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제는 8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 상을 마쳤다. 이때 막내 여동생이 돌도 채 되기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포대기 속에서 우는 것이 매우 애처로웠다. 그 또한 어린 나이로 애통하고 슬펐지만, 항상 거처하는 방안에서 어린 여동생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어린 여동생의 젖동냥을 구하였고, 몸소 보호하고 기르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를 들은 자들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친구들과의 우정
신지제는 어렸을 때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서 수학하였다. 문도 70명은 산에서 땔감을 가져다 서당에 불을 지폈는데, 하루는 참판(參判) 권태일(權泰一)과 절도사(節度使) 박의장(朴毅長)과 함께 산에 땔감을 구하러 갔었다.
마침 한 노인이 산에 나무를 하고 있었다. 신지제는 친구들과 함께 가서 땔감을 구걸하였는데, 노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급기야 욕을 해대었다. 함께간 친구가 화가 나서 노인을 밀쳤는데, 노인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노인의 아들이 관가에 고소하여, 곧 밀친 친구가 체포되었다. 신지제는 친구에게 “우리 세 사람이 함께 갔으니 한 사람에게 죄를 씌울 수 없다.”라고 하고, 관가에 따라 들어가서 서로 자신이 밀쳤다고 다투었다.
사또가 한참 지켜보다가 노인의 자식에게 “이 세 아이들은 모두 훗날 재상감이다. 네 아비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한번 용서하여라.”라고 하고, 아이들에게 노인의 자식과 함께 노인의 장례를 치를 것을 명하였다.
아리따운 여성을 매질하다.
신지제는17세에 산속 절에서 독서를 하였다. 하루는 아름다운 시골 여성이 절에 들락거리며, 깊은 밤이 되어도 돌아가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 여성의 속마음을 짐작하고는 그 여성에게 회초리를 가지고 이리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엄숙한 얼굴로 “당신은 밑도 끝도 없이 이곳에 와서는 밤이 깊어도 돌아가지 않고 있으니 반드시 나에게 볼일이 있는 것일 것입니다. 당신은 시골 여성으로 음흉한 생각과 다른 마음으로 서생을 더럽히려고 하니 어찌 그 죄를 벗어 날 수 있겠소?”라고 하고, 여성을 매질하여 돌려보냈다. 며칠 뒤 한 남자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찾아왔다.
신지제는 평소 안면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찾아온 까닭을 묻자, 남자가 “공은 성대한 덕이 있어 시골 여성을 바른 도로 훈계한 것을 들었기에 와서 인사하는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그 여성이 공의 말에 감동하여 돌아가서 남편에게 말한 것이었다.
강직한 성품
신지제는 인조반정 때 주르륵 눈물을 흘렸고, 풍류(風流)가 돈독하였지만 자신의 몸가짐을 매우 엄하게 단속하였다. 하루는 사람들이 그에게 권세가를 소개 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공은 사양하며 들어주지 않고 그들을 풍자하거나 경계시켰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듣지 않았고, 얼마 뒤 과연 그들은 화를 입었다.
일찍이 사헌부가 화를 입어 장차 차자(箚子)를 올리려고 공에게 초고를 부탁하였는데, 그 말이 권간(權奸)들에게 저촉되어 동료들에게 제지를 당하였다. 그러자 곧 휴가를 청하고[呈告]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의 권세가 매우 높았는데, 공은 근처에 있었지만 6년 동안 한 번도 더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정인홍은 마음속으로 공의 정치에 탄복하고 감히 그와 불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조
:
신응규(申應奎)
생부
:
신몽득(申夢得)
모
:
월성 박씨(月城朴氏) 사인(士人) 박민수(朴敏樹)의 딸
형제
:
신지효(申之孝), 신지신(申之信)
집안이력
신지제의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시조 신윤유(申允濡)는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신우(申祐)는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를 지냈으며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증조부 신한(申翰)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추증되었고, 조부 신응규(申應奎)는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냈으며, 부친 신몽득(申夢得)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된 의흥 박씨(義興朴氏)이다.
늦둥이를 얻다
신지제는 40이 되도록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 어느 날, 꿈에 홀연히 한 신령이 나타나서 “그대는 적선(積善)이 있으니 하늘이 기이한 아이를 보내 줄 것이다. 그대는 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망(望)’자를 넣어서 이름을 짓도록 하게!”라고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훗날 과연 아들 신홍망(申弘望)을 낳았다.
