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승정원주서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다. ○ 82세 된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는데, 임금이 藥材와 부채를 하사하다.
인조
23
1645
을유
順治
2
46
2월, 소명을 받고 漢江에 이르렀는데 체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오다. ○ 〈赴召命到漢江聞遞卽回程〉 시를 짓다.
인조
24
1646
병술
順治
3
47
전적, 병조 좌랑, 사간원 정언, 예조 좌랑이 되다. ○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다.
인조
25
1647
정해
順治
4
48
가을, 정언이 되다. ○ 노모를 위해 부친의 遺蹟이 있는 全州 判官이 되어 가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51
모친상을 당하다.
효종
3
1652
임진
順治
9
53
가을, 사헌부 지평이 되다. ○ 李時楳가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先賢들을 모욕한 것에 대해 탄핵하였다가 黨論을 짓는다는 이유로 26일동안 平海에 付處된 뒤 석방되다.
효종
7
1656
병신
順治
13
57
겨울, 蔚山 府使가 되다.
효종
10
1659
기해
順治
16
60
봄, 豐基 郡守가 되다.
현종
4
1663
계묘
康熙
2
64
강원도 도사가 되었으나 곧 체차되고 성균관 사예가 되다.
현종
5
1664
갑진
康熙
3
65
종부시정 겸 춘추관편수관이 되다.
현종
12
1671
신해
康熙
10
72
승문원 판교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부인 永川李氏의 상을 당하다.
현종
14
1673
계축
康熙
12
74
1월 22일, 집에서 졸하다. ○ 義城縣 下川 黑石里에 장사 지내다.
영조
16
1740
경신
乾隆
5
-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다.
기사전거 : 行狀(李光庭 撰), 墓誌銘(權相一 撰), 朝鮮王朝實錄등에 의함
편찬및간행
저자의 유문은 저자의 부친인 申之悌의 「梧峯集」과 동시에 간행되었으며 문집의 편차 또한 동일하다.신지제의 증손 申叔範이 李惟樟(1625~1701)에게 신지제와 저자의 家藏草藁를 가져가校讐를 부탁하였는데, 이유장이 일을 마치지 못하고 졸하여 편찬 사업이 중단되었다. 이후 1736년에 저자의 증손 申震龜ㆍ申夏龜 등이 두 사람의 유집을간행하기로 결정하고, 1737년 봄에 신하구가 趙德鄰(1658~1737)에게編次를 부탁하러 갔으나 마침 조덕린은 모함을 받아 待命 중이었으므로 유고를 가지고 그대로 돌아왔다. 1738년에藏待書院에 모여 다시 유집의 간행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겨울에는 신하구가, 1739년 봄에는 신진구가 李光庭(1674~1756)에게 번갈아부탁하여 유집을 각각 校正받고 序文도 받았다. 여기에 誌, 銘, 行狀과 신진구가 지은 後識, 權相一(1679~1759)이 지은 跋文을 각각 붙여 族姪 申致雲에게 繕寫하게 하였고,1740년에 藏待書院에서 木板으로 간행하였다. 본서에는 刊記가 따로 없으나, 함께 간행된 「梧峯集」에 “庚申仲春藏待書院開刊”이라는 刊記가 있는 것으로 볼 때, 같은 시기에 간행되었을 것으로생각된다. 《초간본》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722), 규장각(古3428-367),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811.98/신홍망)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저자의 증손 申震龜ㆍ申夏龜 등이 1740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으로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본 影印底本 중 附錄 上의 제3판은落張이므로 同一本인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장본으로 補充하였다.
序(李光庭 撰), 後識(申震龜 撰), 跋(權相一撰)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집은 원집 3권, 부록 2권 합 2책으로, 卷首에李光庭이 쓴 序文이 있고 目錄은 없다.
권1~2는 詩로, 저자의 詩 156題가 詩體 구분 없이 저작 연도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주로 수창한사람은 趙松年, 李廷機, 沈澂, 申濡 등이다. 만시는 趙亨道, 李民宬, 申楫, 孫胤業, 趙咸英, 申志道, 李弘祚, 鄭侙, 金震遠, 趙遵道, 金應祖, 南海準 등에 대한 것이다. 〈赴召命到漢江聞遞卽回程〉은 1645년 임금의 소명을 받고 도성으로 가던 중, 한강에 이르러 체차되었다는소식을 듣고 돌아가면서 지은 것이다. 〈送子愼覲月城〉은 벗 李廷機가 生父인 紫巖 李民寏이 부윤으로 있던 월성으로찾아뵐 때에 전송하며 지어준 것이다.
권3은 疏(2), 祭文(7)이다. 〈本縣弊瘼疏〉는 義城 縣監을 대신해서 지은 것으로,1616년 災傷敬差官 姜遴이 本稅외에 500여石의 虛稅를 勒定한 이후로 고질이 된 명목에 대해 혁파해줄 것을 호소한 내용이다. 제문은 張顯光, 朴偁, 姊兄 李擧, 사위 柳重河, 李廷機 등에 대한 것이다.
