3년간소찬을 지켰다. 그 이유를 묻는 이가 있으면 곧 말하기를 “내가 공복이나 시마복을 입어야 할 일이 있다.”고만 말하였다.
是年春遭其婦翁之喪 棺槨之備 親自營辦 葬具祭奠 盡其情禮
이해 봄에 장인의 상을 당하였는데 관이나 곽을 갖추는 일을 직접 몸소 마련하였으며, 장례 도구나 제사 올리는 것에 모두 그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다.
丁未夏 朴兄橫罹 無妄拘囚牢獄 君單童匹馬 奔告于甘棠之下 以直其寃
정미년 여름에 박형이 재난을 당하여 억울하게 뇌옥에 갇혔는데 군은 어린 종하나 데리고 말한마리 타고 달려가그 억울한 사정을 말하고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戊申春 余避癘遠遊于公山 得病苦痛 至幾滅性 君追往求療 極盡調護 以續殘命
무신년 봄에 내가 역질을 피하여 공산으로 멀리 가다가 병을 얻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군은 쫓아 와서는구호하고 치료하기를 극진히 간호해 주었으니 이 덕에 목숨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庚戌夏 朴兄見背葬送之祀[禮?}營造之役 以身當之
경술년 여름에 박형이 어버이를 여의고 장례를 치러야 했을 때에는 영건하는 역을 몸소 담당하였다.
其四女一男 親自擇人婚嫁 躬辦婚需 使不失時
그의 딸 넷과 아들 하나를 직접 사람을 택하여 시집보내고 장가들게 하였는데 몸소 혼수를 마련하여 때를 놓치지않도록 하였다.
신해년 봄에 탄식하며 말하기를, “세월은 빨리 지나가고 입신양명은기약이 없다. 어머니 나이가 많으신데 입에 달고 맛있는 것을 마련해 드리지 못한다. 옛 사람이 이르되.‘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노쇠한데 벼슬하여 녹을받지 않는 것은 불효 가운데 하나다.’라 하였다. 나는 장차부끄러움과 비웃음을 무릅쓰고 잔약한 읍의 훈도나 학관이라도 되어 집안에 쌀가마니나 지고 오는 정을 이루려 한다.”고하였다.
於是得除湖南長水學 時致月餼之餘 以資偏親之養
이에 호남 장수현의 학관으로 제수되었다. 이 때 달마다 받는급료의 여유가 있어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는 자산을 삼을 수 있었다.
癸丑 荒政方極 邑宰委以賑恤之任 君曰 此乃濟人之事 不可不盡心竭誠措置 民賴以存活者衆
계축년에 기근이 심하여 진휼을 크게 해야 하는데 읍의 수령이 진휼하는 책임을 맡기려 하였다. 군은 이르기를 “이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다하여 조치해야만 한다.”고 하셨다. 백성들 중 이에 의지하여살아남게 된 이들이 많았다.
甲寅秋 聞周愼齋簀 奔往哭焉 自是心喪三年
갑인년 가을에 신재 주세붕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곡하였으며 이 때부터 심상 3년을 지켰다.
丁巳 卜地于長川之上 創建書院 因時不利 纔立十間 而功未就緖
정사년에 장천 위쪽에 자리를 정하고 서원을 창건하였다. 그때시세가 불리하여 겨우 열칸 남짓만 세우고는 공사를 다 마치지 못하였다.
又以老兄嫁女之禮 勤苦資粧 余不費力焉
또한 노형(필자)의딸이 시집가게 되었을 때 그 예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여 밑천을 준비해주어 나는 비용과 노력을 거의 들이지 않았다.
庚申 與南村姓族 結約爲契 講信睦族 又與柳義興希潛議立鄕約 講禮春秋
경신년에 남촌에 사는 동성 친족들과 계를 만들어 친족간의 신뢰와 화목을 다짐하였으며, 또한 의흥 유희잠과 논의하여 향약을 세워 봄가을의 예법을 강구하였다.
갑자년에 또 청도 학관으로 제수되었다. 전후로 학관에 제수된것은 모두 어머니를 모시기 위한 계책이었다. 일찍이 벽에 글귀를 써놓았는데 이르기를,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려 할 때에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쉬어야 하며,집안이 가난한데 어버이가 늙으셨다면 봉록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때부터 어머니께서 더욱 노쇠해지시자 오로지 전심을 다하여 따뜻하고 맑게 살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며멀리 출타하지도 않았다.
