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1626년 신달도는 예조 정랑(禮曹正?)에 제수되어 함경도의 덕릉(德陵)과안릉(安陵)을 가서 살폈다.돌아와서는 서쪽지방의 굶주린 백성들이 관북으로 유입되는 상황에 대해 상소를 올리고, 또한송태조(宋太祖)가 심륜(沈倫)을 시켜 군량미를 내어 양사(楊泗)지역의굶주린 백성을 구휼시킨 고사를 거론하며 군량미를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할 것을 청하였다.
1626년 겨울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신달도는 당시의 폐단 10가지를 간언하니, 즉 ‘어진이를 등용하고, 수령을 잘 선택하며, 백성의 마음을 잘 추스르고, 풍속을 두텁게 하며, 언론을 열어놓고, 가려진 것을 터트리며, 옥사를 잘 다스리고, 쓸데없는 관직을 살피며, 공물과 납세를 균등히 하고, 군정을 정비하라.’이다. 또한상소 말미에 다시 왕이 자신을 반성하여 근신하고 덕을 닦는 진실을 거듭 아뢰니 임금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
1627년 봄에 정언(正言)에 제수 되었다. 당시 청나라 병사들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임금은 신료들을 모아 놓고 몽진(蒙塵)을 의논하였다. 신달도는 도성을 굳게 지키고 병사를 이끌고 나가 친히정벌해야 한다고 청을 하자 임금은 낯빛을 바꾸었다.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강화도[江都]에들어가자 화친의 잘못됨을 힘써 간쟁하고,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을 계책을 무수히 내었다. 계책이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지식인들은 그가 옳다고 여겼다.
병자호란 당시 명나라 원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島)를 지키고있었는데, 조선이 적을 끌어들여 가도를 급습하게 하였다는 등의 말로 우리나라를 무고하였다. 신달도는 왕명을 받들어 모문룡의 병영에 들어가서 좋은 말로 응대하니, 원수모문룡은 마침내 감동하여 가도에 잡혀있는 조선인을 모두 돌려보내고, 또한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형세와적의 정황을 두루 말해주었다. 신달도는 빨리 돌아와 이를 알리니 임금이 그를 기특하게 여겨 지평(持平)으로 소환하였다. 공이어전에 나아가 임금을 면대하자, 특별한 유지(諭旨)로 그를 칭찬하였다.
신달도가 지평(持平)에 제수되었을당시 대간들이 훈재(勳宰)들의 교만하고 횡포한 실수를 논하다가임금의 뜻을 거역하여 파직을 당하였다. 그는 곧 대청에 나아가 훈재의 실정을 힘써 아뢰어 말로 임금을핍박하자, 좌우의 신하들이 한 때 자신의 혐의를 회피하려고 사직을 고려하였다. 이에 임금이 크게 노하여 특별히 체포할 것을 명하였다. 이일로 정직한명성을 온 나라에 떨치게 되었으니 세상에서는 3학사라 부른다. 대개윤황(尹煌), 조경(趙?) 그리고 공을 가리킨다. 신달도는 1629년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장령(掌令)을 역임하고, 임금의명으로 조정으로 돌아왔다. 당시 어떤 한 훈재(勳宰)가 경연 중에 재상을 침해하고 업신여기자 그는 “재상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조정을 우러러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고 상소를 올려 그를 탄핵하였다. 이에 조정대신들이 그를두려워하였다.
2. 가족
조 : 신원록(申元祿) 생부 : 신흘(申?) 모 : 순천 박씨(順天朴氏) 전력부위(展力副尉) 박륜(朴倫)의 딸 형제 : 신적도(申適道), 신열도(申悅道)
신달도의 본관은 아주(鵝淵)다. 시조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지낸 신윤유(申允濡)이고,안렴사(按廉使) 신우(申祐)는 충효로 이름이 나서 이때부터 대대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증조부 신수(申壽)는 진실로덕을 숨기고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조부 신원록(申元祿)은 지극한 효성과 독실한 학문으로 호조시랑(戶曹侍郞)에 증직되었고 대대로 ‘회당선생(悔堂先生)’으로 불린다.
부친 신흘(申?)은 사림에명망이 있어 좌승선(左承宣)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순천 박씨(順天朴氏)로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으며, 참봉(參判) 박안명(朴安命)의 후손이고, 전력부위(展力副尉) 박륜(朴倫)의 딸이다.
임진년(1592) 왜구가 쳐들어 왔다.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7세였는데, 몸소 수백리 밖에 쌀을 이고 와서 콩과 물과 함께 생활 기반으로 삼았다. 당시 목숨을 담보로 출입하였기에 서로염려하였고, 한 가문의 백여명 사람들이 그에게 의지하여 살 수 있었다.
정유년(1597) 왜구가 재차 침략하여 온 집안이 달아나 피하였다. 당시 아우 신열도(申悅道)는나이가 겨우 9세였고, 다리에 힘이 없어 걸을 수가 없었다. 신달도는 낮, 밤으로 열도를 업고 험한 길을 걸으면서도 오히려 서로헤어져 잃어버릴까 걱정하였다. 이를 본 피난민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신달도는 나이 7세에『소학』을 배웠다.당시 증조부 성은공(城隱公)이 자제를 가르치는데법도가 있었다. 그는 매양 일찍 일어나 조부모에게 문안을 드리고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였고, 한번 말하고 움직이는데 모두 소학에 의거하여 행동하였다.
