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1344년(고려 충혜왕 5년) 4월 29일 신우(申祐)를 2군 6위의 두 번째군단인 신호위(神虎衛)의 향촌사회 부유한 계층 출신 보군인보승(保勝) 직무대리 호군(攝護軍)에 임명한 내용이다.
왕지(王旨)는 고려 때부터 조선 태종 때까지 임금이 내리는 분부를 기록한것이다. 그 중 현재 보물로 지정된 6개의 왕지는 모두 조선조초기 것들이다.
따라서 이 왕지는 고려시대것이라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조선 세종 때부터는 이런 문서를 교지(敎旨), 조선조 말 대한제국 시기에는 칙명(勅命)이라 했다.
신우(申祐)는 아주신씨(鵝洲申氏) 의성 입향조로 부인은 약목유씨(若木柳氏)다. 고려 충혜왕 때 무과에 급제해 봉상(奉常), 사헌부 장령(掌令), 호군(護軍)에 이르렀다.
정몽주에게 영향을 받아고려 멸망 후 조카사위인 길재(吉再)와 같이 고향에 은거했고, 조선 태조가 형조판서에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의 행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삼강행실록’에실려 있고, ‘퇴재선생실기(退齋先生實紀)’ 문집 2권이 있으며, 묘소는의성군 구천면 용사리에 있고, 의성군 단밀면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배향돼 있다.
단밀면 주선리에 있는 유허비각에는 3개의 비가 있으며, 정경세가 묘표를, 김응조가 봉안문을, 채제공이 유허비명을 지었다.
1344년 고려 말 임명문서는 신우에게 임금이 발급한 자료로, 경북의성의 아주 신씨 가문에 전해지는 유일한 왕지 실물 자료다. 그러나 조선 전기 발급한 왕지와 양식이다소 달라 진위 논란도 있다. 가와니시는 문서에 찍혀 있는 인장이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 시기에 창안한파스파 문자로 새겨진 ‘부마고려국왕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조선시대에는 파스파 문자를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파스파 문자 위조가 힘들다는 점을 들어 이 문서가 진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內容文에 있어品階未詳(품계미상)인 辭令將(사령장)에 不過(불과) 하다 할지 모르나 이는 우리 鵝洲申氏로서는 無上의 至寶(지보)로운 文蹟(문적)이다.
왜나하면 우리 國內에 私家로써이같은 高麗朝의 自己祖上의 文蹟을 몇집이나 가지고 그 기나긴 星霜(성상) 國家的으로도 수많은 兵燹(병선)과災難(재난) 蓮續(연속) 되어온 歷史(역사)속에서도오직 이를 孝奉(효봉) 하여온 歷代宗孫(역대종손)의 崇祖(숭조)의 誠(성)이 至極(지극) 하였고 宗孫 으로서의 責任(책임)을 다한데서 이루어진 結果(결과)이기에말이다.
이것이야 정말 우리 祖上들의크나큰 多幸임은 勿論(물론) 裔孫(예손)들의 자랑이요 이를 지켜온 宗家의 歷代父祖(역대부조)가 고맙기만하다. 基勳(기훈)은 이 王旨의 實物大(실물대)로 臺紙(대지)는 縱上橫左(종상횡좌) 一寸式(일촌식) 縮少(축소) 影印(영인)하여 이를 一族들이 一枚式(일매식) 保存(보존) 또는 揭額(게액)으로 하는것이 後孫(후손) 들로서는 爲先(위선)의誠(성)과 榮光(영광)의 길을 열어주는 方法(방법)이될것이요 또 마음이기도 하다.
前.大田市長.農經出版社 代表 : 申基 勳
*이 王旨(왕지)는 그동안宗孫(종손)인 집안의 家門(가문)에서 그냥 보관하며 내려 오다가 82년에 大田 農經出版社(대전 농경출판사)에서 확인 하며 깨끗하게 정리를하여 표구를 하였다.
그리고 2000년초에 KBS진품명품 다시 한번 出品(출품)하여 高麗(고려)때의 귀중한 珍品(진품)으로재조명 되었다.
위글에서 표현바와 같이鵝洲申氏 家門(아주신씨 가문)의 영광 이며 至寶(지보)로운 文蹟(문적) 으로 우리 집안의 家寶(가보)로소중히 보관하여 내려 오고 있으며, 그리고 이왕지는 현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왕지 중에서 제일 오래된년도로 추정하고 있다.
성명 : 신우(申祐) 본관 : 아주(鵝洲) 호 : 퇴재(退齋)
출생지 : 개경분묘지 : 사포(蛇浦)리 태향(兌向) 언덕
내관직 : 장령(掌令) 외관직 : 전라도 안렴사
1. 생애
신우(申祐)는 고려조에 벼슬하여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일찍이 전라도 안렴사가 되었는데 고려조의 고사(故事)에 때때로 근시(近侍)의 관원을 여러 도로 내려 보내어 산천에 제사 지내고 백성들의 풍속을 탐문하고 수령들의 근만(勤慢)을 살펴 출척(黜陟)하였다. 그것을 이름하여 안렴사라고 한다.