스승
:
김언기(金彦璣)
향사
:
장대서원(藏待書院)
학파
:
퇴계 학파
배우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는 공부열정
신지제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다. 그의이웃집에 늙은 선생이 있었는데, 신지제가 책을 끼고 찾아가 배움을 청하자 늙은 선생은 보지도않고 밭에서 호미질만 계속하였다. 이에 그는 울타리 밖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기다렸다가 반드시 수업을 받은 이후에야 하직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신지제는 성장 할수록 뜻을 분명히 하고 학업에 충실 하였다.
예안현감을 자청하다.
신지제는 항상 나이가 어려 퇴계의 문하에 나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예안현감을 자청하였다. 그리고 예안을 다스릴 때 항상 도산(陶山)을왕래하면서 나의 많은 사우(士友)들과 함께 학문의 비결을강구(講究)하였다.
먼 길 떠난 자식의 훈계
신지제는 과거를 보기 위해 떠난 아들 신홍망에게 편지를 보내어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돌아와 부모를 걱정하게 하지 말고, 하천(下川)의 종질형제 집에 전염병이 돌고 있으니 들르지 말며, 물이 불은 곳을 경솔하게 건너지 말고, 잘 모르는사람과 쉽게 어울리지 말도록 하여라.”라고 편지를 보내어, 먼 길 떠난 자식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을 기술하였다.
오봉선생문집(梧峯先生文集)
『오봉집(梧峯集) 』은 의성지방의 문신 신지제(申之悌)의 시문집이다. 목판본으로
원집 4책 과 별집 1책이존재한다. 원집의 권두에는 1739년에이광정(李光庭)이 지은 서문이 있고, 권말에 같은 해에 지은 권상일의 발문이 있다. 권1~5는 권1~5는 시, 권6~7은 문, 부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은 시 36제이고, 권2~4는 회산잡영(檜山雜詠)이다. 회산잡영은 상권(107), 중권(54), 하권(92)으로 나뉘어 있으며, 253제의 시를 수록하였다. 권5는 구당만록(龜堂漫錄) 192제이다. 권6은 기(記)2편, 서(序) 1편이다. 권7은 차(箚)1편, 교(敎) 3편, 제문(祭文) 8편, 묘지(墓誌) 2편, 서(書) 6편, 습유(拾遺) 8편과 부록이다. 부록은 상권과 하권으로 되어 있으며, 행장, 묘갈명(墓碣銘), 제문4편 등과 현손 신진구(申震龜)가 지은 문집후지(文集後識)이다. 권말에 권상일(權相一)이 지은 발문과 간기(刊記)가있다.
별집(別集)은 목록, 시 63제, 소 1편, 서 5편, 지발(識跋) 2편, 제문 2편이고, 권말에연보가 있다. 마지막에 1742년에 김이만(金履萬)이 지은 별집 발문과 6세손신체인(申體仁)이 지은 별집개편후지(別集改編後識)가 있다.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유청량산록』은신지제가 갑오년(1594) 9월 2일부터 9월 5일까지 청량산을 유람하고 기록한 기행문이다. 금난수(琴蘭秀)가 동행하였으며, 여행의 경로는 치원암, 안중암과 몇몇 봉우리를간신히 보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넉넉히 유람할 겨를이 없음을 아쉬워하고 있으며, 김수온(金守溫)이불교에 아부한 시를 보고 유자(儒者)의 죄인이라고 평가했으며, 퇴계선생의 유향을 흠모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신지제 묘갈명(申之悌墓碣銘)
공의 성은 신씨(申氏)이고 이름은 지제(之悌)이며자는 순부(順夫)이고 호는 오봉(梧峯)이며 아주(鵝洲)사람이다. 시조 신윤유(申允濡)는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지냈으며 그의 아들 신우(申祐)는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를 지냈으며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증조부신한(申翰)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추증되었고 조부 신응규(申應奎)는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냈다. 부친 신몽득(申夢得)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에추증된 의흥박씨(義興朴氏)이다. 1562년(명종 17) 7월 공이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다. 1589년(선조 22) 문과에 급제하여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ㆍ전적(典籍)ㆍ감찰(監察)을 거쳐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나갔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선생이 그가 떠남을 애석히 여겨 그를 애써 만류하였지만 공은 부모의 편리한 봉양을 위해 부임지로 떠났다. 1592(선조 25) 팔도가 전쟁에 유린되자 공은 오합지졸을 모아용성(龍城)에 주둔하여 적을 막으려 하였다. 