附錄은 上ㆍ下로 되어 있다. 李光庭이 쓴 行狀, 權相一이쓴 墓誌銘, 金應祖ㆍ黃㦿ㆍ申悅道ㆍ李元圭 등이 저자가 全州 判官으로 赴任할 때에 써 준 送序, 柳元之ㆍ李之煜이 쓴 祭文, 金啓光ㆍ南天漢ㆍ柳世哲ㆍ李玄逸ㆍ李惟樟 등이지은 輓詞, 李惟樟이 1693년에 쓴 〈樂善堂銘〉이 있다. 끝에 저자의 曾孫인 申震龜가 1739년에 지은 文集後識가 실려 있다.
권미에 權相一이 1739년에 지은 跋이 있다.
나재집(懶齋集)
형태서지저자
권수제
나재선생문집(懶齋先生文集)
성명
신열도(申悅道)
판심제
나재집(懶齋集)
생년
1589년(선조 22)
간종
목판본(木版本)
몰년
1659년(효종 10)
간행년
간행연도미상(1796년이후간행)
자
진보(晉甫)
권책
9권 4책
호
나재(懶齋)
행자
10행 18자
본관
아주(鵝洲)
규격
19.9×16.9(cm)
특기사항
장현광(張顯光)의문인. 김응조(金應祖), 김세렴(金世濂), 장응일(張應一) 등과교유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古3648-文40-46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속 24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선조
22
1589
기축
萬曆
17
1
12월 21일, 義城鄕校里에서태어나다.
선조
36
1603
계묘
萬曆
31
15
9월, 의성현령으로부임한張顯光에게수학하다.
선조
39
1606
병오
萬曆
34
18
사마시에합격하여성균관에입학하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19
聞韶金氏金浤의딸과혼인하다.
광해군
6
1614
갑인
萬曆
42
26
4월, 모친상을당하다. ○ 6월, 부친상을당하다.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36
가을, 증광문과을과에합격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37
7월, 저작이되다.
인조
4
1626
병인
天啓
6
38
박사, 전적이되다.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39
江華에호종하고, 仲兄申達道와함께斥和를주장하다. ○ 2월, 강원도관찰사崔晛의종사관이되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40
3월, 형조좌랑이되다. ○ 7월, 冬至使宋克訒의書狀官이되어海路로朝京하다.
인조
7
1629
기사
崇禎
2
41
5월, 復命하다. ○ 사행의일로송극인과함께사헌부의탄핵을받아추고되다. ○ 예조, 형조, 호조의좌랑이되다.
권1은 詩(123題)이다. 書狀官으로 赴京할 때 上使 宋克訒과 수창한 시 및 使行 중 각처에서 소회를 읊은 시가 가장 많으며, 張顯光, 冶隱 吉再, 伯ㆍ仲兄등의 시에 차운한 시, 申之悌ㆍ洪瑋 등을 애도한 만시, 金榮祖ㆍ申楫등에게 준 증시 등이 시체 구분 없이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권2는 敎書(2), 賜祭文(2), 疏(4), 啓(9)이다. 강원 감사 朴遾, 황해 감사 李㬅에게 내리는 교서와 漢南君 李必榮, 형조 참판李民寏을 위한 사제문이 있다. 〈戊寅應旨疏〉에서는 結役의 편중과 軍額의 과다로 인한 蔚珍縣의 폐해를 진달하여 도움을 청하면서 ‘多難興邦’을역설하였고, 〈請勿遣信使仍自劾啓〉에서는 강화 사신을 보내지 말 것을 주장한 鄭蘊을 옹호하고 諫官의 소임을다하지 못한 자신의 체직을 청하였다.
권3은 〈朝天時聞見事件啓〉로,서장관이 되어 1628년 7월 11일 辭朝하고 海路로 부경하여 1629년 윤4월 18일 平壤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을 자세히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한것이다.
권4는 明의 都督 毛文龍, 登州軍門, 禮部에 올린 呈文(8)이다.
권5는 장현광, 沈之源, 金世濂, 金光繼, 金應祖등에게 보낸 書(30)이다. 장현광에게는 父母, 妻, 長子의 喪禮에 대한 問目 등6편이 있고, 〈寄諸兒〉는 1636년 남한산성에서척화를 주장하며 아들들에게 비장한 마음을 전한 것이다.
권6은 雜著(2), 序(3), 跋(7), 上樑文(4), 祝文(12)이다. 잡저의 拜門錄은 장현광의 문하에서 40여 년간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기록하였고, 〈懶齋說〉은 齋名을‘懶’로 삼은 연유를 설명한 것이다. 黃㦿, 申弘望, 金光岳을 위한 送序와 仙槎誌(1640년)와 聞韶誌(1656년)의발, 장현광을 배향한 東洛書院 등의 상량문, 1621년 使行중에 폭풍으로 사망한 柳澗, 朴彛叙 등을 위로하는 제문 등이 있다.
권7은 祭文(17), 墓表誌(6)이다. 정구, 장현광, 신지제, 李民宬, 崔晛등을 애도한 제문, 父母의 묘표, 중형 申達道와 종형 申志道의묘지 등이 있다.
권8은 이민성, 伯祖申元福, 신달도, 이민환의 行狀이 있다.
권9는 附錄으로 鄭宗魯가 지은 행장과 金應祖가 지은 묘지가 있다.
구성과내용
본집은 9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권마다 目錄이 있다.