신달도는 9세때 맹자를 읽었는데, ‘순(舜)은 어떠한 사람이고, 나또한어떠한 사람인가?[舜何人, 予何人]’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번번이 분발하면서 “대장부가 뜻을 세우는데 있어 진실로 이와 같이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40자 정도의 글을 짓고 작은 판에 기록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부여해준 것이 처음에는 현자와 다르지 않다. 비록성현이라고 하나 또한 두 개의 입과 네 개의 눈을 가지지는 않았다. 저들도 대장부고 나도 대장부이다. 훌륭한 일을 행하는 자는 또한 이와 같으니 이전 성현의 아름다운 자취를 따르고 싶다.”
신달도는 나이 16세 때 장천서원에서 독서를 하였다. 그는 일찍이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 포부가 매우 커야 한다. 어찌한 가지 선으로 선비의 명성을 이루어 스스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경전의 뜻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전대의 흥망성쇠의 자취와 지금의 치란(治亂)의 이유를 깊이 연구하여 사업(事業)에두고서 힘썼다.
4. 저작
만오선생문집(晩悟先生文集) 『만오집』은 신달도(申達道)의시문집이다. 목판본으로 10권 5책으로구성되어 있으며. 권수에는 전체의 목록이 있고, 각 권마다맨 앞에 각 권의 목록이 따로 있다.
권 1은 120여 수의 시가있다. 권 2는 1626년 시폐(時弊)에 대하여 10가지조목으로 요약하여 올린「진시폐십조소(陳時弊十條疏)」이다. 권 3에는 1627년 척화를주장하다가 청군이 퇴각한 후 올린「구퇴후진소회소(寇退後陳所懷疏)」등소(疏) 12편과 삼사와 연명하여 올린「신구사간윤황차(伸救司諫尹煌箚)」의 차(箚) 1편이 있다. 권 4에는「청수나만갑원찬지명계(請收羅萬甲遠竄之命啓)」 등 계(啓) 43편이있다. 권 5에는 1627년 올린「가도봉사시문견계(?島奉使時聞見啓)」 1편등 공함(公緘) 2편, 정문(呈文) 1편이 있다. 권 6에는 조목(趙穆), 장현광(張顯光), 정경세(鄭經世), 이호민(李好閔), 조익(趙翼) 등에게보내는 편지가 모두 41편이 있다. 권 7에는 정묘호란 당시 강화도로 피난하였을 때의 일을 기록한「江都日錄(江都日錄)」 등 잡저 4편이있다. 권 8에는 서(序) 5편, 기(記) 2편, 발(跋) 1편, 잠(箴) 2편, 표(表) 1편, 전(箋)5편, 애사(哀辭) 1편, 고사(告辭) 2편 등, 제문(祭文) 5편, 묘지(墓誌) 1편, 부친의 행장 등 행장 3편이있다. 권 9는 동생 신열도(申悅道)가 지은 신달도의 「연보(年譜)」이다. 권 10은 부록으로 1653년신열도가 지은 행장,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묘갈명(墓碣銘), 신열도가지은「묘지(墓誌)」, 유성증(兪省曾) 등이 지은 제문 7편, 만장(挽章) 52편이있다. 권말의 표지 안쪽에는 조선총독부의 허가에 의해 1927년인쇄 및 발행하였다는 것과 발행인 및 발행소 등을 기록한 표가 있다.
강도일록(江都日錄) 「강도일록」은 1627년 정묘호란 때에 겪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해 1월 17일부터 3월 23일까지의 진행된 전란상황과 자신의 활동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1월 13일에 오랑캐들이 이미 의주(義州)를 침범하였고 14일에는정주(定州)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는 것으로 일기는 시작된다. 특히 이정구(李廷龜)ㆍ장유(張維)ㆍ이경직(李景稷) 등이 청나라 사신인 유해(劉海)와더불어 강화를 논의하는 등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신열도의 천성은 순수하여 생각에 막힘이나 인색함이 한 점도 없었고, 털끝만큼의거친 기상도 없었다. 집안에서 거처할 때 효성스러움과 우애심이 독실하였고, 제사를 받드는 것에도 그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마을에 거처할때는 남에게 진실하면서도 베풀고 양보하여 미덥고 순함이 상하에 드러났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편안하고 고요하게 스스로를 지키고 구차히 함께하여 잘못 따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이르러서는 교화를 핵심으로 삼아 학문을 흥기시키는데 솔선하였다.
1647년 수재와 한재로 인해 굶어죽는 백성들이 속출하자 신열도(申悅道)는 굶주린 백성을 위하여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이번 수재와 한재를만나 굶어 죽는 백성이 많으니 마땅히 현재 호조·남한(南漢)·강도(江都)에 있는 미곡의 수효와 삼남(三南)의 감영(監營)·병영(兵營) 및 통영(統營)에 저축된 미곡과 포목의 수효가 얼마인가를 총괄해서 계산하고, 또 1년의 경비 및 외국 사신에 필요한 불시의 수요가 얼마인가를 총괄해서 계산하여 종류대로 모아 연구해서, 만약 지금 있는 것으로 충분히 지탱할 수 있으면 금년의 부세(賦稅)를 모두 탕감하고 만약 혹 이 숫자에 모자라면 여러 도 가운데 아주 실농하지 않은 곳에서 절반의 세금을 거두어 1년 경비를 지탱한다면 공물을 전부 감하니 헤아려 감하니 하는 등의 구구한 말을 할 필요 없이 온 나라 백성들이균등하게 은택을 입어 생기가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2. 가족
조 : 신원록(申元祿) 생부 : 신흘(申?) 모 : 순천(順天) 박씨(朴氏) 박윤(朴倫)의 딸 형제 : 신달도(申達道), 신적도(申適道)
아주(鵝洲) 신씨(申氏)의 시조는 고려 때 권지호장(權知戶長)을 지낸 영미(英美)이다. 대표적 인물은 우(祐)인데, 그는 충혜왕 때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를 지냈으며, 지극한 효자로서 경상북도 의성(義城)에 정문과 효자비가 세워졌다.
