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義城 鵝州申氏家의 고문서를 가지고 이 가문의 가계 이력과 향촌 재지 기반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의성의 아주신씨가는 조선중기 이래 명망있는 가문으로 누백년 동안 의성읍과 봉양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이 중에 특히 邑派라 불리는 內府令公派와 龜派라 불리는 鳳州公派는 의성읍과 봉양면 귀미리를 중심으로 세거하면서 많은 걸출한 인물과 전적을 남겼다.
영남 재지사족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가문의 고문서 자료들을 토대로 그 가계 이력과 사회․경제적 기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의성의 아주신씨 읍파는 16세기 초 申元祿으로부터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원록은 周世鵬과 退溪, 南冥에게 배워서 학문적 기반을 쌓았다. 이를 바탕으로 長川書院을 설립하여 학문 진흥과 향약실천에 힘썼다. 이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이후 이 가계의 후손들이 寒岡 鄭逑와 旅軒 張顯光 등 영남의 巨儒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향촌사회의 학문 진흥과 사회 구제 등 오직 성리학적 질서에 따른 전통유지에 힘쓰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의성을 중심으로 유명한 양반 사족가문으로서 사회적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봉주공파는 의성 봉양면의 귀미리를 중심으로 대대로 살아 왔다. 귀미의 입향조 申之悌는 일찍이 惟一齋 金彦機와 鶴峯 金誠一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1589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중앙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 과정에 중앙의 여러 영남 출신 관직자들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 弘望은 16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중앙관직과 풍기군수, 울산부사 등 지방 수령을 역임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의 호구단자․준호구 등에 나타나는 노비들이 의성을 중심으로 하는 인근 지역과 멀리는 울산, 창원 등지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었다.
이 가계의 학문적 연원 또한 김성일․유성룡․장현광 등에게 배워 한고장을 중심으로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위치에 있었다.
혼인은 두 가계 모두 의성과 안동권을 중심으로 한 인근 고을의 사족들과 인척을 맺어 그들의 사회․신분적 기반을 더욱 굳건히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학문적 바탕에 더하여 경제적으로도 부족하지 않는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 가계의 경제 규모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제한적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일부 고문서에 나타난 내용 등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항들을 고려해 볼 때 이 가계의 경제 규모뿐만 아니라 한 고장에서 차지하는 향촌 재지적 기반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