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조의 이름은 우, 고려때 입사하여 벼슬이 전라도 안렴사에 이르셨으며 효행으로 세상에 이름나셨다.아버지 판도판서 윤우께서 돌아가시자 삼년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아침저녁으로 묘 앞에서호곡하니 두그루 흰 대가 묘앞에서 자라났다. 사람들은 그 효성에 감화된 것이라 하였는데 그 일이 알려져정려받으셨다.
8세조의 이름은 광부, 중현대부내부령을 지냈다. 7세조의 이름은 사렴, 언양현감을 지냈다. 6세조의 이름은 석명, 성균 생원이었다. 고조의 이름은 준정, 승사랑 교수를 지냈다. 증조의 성함은 수, 유학을 공부하여 평소에 명망이 있어 사류들이무겁게 여겨 추앙하는 바가 있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원록, 호는회당이다. 공부한 바가 순정하여 효성과 우애로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 안렴공(9세조)의 아름다운 행적을 밝게 드러내시니 벼슬한 자들로 이 길을지나가는 자들 중 그 여막에 들러 직접 뵙기를 바라지 않음이 없었다. 정려받아 통정대부 호조참의로 추증되었다.
용모가 출중하시고 단정하며 엄숙하시었으며, 지조가 굳기로는 금석과 같았다. 일을 하시면 조용하면서 민첩하시었다. 집안에 거하시면서 즐거우심을 좋아하시었다. 승지공을 모시면서 부드러운낯으로 그 의지와 뜻을 따르고 순종하시었다. 법도에 어긋나는 말씀은 입밖에 내신 적이 없었고, 예의에 어긋하는 일은 몸소 하신 적이 없었다. 그 집안의 가풍을이어서 능히 행한 자가 있다면 바로 선고셨다.
또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집안이 대대로 효성이 전해내려 오는데 불초하고 미천한 자손이 이어져 나머지 풍조가 타락하고 있으니 흠을더하는 죄를 장차 어찌하여 피하고 면할 것인가. 이로써 일족을 면려하고 이로써 행실을 돈독히 하여 능히마땅히 해야 할 직분을 다하고 끝까지 봉양할 수 없다면 비천한 일이라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해야 한다.”하시었다. 이윽고 낮에는 사냥하여 찬을 마련하여 공궤하고 밤에는 독서하는데 노력하여 글을 읽었다.
46)이밀(李密)의 〈진정표(陳情表)〉에“외롭게 홀로 선 채 신의 몸과 그림자만이 서로 위로할 뿐이었는데, 할머니 유씨가 일찍부터 병에 걸려침상에 누워 계시니 신은 탕약을 만들어 모셔야지 일찍이 버리고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焭焭孑立 形影相吊而劉夙嬰疾病 常在牀褥 臣侍湯藥 未嘗廢離〕”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이 문장에서 따온것으로 보인다.
비 숙부인께서 일찍부터 질병이 있어서오랫동안 병석에 누워계셨는데 몸소 탕약을 받들고 옷의 띠조차 풀지 않고 여러 해동안 모셨다. 의술을공부하여 온갖 방도를 써서 치료하여 병이 나으셨으니 원근에서 보고 들은 자들이 이르기를 효성이 지극하여 감응한 것이라 하면서 차탄하지 않음이 없었으며식견이 있는 사람은 자못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집안에는 두 동생과 두 누이가 있었는데의식을 모두 선고께 의지하였다. 선고께서는 형제에 대해서 너나를 가림이 없으셨으니 옷이 있으면 전해서입도록 하였고 먹을 것이 있으면 밥상을 같이 하였다. 슬하의 여러 아이들이 비록 떨고 주려도 끝내 가엾게여기는 모습이 없었으면서도 누이들의 혼인에 필요한 물품은 모두 직접 마련하여 준비하였고 혼인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하였다.
親戚之困於飢寒者 必竭誠以恤之 人之陷於危患者必盡力以濟之 有喪者亦匍匐以救
친척 중에서 주리고 추위에 고생하는 자가있으면 반드시 정성을 다해서 구휼하였으며, 위험이나 근심에 빠진 이가 있으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구제하였다. 상을 당한 자는 역시 기어가서라도 도왔다.
