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성산이씨로 증조의 함자는 맹전, 봉정대부 사간원 정언이셨으며, 할아버지의 함자는 서, 통덕랑 통례원 통찬이셨고, 아버지는 지원으로 병절교위를 지내셨다.
先君子稟質醇厚 慈祥愷悌 孝友回心 式遵先訓
공은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며 자애롭게 살피시고 화목하고 공경하시며 효성과 우애를 마음에 담고 선조들의 가르침을그대로 따르려 하셨다.
歲丙子遭王父憂 廬墓三年 搆小軒於山所 扁曰永慕 以寓孝思
병자년에 아버지 상을 당하자 3년간 여막에서 시묘살이 하셨으며, 산소 옆에 작은 집 하나를 짓고 “영모(오래오래 그리워함)”라 편액을 걸어 효성스러운 마음을 표현하였다.
奉養王母 凡十八年 盡其慛愉 癸巳王母棄養 時丁板蕩 葬祭以禮 追慕之心 終始不懈
어머니를 봉양함이 무릇 18년에 이르는 동안 정성을 다하였으며계사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니 그때 정녕 크게 어지러웠으나(그때 정묘호란으로 크게 어지러웠으나) 장례건 제례건 예의에 맞추어 치렀으며 추모하는 마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았다.
每値諱辰 先期齋沐祭 需称有無 務精潔以致如在之誠
돌아가신 날이 되면 미리 목욕재계하고 제수는 있건 없건 잘 갖추었으며 정결하게 하여 마치 살아계신 듯 정성을다하였다.
事伯父友愛備至 敎諸子必以義方
큰 아버지를 모시면서 우애를 지극히 갖추었다. 여러 자제들을의로운 방향으로 가르쳤다.
嘗書一絶以戒之曰 持身如履薄 待人一至誠 若不謙受益 恐忝爾所生 又以取友必端 不妄交遊爲戒
일찍이 절구 하나를 써서 경계하며 이르되, “자기 몸 건사하기는신발짝처럼 박하게 하고, 남을 대할 때에는 한결같이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라. 겸손하지 않으면서 이익을 챙기면 네 자손에게 욕이 될까 걱정하라.”또 반드시 단아한 이를 벗 삼았으며 망령되지 않기를 교유하면서 경계하였다.
향당에 처할 때에는(동리에서는)겸양하고 공손하게 스스로 낮추었으며 남들과 다투지 않으셨다. 누군가 상을 당하면 온 힘을다하여 서로 구하였다. 계사갑오년(임진왜란 중?) 전란으로 어려운 때에 죽조차 제대로 먹기 어려웠어도 굶주리는 친척이 있으면 반드시 두루 마음 써주셨다.
未嘗言人之不善 未嘗與人較是非曲直 家雖貧 亦未嘗有憂歎戚嗟之意 怡然自處 恬靜無爲
일찍이 남의 나쁜 점을 말씀하신 바 없고 남과 더불어 시비 곡직에 대해 비교한 적 없으셨다. 집안이 비록 가난해도 근심스럽거나 걱정된다는 뜻을 가지시지 않으셨으며 고요하고 자연스러우셨다.
嘗曰 吾見世人 勤苦營産 以遺子孫 而有不能守者 此不知命也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 사람들을 보니 애쓰고 노력해서재산을 키워 자손에게 물려주어도 지키지 못하는 일이 있는 것은 자기 운명(명?)을 모르는 것이다.” 하셨다.
그리고는 속된 말을 따라서 가사를 지어 이르시되, “하늘은 모두에게운명을 내려 주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알지 못하고 서로 경영하며 온갖 방법을 꾸며내느라 정신이없다. 나를 위하는 것은 천명을 알고 몸을 닦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대개 이로써 편안해지는 것이다.”고 하시었다.
平生以養痾爲事 中年攻擧業而未嘗留意焉
평생 모시고 병수발 드는 것을 일삼다가 중년이 되어 과거 공부를 하셨으나 일찍이 마음에 두지는 않으셨다.
先妣 順天朴氏 天性仁孝 事先君子無遺德 訓子弟皆有法
돌아가신 어머니 순천 박씨께서는 천성이 어질고 효성스러우시며 아버님을 섬기며 유감이 없었고 자제들을 훈육함에모두 법도가 있으셨다.
嗚呼 以吾先君子先妣之德行 宜膺景福 永享遐齡 而旻天不吊 荐降酷罰
오호라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덕행이라면 마땅히 환히 복을 누리셔야 하고 오래오래 사셔야 하는데 하늘이 살펴주지않으시고 거듭하여 엄한 벌을 내리시고 말았다.
歲甲寅 先君子與先妣 相繼棄代 享年纔六十有五 天乎天乎 其忍是耶
갑인년에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서로 이어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연세가 겨우65세셨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그 차마 이럴 수 있는가.
아버지께서는 가정 29년 경술9월 9일 기해일에 태어나셨고 만력 42년 갑인 6월 27일 무신일에 돌아가셨다. 어머님은아버님과 같은 해 11월 7일 병신일에 태어나셨으며, 역시 아버님과 같은 해 4월 16일무술일에 돌아가셨다. 이에 그 해 12월 8일 병오일에 의성현 남쪽 오토산 태향쪽 언덕에 합장하였다. 자녀는모두 여섯으로 장남은 적도, 차남은 달도, 셋째는 열도이며, 장녀는 사인 김유엽에게 시집갔으며 자식이 없다.
(이하 이어지지 않음)後 次適訓鍊奉事 任乃重 次適僉正朴宗敎 內外子孫 男女總二十餘人
둘째 딸은 훈련원 봉사 임내중에게 시집갔다. 셋째 딸은 첨정박종교와 혼인하였다. 내외 자손이 남녀 20여인이다.
오호라 우리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지 이제 1년이 되었는데유당(幽堂)에 모실 지문을 아직도 부탁하지 못하였으니 불초한우리 형제들은 감히 서차와 세계, 연월 및 행적의 대략을 가지고 지문을 쓸 수 있는 근거로 삼으려 한다. 천계 원년 신유년 겨울 11월 일에 불초자 열도가 삼가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