承文院權知正字가되었으나나아가지않다. ○ 2월, 冰溪書院에머무르고있던密菴李栽와교류하기시작하다. ○ 9월, 英陽縣監으로있던姜樸을방문하고함께內延山을유람하다.
경종
4
1724
갑진
雍正
2
34
1월, 道南書院에서權相一, 이만부등과「近思錄」을講하다. ○ 12월, 司饔院主簿가되었으나나아가지않다.
영조
3
1727
정미
雍正
5
37
江原都事, 병조정랑이되었으나나아가지않다. ○ 12월, 居昌縣監이되다.
영조
4
1728
무신
雍正
6
38
5월, 이인좌의반란때관아를버리고달아난죄목으로軍威에徒配되다.
영조
5
1729
기유
雍正
7
39
5월, 特令으로석방되다.
영조
7
1731
신해
雍正
9
41
1월, 李潝의탄핵을받고투옥되다. ○ 4월, 興陽縣呂島에유배되다. 고을의士人들이가르침을청하며白雲先生ㆍ天放先生이라부르고, 자호를 ‘二恥齋’라하다.
영조
8
1732
임자
雍正
10
42
「素行錄」을편찬하다.
영조
11
1735
을묘
雍正
13
45
2월, 錦山으로量移되다.
영조
12
1736
병진
乾隆
1
46
3월, 忠原(忠州)으로付處되다.
영조
14
1738
무오
乾隆
3
48
9월, 龍安驛으로거처를옮기다. ○ 10월, 6대조申元祿의「悔堂遺稿」를교정하고年譜를편집하다.
영조
15
1739
기미
乾隆
4
49
3월, 모친상을당하다. ○ 4월, 奔喪하다.
영조
16
1740
경신
乾隆
5
50
4월, 부인상을당하다. ○ 부친과아내등친족들의遺狀을작성하다.
영조
18
1742
임술
乾隆
7
52
4월 23일, 配所에서졸하다.
영조
19
1743
계해
乾隆
8
-
윤4월, 五土山璋龜峯에장사지내다.
고종
1
1864
갑자
同治
3
-
7월, 特命으로復官되다.
고종
36
1899
기해
光武
3
-
5대손申相憲이목판으로문집을간행하다.
기사전거 : 年譜(申彦模 撰), 行狀(李敦禹 撰) 등에의함
편찬및간행
저자의 유문은 아들 申邦烈과 申光烈이 家藏 초고를 바탕으로 수습하여, 戰兢齋 金瑞一에게校正과 狀文을 의뢰하였으나 그 대신 저자의 행력에 대한 변호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後敍를 받고, 문집의草稿本을 만들어 두었다.
그 후 1864년에 저자가 복권되자 증손 申冕璧(1803~1868)이肯庵 李敦禹에게 저자의 行狀을 받고, 가장된 초고본을 재정리하여 편집하였다.
1887년에 문집을 營刊하자는 의논이 일어나면서 저자의5대손 申相憲(1842~1911)이 金道和와 함께 교정하고, 1898년에 張錫龍이 지은 저자의 묘갈명 등을 새로이 부록에 추가하여 이듬해인 1899년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때 재정적 한계로 시문의 일부만을編刊하였으며, 저자가 유배지에서 편찬한 「素行錄」은 간행하지 못하였다.《초간본》 이 본은 현재 姜景勳氏,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581), 규장각(古3428-457), 장서각(K4-6411)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 「소행록」은 6대손 申世煥, 申啓煥, 申紀煥 형제가 10권 3책으로騰寫하고, 7대손 申基勳이 부록을 추가하여 1980년에 石版으로간행하였으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古2506-文40-8),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치암C1-A249)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5대손 申相憲이 1899년에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으로 姜景勳 소장본이다. 본 영인저본 중 권2의제9~48판은 판차가 ‘一~四十’으로 誤記되어 있다.
