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훌륭한 자질이 있었고 지조가 굳었다. 행실이돈후하고 효성스럽고 우애깊었으니 억지로 시켜서 된 것이 아니었다. 공의 부친께서 일찍이 풍질을 앓으셨는데의사가 치료해도 효과가 없었다. 공의 나이 10여 세였는데팔공산에 올라 약을 캐서는 좋은 의사의 처방대로 제조하여 밤낮으로 탕약을 달여서 올렸다. 눈 한번 붙이지않았고 의복의 띠조차 풀지 않기를 8년간 하였다. 계사년봄 공의 나이 18세 때 부친상을 당했는데 크게 애통해 하면서도 예에 어그러짐은 없었다.
自殯至葬 凡所以附於親者 盡其誠信 廬于墓側 泣血三年 人稱善居喪
빈소를 차린 후부터 장례에 이르기까지 무릇 어머니에 관한 것이라면 그 정성과 신의를 다하였다. 묘 옆에 움막을 꾸리고 3년간 피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거상을 잘했다고칭하였다.
戊戌承慈敎遊國學 自是硏精篤志 講習不怠 嘗與伯氏 同屈於漢城 發鮮還途 伯氏遘瘧 未克前路
무술년에 자교(慈敎)를받아 국학(國學: 성균관)에서공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연마 정진하고 뜻을 돈독히하여 강습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찍이 형님과 함께 한성에서 어렵게 살았는데[한성부 시험에서 선발되지못하다가] 뽑혀서 돌아오는 길에 형님이 갑자기 학질에 걸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였다.
至天民川 秋水方漲 人言此水有毒蠎害人 不可徒涉 公負兄乃克濟
천민천에 이르르니 가을 물이 바야흐로 넘쳐흘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물은 독을 가진 이무기가 있어 사람을 해치므로 걸어서 건너지 못할 것이다.”하였으나, 공은 형을 업고서 힘들게 건넜다.
癸卯冬聞豊基倅周愼齋世鵬 始建竹溪書院 士子坌集 公贄文往謁
계묘년 겨울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죽계서원을 처음 세웠다는 말을 듣고 선비들이 모여들었는데 공도 인사를 올리는글을 가지고 가서 뵈었다.
愼齋出論題製院生 批公所製文曰 我院有人 其心如玉 天將玉汝 申其祿矣
신재가 글제를 내어 원생들에게 짓게 하였는데 공이 지은 제술문을 평하여 이르기를 “우리 서원에 이런 사람이있구나. 그 마음이 옥과 같도다. 하늘이 그대를 옥처럼 만들려하니 그 녹을 펴도록 하라.”하였다.
이때부터 큰 그릇이라 일컬어졌고 인하여 언행의 기준이 되어 서로 돌아보게 되었으니 실로 동방(우리나라: 조선) 도학의실마리가 겹겹이 더해져 피로함을 잊을 지경이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에 절구 하나를 주었는데이르기를, “공부라는 것은 원래의 물길이 갈라졌다 합치는 것처럼 스승을 원류로 삼아 토론하면서 서로취하는 것이니 서로 유의할 것은 이 문장 뿐이다.” 하였으니 백년동안 이어지는 그리운 정이 두텁기가이와 같았고, 공 또한 평생 간직하였다.
連遭中仁廟國恤時 人只擧義服之制 公獨以素餐終三年 人或有問 答以功緦之服 不令人知
중종과 인종의 국휼을 잇달아 맞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다만 의복(義服: 의리로 입는 상복)의 제도를 따를 뿐이었는데 공은 유독 소찬으로 3년을 끝까지 채웠다. 누군가 이유를 물으면 답하기를, “공시(功緦)의 복을입는 중입니다.”하면서 남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였다.
신해년 봄에 공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빛과 그림자가 바뀌는것이 오래되어도(세월이 오래 지나도) 입신양명하는 것은 기약이없다. 어머니 연세가 많으셔 맛있는 음식도 좋다 하지 않으신다. 옛사람이이르기를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는데 벼슬하여 녹을 받지 않는 것은 첫 번째 불효라고 했다. 나는장차 웃음거리가 될 것을 무릅쓰고 급제하여 잔약한 고을의 훈도나 학관이라도 되어 쌀을 지고 날라 삯을 받아 부모를 봉양하거나 멀리서 부모님을 그리는정(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도)을 이루려 한다.”하였다.
그리고는 호남 장수의 학관으로 제수되어 봉양할 수 있는 자산이 생겼다. 계축년에기근을 구제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읍의 수령이 공에게 진휼하는 임무를 맡겼다. 공은 이르기를, “이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니 어찌 감히 눈치나 보면서 피하겠는가.”하고는 정성을 다해 조치하니 백성들이 의지하여 살게 되었다. 갑인년 가을에 신재공 주세붕이 병으로 돌아가시자달려가 곡하였으며 심상 3년을 지켰다. 공이 죽계에서 돌아와형님께 이르기를 “풍천에는 서원이 있으니 성대한 일입니다. 우리 동네에만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쓸 수있는 곳이 없습니다.”하였다.
