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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명문가 = 아주신씨(鵝州申氏)
2011년 10월 25일(화) 13:16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이홍선 고문 칼럼리스트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아주(鵝州)는경상남도(慶尙南道) 거제군(巨濟郡)에 속했던 지명(地名)으로본래(本來) 소가야국(小伽倻國)의 일부(一部)였던 독로국(瀆盧國)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新羅)의 거적현(居績縣또는 巨績)이었으며 청주(菁州: 晉州)에 속하였다. 677년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7년 거제(巨濟)에처음으로 상군(裳軍)을 두었는데 삼속현(三屬縣)의 거로현(居老縣)이라 하다가 757년 경덕왕(景德王) 16년 거제군(巨濟郡) 아주현(鵝洲縣)으로 개칭(改稱)하고 성을 쌓았으며 감무(監務)가다스렸으나 1271년 고려(高麗) 원종(元宗) 12년 왜구(倭寇)의 침범(侵犯)으로 거창현(居昌縣)의속현(屬縣)인 가조현(加祚縣)으로 현민(縣民) 모두피난(避難)갔다가 1422년(조선 세종 4) 거제현(巨濟縣)의 옛터로 돌아왔으며, 1432년 세종(世宗) 14년 거제현(巨濟縣)을 사등성(沙等城)에서 고현성으로 옮기고 관하(管下)에 7면을 두었는데 이운면(二運面)이라 개칭(改稱)하고 권농관(勸農官)이 집정(執政)하였다. 1769년 영조(英祖) 45년 방리(坊里) 개편(改編)으로 아주방(鵝洲坊)이라 하였는데 1889년 고종(高宗) 26년 상아(上鵝)와하아리(下鵝里)로 나뉘었으나 1915년 6월 1일 아주리(鵝洲里)로 되었으며 1942년 5월 1일 부락구제(部落區制)로 장기(場基), 탑곡(塔谷), 내곡(內谷), 용소(龍沼)의 4구(區)를 1969년 5월 15일전래(傳來)의 고유지명(固有地名)으로 바꾸었는데 1989년 1월 1日일 장승포시(長承浦市) 설치(設置)에 따라 아양리(鵝陽里)와 아주리(鵝洲里) 지역(地域)을 아주동(鵝州洞)으로 되었다. 현재(現在) 경상남도 거제시 장승포읍 지역(慶尙南道 巨濟市 長承浦邑 地域)이다.아주(鵝洲)는 용소(龍沼)의 늪에 거위(鉅偉)가 서식(棲息)하여 이름하였다. 시조(始祖) 신영미(申英美)는 고려(高麗) 말엽(末葉) 거재군(巨濟郡) 所屬소속) 아주현(鵝洲縣)의 권지호장(權知戶長)이 되었으므로 그 후손(後孫)들이아주(鵝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界)를계승(繼承)하고 있다. 가문(家門)의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로는 신영미(申英美)가 고려(高麗)에서 권지호장(權知戶長)을 지내고 6세손(六世孫) 신우(申佑)가 충혜왕(忠惠王) 때 전라도(全羅道) 안렴사(按廉使)에 올라효행(孝行)으로 이름났다.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歷任)한 그의 아버지 신윤유(申允濡)가죽자 3년간(三年間) 여막(廬幕)에서 생활(生活)하여 무덤 앞에 쌍죽이 돋아나 세인(世人)들은 그의 지극(至極)한효성(孝誠)때문이라고 칭찬(稱讚)했으며, 정려(精慮)가 세워져지금(至今)도 경북의성(慶北義城)에 효자비(孝子碑)가 남아있다.조선조(朝鮮朝)에 와서도이름난 효자(孝子) 신원복(申元福), 신원록(申元綠)이 효행(孝行)으로 유명(有名)했으며, 신원록(申元綠)의 손자(孫子) 신적도(申適道)가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의병(義兵)을 모아아우 신달도(申達道), 신열도(申悅道)와 함께 가문(家門)을 빛냈다.광해군(光海君) 때 창녕부사(昌寧府使)를지낸 신지제(申之悌)는 백성(百姓)을 괴롭히던 도적(盜賊)을 토평(討平)하여 민심(民心)을 안정(安定)시킨 공(公)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歷任)한 흥효와 현감(縣監) 신섬(申暹)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조선시대(朝鮮時代) 과거급제자(科擧及第者)신달도(申達道, 1576 丙子生) : 문과(文科) 인조1년(1623)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신홍망(申弘望, 1600 庚子生) : 문과(文科) 인조17년(1639) 별시 병과(丙科)
신유(申瑠, 1606 丙午生) : 문과(文科) 인조24년(1646) 식년시 병과(丙科)신면주(申冕周, 1768 戊子生) : 문과(文科) 순조5년(1805) 별시 병과(丙科)
신면횡(申冕鐄, 1794 甲寅生) : 문과(文科) 헌종3년(1837) 별시 을과(乙科)
신정모(申正模, 1691 辛未生) : 문과(文科) 숙종45년(1719) 증광시 병과(丙科)
신지제(申之悌, 1691 辛未生) : 문과(文科) 선조22년(1589) 증광시 갑과(甲科)
신열도(申悅道, 1589 己丑生) : 문과(文科) 인조2년(1624) 증광시 을과(乙科)
신규(申圭, 1611 辛亥生) : 문과(文科) 효종2년(1651) 식년시 을과(乙科)
신면직(申冕直, 1795 乙卯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34년(1834) 식년시 이등(二等)등
모두 40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무과 9명, 사마시 31명)
본군(本郡)에는 전라도(全羅道) 안렴사(按廉使)를 역임(歷任)한 신우(申佑)의 후손(後孫)인 과천군수(果川郡守) 신용보(申用甫)와 신춘년(申椿年)의 후손(後孫)이 봉화유곡(奉化酉谷) 탑평(塔平)들을 비롯하여 각처(各處)에살고 있다.신석호(申奭鎬) 1904년 광무(光武) 5년 ~ ? 봉화유곡(奉化酉谷)에서 출생(出生)하여 경성제대법학부사학과(京城帝大法學部史學科)를 졸업(卒業)하고 조선총독부역사편찬위원(朝鮮總督府歷史編纂委員)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피체징역(被逮役獄) 고려대교수(高麗大敎授) 문학박사(文學博士)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國史編纂委員會委員長) 고등고시위원(高等考試委員) 성균관대학교문리과대학장(成均館大學校 文理科大學長) 영남대학교대학원장(嶺南大學校大學院長) 학술원종신회원(學術院終身會員) 세종기념사업회장(世宗記念事業會長)민족문학추진위원회이사(民族文學推進委員會理事) 동경봉화군민회장(東京奉化郡民會長)등을 역임(歷任)했다.신광열(申光烈) 1965년생(年生)으로 명호고계(明湖古界)에서 출생(出生)하여 서울법대(서울法大)를 졸업(卒業)하고 사법고시합격(司法高試合格)하여법원판사(法院判事)를 역임(歷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