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가치의 구현을 추구하는 순문학의 영역에서 옛 문인들의 시는 자신 의 사유를 전달하고 다른 문인들과 정서적인유대와 결속을 강화할 수 있는 문학적 수단이었다.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문운(文運)이 성대한 시기였다고 일컬어 지는 조선 중기에는 전란 속에서도뛰어난 한시 작가들이 등장하여 시로 정감을 표출하고 교류하며 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다. 오봉 신지제(梧峯 申之悌 )(1562~1624) 또한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 활동을 주도 하고 전란이끝난 후에 당대의 문호(文豪)들과 시를 주고받았던 인물이다.
신지제는 임진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예안 현감을 제수받고 그 이후 로 전란을 수습하느라 7년을 지방에서 머물렀지만, 오히려 부모님을 봉양하 고 이황(李滉)의 고제(高弟)들과 교유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평소 이황(李滉)에게 직접 배우지 못했던 것을 아쉽게 여겼던 그는 매달 도산서원(陶山書院)에 가서 사당에 배 알하고 이황의 문인들과 경전을 강론하며우의를 다졌다. 이때 그들과 함께 왜적에게 유린당한 국토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출하고 국난 극복을 위한결 의를 다지며 남겼던 작품들이 오봉집(梧峯集) 권1에 실려 있다.
영남을 거점으로 임진왜란 때는 향병을 이끌고 왜적을 막은 박의장ㆍ김 해ㆍ곽재우(朴毅長ㆍ金垓ㆍ郭再祐)와 구국 활동을 함께 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순국한조종도를 비롯하여 여대로ㆍ손기양ㆍ조형도ㆍ성안의(呂大老ㆍ孫起陽ㆍ趙亨道ㆍ成安義)등과 팔공산성에서 왜적을 방비하였다. 신지제는 훗날 창원 수령으로한가하게 지낼 때에도 이들과 교 유를 유지하여 서로 시를 주고받거나 함께 유람을 즐겼다.
중앙 조정에서 잠시 벼슬했던 시기에는 동향의 관료들과 ‘동도회(同道會)’를 만 들어 장낙원(掌樂院)에서 모임을 가진 뒤 영남동도회제명권(嶺南同道會題名卷)이라는 계첩을 남겼 다. 이 동도회(同道會)는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는 동향인들이 친목을 다지고자 만든 것으로, 신지제는계첩의 명단에 실린 문인 중에 당시 재상을 지냈던 李好 閔을 위시하여 이민성ㆍ이민환(李民宬ㆍ李民寏)형제, 조우인, 조정(曺友仁, 趙靖)등의 관료들과지속적 으로 시를 주고받았다. 28세에 치른 과거에서 대책문(對策文)으로 갑과 3인에 들었고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어 임금의 명으로 교서를 지어 올렸던 이력1)과 중앙 관료들에게 학문적 성취를 인정받으며 시를 통해 저명한 문사들과 나누었 던 교유등은 범상치 않은 그의 문학적 역량을 대변해준다.
현재까지 신지제의 가계나 학문, 의병 활동에 대한 연구2)를 제외하면 그 의 문학에대한 연구로는 창원 부사 재직기의 작품에 나타난 정서를 다룬 연구3)만진행되어 있다. 그의 시문학에는 전란 속에 의병 활동으로 맺어진 우의와 다양한 학맥ㆍ직위의 문인들과교류한 정서 등이 담겨 있으며, 그 실체는 신지제의 인적 관계망과 교유한 문인들의 시적 경향 및 교유시(交遊詩)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일부 구명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에 신지제가 벼슬에 출 사한 이후로 교유했던 인물 및 그들과 주고받았던 시를 총체적으로 살피려 한다. 이를 통해 작품에 표출된 문인들 간의 정서적인 영향과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사유의 양상을 이 글에서 밝혀 보고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