친척 중 한 사람은 염병으로 죽었는데여러 친족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꺼려서 염습을 하려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선고께서는 직접 그곳으로 가셔서상을 치르시고 초장을 해주신 후에 나오셨다. 나이든 이들이 모두 이르기를, “특이하도다. 이 사람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할 행동이로다.” 하였다. 이 때부터 비로소 염병은 서로 전염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으며더욱 존경하였다.
之 先考持己以敬 存心以仁 其日用行事之際無嶄絶崖岸之行 而好善惡惡之心 未嘗不發於中而見於外
선고께서는 경(敬)으로써 자신을 지키셨고, 인(仁)으로써 본 마음을 보전하시었다.그 일상 생활이나 일을 하심에 우뚝한 대단한 행동은 없으셨으나 선함을 좋아하고 악함을 미워하는 마음은 언제나 속 깊은 곳에서 나와밖으로 보여지지 않은 적이 없으셨다.
見善人則雖貧賤 待之如貴人 愛之如兄弟
선한 이를 보게 되면 비록 가난하고 천하더라도귀한 사람처럼 대하셨고 형제처럼 사랑하시었다.
見惡人則疾之如仇讐 期於屛去而後已
나쁜 사람을 보면 마치 원수처럼 꺼려하시었고반드시 물리쳐 차단해버리시고 말았다.
是以知之寡而不知者衆
이 때문에 (선고를) 알아주는 이는 드물었고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平生以淸儉自守 單瓢屢空而不謨資生之策 斗屋朽破而亦無庇廕之計
평생 청렴하고 검박함을 스스로 지키며사시어 밥그릇이나 표주박이 여러 번 비어도 생계에 보탬이 될 방도를 도모하지 않으셨으며 좁은 집이 낡고 무너져도 역시 가리고 덮으려는 계책을 꾸미지않으셨다.
무오 기미 연간에 백성들이 곤궁해지고극히 가난해지는 형편이라 거처하고 있던 곳들을 떠나 유랑하게 되니 마을은 황폐해지고 집터가 비게 되어 가난한 이들은 거기에 머물면서 부자가 되기도하고 부자들은 마음대로 빼앗아 더욱 부자가 되었다. 어떤 이가 권하기를 자손들을 위하여 그리하라고 하니선고께서는 정색하시면서 따르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남의 땅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고 남의 집을 빼앗아 자기 집으로 삼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불의한 일을 그대는 어찌 내게 권하는가. ” 끝내 응하지 않으시니권하던 이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至於兄弟分異之日 奴婢之老弱者 田廬之荒頓者必引以取之
형제간에 (재산을) 나누어야 하는 날에는 노비 중 노약자들과 논밭 중 황폐한것을 굳이 자기 것으로 삼으셨다.
정봉공 신홍도는 선고의 재종형이라 문학으로세상에 이름이 알려졌고 지조있는 행동이 밝고 강개하시어 사람의 잘못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친구 중에행동이 바르지 않은 이나 처사가 의리에 어긋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매우 미워하면서 통렬히 절교해 버렸다. 이때문에 나쁜 행동을 하는 자들은 그 집 문앞에 이르지도 못했으며 착한 행동을 하는 이들은 날마다 와서 만나고 친하고 신뢰를 쌓으며 지냈다.
선고께서는 어려서부터 나이드실 때까지학문을 사랑하시니 정봉 김광헌 선생은 마치 친형제처럼 대하였고 무릇 크고 작은 일들을 반드시 상의한 연후에 행하였으며, 언제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집안을 일으킬 자는 반드시 이 동생이다.”하셨다. 여헌 장현광 선생 또한 사랑하고 존중하여 여러 차례 편지로서로 안부를 물었다. 그럼에도 자주 뵙고 받들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셨다. 또한 선고께서는 어지럼증과 담증, 천식이 있서 반년 가까이 꼼작못하고 앓으셨기 때문에 선생의 문하에 왕래하지 못하였다. 이는 선고의 평생의 큰 한이었다.
선고께서 어리실 때 말타고 활쏘기하며(무반으로 나아가며) 사방에 다니시고 싶은 뜻이 있으셨고, 성인이 되자마자 임진년의 병화를 만났으므로 군문에 종사하려 하였다. 그러나승지공께서 금하고 꾸짖으셨으므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언제나 스스로 개연히 여기시면서 탄식하여이르시기를, “사나이의 할 일이 어찌 구구한 과명(과거 급제)하나 얻는데서 그쳐야 하겠는가.”하시었다. 드디어 여러 분야의 서적을 두루 읽으시고 밝고 환히 그 뜻을 깨달으시었다. 비록과업에 종사하시었으나 반드시 급제하겠다는 각오를 가지신 적은 없으셨다.