무진년 가을에 개연히 탄식하며 이르기를 “우리 지역에 서원을 세우는 것은 내가 일찍부터 마음을 두었으나이루지 못하였다. 어찌 커다란 흠이 아니겠는가.” 하고는동지들과 읍재(수령)에게 고하여 그 일을 전담하여 맡아 새벽부터밤까지 힘을 다하였다. 경오년 가을에 그 미비한 채로 마무리하였는데 오직 사우만 지을 수 있었다. 일찍부터 그것을 한으로 여겨 을해년에 지역의 사대부들과 함께 사묘를 세웠으며 병자년 봄에 지방의 선정 모재김안국 선생을 봉안하였다. 방백(관찰사)이 계문하여 장천이라 사액받으니 군이 비로소 마음에 흡족히 여겼다. (이와같이) 학교를 세우는 일과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힘써 노력하여 사문을 지키는 것은 평소 공이 마음 둔바였다.
무릇 어머니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정성을 다하여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신기한 꽃과 색다른 풀들을 심었고 좋은 계절 절기를 맞이하면 매양 어머니를 모시고 형을 맞이하여 연회를열었는데 직접 팔관가를 지어 헌수하고 잔 올리면서 사랑을 극진히 하였다. 날마다 지극히 정성을 바쳐천륜의 즐거움을 펼쳤고 이로 인하여 입으로 한 구절을 읊으니. “근심 속에 보내는 삶에서 원망하고 한탄하지않았다. 우리 집안에 한가지 기쁜 일 있어 가장 자랑할 만하니. 칠순형제가무늬 옷 입고서 백세되신 어머니 앞에 있으니 몇 집이나 그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벽에 18글자를 써서 이르기를 “옛 사람은 하루를 봉양할수 있으면 삼공의 자리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실로하늘에 감응하지 않았어도 일과 마음에 어긋남이 있으면 이르기를 “무릇 어버이를 봉양함은 그 뜻을 기르게 하는 것을 우선해야 하며 어버이의 마음을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그 드시는 것을 좋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반드시 두 종류를 갖추어 그 중 맛좋은 것을 택해서 올리면서 무엇을 드릴까요 여쭙고 드렸다.
凡親所着褻衣 常作小槽 必手澣然後付之人便旋之 器亦必躬自除濊 不使之人
무릇 어버이께서 입으셨던 때묻은 옷은 작은 물통을 만들어서 반드시 직접 세탁한 후에 인편에 맡겨 가져오게하였다. 그릇들도 반드시 직접 씻어내었으며 남을 시키지 않았다.
이해 겨울에 모친의 병세가 급히 나빠져 호흡이 어려웠는데 등불 밝히고[등잔의심지를 돋우고] 밤새면서 눈물을 삼키면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잠자리가 조금이라도 편안하지 않으면 자리를 더 깔고 요를 겹쳐 깔아드렸다.혹은 흰 솜이불, 혹은 부드러운 털이불, 기장을넣은 흰 솜이불 등을 이용해서 어머니 몸이 편안하시도록 힘썼다. 그러나 오래 누워계시고 일어나지 않으셔서근육과 뼈는 기운이 빠지고 피부와 살은 문드러졌다. 군은 그 아픔을 가슴 아프게 여겨 옷으로 싸서는끌어안고 앉아서 날마다 더욱 착실히 모셨다.
親曰 吾不遄死 使汝勞苦 誰知汝之若此乎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빨리 죽지 않아서 너를 수고롭게하는구나. 네가 이렇게 하는 것을 누가 알겠느냐.” 하였다.
君瞿然曰 固所子職 是何言也 雖千萬歲 猶以不足 有何勞焉
군은 놀라서 말씀드리기를 “실로 아들된 직분일 뿐입니다. 이무슨 말씀이십니까. 천년만년이라도 오히려 부족한데 어찌 수고랄 게 있겠습니까.” 하였다.
至乙亥春 親病少間 朴妹來侍親側久矣 三月將還乃曰 親病稍歇 娣亦歸家 値此令節 可不慰親之心乎
을해년 봄에 어머님의 병환이 조금 나으셨을 때 박씨 누이가 와서 어머니를 모시면서 오래 있었다. 3월이 되어 장차 돌아가려 하니 말하기를 “어머니 병이 조금 덜하시고 누이도 귀가해야 하는데 마침 명절이 되었으니어머니 마음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즉시 동쪽 언덕에 자리를 마련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형제 자매와 손잡고 동네 노인들도 맞이하여 어머니 마음을기쁘게 해드렸다. 어떤 노파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미친 듯 노래부르며 오랑캐 춤을 추어 광대들처럼 놀았다. 어머니가그것을 보고 한번 웃으셨다. 이로써 이날의 놀이를 마쳤다.
