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인조12월 청은 조선을 침입하여 여일 만에 서울 근교까지 이르렀다 급하게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12월 19일 교서를 내려 의병을 독려한다 이를 계기로 각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지만 병자호란시 의병 활동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청의 침입로에 위치하였던 관서 지역의 의병이 적과 맞서 싸웠지만 다른 지역 의병은 대규모 전투를 치르지도 못한 채 인조의 출성과 항복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더욱이 호남의병을 제외하고는 그 조직이나 구성이 명확하지 않아 병자호란 시 의병에 대한 연구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1)
그러한 가운데서도 단편적이나마 각 지역의 의병장에 관한 기록들을 통해 의병 활동에 대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으며 호남의병의 활동은 호남병자창의록, 은봉창의록 등을 통해 대체를 파악할 수 있다.2)
또한 각 의병장이 남긴 일기나 일지 등을 통해 당시 의병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전라도 화순에서 거의한 淸江 조수성과 경상도 의성에서 거의한 虎溪 신적도는 의병 활동과 관련하여 비교적 상세한 일지를 남겨 병자호란 시 의병을 조금 더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3)
이 글에서는 영남과 호남 출신 두 의병장의 활동 일지를 중심으로 병자호란 시 의병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4)
먼저 신적도와 조수성이 의병을 일으키는 과정과 의병진의 진격로를 살펴보고 거의 과정에서 차이점도 드러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두 의병진의 구성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신적도와 조수성 두 의병장이 처한 지역적 분위기를 찾아보려 한다 이를 통하여 신적도 의병진과 조수성 의병진이 구성 되고 활동하기까지 어떠한 요소들이 작용하였는가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렇다고 이 글의 전개가 오로지 영남과 호남의병을 비교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굳이 지역적 차이를 밝혀내기에는 한계도 있다. 청의 침입이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결국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대치하는 국면이 조성되었기에 호남과 영남은 적의 침입에 직접 노출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두 지역의 의병이 거의 과정이나 활동에서 차이가 있더라도 큰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차라리 조직과 인적 구성에서 보면 영남과 호남안에서 두 의병진과 다른 의병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역을 염두에 두고 두 의병진을 살펴보려는 것은 비교적 구체적인 창의일지를 남기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나아가 병자호란이 끝난 이후 인조가 영남은 의리 있는 자가 많아 의병을 일으켰으나 호남은 그러지 못했으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고 하여 호남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한 상황이 전개된 연유에 대하여 두 의병진을 비교함으로써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한계가 있지만 이 글을 통해 창의일지를 중심으로 두 의병진의 구성과 활동 면모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드려다 볼 수 있고 나아가서는 호남의병 가운데 조수성 의병진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조선 후기 호남 지역 재야사림의 존재 형태에 대한 이해의 또 다른 계기로 삼고자 한다.
* 남부대학교 교수
1) 병자호란 당시 전국 의병과 호남의병에 대하는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ㆍ이장희 "정묘.병자호란시 의병 연구", "국사관논총" 30(1991).
ㆍ류창규 "병자호란과 호남의병", "남도문화연구" 21(2011).
2) 병자호란 당시 호남의병에 관한 기록은 후대에 호남병자창의록 으로 편찬되었다 그렇지만 보성을 중심으로 거의한 안방준의 의병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은봉창의록"으로 별도로 남아 있다 "호남병자창의록"의 간행과 의의에 대하여는 권수용 "병자창의록연구", "지방사와 지방문화" 14-2(2011)를 참고할 수 있다 한편 병자호란 시 호남 의병에 참여한 인물은 "호남절의록"에도 들어 있다 하지만 각 책과 각 판본에 따라 수록된 인물에 차이가 있으며 인원수가 다르다 이러한 점은 자료 수집과 선정 기준의 차이에서 빚어진 것이며 편찬을 주도하였던 이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이와 관련하여 김동수 "호남절의록의 사료가치검토(1)", "역사학연구" 44(2011), 81-84쪽을 참고할 수 있다.
3) 이 글에서는 신적도의 "호계선생유집 "가운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부분을 번역한 신해진의 "역주 창의록"을 조수성에 관한 내용은 "청강집", "병자거의일기" 와 "호남병자창의록" 두 번째 간행본(정조 2년 1798)을 주로 인용하였다. 신적도의 병자호란 시"倡義日錄" 은 자신이 직접 기록한 것이며 조수성의 "丙子擧義日記"는 그의 아들 曺煜이 함께 종군하면서 기록한 것이다 편의상 두 기록을 창의 일기나 창의일지로 표기해둔다 이 외에도 병자호란 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던 이들이 남긴 창의록이 남아 있으나 일지 형식의 창의일기로는 위의 두 의병장이 남긴 것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4) 신적도와 조수성은 병자호란 시 영남과 호남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자리매김 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창의일지는 다른 의병장이 남긴 기록에 비해 구체적인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소모사 정홍명 아래 활동하였던 황위가 남긴 일지("당촌집"3 "잡저" 창의일기) 나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만승이 남긴 병자창의록("괴당선생문집"2 "부록") 등 여러 기록이 있지만 거의 사실에 대한 개략적 내용이나 과장된 내용을 담고 있다 구체적인 비교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거의 사실과 일정 등을 당시 기록과 대조하여 보면 신적도와 조수성의 일지가 비교적 객관성을 띠고 있다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