권1은 賦(2), 辭(3), 詩(82題)이다. 賦와 辭는 1724년에 지은 〈聾隱窩辭寄呈申上舍〉를 제외하면 모두유배 중에 지은 것들이다. 이 중 〈陰厓辭〉는 1741년迦葉山을 유람할 때 蘭草寺의 남쪽에서 李耔가 己卯士禍 이후 은거할 때 노닐던 곳을 발견하고 느낀 점을 노래한 글이다. 권2의 전반부까지 수록된 시는 저자가 17세 때 지은 〈丁亥春讀書 ……〉를 시작으로 유배지에서 졸하기 전에지은 〈病中口號古詩一章〉까지 詩體 구분 없이 저작 연도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유배 이후에 지은 시들이많은 수를 차지하며, 벗들과 여러 지역을 유람하며 지은 유산시와 모친과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시가 자주보인다. 그 가운데 〈白雲精舍雜詠〉은 유배 생활의 답답함을 잊기 위하여 자주 방문하던 八影山의 백운정사와주위의 풍경들을 노래한 연작시로서, 칠언절구 20수와 오언절구 14수로 되어 있으며 창작의 배경을 서술하고 있는 長文의 詩序가 있어 1733년당시 저자의 심적 정황을 엿볼 수 있다.
권2는 詩(31), 書(20)이다. 書는 李萬敷, 李栽, 李, 權相一, 李光庭, 柳升鉉, 申弼貞, 李重煥, 鄭之鏶, 河瑞龍에게 보낸 것이다.그중 〈與密菴李丈〉의 別紙는 이재에게 「朱書講錄刊補」와 「近思錄」에 대하여 의문 나는 점을 조목별로 정리하여 질문한 것이다. 〈答密菴李丈〉은 戒懼가 動靜을 겸하는가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권3은 書(8), 雜著(7), 序(3), 記(7), 跋(3), 箴銘(7), 說(7), 辨(1), 上樑文(1)이다. 書는李景翼, 洪重寅, 洪重徵,吳尙遠, 金瑞一, 南耈, 李眞望, 申德涵, 伯兄申彦模에게 보낸 것이다. 雜著에는 戊申亂 당시에 慶尙監營에 보고하기 위하여 지은 〈賊變時報營草〉와 의금부에서심문을 받을 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지은 〈陳情文〉이 포함되어 있다. 〈悔堂先生年譜跋〉은 1748년 6대조 申元祿의 문집을 校正하고 연보를 지은 내력을 기록한글이다. 〈二恥齋銘〉은 저자가 자신에게 나라를 배반하여 忠을 어기고 부모와 떨어져 孝를 훼손하게 된두 가지의 부끄러운 과오가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하여 유배소의 小齋를 ‘二恥齋’로 명명하고 그 경위를 기록한 글이다. 〈游楊尹諸公不著伊川行狀辨〉은程頤의 문하에 여러 뛰어난제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행장이 지어지지 않고 그 대신 후대에 주자에 의해 연보가 만들어진 이유에 대하여 논한 글이다.
권4는 祭文(7), 哀辭(3), 誄文(1), 遺狀(7), 墓碣銘(1)이다.
제문은 安季皐, 申德浩, 伯從叔, 모친 宣城李氏, 부인 順興安氏와 東萊鄭氏에 대한 것이다. 애사는 從兄 申重模, 李猶龍, 李子達을위해 지은 것이다. 뇌문은 李栽를 위하여 지은 것이다. 유장은조부 申文錫, 伯祖 申禹錫과 아버지 형제들의 행장과 두 부인에 대한 行略이다. 묘갈명은 李東美에 대한 것이다.
권5~6은 附錄이다. 권5는 저자의 백형 신언모가 작성한 연보, 아들 申邦烈이 지은 言行拾錄, 金星慶, 許昶 등이 지은 挽詞29편, 許寶, 李萬甲 등이 지은 제문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6은許逷, 許澈 등이 지은 제문 8편, 李敦禹가 1864년에 지은 행장, 張錫龍이1898년에 지은 墓碣銘, 1864년에 복관이 되어 종후손 申錫祜와 이돈우가 지은 告由文 2편, 金瑞一이 1766년에지은 文集後敍, 5대손 申相憲이 1898년에 지은 跋과 종후손申相夏가 지은 文集告成文이 수록되어 있다.