권1은 詩(123題)이다. 書狀官으로 赴京할 때 上使 宋克訒과 수창한 시 및 使行중 각처에서 소회를 읊은 시가 가장 많으며, 張顯光, 冶隱吉再, 伯ㆍ仲兄 등의 시에 차운한 시, 申之悌ㆍ洪瑋 등을애도한 만시, 金榮祖ㆍ申楫 등에게 준 증시 등이 시체 구분 없이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권2는 敎書(2), 賜祭文(2), 疏(4), 啓(9)이다. 강원 감사 朴遾, 황해 감사 李㬅에게 내리는 교서와 漢南君 李必榮, 형조 참판 李民寏을 위한사제문이 있다. 〈戊寅應旨疏〉에서는 結役의 편중과 軍額의 과다로 인한 蔚珍縣의 폐해를 진달하여 도움을청하면서 ‘多難興邦’을 역설하였고, 〈請勿遣信使仍自劾啓〉에서는 강화 사신을 보내지 말 것을 주장한 鄭蘊을 옹호하고 諫官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자신의체직을 청하였다.
권3은 〈朝天時聞見事件啓〉로, 서장관이 되어 1628년 7월 11일辭朝하고 海路로 부경하여 1629년 윤4월 18일 平壤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을 자세히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한 것이다.
권4는 明의 都督 毛文龍, 登州 軍門, 禮部에 올린 呈文(8)이다.
권5는 장현광, 沈之源, 金世濂, 金光繼, 金應祖등에게 보낸 書(30)이다. 장현광에게는 父母, 妻, 長子의 喪禮에 대한 問目 등6편이 있고, 〈寄諸兒〉는 1636년 남한산성에서척화를 주장하며 아들들에게 비장한 마음을 전한 것이다.
권6은 雜著(2), 序(3), 跋(7), 上樑文(4), 祝文(12)이다. 잡저의 拜門錄은 장현광의 문하에서 40여 년간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기록하였고, 〈懶齋說〉은 齋名을 ‘懶’로 삼은 연유를 설명한 것이다.黃㦿, 申弘望, 金光岳을 위한 送序와 仙槎誌(1640년)와 聞韶誌(1656년)의 발, 장현광을 배향한 東洛書院 등의 상량문, 1621년 使行 중에 폭풍으로 사망한 柳澗, 朴彛叙 등을 위로하는 제문 등이있다.
권7은 祭文(17), 墓表誌(6)이다. 정구, 장현광, 신지제, 李民宬, 崔晛등을 애도한 제문, 父母의 묘표, 중형 申達道와 종형 申志道의묘지 등이 있다.
권8은 이민성, 伯祖 申元福, 신달도, 이민환의 行狀이 있다.
권9는 附錄으로 鄭宗魯가 지은 행장과 金應祖가 지은 묘지가 있다..
만오집(晩悟集)
형태서지저자
권수제
만오선생문집(晩悟先生文集)
성명
신달도(申達道)
판심제
만오선생문집(晩悟先生文集)
생년
1576년(선조 9)
간종
활자본(木活字)
몰년
1631년(인조 9)
간행년
1927년간행
자
형보(亨甫)
권책
10권 5책
호
만오(晩悟)
행자
10행 18자
본관
아주(鵝洲)
규격
19.7×17.5(cm)
특기사항
조목(趙穆), 장현광(張顯光)의문인
어미
上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도서번호
古819.5-Si61m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속 18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선조
9
1576
병자
萬曆
4
1
8월 20일, 義城縣 陶巖里에서 태어나다.
선조
13
1580
경진
萬曆
8
5
족형 鼎峰 申弘道에게 「十九史」를 배우다.
선조
24
1591
신묘
萬曆
19
16
長川書院에서 독서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17
4월, 倭亂이 발발하자 부친을 모시고 黃鶴山으로 피란하다. ○ 6월, 왜적이 沙村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淸凉山으로 향하다. ○ 9월, 황학산 城洞으로 돌아오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21
7월, 陶山書院에서 月川 趙穆을 뵙다. ○ 苟全 金中淸과 易東書院에서 禮書를 공부하다.
선조
30
1597
정유
萬曆
25
22
7월, 부친을 모시고 성동에 다시 들어가다. ○ 靑松 涑谷에 가서 旅軒 張顯光을 뵙다.
선조
32
1599
기해
萬曆
27
24
2월, 全州李氏 李鸞壽의 딸과 혼인하다.
선조
34
1601
신축
萬曆
29
26
봄, 仙巖에 書塾을 짓고 ‘無忝’이라 편액하다.
선조
36
1603
계묘
萬曆
31
28
7월, 義城 縣令으로 온 장현광이 방문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29
3월, 西厓 柳成龍을 뵙다. ○ 9월, 月波亭에 올라 朴敦復, 崔喆 등과 重陽會를 가지다. ○ 高敬履가 五賢에서 晦齋 李彦迪을 빼버리고 成渾을 넣자 변무하는 상소를 가지고 상경하다.
선조
38
1605
을사
萬曆
33
30
8월, 향시에 합격하다.
선조
39
1606
병오
萬曆
34
31
2월, 梧里 李元翼을 뵙다. ○ 11월, 조목을 곡하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32
2월, 別試 初試에 장원하다. ○ 3월, 安東 府使 寒岡 鄭逑를 뵙다. ○ 10월, 부친의 명으로 不知巖으로 장현광을 스승의 예로 찾아뵙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34
4월, 장남 申在가 태어나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35
윤3월, 생원 회시에 합격하다. ○ 5월, 유성룡의 手簡書後를 짓다.