소문을 들은 자들은 그를 장하게 여겼다. 관찰사는 공만이 홀로 관원의책무에 실수가 없다고 장계를 올려 예조정랑(禮曹正郞)에 겸임되었으니특별한 은전이다. 1596년(선조 29) 체찰사가 장계를 올려이에 유임되었다. 1597년(선조 30)에 정언(正言)에제수되었다. 이때부터 1607년(선조 40)까지 내직으로는 예조(禮曹) 좌랑(佐郞)ㆍ정랑(正郞)ㆍ지평(持平)ㆍ문학(文學) 겸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전라도사(全羅都事)ㆍ전주(全州)와 강계(江界)지방의 판관(判官)ㆍ순찰사(巡察使)ㆍ체찰사(體察使)ㆍ통제삼영종사관(統制三營從事官)을 역임하였다. 1607년(선조 40) 여름에어머님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 3년을 마쳤다. 1608년(선조 41)에 선조가 승하(昇遐)하여 당시 조정의 변화 때문에 은거하거나 비루한 처지를 면할 수 없었으나 공조정랑(工曹正郞) 충청(忠淸)과 전라(全羅)지방의 도사ㆍ북평사(北評事)를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 창원부사(昌原府使)에 제수되었다. 1617년(광해군 9)에 적을 사로잡은 공으로 통정(通政)의 품계에 올랐다.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조정이 맑고 밝아졌으며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공은 본래 중풍을 앓고 있었는데 이 당시 병세가 더욱 심하였다. 1624년(인조 2) 정월 8일에정침(正寢)에 별세하였다.그해 의성현(葬義城) 서쪽 율곡(栗谷) 사향(巳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이보다 앞서1604년(선조 37)에 선무호종(宣武扈從)에 녹훈(錄勳)되었다. 1646년(인조 24) 이조참판(吏曹參判)에증직되었다. 오호라! 공은 자질이 순수하고 예의와 법도가 매우 뛰어났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일찍이 제1의인물이라고 칭찬하였다. 공은 효성이 독실하였는데, 8세에어머니 상을 치르는 것이 성인(成人)과 같았고 계모 오씨에게효를 다하였다. 공은 말년에 병이 들어 숨을 헐떡거리며 말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자주 부모의 병환을물었고 기절하여야 그쳤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것이 지극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다. 일찍이 인조반정 때 주르륵 눈물을 흘렸고 풍류(風流)가돈독하였지만 자신의 몸가짐을 매우 엄하게 단속하였다. 사람들이 공에게 권세가를 소개시켜 줄 것을 요구하면공은 사양하며 들어주지 않고 그들을 풍자하거나 경계시켰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듣지 않았고 얼마 뒤과연 화를 입었다. 사헌부가 화를 입어 장차 차자(箚子)를 올리려고 공에게 초고를 부탁하였는데, 그 말이 권간(權奸)들에게 저촉되어 동료들에게 제지를 당하였다. 그러자 곧 휴가를 청하고[呈告] 고향으로내려갔다. 정인홍(鄭仁弘)의권세가 매우 높았는데, 공은 근처에 있었지만 6년 동안 한번도 더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정인홍은 마음속으로 공의 정치에 탄복하고 감히 그와 불화를 일으키지않았다. 더욱이 문교(文敎)에마음을 두어 예안(禮安)ㆍ전주(全州)ㆍ창원(昌原)을 다스릴 때 한결같이 학교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다. 예안에있으면서 매번 도산으로 가서 여러 유생을 불러 학문을 강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함안조씨(咸安趙氏)로 형조판서(刑曹判書)에추증된 조지(趙址)의 딸이다. 1563년(명종 18)에태어났고 1650년(효종1)에 죽었으며 율곡에 합장하였다. 공은 예안을 다스릴 때 큰 기근을 당하였는데, 참된 정성으로 구휼하니 이웃 고을이 모두그에게 귀의하여 살아난 자가 수천 명이었다. 공은 당시 후사가 없었는데 꿈에 신령이 “선을 쌓은 집에귀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1600년(선조 33)에 과연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풍기공(豐基公)이다. 재주와행실이 있어 사림에 중망(重望)을 받았으니 어찌 끝내 조그만고을에 그치겠는가? 선을 쌓은 경사는 그 이치가 반드시 그러한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