신우는 혼탁한 세상에 처하여서도능히 깨끗함으로 몸가짐을 하였으며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효성을 다하였다. 아버지인 판도판서(版圖判書) 휘 윤유(允濡)가 졸하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묘앞에서 호곡(號哭)하였는데,대나무 두 그루가 묘 앞에 자라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효성에 감응한 소치라고들하였는데 조정에 알려져 정려문(旌閭門)을 받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 마을의 이름을 효자리라고 하고, 그 앞을 흐르는 냇물을효수천(孝水川)이라 하였다.이에 대한 사실은 국승(國乘) 및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2. 가족
조 : 신윤유(申允濡), 모 : 성주 이씨(星州 李氏)
신우는 약목 유씨(若木柳氏)와의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름이 광부(光富)와광귀(光貴)이다. 광부는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름이 사렴(士廉)과 사빈(士贇)이며, 사렴은 언양 현감(彦陽縣監)을지냈다. 그의 현손인 원록(元祿)이 뒤에 또 효행으로 공의 아름다운 행실을 뒤이어 정려되었다.
아주신씨 문중에 이름이있는 인물은 문학군(文學君) 신달도와 그의 형인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 신적도(申適道), 동생인 예조 좌랑 신열도(申悅道)가있다. 이른바 족형인 승지는 이름이 신지제(申之悌)로, 문명이 있어 대과에 급제해 사류들이 추중하는 바가 되었는데 불행하게도수를 누리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은 이름이 신홍망(申弘望)이다. 신달도의 아들은 점(?)과구(坵)인데, 모두준수하고 온아하다.
아버지 신윤유(申允濡)는 첫 이름이 원유(元濡)였다. 고려 관직의 종2품인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 判圖判書) 겸 군기시사(軍器寺事)인데 고려조가 막을 내리니 낙담하여 단밀로 왔다. 공의 충성된 절의를 세상 사람들은 당개(唐介)에 버금간다 하였다. 초하루 보름마다 산 마루에 올라 개경을 마라보고깊은 한을 풀었기에 산 이름도 망경산(望京山)이라 하였는데중세에 만경산(萬京山)으로 변경되었다. 지금의 구천면 청산리에 공의 묘소가 있는데 실전하였고 용사리에 단을 모아 세사로 봉향하고 있다. 공은 아주 신씨의 의성 입향조이다.
종형인 신적도(申適道, 1574∼1663)는 자는 사립(士立), 호는 호계(虎溪)이다. 신적도는 신흘의 아들이며,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향시에 합격였으나, 벼슬은 찰방에 그쳤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뒤 학산(鶴山) 미곡(微谷)에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두문불출하였다. 저서에는『호계집(虎溪集)』이 있다. 이책은 후손 신상하(申相夏)·신돈식(申敦植) 등이 간행하였다. 서(書)는 정구·장현광·정경세(鄭經世)·이경석(李景奭) 등 당대 명유에게 준 것이 많다.
종제 신열도(1589∼1659)는 자는 진보(晉甫), 호는 나재(懶齋). 수(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증호조참의 원록(元綠)이고,아버지는 흘(?)이며, 어머니는 전력부위(展力副尉) 박륜(朴倫)의 딸이다. 교리 달도(達道)의 동생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총명하여 10여 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606년(선조 3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예조정랑·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1638년 울진현감을 지내고, 1647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되어 민생에 대하여 상소하였고 뒤에 능주목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선사지(仙?志)』와 『문소지(聞韶志)』가 있다.
3. 학문
향사 : 속수서원. 검암서원, 학파 : 퇴계 학파
스승, 배움 이야기 등
신우는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에게 대의(大義)를 들었으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사위인 길재(吉再)와 함께 고향에 돌아와 상주 만경산에 은거하였다. 태조 이성계와 친구간으로서 조선이 개국된 뒤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4. 생애
『퇴재실기』는 신돈식(申敦植) 등이 편찬하고, 1908년에간행된 2권 1책의 활자본이다.
권1에는 부록으로 묘표(墓表)·수갈고유문(?碣告由文)·속수서원봉안문(?水書院奉安文)·상향축문(常享祝文)·속원봉안시고묘문(?院奉安時告墓文)·고유손우재선생문(告由孫愚齋先生文)·상주사림통문(尙州士林通文)·속원경현사상량문(?院景賢祠上樑文)·경현사기(景賢祠記)·제쌍죽도(題雙竹圖)·사적(事蹟)·여묘도(廬墓圖)·정려도(旌閭圖)·밀성지(密城誌) 등을 수록하였다. 권2에 부후손조두문적(附後孫俎頭文蹟)17편을 수록하였다. 책머리에는 1908년에김도화(金道和)와 17세손신돈식이 쓴 서문과 신씨세계(申氏世系)가 있고, 책 끝에 유도헌(柳道獻)의발문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