광해군
3
1611
신해
萬曆
39
36
1월, 차남 申圭가 태어나다. ○ 7월, 鄭仁弘을 성토하기 위해 상경하는 부친을 모시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37
5월, 蘆谷에서 정구를 뵙다.
광해군
5
1613
계축
萬曆
41
38
4월, 訒齋 崔晛을 뵙다. ○ 9월, 鏡城 判官으로 부임하는 石潭 李潤雨를 전송하다.
광해군
6
1614
갑인
萬曆
42
39
1월, 「鶴峯集」을 교정하다. ○ 4월, 모친상을 당하다. ○ 6월, 부친상을 당하다.
광해군
9
1617
정사
萬曆
45
42
金城山 아래 蔚馬里로 거처를 옮기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43
3월, 黃鶴山에 薇山精舍가 완성되다.
광해군
11
1619
기미
萬曆
47
44
5월, 장현광을 뵙고 ‘理氣分合’을 논하다.
광해군
12
1620
경신
泰昌
1
45
1월, 정구를 곡하다. ○ 3월, 金誠一의 「言行錄」을 勘定하다.
광해군
13
1621
신유
天啓
1
46
陶山書院 尙德祠을 배알하고 月川書堂을 거쳐 梅園 金光繼, 溪巖 金坽을 만나고 돌아오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48
1월, 〈自警箴〉을 짓다. ○ 6월, 明政殿 庭試에 장원하다. ○ 성균관 전적이 되다. ○ 10월, 成歡道 察訪이 되다.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49
李适의 난으로 仁祖가 公州로 幸行하자 경계에서 맞이하다. ○ 5월, 상소하여 驛의 폐단 6가지를 아뢰다. ○ 10월, 全州府 判官이 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50
5월, 관직을 버리고 서울집으로 돌아와 「冠禮儀節」을 찬정하다.
인조
4
1626
병인
天啓
6
51
4월, 倉谷에서 장현광을 뵙다. ○ 윤6월, 형조 정랑이 되다. ○ 9월, 예조 정랑이 되다. ○ 11월, 사간원 정언이 되다. 상소하여 時弊 10조와 修省의 도리를 아뢰다.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52
2월, 강원도 순찰사로 부임하는 동생 申悅道를 전송하다. ○ 5월, 지평이 되다. ○ 7월, 식솔들을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오다. 禾谷에 晩悟齋를 짓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53
1월, 예조 정랑이 되다. ○ 2월, 德陵과 安陵의 奉審使에 차임되다. 봉심을 마치고 會寧에 유배 중인 崔晛을 찾아뵙다. ○ 3월, 咸興 樂民樓, 安邊 駕鶴樓를 유람하다. ○ 복명하여 關北의 실상을 아뢰다. 세자시강원 문학이 되다. ○ 7월, 지평이 되다. 冬至使 書狀官으로 북경에 가는 동생 申悅道를 弘濟院에서 전송하다. ○ 8월, 시강원 필선이 되다. ○ 12월, 사헌부 장령이 되다.
인조
7
1629
기사
崇禎
2
54
6월, 장령이 되다. ○ 8월, 李貴의 교만 방자함을 아뢰다. ○ 10월, 헌납이 되다. ○ 11월, 사직하고 남으로 내려와 蒼石 李埈을 만나다.
인조
8
1630
경오
崇禎
3
55
3월, 장령이 되다. ○ 桐溪 鄭蘊을 변론하고 피혐하다. ○ 5월, 장악원 정이 되다. ○ 9월, 都堂錄에 들다.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56
3월, 장령이 되다. ○ 5월, 군자감 정, 홍문관 수찬이 되다. ○ 阿峴으로 거처를 옮기다. ○ 6월 14일, 阿峴 寓舍에서 졸하다. ○ 7월, 義城 陶巖里에 빈소를 마련하다. ○ 12월, 梧桐山에 장사 지내다.
인조
24
1646
병술
順治
3
―
8월, 도승지로 추증되다.
―
―
1927
정묘
―
―
―
후손 申鴻基 등이 활자로 문집을 인행하다.
기사전거 : 年譜ㆍ行狀(申悅道 撰), 墓碣銘(李玄逸 撰) 등에의함
편찬및간행
저자의 유문은 사후 약 300여 년 동안 간행되지 못하고 초고상태로 전해져 왔다. 동생 申悅道가 1653년에 행장, 1656년에 묘지를 짓고 연보를 편차해 두었고, 증손 申生濂이 李玄逸에게묘갈명을 받은 일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후손들이 저자의 문집을 간행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후손 申鴻基와 申錫基 등이 가장초고를 바탕으로 수집 편차하여 1927년에慶北 義城郡 召文面 道境洞에 있던 申錫基의 塾舍에서 활자로 문집을 인행하였다.《초간본》 이 본은 규장각(古819.5-Si61m),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939), 국사편찬위원회(D3B-113),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장서각(D3B-506),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93년에 14세손 申大源이 초간본을 대본으로 국역한 「晩悟文集」을간행하였다.
본서의 저본은 후손 申鴻基가 1927년에 활자로 인행한 초간본으로규장각장본이다. 본 영인 저본 중 권8의 제4판은 卷次가 ‘七’로, 권10의 제29판은 板次가 ‘三十九’로 오기되어 있으며, 권10의 제50판은 권차가 누락되어 있다.