時丁 國恤 或有非之者曰 雖是悅親之事 當此國恤 無乃過乎
이 때가 국휼기간이라 혹 이를 잘못했다 하면서 이르기를 “비록 이것은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는 일이었다고해도 이같이 국휼을 당했을 때에는 지나친 것이 아닌가.”하였다.
君聞之曰 非是耽吾樂也 日迫西山 餘日苦短 明年此辰 難卜再見 以是知過而犯之耳
군은 듣고서 이르기를 “이는 내가 즐겁자고 한 일이 아니다. 날은서산에 기울었는데 남은 날들이 너무나 짧다. 내년 이 날을 다시 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지나친 줄 알면서도 범한 것일 뿐이다.” 하였다.
自是以後 親病日篤 嘗糞以知其殆 仰天摧咽 至六月十一日未時棄養 攀號擗踊 哭泣無時
이날 이후 어머니의 병이 날로 위독해졌다. 똥을 맛보아 그 위태로움을알게 되자 하늘을 우러러 큰소리로 울기도 하였으나 6월 11일미시에 끝내 어머님이 운명하셨다. 군은 부여잡고 소리치며 가슴을 치며 날뛰었으며 무시로 크게 울부짖었다.
팔지산의 산소에 모셨으며 겨울 10월 20일 갑신일에 선영에 합장하였다. 무덤을 조성할 때에 몸소 직접일을 도맡아 하였다. 나는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 되어 타일러 이르되,“무릇 자식된 도리로서 이 같은 큰일을 당하여 누군들 마음과 몸을 다하려 하지 않겠는가. 진실로감당하지 못할 바가 있고 또한 일꾼이 있는데 어찌하여 몸소 힘들게 하는가.”하였다. 그러자 답하기를, “내 천성이 스스로 좋아서 피곤한 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凡送終之事 獨自營辦 家雖貧乏 極其情禮 殆無遺憾
무릇 장례지내고 모시는 일을 모두 홀로 경영하고 마련하였으니 집은 비록 가난하고 궁핍하였으나 그 마음과예의를 극진히 다하여 조금도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不食醬酪蔬菜 惟糲飯飮水 日漸柴毁 人皆憂其過禮 而益自堅苦 遑遑不息 供奠之具 躬執其勞
간장이나 식초로 양념한 채소를 먹지 않고 오직 거친 현미밥만 먹고 물만 마셨으니 날마다 장작개비처럼 마르고몸이 상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예의가 지나치다고 걱정하였으나 그럴수록 더욱 스스로 어려움을 감수하였으며정신없이 다니며 쉬지 않았고 공궤하여 올리는 도구를 몸소 그 노고를 다하였다.
일찍이 어머니 영정을 만들어서 훗날 오래 느낄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때에는 궤연의 위에 걸어두고는 아침저녁으로 절하며 곡하니 마치 살아계실 때 정성을 올리는 듯하였다. 매일 세차례씩 묘소에 가서는 둘레를돌면서 애통해 하였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치지 않았으니 독한 병이 이 때부터 몸에 들어가 바짝 말라감이 더욱 심해져 다만 뼈와 가죽만 남을지경이었다.
子弟泣諫卽曰 命稟於有生之初 豈以勤苦致死乎
자제들이 울면서 간하면 말하기를, “목숨이라는 건 날 때부터타고나는 것이니 어찌 힘쓰고 고생한다고 죽음에 이르겠느냐.” 하였다.
丙子淸明 增修曾祖墓 乃曰 平生積念 於此少弛
병자년 청명일에 증조의 묘소를 보수하고는 이르기를 “평생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인데 이제야 조금 풀렸다.”고 하였다.
三月二十八日 得癨亂 彌留不廖 拜奠之禮 猶不少廢
3월 28일에곽란에 걸려 오래도록 낫지 않았는데에도 절하고 상올리는 예의는 조금도 폐하지 않았다.
四月初二 厥疾危重 未能起居 不以病爲痛 以廢禮爲痛
4월 초2일에 병질이 위중해져서 일어나지도 앉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병을 아파하지는 않고 예의를 폐하고 있음을 애통하게 여겼다.
至初七 乃曰 久闕親奠 實所哀痛 明日乃是觀燈令節 可設別奠
초 7일이 되자 이르기를 “오래도록 친히 존헌례를 행하지 못했으니실로 애통해 하는 바이다. 내일은 연등회 구경을 하는 명절이니 특별한 상을 올려야 한다.”하였다.
