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때에 강화 체결을 반대하며 올린 상소. 우리나라는 명나라와의 대의(大義)가 중요한데, 이제 오랑캐의 침입으로 인하여 강화를 하자는 논의가 나오고 있으나 이는 성덕을 그르치고 후세에 비웃음을 받을 일이니 화의(和議)를 물리치고 대의를 펼치기를 청하였다
청척화소(請斥和疎)(1636) 13
병자호란 때에 척화를 주청한 상소. 오랑캐의 침범으로 종묘사직은 강화도에 달려 있고 임금은 남한산성에 몽진하였으니 전장에 나아가 국난에 목숨을 바칠 때이다. 그런데 나라를 그르치는 화의를 주장하는 자가 있으니 이는 오랑캐와 군신의 관계를 맺어 백성을 오랑캐로 만드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극복하였듯이 君臣 상하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이 급선무이니 빨리 화의를 물리쳐서 기강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三烈士(김엽‧김욱‧김찬(金燁‧金煜‧金燦))포열상언(褒烈上言) 16
의성 출신 3형제 金燁‧金煜‧金燦이 1637년(인조 15) 1월에 전사하자 그들의 의열(義烈)을 포장하여 줄 것을 청한 上言. 김엽 등은 金振古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정묘호란 때에 창의하였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신의 휘하에 들어와 쌍령(雙嶺)에 이르러 적병과 싸우다가 삼형제가 함께 전사하였다. 김엽 등 삼형제의 의열을 포장하여 그들을 위무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서(書)
상한강정선생(上寒岡鄭先生) 17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선생에게 올린 편지. 5월 20일에 평안하다는 편지를 받고 위로가 되지만 가르침을 저버리고 벗들의 기대를 잃어 두렵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는 퇴계 선생이 일생의 공력을 들여 10책으로 초선(抄選)하여 후세에 전하려고 한 것이다. 당시 인출(印出)하려는 논의가 문하에서 나왔을 때 선생이 그만두게 한 것은 지극한 교훈이다. 지난 날 무흘(武屹)에서 강정(講定)한 논의는 매우 정당하다
상한강선생(上寒岡先生) 18
한강 정구 선생에게 올린 편지. 문하를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나 사모함이 깊다. 요즘 다섯 선생의 예설(禮說)을 절충하여 일통(一統)하였으니 사문(斯文)의 은혜라 할 수 있다. 저는 근래 태만하여 죄를 얻음이 깊은데, 가르침을 주어 전일의 잘못을 보정(補正)하였으면 한다
상여헌(上旅軒)張先生 19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에게 올린 편지. 선생을 떠나온 뒤 어버이를 모시느라 공부에 힘을 쓰지 않아 매양 한탄이 끊이지 않는다. 조만간에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상여헌(上旅軒)先生(1627) 19
여헌 장현광 선생에게 올린 편지. 정묘호란 때 장현광이 경상도 호소사(號召使)에 임명되어 자신을 의병장에 임명하자 평소에 들은 바는 충효(忠孝)이니 병량(兵糧)을 모집하여 지휘를 따르고 조정에 보답하고자 한다
여정우복(與鄭愚伏) 20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에게 보낸 편지. 후금이 침입하여 국가가 어려운 지금 의병장에 추대되었으나 충용신위(忠勇信威)가 부족하다. 그렇지만 충분(忠憤)이 격발되어 사양할 수 없으니 군량(軍糧)을 모집하여 발행하려고 한다
우복 정경세에게 보낸 편지. 현인(賢人)을 사당에 배향함은 우리나라에서 우선으로 하는 바이다. 이제 상주 경현사(尙州 景賢祠)에 충효를 겸전한 고려말의 명신 신우(申祐)를 배향하려 하니 고을의 인사들이 모두 기뻐한다. 그런데 신우의 무덤에 위의를 갖추기 위하여 비갈(碑碣)을 세우려 하니 비문(碑文)을 지어주기 바란다