乙巳赴發鮮鄕試擢第二 西崖先生見其文異之曰着力深思 推究義理如此 不但爲科文而已
을사년에 향시에 응시하시어 2등으로 뽑히셨는데 서애 선생(유성룡)이 선고께서 쓰신 글을 보고 기이하게 여기시면서 이르시기를 “매우 힘쓰고 깊이 생각하여 의리를 추구함이 이와같으면 문과에 급제할 뿐이겠는가.”하시었다.
中丙午進士 來游泮中 爲時輩所指點而排斥退處江湖 終老不起
병오년 진사에 급제하시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시었는데당시 시류에 영합하는 무리들이 꺼리고 배척하는 바 되어 물러나 강호에 거처하시었고 늙도록 벼슬하지 않으셨다.
일찍이 영계서원 원장이 되었을 때에 정조(1559-1623, 광해군 때 권신인 북인 이이첨의 무리)가 관찰사가되어 기세 등등하였으니 사림들에게 화를 일으킬 듯 하였으므로 정조의 성명을 심원록에서 제거하였다. (그러자) 간사한 소인배들이 감영에 무함하여 방백(정조)를 부추켜 성화같이 가두라고 독촉하였다. 이에 서원의 임원들이 모두황망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분주히 도망가거나 숨었다. 밤낮으로 두렵고 위태한 상황이라 떨면서혹시라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두려워 하였다.
선고께서는 역시 일찍이 학궁(서원)을 부지하고 보호하는데 뜻을 두시었다.(마음을 쓰시었다.) 묘우가 퇴락하고 무너지면 모두 수리하고 고치셨으며, 선비들의 기풍이 흔들리고 위축되면 역시 떨쳐 일어나도록 하시었다. 학궁유지 자금이 탕갈되면 거두어 들여서 가득 차도록 해주시었다. 제기가 깨지고 빠진 것이 있으면 낡은 것을새것으로 바꾸어 주시었다.
정축년의 난리(병자호란)가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일으키셨는데 눈물을 흩뿌리며 무리들과맹세하면서 이르시기를, “군부께서 포위당하셨는데, 신자된도리로 어찌 하루인들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하시었다. 드디어외롭고 약한 군사들을 이끌고 고개 아래에 달려갔는데 늠름하여 적과 맞서려는 뜻이 있으니 무사들은 입을 꽉 다물고 적을 무찌르려는 기세가 있었다. 전란이 끝난 후 의롭게 모은 군량을 다시 궐하에 바치니 건원릉 참봉으로 제수되셨다.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역시 사은숙배만 하고 물러나셨다.
全參議提挽而止之 而先考以祿不及養爲風樹之痛老境薄宦 豈其本情哉 遂辭謝而歸 自此已無意於人世矣
전참의가 붙잡고 만류하였으나 선고께서는“녹봉이 어버이를 모시기에 넉넉하지 못하니 나이들어 낮은 벼슬하는 것이 어찌 본 뜻이겠습니까.” 하시고는끝내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시었다. 이후로는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으셨다.
48)白髮蒼顔: 소식(蘇軾)의 〈원일과단양명일입춘기노원한(元日過丹陽明日立春寄魯元翰)〉에 “백발 늙은 얼굴을 누가 기억해 주랴. 새벽에 자주 재채기함은누구 때문인가.〔白髮蒼顔誰肯記 曉來頻嚔爲何人〕” 하였다. 중국의 속설에 재채기를 하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얘기를하기 때문이라고 하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蘇詩補註 卷11》
이에 구름있고 물이 있는 동리에(자연과 벗 삼을 수 있는 곳에) 몇칸짜리 정사를 짓고는 백발의 노쇠한모습으로 그 안에 물러나셔서 산수를 즐기시면서 몸에 좋은 깨끗한 음식 드시고 음풍농월하시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고 지내셨다. 사람들은 지상의 신선이라 불렀으며, 모두 말하기를 “건강한 몸으로오래오래 사실 것이다.”하셨다. (그러나) 하늘이 돕지 않아 잔혹한 형벌을 우리에게 내리셨다.