命取薔薇花 來回扶起盥嗽 病旋大灼 百藥無效
장미꽃을 가져오라 하고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하였는데 곧 병세가 크게 악화되어 백약이 효과가 없게 되었다.
子弟請調護于家則曰 喪人死於殯側可矣 何死於家
자제들이 집에서 조리하고 요양할 것을 권하니 이르되 “상을 치르는 사람은 빈소에서 죽어야 한다. 어찌 집에서 죽겠느냐.” 하였다.
病勢已不可 爲內嫂來省 卽曰 山所非婦人所至 何以來爲
병세가 이미 가망이 없게 되자 안으로 들이기 위해 형수가 와서 살피니 곧 이르기를, “산소는 부인이 올 곳이 아닌데 무엇하러 왔소?” 하였다.
問後事不答 但云 我之平生 事親有所未盡 今又不得終制 以是爲憾
뒷일을 물으니 답하지 않았으며 다만 이르기를, “내 평생 어버이를섬기되 미진한 점이 있었는데 지금 또 예식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니 이것이 유감이다.”하였다.
欲哭不能 嗚咽垂淚 而言曰 以母氏遺像。置我棺傍。吾將奉侍于泉下矣。至八日酉時。乃逝。
곡하려 하였으나 하지 못하고 오열하면서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이르기를, “어머니 초상을 내 관 옆에 넣어주시오. 나는 장차 황천에서도 어머니를모시겠다.” 하였다. 8일 유시가 되자 사망하였다.
아아, 사람이 천지간에 나서 누구라도 타고난 좋은 성품이 없겠으며누구라도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겠는가마는 그 효성스럽고 공손한 행동을 다하는 자는 드물다. 그대는능히 어버이를 섬김에 효로써 하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어김이 없었다. 형제 사이에 우애가 좋기로는 늙을수록더 돈독하였다. 자손은 의롭고 바르게 가르쳤고 남을 가르칠 때에는 겸손하고 받드는 태도를 지켰다. 갈고 닦은 뜻은 굳고 고되었으니 일상을 살아가기에 바빠 날마다 여유가 없었으므로 우뚝 솟은 뛰어난 행실은 없었으며다만 살아가면서 그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다하였을 뿐이다. 이 때문에 공을 아는 자가 드물고 이름이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然其孝友之行 拔出流俗 能追按廉府君之芳蹟 以肥家道 垂範後昆 則恐無愧於古之人也
그러나 그 효성스럽고 우애깊은 행동은 평범한 속세에서 아주 뛰어난 것이니 안렴공 부군의 꽃다운 행적을 뒤따라집안의 법도를 풍부하게 한 것이니 후손에게 모범을 보인 것으로 하자면 옛 어른에 비해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또 함께 일하는 스승이나 벗들 사이에서 일찌감치 위기지학(남이알아주기를 바라는 학문이 아닌 자기가 깨달은 학문)은 모든 것이 본인의 체험이고 절실함에 달려 있음을깨달았으며, 속된 유학자들의 입과 귀에 걸린 학문을 따르지 않았다. 더욱이학문을 진흥시키고 돕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알아 서원을 창건하고 시종 담당하였다. 그 얻은 바는 학문의힘에서 비롯된 것이니 어찌하겠는가.
아아, 군의 아름다운 행실과 근본이 있는 학문은 전날에 혁혁하였고오래도록 사라져 버리지 않으니 진실로 노형이 껄껄 웃으라고 기다린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레 그리 됩니다. 그어버이를 모신 곳이나 집안 형제 규문의 속에는 다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으리니 우리 집안 후손들은 남겨진 글이 없으면 징험할 수 없을것입니다. 그러므로 노형이 재주 없음을 살피지 않고 혐의를 피하지 않고 삼가 평소에 직접 본 것 가운데백분지 일이나마 억지로 짧게 기록하니 앞으로 태어날 어린 자손들은 글이 뜻에 이르지 못한다 하여 꺼리지 말고 어진 행동을 본받을 법식으로 삼아야할 것입니다.
군은 정덕 병자년 12월 계해일에 태어났고 만력병자 4월 신미일에 돌아갔습니다. 어지신 형수 이씨는 군보다 1년 1개월 뒤에 태어났고 시어머니를 35년 모셨으니 효심 역시 지극히 순수하십니다. 아들 둘이 각기 뛰어난자식들을 두었으니 어질게 된 자는 반드시 후손으로 보답을 받는다는 것이 기쁨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