임필대(任必大), 김낙행(金樂行), 이상정(李象靖)의 문인. 이종수(李宗洙), 김종덕(金宗德), 유장원(柳長源), 조술도(趙述道) 등과 교유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석주D1-A1016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속 93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영조
7
1731
신해
雍正
9
1
4월 25일, 義城縣 龜尾里에서 태어나다.
영조
14
1738
무오
乾隆
3
8
3월, 모친상을 당하다.
영조
18
1742
임술
乾隆
7
12
11월, 계모 李氏의 상을 당하다.
영조
26
1750
경오
乾隆
15
20
豐山柳氏 柳後元의 딸과 혼인하다.
영조
30
1754
갑술
乾隆
19
24
順菴 安鼎福을 찾아 뵙고, 「東史綱目」 草本의 十數條를 논하다.
영조
32
1756
병자
乾隆
21
26
5월, 부친상을 당하다. ○ 6월, 부인 풍산유씨의 상을 당하다.
영조
35
1759
기묘
乾隆
24
29
順天張氏 張大龍의 딸과 혼인하다.
영조
37
1761
신사
乾隆
26
31
鄕解에 1등으로 합격하다.
영조
40
1764
갑신
乾隆
29
34
大山 李象靖에게 나아가 수업하다.
영조
50
1774
갑오
乾隆
39
44
任必大를 곡하다.
영조
52
1776
병신
乾隆
41
46
趙述道, 鄭宗魯 등이 내방하다.
정조
5
1781
신축
乾隆
46
51
이상정을 곡하다.
정조
6
1782
임인
乾隆
47
52
구미리 錦山에 主敬齋, 集義齋를 짓고 전 영역을 錦淵精舍라고 하다. 이후 ‘晦屛’으로 자호하다.
정조
7
1783
계묘
乾隆
48
53
大山書堂에 모여 이상정의 遺集을 교정하다.
정조
8
1784
갑진
乾隆
49
54
4월, 부인 순천장씨의 상을 당하다.
정조
10
1786
병오
乾隆
51
56
의성 氷溪書院의 洞主가 되다. ○ 구미 東洛書院에서 「太極問辨」을 교정하다.
정조
12
1788
무신
乾隆
53
58
심한 眼疾을 앓다.
정조
13
1789
기유
乾隆
54
59
6대조 申之悌의 「梧峯集」 別集을 간행하다.
정조
22
1798
무오
嘉慶
3
68
8월, 큰아들 申鼎辰을 곡하다.
정조
23
1799
기미
嘉慶
4
69
2월, 계모 영양남씨의 상을 당하다.
~
-
~
~
~
-
~
의성 현감 金相任이 經術과 文章으로 천거하다.
순조
8
1808
무진
嘉慶
13
78
경상도 관찰사 尹光顔이 천거하다.
순조
9
1809
기사
嘉慶
14
79
경상도 관찰사 鄭東觀이 천거하다.
순조
12
1812
임신
嘉慶
17
82
4월 3일, 금연정사에서 졸하다. ○ 6월, 涑洞에 장사 지내다.
순조
34
1834
갑오
道光
14
―
4월, 아들 申瀷辰의 부탁으로 李秉遠이 행장을 짓다.
기사전거 : 行狀(李秉遠 撰), 遺事(申鼎周 撰, 陶窩集卷4), 本集內容 등에 의함
편찬및간행
저자는 梧峯 申之悌와 孤松 申弘望의 후손으로 벼슬은 하지 않은 채 산림에서 李象靖, 金樂行의문인으로 활동하였는데 文才와 學德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자의 저서로는 시문 외에 聖賢들의 ‘敬’에 대한 요지를 편차한 「崇敬錄」 2책이 남아 있다.