조선시대에 크게 벼슬을 한 사람은 없으나 학자와 효행으로 이름난 사람이 많다. 우의 6대손 원록(元祿)은 성리학을연구한 학자로서 효행이 뛰어나 효자정문이 세워졌고, 그의 손자 3형제중 적도(適道)는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찰방(察訪)을 지냈는데, 역시학문과 효행이 뛰어났다. 달도(達道)는 삼사(三司)를 역임하고장령(掌令)을 지냈으며, 정묘호란때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신원록은 11세에 부친이 중풍에 걸려 치료가 어렵자, 팔공산에 올라가 손수 약초를 캐서 유능한 의원의 조제를 받아 밤낮으로 끓여 올렸다. 무릇 8년 동안이나 밤을 지새워가며 부친을 정성껏 간호하였다. 신원록은 모친이 90세가 되도록 의복이나 변기를 남에게 맡기지 않고손수 세탁하였고, 똥을 맛보아 증세를 판단하였으며, 밤마다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등 갖은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같은 해 6월 모친이 93세로돌아가시자 날마다 성묘를 하고, 미음만 마시고 다른 것은 입에 가까이하지 않아 결국 여막에서 세상을떠나게 되었다.
이후 1590년 향인들이 신원록의 행적을 적어 고을 수령에게 올리므로인해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다. 1600년에 향인들이 다시 글을 올려 을묘년(1615)에 정려(旌閭)가내려졌으며 아울러 호조참의에 추증되고『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에그의 효행사적이 실리게 되었다.
3. 학문
스승 : 장현광(張顯光) 학파 : 퇴계 학파
신열도는 9세 때 이미 경전과 역사에 통달했고 글을 잘 지었다. 인재(?齋) 최현(崔晛)이 항상 그의 재주를 작게 이루어지는 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칭찬했다. 17세 때 도(道)의 도회(都會)에서 뽑혀 18세에 진사(進仕)에합격했다.
1603년 스승 장현광이 의성으로 부임해왔다. 선생은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제생들과 상읍례(相揖禮)를 행하시고는 훈장(訓長)과제생들은 차례로 앞줄에 앉히고 아이들은 또 그 다음 줄에 앉힌 다음, 이들과 경전(經傳)의 뜻을 강론하였다. 제생중에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선생은 반복하여 가르쳐 주었으며 질문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대답하였는바, 말소리가크고 통창(通暢)하시어 온 좌중이 경청하였다.
신열도는 어린 나이로 책을 끼고 맨 말석(末席)에 앉아 있었는데, 선생을 우러러보니 기상(氣象)이 혼후(渾厚)하고 위의(威儀)가 엄정(嚴整)하여 자기도 모르게 숙연(肅然)하여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있게 되었다. 1622년 봄에 신열도는 신달도와 함께 남산으로 와서 스승을 뵙고,저녁에는 모시고 부지암(不知巖)으로 가서 이틀동안 머물러 모시면서『근사록(近思錄)』의 의심스러운 부분 10여 조항을 질문하였다.
신열도는 스승인 장현광이 안거(安車)로부르는 명령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가 뵈었는데, 스승이여러 친구들이 전별(餞別)함으로 인하여 연일 술을 드셨다. 이에 신열도는 “식사는 적게 하시면서 술을 너무 많이 드시니, 혹이로 인하여 건강이 손상될까 두렵습니다. 이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아뢰었더니, 스승이 “술의 힘이 노인을 보양함은 어린아이가젖을 먹는 것과 같아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대의 말이 또한 좋으니, 내 마땅히 유념하겠다.”고 말하였다.
4. 저작
나재문집(懶齋文集) 『나재문집』은 의성지방의 학자 신열도(申悅道)기 지은 시문집이다. 목판본으로 9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1은 시 127수가 실려있다.
권 2는 교지(敎旨), 사제문(賜祭文), 소(疏), 계(啓)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무인응지소(戊寅應旨疏)」는 울진현령(蔚珍縣令)으로 있을 때 왕명에 따라 올린 보고서로, 흉년이 계속되어 주민의생활이 어려우므로 세금을 경감하여줄 것과 부역을 줄이며 고을재정에 국고보조를 하여줄 것을 요청한 내용이다. 「청물견신사잉자핵계(請勿遣信使仍自劾啓)」는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강화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한 조정의 공의에 반대하여 강화사신을 보내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다.
권 3은「조천시문견사건계(朝天時聞見事件啓)」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1628년(인조 6) 동지사은사의 서장관이 되어 7월 11일 서울을 출발하여 명나라의 남경까지 갔다가 이듬해 윤 4월 11일 평양에 돌아올 때까지 도중에서 보고들은 일들과 중국 사람들과통화한 내용들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보고한 여행기록이다.
권 4는 정문(呈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정등주군문변무문(呈登州軍門辨誣文)」은 등주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군대에 잘못 전달되어명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 오해가 생긴 일에 대하여 사실을 밝힌 외교적인 문서이다.
권 5는 장현광(張顯光)·심지원(沈之源)·김세렴(金世濂)·김응조(金應祖)·김치관(金致寬)·김경장(金慶長)등 당대의 학자들과 주고받은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권 6은 장현광(張顯光)에게 입문의 예를 마치고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기록한「배문록(拜門錄)」과 자기의 사상과 취지를 밝힌「나재설(懶齋說)」의 잡저와 각종 서발(序跋), 그리고상량문(上樑文), 축문(祝文), 제문(祭文)으로 구성되어있다.
권 7은 각종 제문과 묘표(墓表)로 구성되어 있다.
권 8은 행장,
권9는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선사지 仙?志』와 『문소지 聞韶志』등이 있다.