癸卯七月初一日丙寅巳時 終于正寢 彼蒼者天胡寧忍此 嗚呼痛哉 嗚呼痛哉
계묘년7월 초 1일 병인 사시에 정침에서 돌아가셨다. 저푸르른 하늘이여! 어찌하여 차마 이럴 수 있는가! 아아 애통하도다. 아아 애통하도다.
49)卑以自牧:《주역》 〈겸괘(謙卦) 초육(初六) 상(象)〉에 “겸손한군자는 몸을 낮추어 자신의 덕을 기른다.〔謙謙君子 卑以自牧也〕”라는 말이 나온다.
선고께서는 마음 쓰시고 근신하셨으며 경(敬)을 주로 하셨으며 위세와 외모는 존중할만 하였고, 용모와 행동거지는 볼만 했으며, 말씀이나 기세는 좋아할만하였고, 덕업이나 행실은 본받을만 하였다. 그리고 또한 언제나 팽팽하여 느슨하지않으셨으며, 느슨하실 때에는 팽팽하지 않으셨다. 사람을 대할때에는 온화한 기색이 안면에 가득하였고, 정답게 말씀하셨다. 향리에서는낮추어 스스로 덕을 기르셨고, 감히 지혜로써 남보다 앞서려 하지 않으셨다. 이에 위아래 없이 모두 환심을 얻으셨으며, 조용하고 돈독하고 신중하시어처음부터 끝까지 바름을 지키셨으며 시속과 하나되지 않으시었다. 이 때문에 세상에 쓰이지 않으셨으나 평온히사시었다. 관대하기 보다는 엄정하시었고 온화하기 보다는 위엄이 있으셨다. 자제나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은 웃으며 떠들거나 비루함에 가까운 말을 감히 못하게 하시었다. 의관이 정제되지 않으면 신칙하여 바로 잡도록 하시었고, 걸음걸이에절제가 없으면 책망하여 절제되도록 하시었다. 또한 반드시 의롭고 방정하도록 가르치시었고, 순하고 덕스럽도록 훈계하시었다. 비록 어린 아이들일지라도 역시 감히앞에서 희롱하면서 까불지 않도록 하시었다. 깨끗이 씻고 청소한 후 응대하도록 하며, 옷깃을 바로 하고 꿇어 앉도록 하시어 삼가고 삼가도록 타이르고 훈계하시었다.
婢僕不敢仰視而屛息 奔走門庭 肅肅若朝廷然諸姪群族
노복들은 감히 눈을 치켜뜨지 못하고 숨을죽여 조심스레 행동하였고, 뜨락에서 분주히 다니면서도 엄숙하고 조용한 것이 마치 조정에서 그러한 것과같았다.
後生少年 有口問業者 則先以孝悌忠信 反覆開諭有謁見者 則亦以先祖懿行戒飭遵奉
나이 어린 후생 가운데 학문에 대해 묻는자가 있으면 먼저 효제충신을 반복하여 타일러 주었다. 뵙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먼저 선조들의 아름다운행실을 몸소 따르도록 훈계하였다.
언제나 방 한 가운데 단정히 앉으셔서서책과 역사서를 고요히 읽으셨고, 뜻이 가는 곳이 있으면 문득 기뻐서 끼니를 잊으셨다. 성현의 간절하고 중요한 말씀을 접하게 되면 반드시 자제들로 하여금 낭송하게 하고 이르시기를, “성현의 말씀이 절실하기 이를데 없도다. 다만 한바탕 이야기 거리를만들어야 하지만 너희들은 심상히 여기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구나. 이야말로 하등 인물이 되는 까닭이다.”하시었다. 또한 소학을 암송하기를 권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오늘날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교만하고 나태하여 정신이 무너져 점점 성장하여 뜻을 이루는 것은 막혀 있다 여기면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에 그 효제를 행하는 자가 드물게 되었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다만현재의 상태에 의거하여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효제충신이나 예의염치 등의 일에 대해 모두 요체를 이해하고오래 성숙시키면 문득 이 도리를 밝게 깨닫게 될 것이다.” 하시었다.
