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성은 신, 이름은 열도이며, 자는 진보, 스스로난재라 하였다. 본관은 아주다. 고려때 윤유라는 분이 계셨는데판도판사를 지내셨고 우라는 분을 낳았다. 우는 전라도 안렴사를 지냈으며 효성으로 인정받아 정려되었다. 열도의 증조는 수이며, 할아버지는 원록으로 증통정대부 호조참의이며역시 효성으로 정려되었다. 아버지의 함자는 흘 증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이다. 어머니는 증숙부인 순천 박씨 현감 회의 증손이며 전력부위 윤의 딸이다. 만력기축년 12월 21일에 의성향교 앞마을에 있는 집에서 공을낳았다.
삼십년간 조정에 있으면서 내외 여러 관직을역임하였다. 내직으로는 승문원 부정자 정자 저작 박사를 거쳐 성균관 전적에 올랐다. 체직된 후에는 다시 전적이 되었으며 직강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찍이오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5조의 좌랑을 지냈고 예조 병조 공조 3조의정랑을 거쳤다. 사간원 사헌부에 들어가서는 정언을 한번 지냈고 장령을 네 번 지냈다. 앞서는 사도시 정에 배수되었고 뒤에는 사도시 종부시 정에 배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其兼帶 則春秋館 記事官 記注官 至於知制敎則凡除拜常例兼焉
겸대한 직책은 춘추관 기사관 기주관이며지제교는 무릇 제배될 때에 의례히 겸직하는 것이다.
在外則鏡城判官 蔚珍縣令 醴泉郡守 綾州牧使
지방관으로는 경성판관 울진현령 예천군수능주목사를 지냈다.
其出使則江原道巡營從事官 赴京書狀官 至於咸鏡道京試官則不赴焉
왕명을 받고 나간 것은 강원도 순영 종사관부경서장관이며 함경도 경시관은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公神觀淸嬴素多病 至是益痼 己亥四月卒
공의 신관은 맑고 가득하나 평소에 병이많았는데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해져 기해년 4월에 졸하였다.
訃 聞命本道別致賻 八月葬于縣南飛亭山午向原
부고가 알려지자 (임금께서) 본도에 명하여 별도로 부조하도록 하였다. 8월에 현 남쪽 비정산의 남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嗚呼 公資稟粹然 無一點滯吝意思 無一毫粗屬氣像 立雪王山 門下感發深矣
오호라 공의 타고난 성품은 순수하여 조금이라도집착하는 것이 없었으며, 털끝만큼도 거친 기운이 없었다. 스승을 지성으로 받들었으니 문하의 제자들이 깊이 감격하였다.
其家居孝友篤 至奉祭祀 極其誠敬 其居鄕恂恂卑讓 信順著於上下
집에 있을 때에는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고제사를 받듦에 정성과 공경함을 극진히 하였으며 동리에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스스로 낮추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고 공손하여 위아래에 널리 알려졌다.
其立朝 恬靜自守 不肯苟同而跪隨
조정에 들어서는 깨끗하고 고결하게 스스로본분을 지켰으며 구차하게 무리에 끼려 하지 않았고 단정히 지낼 뿐이었다.
以至治州邑以敎化爲要 興學爲先 陳䟽章輒眷眷於律 本興學之說
지방관으로 나가서 읍을 다스릴 때에는교화를 위주로 하였고, 학교를 세우고 학풍을 진작시키는 것을 우선하였다. 상소문을 올릴 때에는 법식에 맞는지 유의하였으며 학문을 흥성케 하는 학설에 근본을 두었다.
其在南漢圍中 人皆恇㥘 苟冀和好 公以死自許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어 있을 때에 다른이들은 모두 겁에 질려 구차히 강화할 것을 바라는데 공은 스스로 죽기를 각오하셨다.
製小第以備襲殮 修家信以付蒼頭 從容自得如平日非信道篤而自知明 能然乎
작은 집을 지어 염습에 대비하였으며 집안사람들에게보내는 글을 지어 사내 종에게 맡기면서 조용히 이르기를 평일의 모습과 같았다. 평소 학업에 독실하여스스로 명확히 깨닫지 못했다면 어찌 능히 이럴 수 있었겠는가.
其四爲掌令也 上因事囚諫官 公獨啓極言其失忤旨而遞
네 번 장령이 되었는데 임금께서 어떤일 때문에 간관을 가두려 하니 공만이 유독 그 잘못하심을 극력 아뢰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체직되고 말았다.
所歷州邑 皆有治績 士民追思立碑以頌德 觀民可以觀我生矣
지방관을 지내는 곳마다 모두 치적이 있어사민들이 추앙하여 비석을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으니 백성들 보기를 내 자식 보듯 하였던 것이다.
好讀書 如朱子節要 聖學十圖等書 手不釋卷
책읽기를 좋아하여 주자절요나 성학십도등을 언제나 손에서 놓지 않으셨고,
爲文 纖悉典雅 應製 多見推應對 大國一行爲之閣筆焉
문장을 지음에 치밀하고 충실하고 전아하였으며응제문이 많이 인정받았다. 이로 미루어 대국 일행을 응대하게 되자 쓰던 글을 중지하고 붓을 놓아버렸다.