장여헌(張旅軒)에게 수업하여 문장으로 유명하고, 의성지의 전신인 문소지(聞韶誌)를처음 펴낸 공도 있었다. 정묘호란 때 화의를 극력 반대, 금군(金軍)을 물리칠 것을 주장, 그 침략을 분쇄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도 붓을 던지고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왕을 수행 척화를 주장했다. 능주목사(陵州牧使)를 역임하고 문집이 있다.형 적도, 달도와 더불어 기라성 같은 일생을 살고 갔다.호는 난제이다.
신우(申祐)
성명 : 신우(申祐) 본관 : 아주(鵝洲) 호 : 퇴재(退齋) 출생지 : 개경 분묘지 : 사포(蛇浦)리 태향(兌向) 언덕 내관직 : 장령(掌令) 외관직 : 전라도 안렴사
1. 생애
신우(申祐)는 고려조에 벼슬하여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일찍이전라도 안렴사가 되었는데 고려조의 고사(故事)에 때때로 근시(近侍)의 관원을 여러 도로 내려 보내어 산천에 제사 지내고 백성들의풍속을 탐문하고 수령들의 근만(勤慢)을 살펴 출척(黜陟)하였다. 그것을 이름하여안렴사라고 한다.
신우는 혼탁한 세상에 처하여서도 능히 깨끗함으로 몸가짐을 하였으며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효성을 다하였다. 아버지인 판도판서(版圖判書) 휘윤유(允濡)가 졸하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묘 앞에서 호곡(號哭)하였는데, 대나무 두 그루가 묘 앞에 자라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효성에 감응한 소치라고들 하였는데 조정에 알려져 정려문(旌閭門)을 받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 마을의 이름을 효자리라고 하고, 그 앞을 흐르는 냇물을 효수천(孝水川)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사실은 국승(國乘) 및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2. 가족
조 : 신윤유(申允濡) 모 : 성주 이씨(星州 李氏)
신우는 약목 유씨(若木柳氏)와의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름이 광부(光富)와 광귀(光貴)이다. 광부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름이 사렴(士廉)과 사빈(士贇)이며, 사렴은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지냈다. 그의 현손인 원록(元祿)이 뒤에 또 효행으로 공의 아름다운 행실을 뒤이어 정려되었다.
아주신씨 문중에 이름이 있는 인물은 문학군(文學君) 신달도와 그의 형인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 신적도(申適道), 동생인예조 좌랑 신열도(申悅道)가 있다. 이른바 족형인 승지는 이름이 신지제(申之悌)로, 문명이 있어 대과에 급제해 사류들이 추중하는 바가 되었는데 불행하게도수를 누리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은 이름이 신홍망(申弘望)이다. 신달도의 아들은 점(?)과구(坵)인데, 모두준수하고 온아하다.
아버지 신윤유(申允濡)는첫 이름이 원유(元濡)였다.고려 관직의 종2품인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判圖判書) 겸 군기시사(軍器寺事)인데 고려조가 막을 내리니 낙담하여 단밀로 왔다. 공의 충성된 절의를세상 사람들은 당개(唐介)에 버금간다 하였다. 초하루 보름마다 산 마루에 올라 개경을 마라보고 깊은 한을 풀었기에 산 이름도 망경산(望京山)이라 하였는데 중세에 만경산(萬京山)으로 변경되었다. 지금의 구천면 청산리에 공의 묘소가 있는데 실전하였고용사리에 단을 모아 세사로 봉향하고 있다. 공은 아주 신씨의 의성 입향조이다.
종형인 신적도(申適道, 1574∼1663)는 자는 사립(士立), 호는호계(虎溪)이다. 신적도는신흘의 아들이며,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향시에 합격였으나, 벼슬은 찰방에 그쳤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뒤 학산(鶴山) 미곡(微谷)에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두문불출하였다. 저서에는『호계집(虎溪集)』이 있다. 이책은 후손 신상하(申相夏)·신돈식(申敦植) 등이 간행하였다. 서(書)는 정구·장현광·정경세(鄭經世)·이경석(李景奭) 등 당대명유에게 준 것이 많다.
종제 신열도(1589∼1659)는자는 진보(晉甫), 호는 나재(懶齋). 수(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호조참의 원록(元綠)이고, 아버지는 흘(?)이며, 어머니는 전력부위(展力副尉) 박륜(朴倫)의 딸이다. 교리 달도(達道)의 동생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여 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1606년(선조 3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으로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정랑·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1638년 울진현감을 지내고, 1647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되어 민생에 대하여 상소하였고 뒤에 능주목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선사지(仙?志)』와 『문소지(聞韶志)』가 있다.
3. 학문
향사 : 속수서원. 검암서원 학파 : 퇴계 학파
스승, 배움 이야기 등 신우는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에게대의(大義)를 들었으며, 고려가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사위인 길재(吉再)와 함께 고향에돌아와 상주 만경산에 은거하였다. 태조 이성계와 친구간으로서 조선이 개국된 뒤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4. 생애
『퇴재실기』는 신돈식(申敦植) 등이편찬하고, 1908년에 간행된 2권 1책의 활자본이다. 권1에는 부록으로 묘표(墓表)·수갈고유문(?碣告由文)·속수서원봉안문(?水書院奉安文)·상향축문(常享祝文)·속원봉안시고묘문(?院奉安時告墓文)·고유손우재선생문(告由孫愚齋先生文)·상주사림통문(尙州士林通文)·속원경현사상량문(?院景賢祠上樑文)·경현사기(景賢祠記)·제쌍죽도(題雙竹圖)·사적(事蹟)·여묘도(廬墓圖)·정려도(旌閭圖)·밀성지(密城誌) 등을수록하였다. 권2에 부후손조두문적(附後孫俎頭文蹟) 17편을 수록하였다.책머리에는 1908년에 김도화(金道和)와 17세손 신돈식이 쓴 서문과 신씨세계(申氏世系)가 있고, 책끝에 유도헌(柳道獻)의 발문이 실려 있다.