墓碣銘(李玄逸 撰) 등에의함.
구성과내용
본집은 10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과 발문은 없다. 권수에 총목이 있고 권마다 목록이 실려 있다.
권1은 시(118)이다. 경광을 읊은 시, 차운시, 회고시, 만시 등이 고루 섞여 있다. 〈城洞卽事〉는 임진왜란 때 피란했던黃鶴山 성동에서의 일을 읊은 것이다. 〈敬次月川先生下示韻〉은 1596년도산서원에 갔을 때 趙穆이 心學의 요체를 알려 주며 지어 준 시를 차운한 것으로 배움의 기쁨을 나타낸 것이다. 〈送李從事征西〉는 1618년 명나라에서 구원을 요청하자, 姜弘立의 막하로 출전하는 李民寏을 전송하는 시이다. 〈思歸〉는 全州 判官으로 재직할 때 지은 것으로 객지에서의 쓸쓸한 심정을 읊은 것이다. 〈江都記事十八首〉는 정묘호란때 인조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란 갔을 때 지은 것으로 전쟁의 상황과 전쟁에 대한저자의 생각 등을 읊은 것이다. 만시는 柳成龍, 朴而章, 李民宬, 金奉祖 등에 대한 것이다.
권2~3은 疏(13), 箚(1)이다. 권2에는 〈陳時弊十條疏〉만실려 있는데 1626년에 올린 것으로 어진 이를 등용할 것, 守令을잘 택할 것, 인심을 수습할 것, 풍속을 후히 할 것, 諫諍의 길을 열어 놓을 것, 庶獄을 신중히 할 것, 貢賦를 균등하게 할 것 등 10조목에 대해 의견을 진술한 것이다. 권3은 지평ㆍ문학ㆍ필선ㆍ장령 등을 사직하는 상소와 여러 상황에 대한소회를 아뢴 것 등이다. 〈寇退後陳所懷疏〉는 정묘호란이 끝나고 소회를 아뢴 두 건의 상소로, 서약을 맺은 것은 종묘사직의 수치이고 백성들의 씻기 힘든 울분이니 대소 신료들이 힘을 다하여 自彊策을 세워야한다고 한 것이다. 〈請賑西路饑民疏〉는 1628년에 德陵과安陵을 봉심하고 나서 西路의 굶주린 백성들이 關北으로 유입되는 상황을 아뢰고 구제해 주기를 청한 것이다. 〈伸救司諫尹煌箚〉는화친은 일국의 굴욕이라고 하다가 삭탈관직되어 유배된 윤황을 변론한 것으로 三司에서 연명으로 올린 것이다.
권4~5는 啓(44), 公緘(1), 呈文(2)이다. 계는주화론을 주장한 崔鳴吉을 律文대로 처분할 것, 윤황을 체차하라는 명을 거두어 줄 것, 적을 막지 못한 도원수 張晩을 遠竄할 것, 諸宮家의 魚鹽船稅 등을혁파할 것, 羅萬甲을 원찬하라는 명을 거두어 줄 것, 張維를羅州 牧使에 보임하라는 명을 거두어 줄 것, 豐呈宴에 妓樂을 보내지 말 것, 地主를 무고한 竹山의 軍民들을 처벌할 것등을 아뢴 것이다. 권5의 〈椵島奉使時聞見啓〉는 1627년에 접반사 元鐸과 椵島에 들어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도로에서 보고 들은 것을 날짜별로 적어 아뢴 것이다. 공함은 사헌부의 추고에 대해 자신을 변론한 것이다. 정문은 毛文龍에게보내는 것으로, 적에게 붙어 침학을 행하는 변방의 백성들을 살육할 때 선량한 백성을 보호해 줄 것을청한 것이다.
권6은 書(35)이다. 조목, 장현광, 정경세, 이호민 등과의 편지이다. 1605년에 올린 〈上月川先生〉은 조목에게누누이 가르침을 주고 장려해 주는 것을 고마워하며 道를 궁구하는 데 힘쓰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한 것이다.1623년에 올린 〈上旅軒先生〉은 장현광의 理氣說이 李滉의 定論과 부합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한 것이다. 1629년에 올린 〈上鄭愚伏〉은 世道를 바로하려면 우선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 어진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말한 것이다. 1623년에 올린 〈上李五峯〉은 李好閔에게 기강을 바로 세우고, 光海朝 때의 죄인을 엄히 다스리고, 오랑캐를 막을 계책을 세울 것을청한 것이다. 〈答崔訒齋〉는 최현에게 보낸 것으로 「학봉집」의 교정에 참여해 달라는 청을 승낙한 것이다.〈與黃大進〉은 黃宗海에게 보낸 것으로, 竹林書院에 鄭逑와 金馹孫을 追享할 때는 세대보다道學이 우선하므로 정구를 먼저 모시는 것이 마땅할 것 같지만 장현광에게 여쭈어 처리하라는 내용이다. 〈與洪副學〉은洪瑞鳳에게 보낸 것으로 號牌法의 시행 시기를 잘 살펴서 하라고 한 것이다.