臨終 神志不亂 處置身後事 無一語及於家業其平日所守之正 又可見矣
돌아가는 순간까지 정신이 어지럽지 않아자신의 사후 일에 대해 조치하시면서도 집안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하셨으니 그 평소에 지킨 바가 얼마나 바른지 또 알 수 있다.
配淑人聞韶金氏 鶴峰先生之孫 從仕郞諱浤之女窈窕靜淑 人爲兩美必合
부인 숙인 문소 김씨는 학봉 김성일 선생의손자이며 종사랑을 지낸 굉의 딸이다. 단아하고 아름다우며 고요하고 맑은 분이셨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두 사람이 아주 잘 만났다고 하였다.
生壬辰沒庚午 葬于縣南五土山 庚向之原
임진년에 나셨으며 경오년에 돌아가셨다. 현 남쪽에 있는 오토산의 서쪽 방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生五男 長㙨 早夭無後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맏이의 이름은 기다. 어려서 궂겼으며 후손이 없다.
次圾 男三 長應錫 二幼 女五 適鄭惟興曹壽昌 金命賢 餘幼
둘째는 급이다. 아들 셋을 두었고 맏이는 응석이며 둘은 아직 어리다. (급의) 딸은 다섯이며 정유흥 조수창 김명현에게 각기 시집보냈고 나머지 둘은 어리다.
次堪 男二 仁錫 義錫 女一幼
세째는 감이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인석과 의석이며, 딸 하나는 어리다.
次塼 男三 長斗錫 餘幼 女二幼
네째는 전이다. 아들이 셋이며 맏이는 석두고 나머지는 어리다. 딸 둘 있는데 어리다.
次垶 男四 長富錫 餘幼 女幼一
다섯째는 성이다. 아들을 넷 두었다. 맏이는 부석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딸도 하나 있는데 어리다.
二女 長適金宗源 男二幼 女四 長適鄭其興趙德胤 餘幼 次適生員權니(車尼) 早夭無後
딸이 둘이며 맏이는 김종원에게 시집가서아들 둘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또 딸 넷을 낳아장성한 딸들은 정기흥과 조덕윤에게 시집보냈고, 나머지는 어리다. 둘째 딸은 생원 권니에게 시집보냈는데 일찍 죽었고후손이 없다.
側室 有二男曰增曰壁
측실 소생으로 아들 둘이 있는데 증과벽이다.
銘曰
명을 지어 이른다.
鵝州之申 孝于家世 아주의 신씨집안은 대대로효자 가문이라.
傳芳趾美 澤流後裔 대를 이어 그 아름다운이름이 전해져 후손에 미치네.
公稟淑氣 玉瑩質然 공은 깨끗한 기품을타고 났으며 옥과 같은 타고난 성품이 빛났네.
立雪師門 懲室功傳 스승을 극진히 모셨으며118)집안사람들을 깨우쳐 공을 전하였고
鶴唳聞天 平步靑雲 학의 울음은 하늘이들었으니119)차분히 걸어서청운에 나아갔네.
簡重自晦 迹絶權門 간결하고 무겁게 스스로를감추고 권세가진 집안과 인연을 끊었네.
厥施未普 專于一州 정책은 널리 퍼지지못하였고 오로지 한 고을에서만 전념하였네.
卷懷林泉 不怨不㔫 아쉬움을 품은 채 자연으로 돌아왔으나원망하거나 비뚤어지지 않았네.
天胡不愍 地不埋名 하늘인들 불쌍히 여기지않겠으며 땅인들 이름을 묻어두려 하겠는가.
悼道無徵 我銘以貞 슬퍼도 징험할 길이없으니 내가 명을 지어 새겨놓으려 하노라.
通政大夫 司諫院大司諫 金應祖 撰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 김응조가 찬하다.
117)신열도, 懶齋先生文集卷之九 /附錄 墓誌[金應祖] (한국문집총간 024, 146a)
김응조, 鶴沙先生文集卷之八/ 墓誌 懶齋申公墓誌銘幷序(한국문집총간 91, 162a).
118)立雪師門: 스승의 문간에서 눈을 맞고 서있다.
송(宋)나라의 유작(游酢)ㆍ양시(楊時)가 정이(程頤)를 처음 찾아가 뵈었을 때 정이가 눈을감고 명상(瞑想)에 잠겨 있으므로 두 사람은 곁에 시립(侍立)하여 날이 저물도록 기다렸는데,정이가 물러가라고 명하였을 때에는 문 밖에 눈이 석 자[尺]나 쌓였었다는 고사(故事)에서유래.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이 커서 스승의 뜻을 극진히 따르고 모신다는 뜻.
119)《시경》〈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의 늪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 하였는데, 이는 은거하는 군자의 덕이 멀리까지 알려지는 것을 비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