신원록(申元祿)
호는 회당(悔堂)이다. 열한살 때환중의 아버지를 위해 수백리밖 팔공산까지 찾아가 손수 약을 구해 오는 등 지성으로 8년간이나 형과 같이간호했고, 연친곡 8수를 지어 불러 편모를 즐겁도록 했다. 모친상을 당하자 눈비를 가리지 않고 하루에 세 번씩 성묘했다. 훈도로있으면서 후진 양성은 물론 형과 더불어 장천서원(長川書院)을세워 선현을 받들고 학문 진흥에도 이바지 하였다. 스승 주세붕(周世鵬)의 3년 심상도 입었고, 광해군때 정효가 내리고 통정 대부 호조 참의로 중직 되었다. 그가 향내에 끼친 사업으로는 스승 퇴계에게 다니면서 필사해와 실행케한 향약과 난민을 구제하기 위해 설립 운영한질휼장(賑恤場), 유생을 모아 수학시킨 업유제(業儒齊), 향내 대소과(大小科) 출신 인사를 모아 고장 발전을 상의하고 친목을 도모한 연계소(蓮桂所)의 설립, 문종인사를 매월초 1일에모아 사당에 참배하고 권학회(勸學會)의 조직 등이다.
신윤유(申允濡)( ? )
첫 이름은 원유(元濡)라 하였다. 고려 관직의 종2품인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 判圖判書) 겸 군기사사(軍器寺事)인데 고려조가 막을 내리니 낙담하여 단밀로 왔다. 공의 충성된 절의를세상 사람들은 당개(唐介)에 버금간다 하였다. 초하루 보름마다 산 마루에 올라 개경을 마라보고 깊은 한을 풀었기에 산 이름도 망경산(望京山)이라 하였는데 중세에 만경산(萬京山)으로 변경되었다. 지금의 구천면 청산리에 공의 묘소가 있는데 실전하였고용사리에 단을 모아 세사로 봉향하고 있다. 공은 아주 신씨의 의성 입향조이다.
정조(鄭造)의 이름을 심원록(尋院錄)에서 삭제시키다. 1620년에는정권을 잡은 대북파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여기에가담한 정조(鄭造)가 의성 빙계서원(氷溪書院)에 왔다가 심원록(尋院錄)에 이름을 쓰고 간 일이 있었다. 이에 신적도는 분개하여 유생들을인솔하여 그 이름을 칼로 깎아내고는 “인륜을 업신여기는 난적(亂賊)이어찌 잠시도 유림(儒林)의 반열에 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장면을 보고 들은 자들이 모두 놀랐다.
1627년 금나라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쳐들어오자 신적도는 분연히 일어나며 “임금님의 수레가 먼지를뒤집어쓰고, 왕업이 매우 위태로우니 이는 신하가 되어 초야에서 구차하게 살아갈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각 지방의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모아서 밤 세워 달려갔지만 적들은 이미 물러났다. 그리고 대궐에 나아가 상소를 올리니, 인조가 후한 비답을 내리고 특별히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에 제수하였다.
1636년에 금나라 오랑캐가 다시 쳐들어오자 신적도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용맹을 품은 선비들을 모아서만 번 죽더라도 앞장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쌍령(雙嶺)이 이미 함락되고 화의(和議)가곧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행재소로 달려갔다. 눈물을 뿌리며 임금에게 글을 올려 나라를 판 죄를죄다 아뢰고,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동계(桐溪) 정온(鄭蘊)?용주(龍洲) 조경(趙絅)과 더불어 통곡하였다. 이미되돌아와서 한편의 시를 읊조렸다.
욕되게 임님의 성은(盛恩)을입었으나, 誤被天恩重 신하의 직분 오활(迂闊)하여도리어 부끄럽네. 還?臣分疎 옛 동산의 봄은 이미 저물어 가는데, 故園春已晩 무엇 때문에 머뭇거리는가? 何用更?躇
신적도는 평생을 청렴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였는데, 특히 한 그릇의 밥과한 표주박의 물을 먹는 검소함을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식량이 떨어져도 급급하게 생업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형제와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하면서 늙고 병든 노비와 황폐한 밭과 집은 자신이 가졌고, 또한 친척 중에 굶주리거나 추위에 떠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정성을 다해 구휼하였다. 그리고 사람 중에 곤액을 당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힘을 다해 그를 구제하였다.한번은 종친 가운데 돌림병에 걸려 죽은 이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려서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몸소 장례를 치러줬다.
일찍이 이경석(李景奭)이“신적도는 진실로 국가의 충성스럽고 진실 된 신하이니, 마땅히 관리로 발탁해야 합니다.”라고 차자를 올려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그러나 공은 “천지가닫치고, 상하가 거꾸로 인데, 이 어찌 백발에 나아가는 날이있겠는가?”라 하고 탄식하고는 세상에 대해 생각을 단절하고 학산(鶴山) 미곡(薇谷)에 채미헌을짓고 단정히 앉아 날마다 춘추 서적을 읽으며 울분을 달랬다. 당시 사람들은 “의성 수풀과 골짝에 대명일월(大明日月)이다.”라고 칭찬했다.