권7은 雜著(4)이다. 〈南山問目〉은 아우 申悅道와 함께 남산에 머무르고 있는 장현광을 찾아가 경전을 논의한 것, 장현광의 저술인 「易學圖說」을 보고 理氣에 대해 논의한 것, 「心經」을강론하며 四端七情論에 대해 논의한 것 등이다. 〈牓諭境內文〉은 전주 판관으로 재직시 풍습을 교화하기위해 붙인 방문으로 呂氏鄕約에 의거하여 미풍을 회복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江都日錄〉은 정묘호란의 전말을기록한 일기로, 호란 초기 조정에서 강화도로 피란 여부를 논의한 것,1월 17일 적군이 義州를 침입했다는 평안 감사 尹暄의 장계 등을 날짜별로 기록하였다.
권8은 序(5), 記(2), 跋(1), 箴(2), 表(1), 箋(5), 哀辭(1), 告辭(2), 祭文(5), 墓誌(1), 行狀(3)이다. 서의 〈送金孝仲越北幕序〉는 함경도로 가는 金榮祖를 전송한것이고, 〈送金孝徵遊淸凉山序〉는 淸凉山으로 유람을 떠나는 金應祖를 배웅하며 지은 것으로, 이황의 자취와 정대한 가르침을 받으라는 내용이다. 〈送許仲開之任蓬萊郡序〉는高城 郡守로 부임하는 許啓를 전송하며 지은 것으로 金剛山이 있는 곳으로 부임하니 신선의 자취를 볼 수 있겠다며 부러워하는 내용이다. 〈懶齋記〉는 동생 申悅道의 당호인 ‘懶齋’에 붙인 것으로 ‘懶’ 字의진실된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成歡郵館重創記〉는 성환도 찰방으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으로 소실된관사를 중창하고 지은 것이다. 〈力學箴〉은 9세에 지은 것으로, 하늘이 준 人性은 聖賢과 다를 것이 없으니 그들의 자취를 따르겠다는 내용이다.〈本朝請由海路入貢表〉는 淸이 만주 지역을 점령하였으니 바닷길로 입공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本朝訓鍊都監進金應河忠烈錄箋〉은훈련도감에서 봉진한 김응하의 「충렬록」을 진언하며 올린 것으로, 醫巫閭를 회복하려다 전사한 김응하의충절을 기린 것이다. 〈金而和哀辭〉는 장현광의 문인이었던 金中淸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다. 〈焚黃告辭〉는 세자시강원 좌필선이 되었을 때 부친에게 좌승지가 증직되고 모친에게 숙부인의 칭호가 내려지자 이를고하는 것이다. 제문은 趙穆, 鄭復享, 申弘道 등에 대한 것이다. 이어 백부 申伈의 묘지, 부친과 족형 申弘道의 행장, 司空精의 실기가 실려 있다.
권9는 동생 申悅道가 편차한 年譜이다. 1656년에지은 간략한 後識가 첨부되어 있다.
권10은 附錄으로 申悅道가 1653년에 지은行狀, 李玄逸이 지은 墓碣銘, 申悅道가 1656년에 지은 墓誌, 金尙琦ㆍ崔晛ㆍ李民寏 등이 지은 祭文 8편, 張顯光ㆍ李好閔ㆍ金堉ㆍ李埈ㆍ尹煌 등이 지은 挽章 52편이다.
끝 부분에 1927년에 申鴻基가 발행자가 되어 慶北 義城郡 召文面 申錫基의 塾舍에서 발행한다는刊記가 붙어 있다.
오봉집(梧峯集)
형태서지저자
권수제
오봉선생문집 원집(梧峯先生文集 原集)
오봉선생별집(梧峯先生別集)
성명
신지제(申之悌)
판심제
오봉집(梧峯集)
오봉별집(梧峯別集)
생년
1562년(명종 17)
간종
목판본(木版本)
목판본(木版本)
몰년
1624년(인조 2)
간행년
1740년 간행
1789년 간행
자
순부(順夫)
권책
원집(原集) 7권, 부록(附錄) 2권 합 4책
별집(別集), 연보(年譜) 합 1책
호
오봉(梧峯), 구로(龜老)
행자
10행 18자
10행 18자
본관
아주(鵝洲)
규격
18.6×15.1(cm)
19.3×15.4(cm)
특기사항
김해(金垓) 등과 교유
어미
上下花紋魚尾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古3648-文40-72
古3648-文40-72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속 12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명종
17
1562
임술
嘉靖
41
1
7월 19일, 義城縣 新禮洞에서 태어나다.
선조
2
1569
기사
隆慶
3
8
12월, 모친 박씨의 상을 당하다.
선조
7
1574
갑술
萬曆
2
13
安東 佳野谷의 惟一齋 金彦璣에게 수학하다.
선조
11
1578
무인
萬曆
6
17
가야곡에서 의성으로 돌아오다. ○ 義城 持寶寺에서 독서하다.
선조
14
1581
신사
萬曆
9
20
伯氏와 의성 氷山寺에서 독서하다.
선조
17
1584
갑신
萬曆
12
23
2월, 咸安趙氏 趙址의 딸과 혼인하다.
선조
21
1588
무자
萬曆
16
27
4월, 스승 김언기를 곡하다.
선조
22
1589
기축
萬曆
17
28
4월, 문과에 합격하다. ○ 5월, 司贍寺 直長이 되다.