마침내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약속하여 서원을 짓기로 하고 장천의 위쪽에 터를 정하고 10여 칸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시세가 불리하여(때가 맞지 않아) 중단하였다. 무진년가을에 읍재(수령)에게 고하여 그 일을 전담하여 맡도록 하였다. 밤낮으로 힘을 다하여 두해가 지나자 마침내 일을 마쳐 공들여 사묘를 세울 수 있었다. 지방의 선현 모재(慕齋) 김안국선생을 봉안하였다.
方伯啓聞 賜額長川 其篤於校塾之事 勉進後學 以衛斯文 乃公素志也
관찰사가 계문하여 장천이라 사액받았으니 학교를 세우는 일과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힘써 노력하여 사문을 지키는것은 평소 공이 마음 둔 바였다.
형님 댁에서 딸을 시집보낼 때에 힘써 노력하여 혼주 집에서 비용을 부담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매부가 돌아가니혼자 준비하여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그 집의 딸 넷, 아들하나를 직접 혼처를 택하여 시집 장가 보내 때를 놓치지 않도록 하였다. 무릇 궁핍한 친족이 혼인이나상을 당하면 으레 이같이 하였다.
常[35면에는 嘗]書壁上曰負重涉遠 不擇地而休 親老家貧 不擇祿而仕 如公先後除學 皆爲親屈也
언제나 벽에 글귀를 써놓았는데 이르기를, “무거운 짐을 지고먼 길을 가려 할 때에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쉬어야 하며, 어버이가 늙고 집안이 가난하다면 봉록을 가리지않고 벼슬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과 같은 이가 전후로학관에 제수되었던 것은 모두 어버이를 위해 굽혔기 때문이었다.
及其親齡益衰 專以定省自任 未嘗遠遊
어머니가 나이들어 더욱 쇠약해지자 오로지 정성을 다하여 모시는 것을 스스로 일로 알아서 멀리 출타하지도않았다.
凡可以慰悅母心者 無不致意 嘗雜植奇花異草 每於佳辰令節 陪親邀兄作宴 親曲八關歌 以獻酌盡愛
무릇 어머니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정성을 다하여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신기한 꽃과 색다른 풀들을 심었고 좋은 계절 절기를 맞이하면 매양 어머니를 모시고 형을 맞이하여 연회를열었는데 직접 팔관가를 지어 헌수하고 잔 올리면서 사랑을 극진히 하였다.
날마다 정성을 바쳐 천륜의 즐거움을 펼쳤고 이로 인하여 입으로 한 구절을 읊으니. “근심 속에 보내는 삶에서 원망하고 한탄하지 않았다. 우리 집안에한가지 기쁜 일 있어 가장 자랑할만하니. 칠순형제가 무늬 옷 입고서 백세되신 어머니 앞에 있으니 몇집이나 그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 때 어머니 나이가아흔이 넘으셨다.
親之所厚者 必厚其人 進食必區二品 擇其美味而進之 請其所與而與之
어머니께서 후하게 대하시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후하게 대하였다. 음식물을드릴 때에는 반드시 두 가지를 갖추어 그 중 맛이 좋은 것을 택하시도록 하고 올렸으며 무엇을 드릴까요 여쭙고 드렸다.
所着褻衣 常作小槽必手澣 然後付人便旋之 器亦必躬自除穢 不使之人
입으셨던 옷이 더러워지면 언제나 작은 통을 만들어서 손수 빨래한 후에 사람을 시켜 돌려드리도록 했다. 식기들도 역시 반드시 직접 설거지하였으며 남을 시키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이 갑자기 위급해지자 황황히 밤낮으로 자리를 깔고 앉아서 조금도 편안히 있지 못하였으니 솜을겹겹이 넣어서 깔자리를 만들었다. 혹 누군가 부드러운 털을 가지고 그 몸이라도 편안히 하도록 하라고하니 어머니의 피부가 상하고 문드러질까 염려하면서 몸소 두꺼운 옷을 입고 안아서 모셨다. 이와 같이매일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母曰 我不遄死 使汝勞苦 誰知汝之至此哉
어머님이 이르시기를, “내가 일찍 죽지 않아 너를 이렇게 고생시키는구나.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하시었다.
公悚然曰 固所子職 是何言也 雖千萬歲 猶爲不足 有何勞焉
공이 놀라 아뢰기를, “실로 자식이 해야 할 바입니다. 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비록 천년 만년 사신다 해도 오히려 부족한데어찌 수고롭게 여기겠습니까.” 하였다.