不肖孤哀等 不能奉承庭訓 於是書做得來也淺只作這樣人不孝之罪 當如何也
(그러나)불초한 우리 고애자들은집안의 교훈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고 이같이 글로 남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저 이모양인 사람이니 불효의죄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先考氣力强健 八十年前 則不廢行祭 以致如在之誠
선고의 기력이 강건하여 80세 이전에는 제례를 행하는 것을 폐하지 않으셨으며, 마치 계신듯이 정성을 다하였다.
固窮安貧 一不語及於生産
실로 가난하였으나 안빈의 도를 지켜 한번도먹고 사는 일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생산에 대해 한 말씀도 없으셨다.)
年旣耄耋 情神不亂 每値考妣諱 則必進素饌 子弟極諫則終始不聽 其終身至慕 可見矣
연세가 이미 오래 되셨어도 정신이 조금도흐트러짐이 없으셨고 매양 선고와 선비의 제사일이 되면 반드시 직접 소찬을 올리셨다. 자제들이 극력 간하였으나끝내 따르려 하지 않으셨다. 그 평생토록 지극히 흠모하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선고께서는 나이 드시니 풍질과 열이 극히위중해지셔서 춥거나 더운 때에 신중히 조섭하지 못하셨다. 6월 27일은승지공의 휘일이라 여러 차례 여쭈어도 알지 못하셨다. 대개 이때부터 병세가 이미 심각해져서 전혀 일을살피지 못하셨고 말씀도 통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만해도 중풍이 나타나기 전이라 약으로 치료하면 정신이나기력이 돌아왔으므로 응당 백세까지 보통 이상으로 오래 사시리라 생각하였는데 다만 90세까지만 누리실수 있었다. 이는 실로 고애자 우리들의 악업이 쌓이고 죄가 넘쳐서 그 화가 선고께 미친 것이니 오장이찢기고 무너져 밤낮으로 울부짖고 호곡할 뿐이다.
가을이 되어 손아래 시누이가 혼인을 하게되었는데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같이 선고의 말씀에 따라 직접 짜서 바느질하여 준비하였다. 세속의 재물을좋아하여 사사로이 챙기려 하는 자와는 어찌 같은 하늘 아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선비께서는선고와 같은 해 태어나셨고 나신 달, 일은 선고보다 늦으셨으니 갑술년 윤12월 초 8일 무인에 나셨고, 경자년정월 13일 기사에 돌아가시었다.
初葬于縣之北鷄卵峙 先考歿於後癸卯十二月二十八日辛酉合堋于縣西安平卯向之原
처음에는 현 북쪽 계란치에 모셨다가 그후계묘년 12월 28일 신유에 선고께서 돌아가시니 현서쪽 안평묘향(동쪽방향) 언덕에 함께 모셨다.
有四男三女 男長㙫歲辛丑已卒 其配判官朴夢琚女 無后而次子均之子慶錫繼嗣
4남 3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집(㙫)은 신축년에 일찍 죽었다. 그부인(첫째 며느리)는 판관 박몽거의 딸이다. (집의) 후손이 없으므로 (선고의) 둘째 아들 균(均)의아들 경석(慶錫)을 양자로 삼아 후사를 잇도록 하였다.
次均埰坫坫亦先考妣夭
(집의) 아래로 균, 채(埰), 점(坫)이 있다. 막내 점도 선고, 선비와마찬가지로 일찍 요절하였다.
女適士人金尙珏 次適縣監鄭復享 無后而歿次適平山申命元
딸들 중 맏이는 사인 김상각과 혼인하였고, 둘째는 현감 정복향과 혼인하였는데 후손 없이 죽었으며, 막내는 본관이평산인 신명원과 혼인하였다.
(둘째 아들) 균은 문소 김치홍의딸과 혼인하여 2남 2녀를 낳았다. (그 중) 맏이 경석은 집의 후사가 되었으며 천령 박형의 딸과 혼인하여딸 넷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직 모두 어리다. (균의) 둘째아들 이석은 사인 박전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맏딸은 사인 이일오와 혼인하여 딸 넷을 두었다. (이석의) 둘째 딸은 사인 여함화와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세째 아들) 채는 영가 권창익의딸과 혼인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채의) 맏아들 우석은 연안 이세미의 딸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채의) 둘째 아들 문석은 월성 손현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좌참찬을 지낸 월성군 고 손중돈의현손이다. 1남 1녀를 낳았고 그 중 맏딸은 승지 금복의손자 문도에게 시집보냈다. 나머지는 아직 혼인 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