여이창석(與李蒼石)(埈,1627) 21
창석 이준(蒼石 李埈)에게 보낸 편지. 정묘호란이 일어나 국가가 위급한 지금 그대가 경상도의 관향사(管餉使)가 되었고, 나는 여러 읍의 의병장이 되어 병량(兵糧)을 모집하여 국난에 나가기 위해 수일 내로 출발하려 한다. 본진(本陣)이 지나는 고을에 군수물자를 조달하여 나라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도록 해주면 다행이다
여이백헌(與李白軒)(경석(景奭)) 22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에게 보낸 편지. 가을날 안부를 묻고 보살핌으로 직책을 유지하고 있으나 대책이 없고 백발이 생겨 서글프다
답정동계(온)(答鄭桐溪(蘊)) 22
동계 정온(桐溪 鄭蘊)에게 답한 편지. 서로 병이 들어 방문할 수 없음이 안타깝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미산(薇山)에 정자를 지어 여생을 마치려 한다. 그러나 서북쪽의 소식을 들으니 분노가 일고 옛날 함께 하던 사람들과 같이 죽지 못함이 한스럽다
여유수암(진)(與柳修巖(袗) 23
수암 유진(修巖 柳袗)에게 보낸 편지. 외진 곳에 머물며 탄식하는데, 요즘 『大學』 몇 조목을 보며 조금 본지(本旨)를 알게 되었으나 명백히 질정할 수 있는 이가 없어 적어 보내니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여금군신(수인)(與金君愼(守訒) 23
군신 김수인(君愼 金守訒)에게 보낸 편지. 서울에서 헤어져 고향으로 돌아온 뒤 그리움이 심하다
여김이율(치관)(與金而栗(致寬) 24
이율 김치관(而栗 金致寬)에게 보낸 편지. 병이 들어 기력이 쇠해지고 그대를 찾아가고 싶지만 방도가 없다. 어제 사제(舍弟)의 글을 받고 조정에서 재해를 입은 여러 고을에 창고의 쌀을 푼다고 하여 백성들이 소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 만날 수 없어 매우 한탄스럽다
여업유재회중(與業儒齋會中) 24
의성 업유재(業儒齋)의 회원에게 보낸 편지. 병이 점점 심해져 고생하고 있다. 지난날 주세붕(周世鵬)이 백운서원(白雲書院)과 업유재(業儒齋)를 세워 현사(賢士)를 존양(尊養)하는 장소로 삼아 후학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이제 우리 고을에 주세붕이 했던 전례를 따라 장천원(長川院)과 업유재를 세웠다. 이후 우리 고을에 士風이 진작되리니 여러 군자들은 업유재를 세운 본 뜻을 저버리지 말았으면 한다
기백아집(寄伯兒㙫) 25
큰아들 신집(申㙫)에게 보낸 편지. 후금군(後金軍)의 침입으로 병량(兵糧)을 모집하여 서북으로 진군한지 10여일인데, 죽기를 각오하고 진격할 것이다. 用兵은 식량이 중요하니 너는 식량 모집을 독려하여 끊어지는 근심이 없도록 해주기 바란다
기숙아채(寄叔兒埰) 26
셋째아들 신채(申埰)에게 보낸 편지. 몇 달 전에 집을 떠나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아들의 안부를 걱정한 뒤 사서(四書)와 낙민(洛閩)의 여러 서적, 퇴계(退溪)의 유집(遺集)을 읽어 국가에서 선비를 기르는 본뜻을 저버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기계아점(寄季兒坫) 26
막내아들 신점(申坫)에게 보낸 편지. 여러 달 집을 떠나 집안 소식이 궁금한데, 너는 독서에 지나치게 힘을 써서 건강을 해치지 말고, 지금 읽고 있는 성현의 글은 뜻이 매우 어렵지만 잠심하여 궁구한다면 자득(自得)할 수 있으리니 힘쓰라고 당부하였다
호계선생유집권지이(虎溪先生遺集卷之二)
잡저(雜著)
성설(性說) 1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논한 說. 공자와 맹자 이후 순자‧양자‧한자‧소씨‧호씨(荀子‧楊子‧韓子‧蘇氏‧胡氏) 등이 나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여러 이론을 내었지만 물의 성질을 예로 들어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함을 강조하였다