乙亥親病日篤 嘗糞以驗之 飮泣籲天 食不下咽 及其終天也 不以百歲爲長 而棄養之促 爲無窮之痛
을해년에 어머니 병이 날로 위독해지자 대변을 맛보면서 증세를 판단하였고 눈물을 삼키면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으며음식을 목으로 넘기지도 못하였다. 마침내 상을 당하자 “백살을 사셔도 오래 사는 것이라 할 수 없으며기양지촉(棄養之促)이 무궁한 애통함이 되었다.”고 하였다.
장례치르는 일은 평소에 마음 속에 강구한 바가 있어 집안이 비록 가난하고 궁핍하였으나 미리 준비하여 미치지못하지 않도록 하였다. 형제 자매에 대해서는 화합에 힘썼으며, 예의와제도에 합치도록 노력하여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공궤하고 모시는 도구를 몸소 노력하여 마련하였다. 반찬이나 장을 넣어 먹지 않았으며 오로지 죽이나 거친 밥만 먹을 뿐이었다.
嘗作慈堂影幀 至是揭之几筵之上 朝暮哭拜 以致如在之誠
일찍이 어머니 영정을 만들어 두었는데 이에 이르자 궤연의 위에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울면서 배례하기를 마치살아계실 때 정성을 다하는 듯이 하였다.
日三省墓 環繞哀痛 雨雪不廢 子弟泣陳卽曰 命稟於有生之初 豈以勤苦致死乎
날마다 세차례씩 묘소를 살폈는데 두루 돌면서 애통해 하기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폐하지 않았다. 자제들이 울면서 아뢰니 말하기를, “목숨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것이니 어찌 애쓰고 고생한다고 해서 죽음에 이르겠느냐.” 하였다.
丙子三月 得疾彌留 哭尊之禮 猶不少廢
병자년 3월에 병을 얻어 오래 낫지 않았으나 곡하고 제사 올리는예의는 오히려 조금도 폐하지 않았다.
至四月初七日乃曰 明日是觀燈令節 可設別尊 命取薔薇花 因扶起盥漱 病旋大作 已不可爲
4월 초7일이되었는데 이르기를, “내일은 관등영절이니 별전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하고는장미꽃을 가져오라 명하고 일어나 낯을 씻고 양치질하였다. 그리고 병이 크게 심해져 이미 어찌 할 수없게 되었다.
아아, 사람이 천지간에 나서 누구라도 타고난 좋은 성품이 없겠으며누구라도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마는 그 효성스럽고 공손한 행동을 다하는 자가 드물다. 공은타고난 성품이 다른 사람과 다르고 일찍부터 배움을 실천할 것을 알았다. 이미 효성스럽과 이미 우애스러운데나이들면서 널리 독실해졌다. 깎아지른 절벽과 같이 우뚝한 행동은 아니며 다만 일상생활 중에 취할 수있는 것이라면 그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다하였다.
만약 그 마음씀이나 행실이 바른 것과 사람들을 대하거나 사물을 응접함에 성실한 것, 자식들을 의롭고 바르게 가르친 것, 사람들에게 공손하고 우애스럽도록교훈을 준 것을 보면 그 안에 가지고 있던 것은 인(仁 )이었으며, 일에 임해서는 바르고 굳고 힘드셨습니다. 행실이 돈독하고 뜻을 키우는데힘쓰시느라 날이 부족하였습니다.
雖不博究諸書 以極其所就之地 而本原如此 其他不必論也
비록 널리 여러 책들을 살펴보지 않아도 그 끝까지 성취할 수 있는 기반이 되며 본원이 이와 같으니 그 외에는더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況孝悌百行之源也
하물며 효제는 백가지 행실의 근원입니다.
公能力行於人所不知之處 克紹按廉公之芳躅以立家範 君子多能乎哉
공이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힘써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안렴공께서 꽃같이 아름답게 세워두신 집안의 모범을계승한 것이니 군자라고 대부분 그리할 수 있겠습니까.
此可爲則於後世也
이는 후세에 모범이 될만한 것입니다.
公生于正德丙子 十二月癸亥 歿于萬曆丙子四月辛未 春秋周甲
공은 정덕 병자년 12월 계해일에 태어나 만력 병자년 4월 신미일에 돌아갔으니 나이는 60이었습니다.
이씨는 곧 내 종모(從母; 이모)시다. 이에 공의 올바른 행실은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다. 또한 백씨께서 찬하신 가장(家狀)을얻어보았는데 한글자도 넘치게 아름답지 않았다. 이른바 부모 형제의 말은 남들이 간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약간 보태고 덜어내어 지문을 만들었다.
崇禎乙亥 冬十有一月日 通政大夫 前守江原道觀察使兵馬水軍節度使兼巡察 使崔晛謹誌
숭정 을해년(1635, 인조13) 겨울 11월 통정대부 전강원도관찰사병마수군절도사겸순찰사 최현이 삼가 지문을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