선조
24
1591
신묘
萬曆
19
30
2월, 典籍, 監察이 되다. ○ 6월, 禮安 縣監이 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31
5월, 안동 부사를 겸하여 왜적의 공격을 막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33
1월, 예조정랑 겸 예안현감이 되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35
5월, 공조 정랑이 되다. ○ 체찰사의 청으로 예안 현감에 仍任되다.
선조
30
1597
정유
萬曆
25
36
2월, 사간원 정언, 시강원 문학이 되다. ○ 4월, 순찰사 종사관이 되다. ○ 方伯들과 八公山城에서 왜적을 막다. ○ 火旺山城에 가서 郭再祐와 함께 倡義하다.
선조
33
1600
경자
萬曆
28
39
2월, 전라도 도사가 되다. ○ 5월, 아들 申弘望이 태어나다.
선조
34
1601
신축
萬曆
29
40
1월, 예조 좌랑이 되다. ○ 2월, 예조 정랑이 되다. ○ 8월, 全州 判官이 되다.
선조
35
1602
임인
萬曆
30
41
사헌부 지평, 체찰사 종사관, 전라도 암행어사가 되다.
선조
36
1603
계묘
萬曆
31
42
8월, 慶尙道 軍務按覈使가 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43
5월, 시강원문학 겸 춘추관기주관 지제교가 되다. ○ 扈聖 宣武 原從功臣이 되다.
선조
38
1605
을사
萬曆
33
44
5월, 지평이 되다.
선조
39
1606
병오
萬曆
34
45
7월, 통제사 종사관이 되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46
3월, 江界 判官이 되었으나 親病 때문에 부임하지 않다. ○ 4월, 부친상을 당하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48
12월, 공조 정랑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49
3월, 충청도 도사가 되었다가 사직하고 귀향하다.
광해군
5
1613
계축
萬曆
41
52
가을, 昌原 府使가 되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57
7월, 체직되어 龜尾村으로 돌아가 ‘龜老’라 자호하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62
동부승지 지제교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12월, 모친 오씨의 상을 당하다.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63
1월 8일, 졸하다. ○ 3월, 義城縣 羽谷坊 栗谷里에 장사 지내다.
인조
24
1646
병술
順治
3
―
이조 참판에 추증되다.
현종
13
1672
임자
康熙
11
―
12월, 藏待祠에 봉안되다.
영조
16
1740
경신
乾隆
5
―
현손 申震龜 등이 목판으로 原集을 간행하다.
정조
13
1789
기유
乾隆
54
―
6세손 申體仁 등이 목판으로 別集을 간행하다.
기사전거 : 年譜, 行狀(李民寏 撰), 本集內容 등에 의함
편찬및간행
저자의 시문은 「檜山雜詠」, 「龜堂漫錄」 약간 권이 家藏되어있었다. 증손 申叔範이 孤山 李惟樟(1625~1701)에게遺集을 가져가 校讐를 부탁하였는데, 이유장이 일을 마치지 못하고 졸하여 그대로 藏棄되었다. 1736년에 현손 申震龜, 申夏龜 등이 유집을 간행하기로 결정하고, 1737년에 신하구가 玉川 趙德鄰에게 纂次를 부탁하러 갔으나, 마침조덕린은 모함을 받아 待命 중이라 유고를 가지고 그대로 돌아왔다. 1738년에 藏待書院에 모여 다시유집의 간행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1738년 겨울에는 신하구가,1739년에는 신진구가 번갈아 부탁하여 李光庭이 유집을 釐正하고 序文을 써 주었다. 여기에誌, 銘, 行狀과 신진구가 지은 後識, 權相一이 지은 跋文을 붙여, 族姪 申致雲에게 繕寫하게 하였고, 1740년에 藏待書院에서 木板으로 간행하였다.《원집》 이 본은 현재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40-72, 한46-가1753), 규장각(古3428-335),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만송문고(晩松D1-A1883), 장서각(4-6289),국사편찬위원회(中D3B-307) 등에 소장되어있다.
별집의 간행은 원집 간행 직후부터 이미 준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손신진구가 원집에 들어가지 못한 시문을 수집하고 年譜를 만들어 金履萬(1683~1758)에게 訂正을 받아別集 1책을 완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졸하였다. 신진구의아들 申道河가 6세손 申體仁에게 명하여, 신체인이 7대손인 申鼎沃ㆍ申鼎五 등과 함께 신진구가 만들어 두었던 舊本을 바탕으로 하고 새로 수집한 〈辭承旨疏〉 등을추가하여 다시 校勘 繕寫하여 完本을 만들었고, 1789년에 이를 목판으로 간행하였다.《별집》 이 본은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40-48),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만송문고(晩松D1-A1883Aa),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原集序(李光庭 撰), 原集後識(申體仁 撰), 原集跋(權相一撰), 別集跋(金履萬 撰),別集改編後識(申體仁 撰)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집은 원집과 별집을 합본한 5책으로, 원집은 4책이고, 별집은 1책으로되어 있다.
原集은 권두에 1739년에 李光庭이 지은 서문이 있고,권미에 같은 해에 지은 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각 책의 앞에 목록이 있다. 권1~5는 詩, 권6~7은 文, 附錄으로 이루어져 있다.원집의 시는 대체로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권1은 시 36제이다. 禮安 縣監으로 있던 1591년 이후부터 1613년 昌原 府使가 되기 전까지의 시를 수록하였다. 〈病中漫述〉은禮安 縣監으로 재직하던 중에 지은 것으로, 왜란을 겪고 난 후의 백성들의 피폐한 현실을 근심하며 지은것이고, 〈送李寬甫爲禮曹正郞赴洛〉은 1613년에 예조 정랑이되어 서울로 떠나는 李民宬에게 지어 준 시이다.