저자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族子인 申鼎周(1764~1827)가 지은 遺事(申鼎周 著, 陶窩集 卷4), 그리고이를 가지고 저자의 아들 申瀷辰(1779~1834)이 所菴 李秉遠(1774~1840)에게부탁하여 1834년에 받은 행장 뿐이지만, 이를 통해 볼때 이들에 의해 저자의 유적과 유문이 수습 정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의 편찬 간행에 대해서는序跋文이나 다른 기록이 없어 문집의 정확한 간행 연도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본집의 목록을 보면 권1~11까지의 내용만 있고 권12의 부록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 권12 전체(9판)가 활자로 되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행장이 작성된 1834년이전에 판각이 이루어졌고, 뒤에 활자로 보판하면서 행장을 추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목판 초간본의 현전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이후 문집 사이사이에 활자를 補板하여 간행한 본이 있는데, 보판된 부분은 목록의 제5~6, 25~26판, 권1의제9~14, 17~18판, 권2의 제1~2, 5~8, 25~26판,권3의 제1~2, 25~26, 39~40, 47~50판, 권4의 제2~3, 12~13,24~25판, 권5의 제1~2, 9~10, 13~14, 27~30, 35~38, 41~42판, 권6의 제3~4, 11~12, 15~16, 30~31판, 권7의 제35~36판, 권8의 제25~26판, 권9의 제11~12, 17~18판, 권10의 제1~2, 9~10,23~24, 29~30판, 권11의 제7~8, 21, 23, 37~38, 41~42판, 권12의 제1~9판 등으로, 다시인쇄하면서 마모가 심한 판목 대신에 활자를 이용 보판하여 후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쇄가 이루어진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본집은 저자의 아들 신익진이 유고를 수집 정리하여 목판으로 간행한것을 바탕으로 1834년 이후 부록과 원집의 일부를 활자로 보판하여 인행한 후쇄본이다. 《후쇄본》 이 본은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석주D1-A1016),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898), 장서각(K4-6689), 성균관대학교 존경각(D3B-2688)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밖에 저자의 저서인 「崇敬錄」 4권 2책을후손들이 1974년에 石板으로 간행하였는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장서각,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간행 경위를 알 수 없는 목판본의 후쇄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본영인저본 중 권1의 제18판과 권6의 제3판은 卷次가 ‘三’으로 오기되어 있고, 권5의제2판은 板次가 누락되어 있다. 그리고 권3의 제17ㆍ38ㆍ52판, 권5의 제1판, 권7의 제11판, 권9의 제33판은 상태가 불량하여 동일본인 국립중앙도서관장본으로 대체하였다.
行狀(李秉遠 撰), 西山集(金興洛), 本集內容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집은 12권 6책으로되어 있다. 권수에 서문은 없고 목록이 있다.
권1은 詩(186題)이다. 시는 詩體 구분 없이 저작 연도별로 편차되어 있으며, 1750년부터 1811년까지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장문의 幷說, 幷序, 後識등을 붙여 시의 이해를 돕고 있으며, 姊兄 趙進道의 형제들과 종유하며 수창한 시 및 장편시가 여러 편 있다. 백종형 申重仁, 任必大, 洪虎吉등에 대한 41제의 만시가 포함되어 있는데 백종형 신중인에 대해서는11수의 연작으로 지어 깊은 슬픔을 표현하였다. 이 가운데 〈送金氏妹述懷六十韻〉은 金百能의처가 된 누이동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읊은 것이고, 〈敬松齋〉는 부친이 龜湖에 지은 小齋에 대해 읊은것이고, 〈龜窩詩〉는 丹溪에 있는 재종질 申鼎梅의 小屋에 勸戒의 말을 붙이고 3수를 읊은 것이다. 〈錦山六詠〉,〈錦淵十詠〉, 〈錦里四詠〉, 〈平錦二詠〉, 〈晦屛二詠〉 등은 금산에 지은 금연정사와 주변의 풍광을 읊은 것이다. 〈病中聞利林形勝喜甚略述〉부터〈總述〉까지 6수는 1788년에 안질로 고생할 때, 영남 제일의 洞天 ‘安義三洞’의 절경을 전해 듣고 지은 것이다.