2. 가족
조 : 신원록(申元祿) 생부 : 신흘(申?) 모 : 순천(順天) 박씨(朴氏) 부위(副尉) 박륜(朴倫)의 딸 형제 : 신달도(申達道), 신열도(申悅道)
신적도(申適道)의 본관은아주(鵝洲)이고, 시조는고려조에 판도판서를 지낸 윤유(允濡)이다. 안렴사(按廉使)를 지낸신우(申祐)는 여묘 살이3년에 한 쌍의 대나무가 자란 기이한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조부 신원록(申元祿)은 일찍이퇴계(退溪) 이황(李滉),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양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연원(淵源)의 학문을 들었고, 또한효도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고 장대서원(藏待書院)에배향되었다.
부친 신흘(申?)은 호가성은(城隱)이고, 사림에석망(碩望)을 받았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순천(順天) 박씨(朴氏)로 부위(副尉) 박륜(朴倫)의 딸이다.
조부 신원록은 효행이 뛰어나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내려졌으며,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배향되었다. 신적도는 효행으로 뛰어난 조부에 대해 시를 지어 추모하였다.
<王考悔堂府君 以孝擧旌贈 遂感吟>
효의 근원 깊은 도의 근원에서 나와, 孝源由出道源深 내려진 임금은혜 강과 바다같이 깊네. 有隕恩波河海深 공문(孔門)의 이름난 효는증자와 민자건인데, 聖門惟獨曾閔孝 만일 그들과 함께 나셨더라도 효로 뛰어났으리. 若使生幷特許深
4. 저작
호계선생유집(虎溪先生遺集) 『호계선생유집』은 의병장 신적도(申適道: 1574~1663)의 시문집이다. 목판본으로 6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책 권두에는 유필영(柳必永)의 서문이 있고, 권 1에는 시와 만사(輓詞) 13편, 소(疏) 3편, 서(書) 1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2는 「성설(性說)」「용학도후지(庸學圖後識)」「채미헌기(採薇軒記)」외 9편과「잠명(箴銘)」4편,「제문(祭文)」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3,4는「창의록(倡義錄)」을 싣고 있다. 부록 권 5년「유사(遺事)」와 김도화(金道和)가쓴「행장」과 이돈우(李敦禹)가 지은 봉안문 및 김석유(金奭裕)가 지은「사림통문(士林通文)」,「묘표」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록권 6은 장현광등의 서간문, 제문, 만사 그리고 권말에 신상헌(申相憲)이쓴 후서(後?)와 이중구(李中久)가 쓴 발문이 있다.
채미헌기(採薇軒記) 신적도는 「채미헌기」에서, 학산(鶴山) 미곡(薇谷)은 ‘은자(隱者)가 숨을 만한 곳이다.’라고탄미하고, 또한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출전했다가 화의로 인해 그 뜻을 펴지 못했던 울분을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의(義)로써 피력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일을 언급하였다.
이로부터 10년 후 또 다시 오랑캐가 쳐들어 왔을 때 의병을 일으켜진군했던 일을 말하고, 이때 여기 강화체결로 그 뜻을 펴지 못했던 울분을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하여 소(疏)로써 극언한 후, 이곳 미곡에다 은둔처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있다.
신지제는 8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3년 상을 마쳤다. 이때 막내 여동생이 돌도 채 되기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포대기 속에서 우는 것이 매우 애처로웠다. 그 또한 어린 나이로 애통하고 슬펐지만, 항상 거처하는 방안에서 어린 여동생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부지런히어린 여동생의 젖동냥을 구하였고, 몸소 보호하고 기르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를 들은 자들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신지제는 어렸을 때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서 수학하였다. 문도 70명은 산에서 땔감을 가져다 서당에 불을 지폈는데, 하루는 참판(參判) 권태일(權泰一)과 절도사(節度使) 박의장(朴毅長)과 함께 산에 땔감을 구하러 갔었다.
마침 한 노인이 산에 나무를 하고 있었다. 신지제는 친구들과 함께 가서땔감을 구걸하였는데, 노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급기야 욕을 해대었다. 함께간 친구가 화가 나서 노인을 밀쳤는데, 노인 그만 낭떠러지에떨어져 죽고 말았다. 노인의 아들이 관가에 고소하여, 곧밀친 친구가 체포되었다. 신지제는 친구에게 “우리 세 사람이 함께 갔으니 한 사람에게 죄를 씌울 수 없다.”라고하고, 관가에 따라 들어가서 서로 자신이 밀쳤다고 다투었다. 사또가 한참 지켜보다가 노인의 자식에게 “이 세 아이들은 모두 훗날 재상감이다.네 아비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한번 용서하여라.”라고 하고,아이들에게 노인의 자식과 함께 노인의 장례를 치를 것을 명하였다.
신지제는17세에 산속 절에서 독서를 하였다. 하루는 아름다운 시골 여성이 절에 들락거리며, 깊은 밤이 되어도돌아가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 여성의 속마음을 짐작하고는 그 여성에게 회초리를 가지고 이리오라고하였다. 그리고 엄숙한 얼굴로 “당신은 밑도 끝도 없이 이곳에 와서는 밤이 깊어도 돌아가지 않고 있으니반드시 나에게 볼일이 있는 것일 것입니다. 당신은 시골 여성으로 음흉한 생각과 다른 마음으로 서생을더럽히려고 하니 어찌 그 죄를 벗어 날 수 있겠소?”라고 하고, 여성을매질하여 돌려보냈다. 며칠 뒤 한 남자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찾아왔다.
신지제는 평소 안면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찾아온 까닭을 묻자, 남자가“공은 성대한 덕이 있어 시골 여성을 바른 도로 훈계한 것을 들었기에 와서 인사하는 것일 뿐입니다.”라고하였다. 대개 그 여성이 공의 말에 감동하여 돌아가서 남편에게 말한 것이었다.