권2~4는 檜山雜詠이다. 檜山은 昌原의 별칭으로, 저자가 1613년에서 1618년까지府使로 재임했던 곳이다. 회산잡영은 상권(107), 중권(54), 하권(92)으로 나뉘어 있으며, 253제의 시를 수록하였다. 〈院北村述事〉는 咸安趙氏의 세거지인院北에 대한 내력을 읊은 五言古詩로, 시의 말미에 임란 당시 咸陽 郡守로 있던 大笑軒 趙宗道를 만난일, 趙鵬, 趙凝道 등이 왜적을 막다 戰死한 일 등 처가인함안조씨 가문의 내력을 덧붙였다.
권5는 龜堂漫錄 192제이다. 이것은 1618년에 창원 부사에서 체직되어 구미촌으로 돌아와 6년 동안 閒居할 때 지은 시이다. 權昕, 金涌, 李民宖, 柳成春등을 위한 輓詩가 상당수 있으며, 〈輓奴婢〉는 대대로 처가에서 종살이를 한 여종이 저자의 집에 와 86세로 죽을 때까지 주인집을 위해 정성을 다하였으나 자식이 없어 죽어서도 제사할 사람이 없음을 불쌍히 여겨지은 것이다. 〈辛酉七月二十八日逢火盜……〉는 1621년에 도적이 들어 집이 불타고 서적 500여 권이 불탔을 때의정경을 두고 읊은 것이다.
권6은 記 2편, 序 1편이다. 기 중〈遊淸凉山錄〉은 예안 현감으로 있던 1594년 9월에 孤山의琴蘭秀와 함께 청량산을 유람하고 지은 기행문이다. 〈檜山雜詠序〉는 창원 부사로 있던 1613년에서 1618년 동안에 자신이 지은 글들을 묶은 회산잡영의내력을 적은 것이다.
권7은 箚 1편, 敎 3편, 祭文 8편, 墓誌 2편, 書 6편, 拾遺 8편과 부록이다. 〈憲府箚子〉는1605년 44세 때 持平으로서 어명에 의해 풍수에 의한 재앙을 해결하기 위한 방도를 기술한것인데, 당시 憲長인 朴承宗이 時宰를 몰아세웠다 하여 임금에게 올리지 않자, 저자가 이로 인해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敎는 李光岳, 高曦, 吳連에게 내리는 교서를 지은 것이다. 제문은 金誠一, 權宇, 李輔등을 위한 것이다. 묘지는 金春龍, 鄭宜藩을 위한 것이다. 편지 중 〈寄子弘望書〉는 과거를 보기 위해 떠난 아들 신홍망에게 보낸 것인데,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돌아와 부모를 걱정하게 하지 말 것과 下川의 종질형제 집에 전염병이 돌고 있으니 들르지 말고 올 것, 물이 불은 곳을 경솔하게 건너지 말고 잘 모르는 사람과 쉽게 어울리지 말 것 등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습유는 스승 金彦璣를 위한 만사, 趙穆의 시에 차운한 시 등이다. 부록은 상권과 하권으로 되어 있으며, 行狀, 行狀後識, 墓碣銘, 墓誌, 祭文(4), 輓詞(18), 上樑文등과 1739년에 현손 申震龜가 지은 文集後識이다. 행장은李民寏이 지었고, 행장후지는 1738년에 李光庭이 지었으며, 묘갈명은 金應祖가, 묘지는1739년에 이광정이 지었다. 제문은 李民宬, 李民寏, 申悅道, 金宗一 등이 지었고, 만사는李好閔, 張顯光, 金奉祖,全以性, 李恮 등 18인이 저자를 애도하며 지은 것이다. 藏待書院의 상량문과 1672년에 金啓光이 지은 봉안문, 李惟樟이 지은 상향축문이 있다. 부록의 끝에 현손 신진구가 1739년에 지은 文集後識가 실려 있어 원집의 편찬 과정을 알 수 있다.
권미에 1739년에 權相一이 지은 文集跋과 ‘庚申仲春藏待書院開刊’이라는 刊記가 있다.
別集은 目錄, 詩 63제, 疏 1편, 書 5편, 識跋 2편, 祭文 2편이고, 권미에年譜가 있다. 시는 예안 현감으로 있던 1590년대에 지은〈牛祿巖〉부터 졸하던 1624년에 지은 〈題甲子新曆〉까지 원집에 실리지 못한 시들이 年代順으로 실려있다. 〈辭承旨疏〉는 1623년에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가등극하여 저자에게 승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이를 병으로 사양하는 내용으로, 이 상소를 별집에 실음으로써 후학들에게 비록 폐위된 임금이긴 하나 광해군 때 벼슬했던 大節을 지키려 했던 저자의자세를 보여 주려 했다는 6세손 申體仁의 後識가 말미에 실려 있다. 편지중 4편이 雪月堂 金富倫에게 보내는 것으로, 왜적의 동정을전하며 전란 중의 백성을 安集시키고 의병을 모집하는 등의 일을 의논하는 내용이다. 연보는 墓碣石을 세운 1706년의 기사까지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