권2~5는 書(161)이다. 전체 분량 중 3분의 1 이상을차지하며, 대상 인물별로 묶어 연도순으로 편차하였는데 대체로 師友, 門人, 親戚 순으로 되어 있다. 권2는스승 李象靖, 金樂行, 任必大 및 蔡濟恭, 李秉模, 李弘源, 柳灃, 李宜泰, 李命天, 柳聖霖, 申光翼등에게 쓴 것이다. 이 가운데 이상정에게 1764년에 보낸것은 「朱書講錄刊補」의 교정에 참여하는 선생을 따라 가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쓴 것이고, 1781년에쓴 것은 ‘敬兼中和圖’에 대한 의혹을 질정한 것이다. 신광익에게는 별지로 ‘祧主旁題改不改’, ‘庶子所生母題主稱謂’ 등 喪禮, 祭禮의 禮疑에 답한 것들이다. 권3은 權正鄰, 종장申龍起, 종형 申觀模, 姜必勉, 趙宜陽, 趙運道, 李宗洙, 金宗德ㆍ金宗敬 형제 등에게 쓴 것이다. 이 가운데 이종수에게 1786년에 쓴 편지는 「주서강록간보」의 刊役이 마무리되었지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여 追改할 곳이 있음을 알린것이다. 김종덕ㆍ김종경 형제에게 쓴 편지가 많은 편으로 이들과의 학문적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가 있는데‘致曲’, 「心經講錄刊補」를 논한 장문의 편지 등이 있다. 권4는 柳長源, 李師靖, 黃啓熙, 趙進道, 趙述道, 李德中, 金道行, 金宗道, 金崇默, 柳泰春, 鄭履寅, 李萬運, 任輔, 李經祿, 金始全, 任輐, 都尙郁, 姜世文, 李㙖, 金㙆, 李埦 등에게 보낸 것이다. 이 가운데 1781년 이덕중에게 쓴 편지는 별지를 붙여 文章은 道義를준칙으로 삼아 실용적이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이우에게는 1806년에莊獻世子의 변무를 위한 상소를 올리는 데 앞장섰다가 완도의 古今島로 유배된 것을 위로하며 쓴 것이 있다. 이완에게는 1783년에 이상정의 문집에 대한 교정사항을 적어 보낸 것이 있다. 권5는 金宗發, 安鼎德, 申光孝, 申宅明, 金勉儒, 柳象經, 趙友愿, 金宗駿, 權得仁, 張泰殷, 金良鍵, 鄭台攝, 李東發, 종인 申冕朝ㆍ申冕周 형제,宋國秉, 趙星復, 朴在淳, 金就礪, 趙居信ㆍ趙居讓 형제, 李坰ㆍ李垧 형제, 金宗夏, 재종숙 申道一, 족제 申立仁, 재종질申鼎梅, 종질 申鼎沃ㆍ申鼎五ㆍ申鼎凝, 족질 申鼎周, 아들 申鼎辰과 申鼎輝 등에게 쓴 것이다. 이 가운데 1808년 정태섭에게 쓴 것은 鄭萬陽과 鄭葵陽 형제의 「塤篪兩先生語錄」을 刪校한 뒤에 보낸 것이다. 족질 신정주에게는 별지로 喪服 등에 대해 답한 것이 있다. 〈寄辰兒別紙〉는 1775년 아들 신정진이 지은 잡저를 읽고 그에 대한 의견을 일일이 제시한 것이다.
