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의 함자는 달도, 자는 형보이다. 본관은 아주다. 부친의함자는 흘(仡)이고 증통정대부 승문원좌승지 겸경연참찬관이시다. 조부의 함자는 원록(元祿), 증통정대부호조참의시다. 증조부의 함자는 수(壽)이며 초야에 묻혀 지내셨으며 벼슬하지 않으셨다. 어머님은 순천 박씨
증숙부인으로, 평양군 천상의 후손이며 참판 안명의 6세손이다.
兄自少頻秀異 凡稍長克遵先訓 惇行孝悌 弱冠從遊月川趙先生及 旅軒張先生之門 得聞爲學之方
형은 어려서부터 자못 우수하고 특출났었다. 조금 자라서는 선대의 유훈을 잘 준수하여 행동거지가 돈후하였고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었다. 약관의 나이가 되어서는 월천(月川)조선생(조목)114과 여헌(旅軒) 장선생(장현광)115)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글을 읽을 때에는 뜸을 뜨듯 정성을 기울였고, 어지러이 흐트러진 머리는 수건으로 싸매고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사람들이모두 멀리 크게 도달함이 있으리라 여겼다. 뜻을 세움이 확고하여 옛 사람의 뜻을 흠모하여 따르려 하였다. 일찍이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하고 신하되어서는 충성을 해야 한다는 것을 표준으로 삼았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일이 있으면 강개하니 준절한 언론이 남보다 뛰어났다. (형의) 뜻이나 행동은 시속에 따르는 무리들이 경탄하는 바였다.
先君子不以産業爲意 及癸甲兵荒之世 盡室飢餒兄躬自販鬻 以供菽水 家衆賴免顚壑
아버지께서 생계유지를 위한 일에 별로관심이 없으셨는데 왜란이 일어나고 기근이 심했던 계갑년에 모든 집안이 굶주렸는데 형이 몸소 죽을 팔아 콩국이나마 먹도록 하니 집안사람들이 그에의지하여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丁酉之亂 弟年九勢 弱質不能步 兄於寅夜負弟越險不知勞勩 奔竄之際 孝友彌篤
정유재란 때에 나는 나이 9살이었는데 약질이라 걷지 못하니 형이 한밤중에 나를 업고 위험한 지경을 벗어난 적 있는데 힘들고 수고로운 줄도몰랐다. 분주히 뛰고 도망해야 하는 어려운 시기에 효성스러움과 우애가 널리 돈독하였다.
中萬曆庚戌生員 甲寅夏先考妣相繼棄世(재확인) 葬祭以禮 廬墓終制
만력 경술년에 생원이 되었다. 갑인년 여름에 아버님과 어머님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시니 예의에 맞추어 장례와 제사를 치렀으며 여막을 치고 묘를지키기를 끝까지 격식대로 하였다.
천계 계해년에 조정에 대책문 올린 것으로발탁되어 성환찰방이 되었다. 성환역은 왜란 이후 쇠락하고 피폐해져 지탱할 수 없어 깊은 궁벽한 곳으로옮겨져 있었다. 형은 지세상 요충지에 있는 곳이므로 오래도록 폐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힘을 다하여조치하여 복구하여 다시 세웠으며 봉록을 털어 말을 사들여 지방으로 나가는 관리들과 어사들을 접대하였다.
갑자년 봄에 임금이 남쪽으로 피신하실일이 생겼는데(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파천함), 변이 갑자기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겁을 먹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형은 차원이 되어 임기 응변으로 방책을 강구하니 눈깜짝할 사이에 삼백의 장정과 말을 모아 (임금 행차의) 의장과 위엄을 갖출 수 있었다. 가을이 되어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겨울에 전주판관이 되었는데뛰어난 업적이 있었으나 겨우 8개월만에 그만두었다.
丙寅 除拜刑禮曹正郞 冬拜司諫院正言 疏陳十條目上嘉納
병인년에 형조와 예조 정랑으로 제배되었으며겨울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어 10조의 상소를 아뢰니 임금께서 좋게 받아들이셨다.
丁卯春 特拜正言 時淸兵猝至 上會臣僚議避鋒兄請殿坐鍾樓 召募親征 言雖不施 時論䪘之
정묘년 봄에 정언으로 특별 제배되었다. 이때 청병이 난데없이 쳐들어왔는데 임금께서 신료들을 모아 적의 예봉을 피할 방도를 상의하도록 하니, 형은 임금께서 종로에 나아가 자리잡고 병사들을 모아 직접 거느리고 싸워야 한다고 청하였다. 그 말은 비록 시행되지 않았으니 당시 여론은 옳다고 여겼다.
扈從江都 仍奉使毛鎭 善辭應對 以解疑阻刷還我國人 擄在島中者數百116)
그러다가 임금을 모시고 강화도에 들어갔으며, 이어서 사명을 받들고 모문룡 장군의 진영에 가서 좋은 말로 응대하여 의심과 우려를 풀었으며 우리나라 사람으로끌려가서 섬에 있었던 이들 수백명을 찾아서 데려 왔다.
기사년에 장령으로 부름을 받아 입도(入都: 서울에 들어감? 연경에다녀옴?)하였고, 경오년에 다시 장령이 되었는데, 어떤 공훈이 있는 재신이 면전에서 상신을 모욕준 일이 있자 형은 상신이 존중받지 못하면 조정이 존중받지 못한다하여 소장을 올려 규탄하니 사람들이 떨었다. 벼슬이 바뀌게 되어 장악원정이 되었다.
신미년에 다시 장령이 되었는데 병이 심해져벼슬이 바뀌어 군자감정이 되었으며, 다시 홍문관 수찬으로 제배되었는데 사은하기 전에 서울에서 졸하였다. 임금께서 의례에 맞게 부조를 보내주셨으며 도에 명하여 장례를 살피도록 하였다.상여를 옮겨 본현 오동산 서쪽 을좌 언덕에 모셨다.
兄生於萬曆丙子 至卒之歲 崇禎辛未 享年五十有六
형은 만력 병자년에 태어났고 돌아간 해는숭정 신미년이니 수명은 56년이었다.
娶宗室德信正鸞壽女 生三男二女 曰在縣監曰圭承文院博士 曰至未仕 女長適尹以觀 次適朴忠基
종실 덕신정 난수의 따님과 혼인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아들중 재는 현감, 규는 승문원 박사이며, 지는 아직 벼슬하지않았다. 딸들 중 첫째는 윤이관에게, 둘째는 박충기에게 시집갔다.
崇禎丙子後 二十一年 丙申 二月日 弟通訓大夫前司導寺正 知製敎 悅道 泣而謹誌
숭정 병자 21년 병신 2월 일에 동생 통훈대부 전사도시정 지제교 열도가 울면서삼가 지를 지었다.
114)조목(趙穆): 1524년(중종 19)∽1606년(선조 39) 봉화현감, 군자감주부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115)장현광(張顯光): 1554년(명종 9)∽1637년(인조 15) 조선중기의 학자.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