신지제는 인조반정 때 주르륵 눈물을 흘렸고, 풍류(風流)가 돈독하였지만 자신의 몸가짐을 매우 엄하게 단속하였다. 하루는 사람들이 그에게 권세가를 소개 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공은사양하며 들어주지 않고 그들을 풍자하거나 경계시켰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듣지 않았고, 얼마 뒤 과연 그들은 화를 입었다.
일찍이 사헌부가 화를 입어 장차 차자(箚子)를 올리려고 공에게 초고를 부탁하였는데, 그 말이 권간(權奸)들에게 저촉되어 동료들에게 제지를 당하였다. 그러자 곧 휴가를 청하고[呈告] 고향으로내려갔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의 권세가매우 높았는데, 공은 근처에 있었지만 6년 동안 한 번도더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정인홍은 마음속으로 공의 정치에 탄복하고 감히 그와 불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2. 가족
조 : 신응규(申應奎) 생부 : 신몽득(申夢得) 모 : 월성 박씨(月城朴氏) 사인(士人) 박민수(朴敏樹)의 딸 형제 : 신지효(申之孝), 신지신(申之信)
신지제의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시조 신윤유(申允濡)는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신우(申祐)는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를 지냈으며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증조부 신한(申翰)은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추증되었고, 조부 신응규(申應奎)는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냈으며, 부친 신몽득(申夢得)은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에추증된 의흥 박씨(義興朴氏)이다.
신지제는 40이 되도록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 어느 날, 꿈에 홀연히 한 신령이 나타나서 “그대는 적선(積善)이 있으니하늘이 기이한 아이를 보내 줄 것이다. 그대는 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망(望)’자를 넣어서 이름을 짓도록 하게!”라고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훗날 과연 아들 신홍망(申弘望)을 낳았다.
3. 학문 스승 : 김언기(金彦璣) 향사 : 장대서원(藏待書院) 학파 : 퇴계 학파
배우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는 공부열정 신지제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다. 그의 이웃집에 늙은 선생이있었는데, 신지제가 책을 끼고 찾아가 배움을 청하자 늙은 선생은 보지도 않고 밭에서 호미질만 계속하였다. 이에 그는 울타리 밖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기다렸다가 반드시 수업을 받은 이후에야 하직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신지제는 성장 할수록 뜻을 분명히 하고 학업에 충실 하였다.
신지제는 항상 나이가 어려 퇴계의 문하에 나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래서스스로 예안현감을 자청하였다. 그리고 예안을 다스릴 때 항상 도산(陶山)을 왕래하면서 나의 많은 사우(士友)들과함께 학문의 비결을 강구(講究)하였다. 신지제는 과거를 보기 위해 떠난 아들 신홍망에게 편지를 보내어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돌아와 부모를 걱정하게 하지말고, 하천(下川)의종질형제 집에 전염병이 돌고 있으니 들르지 말며, 물이 불은 곳을 경솔하게 건너지 말고, 잘 모르는 사람과 쉽게 어울리지 말도록 하여라.”라고 편지를 보내어, 먼 길 떠난 자식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을 기술하였다.
4. 저작
오봉선생문집(梧峯先生文集) 『오봉집(梧峯集) 』은 의성지방의문신 신지제(申之悌)의 시문집이다. 목판본으로 원집 4책 과 별집 1책이존재한다. 원집의 권두에는 1739년에 이광정(李光庭)이 지은 서문이 있고, 권말에같은 해에 지은 권상일의 발문이 있다. 권1~5는 권1~5는 시, 권6~7은문, 부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은 시 36제이고, 권2~4는 회산잡영(檜山雜詠)이다. 회산잡영은 상권(107), 중권(54), 하권(92)으로 나뉘어 있으며, 253제의 시를 수록하였다. 권5는 구당만록(龜堂漫錄) 192제이다. 권6은 기(記) 2편, 서(序) 1편이다. 권7은 차(箚) 1편, 교(敎) 3편, 제문(祭文) 8편, 묘지(墓誌) 2편, 서(書) 6편, 습유(拾遺) 8편과 부록이다. 부록은 상권과 하권으로 되어 있으며, 행장, 묘갈명(墓碣銘), 제문 4편 등과 현손 신진구(申震龜)가 지은 문집후지(文集後識)이다. 권말에 권상일(權相一)이지은 발문과 간기(刊記)가 있다.
별집(別集)은 목록, 시 63제, 소 1편, 서 5편, 지발(識跋) 2편, 제문 2편이고, 권말에연보가 있다. 마지막에 1742년에 김이만(金履萬)이 지은 별집 발문과 6세손신체인(申體仁)이 지은 별집개편후지(別集改編後識)가 있다.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유청량산록』은 신지제가 갑오년(1594) 9월 2일부터 9월 5일까지청량산을 유람하고 기록한 기행문이다. 금난수(琴蘭秀)가 동행하였으며, 여행의 경로는 치원암, 안중암과 몇몇 봉우리를 간신히 보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넉넉히유람할 겨를이 없음을 아쉬워하고 있으며, 김수온(金守溫)이 불교에 아부한 시를 보고 유자(儒者)의 죄인이라고 평가했으며, 퇴계선생의 유향을 흠모하는 내용도 포함되어있다.
정조(鄭造)의 이름을 심원록(尋院錄)에서 삭제시키다. 1620년에는정권을 잡은 대북파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여기에가담한 정조(鄭造)가 의성 빙계서원(氷溪書院)에 왔다가 심원록(尋院錄)에 이름을 쓰고 간 일이 있었다. 이에 신적도는 분개하여 유생들을인솔하여 그 이름을 칼로 깎아내고는 “인륜을 업신여기는 난적(亂賊)이어찌 잠시도 유림(儒林)의 반열에 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장면을 보고 들은 자들이 모두 놀랐다.