권6은 雜著(10)이다. 이 가운데 〈宗孫祖應字詞〉는 종손에게 자를 ‘幼承’이라 지어 주고 그 의미를 서술한 것이고, 〈牕銘集句圖〉는 1785년 錦淵精舍에서 지낼 때 詩에서 集句하는방식대로 前賢들의 箴贊名言에서 뽑은 16구를 도식하고 설명한 것이고,〈天學宗旨圖辨〉은 安鼎福, 李獻慶, 趙述道 3인의 천주교 辨斥 글을 읽고 그 글에 실려 있던 ‘천학종지도’가 私慾을 내세웠으므로 천주학이 이단임을 증명하고, 세 사람의 설을 보완하기 위해 1791년에 쓴 것이고, 〈中何嘗不在裏面辨〉은 南軒 張栻이 주장한 ‘已發之後 中何嘗不在裏面’설을 펴는 선배들의 행태를 지적하고 朱子의정론을 들어 후학을 경계한 것이고, 〈父卒三年內爲母服說〉은 「儀禮」와 「通典」에 근거해 해석한 선유들의주장을 싣고 뒤에 저자의 견해를 덧붙여 변설한 것이다. 〈蔡覺軒動箴說疑義〉는 중국의 蔡模가 해석한 程子의四勿箴 중 ‘動箴’에 대한 의문점을 적은 것이다. 〈書贈柳學士士鉉〉은 柳台佐의 과거 급제를 축하하며지어 준 4언시 형식의 箴言이다. 〈留揭氷溪院壁文〉은 빙계서원에있을 때 洞神壇에서 해마다 벌이는 巫樂의 행위를 금한다는 내용을 써서 부친 것이다. 〈讀書謬錄〉은 독서하는중에 「大學」, 「家禮」, 「心經」, 「孟子」 등 경서 및 전현들의 글에서 발견한 오류를 지적하고 저자의 의견을 첨부한 것이다.
권7은 序(9), 記(12)이다. 서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의 일을 기록한 由由軒南礏의 「亂離日記」, 종백형 申重仁의 「龜洞逸稿」, 현감徐命敏이 藏待書院에서 講會를 연 후 지은 詩와 論에 대한 後序, 재종질 申鼎梅의 〈龜園贈別帖〉과 「龜窩遺稿」, 孫有慶의 字 ‘積汝’에 대한 것, 편저인 「崇敬錄」 등에 대한 것이다. 기는 三守軒, 樂素齋, 龍岡草廬, 李師靖의 新樂堂, 李述靖의 四友堂,洪天休의 金鎞軒, 錦山의 形勝을 기록한 것, 금산에 세운 錦淵精舍, 棣華堂, 白石亭, 申光翼의 嵩南精舍, 三一齋 重修 등에 대한 것이다.
권8은 識跋(12), 箴銘(4), 上樑文(4), 哀誄(6), 祝文(2)이다. 지발은 達山 張補之의 實蹟에 대한 것, 李輔의 「南溪實紀」, 「杏堂稿」,「戊申日錄」, 6대조 申之悌의 「梧峯集」 別集, 선조申之孝의 「鷹巖血書拾錄」, 洪彦博의 「陽坡實紀」, 「龜巖實紀」등에 대한 것이다. 상량문은 先廟의 移建, 錦淵精舍, 梧溪里社 廟宇, 西山精舍에 대한 것이다. 애뢰는 李學靖, 趙錫愚, 崔恒鎭, 都吉模, 姜必勉, 金宗燮에대한 것이다. 축문은 梧溪里社 奉安文과 常享祝文, 早谷의世德祠 奉安文과 상향축문이다.
권9는 祭文(21), 墓表(2)이다. 제문은 종백형 신중인, 鄭儁, 외왕모 務安朴氏, 김낙행, 임필대, 장인 柳後元, 이상정, 종질申鼎沃, 김종경, 황계희,김숭묵, 조진도, 申光翼, 柳聖霖, 李埦, 李命天, 이종수, 김종덕 등을 애도한 것이다. 묘표는 종백형 신중인, 종질 申鼎沃에 대한 것이다.
권10은 墓誌(12), 墓碣銘(3), 碑文(2)이다. 묘지는李軫, 尹重邦, 李夢靖, 金謹信, 부친 申道萬, 모친 義城金氏, 조부申賁龜, 증조부 申叔範, 종조 申震龜, 백부 申道三, 중부 申道九, 아들申鼎辰에 대한 것이고, 묘갈명은 申宅誠, 金蕃, 張宇遠에 대한 것이다. 비문은 金燁ㆍ金煜ㆍ金燦 三烈士를 기린 제단비, 李景曾에 대한 묘비이다.
권11은 行狀(9), 傳(1)이다. 행장은 朴文淹, 金震頀, 權應生, 權㶵, 鄭葵陽, 孫守曾, 李臨厚, 이상정, 申祐에 대한 것이다. 전은 麗末鮮初 때 사람 白巖 金齊海에 대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