1627년 금나라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쳐들어오자 신적도는 분연히 일어나며 “임금님의 수레가 먼지를뒤집어쓰고, 왕업이 매우 위태로우니 이는 신하가 되어 초야에서 구차하게 살아갈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각 지방의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모아서 밤 세워 달려갔지만 적들은 이미 물러났다. 그리고 대궐에 나아가 상소를 올리니, 인조가 후한 비답을 내리고 특별히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에 제수하였다.
1636년에 금나라 오랑캐가 다시 쳐들어오자 신적도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용맹을 품은 선비들을 모아서만 번 죽더라도 앞장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쌍령(雙嶺)이 이미 함락되고 화의(和議)가곧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행재소로 달려갔다. 눈물을 뿌리며 임금에게 글을 올려 나라를 판 죄를죄다 아뢰고,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동계(桐溪) 정온(鄭蘊)?용주(龍洲) 조경(趙絅)과 더불어 통곡하였다. 이미되돌아와서 한편의 시를 읊조렸다.
욕되게 임님의 성은(盛恩)을입었으나, 誤被天恩重 신하의 직분 오활(迂闊)하여도리어 부끄럽네. 還?臣分疎 옛 동산의 봄은 이미 저물어 가는데, 故園春已晩 무엇 때문에 머뭇거리는가? 何用更?躇
신적도는 평생을 청렴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였는데, 특히 한 그릇의 밥과한 표주박의 물을 먹는 검소함을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식량이 떨어져도 급급하게 생업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형제와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하면서 늙고 병든 노비와 황폐한 밭과 집은 자신이 가졌고, 또한 친척 중에 굶주리거나 추위에 떠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정성을 다해 구휼하였다. 그리고 사람 중에 곤액을 당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힘을 다해 그를 구제하였다.한번은 종친 가운데 돌림병에 걸려 죽은 이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려서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몸소 장례를 치러줬다.
일찍이 이경석(李景奭)이“신적도는 진실로 국가의 충성스럽고 진실 된 신하이니, 마땅히 관리로 발탁해야 합니다.”라고 차자를 올려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그러나 공은 “천지가닫치고, 상하가 거꾸로 인데, 이 어찌 백발에 나아가는 날이있겠는가?”라 하고 탄식하고는 세상에 대해 생각을 단절하고 학산(鶴山) 미곡(薇谷)에 채미헌을짓고 단정히 앉아 날마다 춘추 서적을 읽으며 울분을 달랬다. 당시 사람들은 “의성 수풀과 골짝에 대명일월(大明日月)이다.”라고 칭찬했다.
2. 가족
조 : 신원록(申元祿) 생부 : 신흘(申?) 모 : 순천(順天) 박씨(朴氏) 부위(副尉) 박륜(朴倫)의 딸 형제 : 신달도(申達道), 신열도(申悅道)
신적도(申適道)의 본관은아주(鵝洲)이고, 시조는고려조에 판도판서를 지낸 윤유(允濡)이다. 안렴사(按廉使)를 지낸신우(申祐)는 여묘 살이3년에 한 쌍의 대나무가 자란 기이한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조부 신원록(申元祿)은 일찍이퇴계(退溪) 이황(李滉),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양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연원(淵源)의 학문을 들었고, 또한효도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고 장대서원(藏待書院)에배향되었다.
부친 신흘(申?)은 호가성은(城隱)이고, 사림에석망(碩望)을 받았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순천(順天) 박씨(朴氏)로 부위(副尉) 박륜(朴倫)의 딸이다.
조부 신원록은 효행이 뛰어나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내려졌으며,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배향되었다. 신적도는 효행으로 뛰어난 조부에 대해 시를 지어 추모하였다.
<王考悔堂府君 以孝擧旌贈 遂感吟>
효의 근원 깊은 도의 근원에서 나와, 孝源由出道源深 내려진 임금은혜 강과 바다같이 깊네. 有隕恩波河海深 공문(孔門)의 이름난 효는증자와 민자건인데, 聖門惟獨曾閔孝 만일 그들과 함께 나셨더라도 효로 뛰어났으리. 若使生幷特許深
4. 저작
호계선생유집(虎溪先生遺集) 『호계선생유집』은 의병장 신적도(申適道: 1574~1663)의 시문집이다. 목판본으로 6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책 권두에는 유필영(柳必永)의 서문이 있고, 권 1에는 시와 만사(輓詞) 13편, 소(疏) 3편, 서(書) 1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2는 「성설(性說)」「용학도후지(庸學圖後識)」「채미헌기(採薇軒記)」외 9편과「잠명(箴銘)」4편,「제문(祭文)」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3,4는「창의록(倡義錄)」을 싣고 있다. 부록 권 5년「유사(遺事)」와 김도화(金道和)가쓴「행장」과 이돈우(李敦禹)가 지은 봉안문 및 김석유(金奭裕)가 지은「사림통문(士林通文)」,「묘표」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록권 6은 장현광등의 서간문, 제문, 만사 그리고 권말에 신상헌(申相憲)이쓴 후서(後?)와 이중구(李中久)가 쓴 발문이 있다.
채미헌기(採薇軒記) 신적도는 「채미헌기」에서, 학산(鶴山) 미곡(薇谷)은 ‘은자(隱者)가 숨을 만한 곳이다.’라고탄미하고, 또한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출전했다가 화의로 인해 그 뜻을 펴지 못했던 울분을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의(義)로써 피력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일을 언급하였다.
이로부터 10년 후 또 다시 오랑캐가 쳐들어 왔을 때 의병을 일으켜진군했던 일을 말하고, 이때 여기 강화체결로 그 뜻을 펴지 못했던 울분을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하여 소(疏)로써 극언한 후, 이곳 미곡에다 은둔처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