심설(心說) 2
심(心)의 작용에 대하여 논한 說. 心은 性과 지각(知覺)을 합한 활물(活物)로 성정(性情)을 체용(體用)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동정(動靜)에 있어 늘 心을 잡고 있지 않으면 안됨을 역설하였다
정의변(情意辨) 3
情과 意에 대하여 분석한 辨. 情은 性이 動한 것이고 意는 心이 發한 것으로 정의는 선후 관계에 있지만 心性의 작용이기 때문에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지의변(志意辨) 3
志와 意에 대하여 분석한 辨. 지와 의는 마음이 동한 바이나 志는 공‧강‧양(公‧剛‧陽)하고 의는 사‧유‧음(私‧柔‧陰)하여 둘 사이에는 경중과 선후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심성정지의변(心性情志意辨) 4
心‧性‧情‧志‧意의 맥락과 선후 관계에 대하여 분석한 辨. 朱子와 북계진씨(北溪陳氏) 등의 학설을 인용한 뒤 다섯 가지의 선후를 사람이 가는 길과 물이 가득 찬 그릇에 비유하여 性→心→情→志→意로 풀이하였다. 사람이 가는 길에 비유하면 길은 性이고, 사람은 心이고, 발을 움직여 가려고 하는 것은 情이고, 발을 움직여 길을 가는 것은 志이고, 길을 가며 몇 리를 갔는지 헤아리는 것은 意라고 하였다
인의예지설(仁義禮智說) 5
仁義禮智에 대해 논한 說. 태극→음양→오행→만물(太極→陰陽→五行→萬物)의 변환 과정에서 인간이 만물에서 가장 존귀한 이유는 仁義禮智의 性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주자‧호운봉(孟子‧朱子‧胡雲峯) 등의 설과 사단‧사덕‧사행‧사방‧사장(四端‧四德‧四行‧四方‧四臟) 등을 들면서 仁義禮智는 체용(體用)의 미묘함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무극이태극설(無極而太極說) 6
無極이 太極임을 논한 說. 주돈이의 無極而太極說을 인용하여 무극과 태극은 동일한 개념으로 만물의 근원이며 만물을 주재하는 근본임을 밝혔다. 無極而太極이라 한 것은 無極만을 쓴다면 空寂에 빠질까 염려해서이다
음양설(陰陽說) 7
陰陽이 천지와 인물의 무한한 순환을 주관하는 원리임을 논한 說. 음양에서 오행이 나오는데, 오행‧사덕‧사방‧사단(五行‧四德‧四方‧四端)은 물론이고 천지만물의 모든 것이 陰과 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순환과 동정(動靜)이 끊임없이 진행된다고 주장하였다
용학도후지(庸學圖後識) 8
中庸圖와 大學圖에 붙인 글. 『中庸』과 『大學』은 규모가 같지 않고 어려운 부분이 있기에 두 책의 본문과 章句, 小註 등에서 긴요한 것을 취하여 兩圖를 만들었으니 배우는 사람들이 入德과 入道의 방도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하였다
가계오조(家戒五條) 9
집안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하여 수신‧제가‧무농‧독서‧취우(修身‧齊家‧務農‧讀書‧取友) 등 다섯 조목을 적고 자세하게 풀이한 글. 修身은 입심‧성경‧시청언동(立心‧誠敬‧視聽言動)을 총괄하고 바탕으로 하니 수신이 매우 중요하고, 齊家는 父子‧兄弟‧夫婦의 正倫에 달려 있다. 務農은 盡力에 달려 있으니 때에 맞추어 농사를 짓고 힘을 다한다면 처자를 양육하여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 讀書는 放心을 구함에 달려 있으니 독서할 때에는 마음을 바로잡아 句讀하여야 한다. 取友는 나보다 나은 사람을 선택하여 나의 德業을 향상시키도록 해야 한다
채미헌기(採薇軒記 )(1638) 11
1638년(인조 16) 8월 의성 동쪽의 薇谷 아래 城洞에 採薇軒을 건립한 뒤에 지은 記文. 채미헌 주변의 지리와 풍경을 적은 뒤 임진왜란 때에 집안 식구를 이끌고 미곡에 들어간 적이 있었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倡義하여 척화를 주장한 적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미곡에 몇 칸의 茅屋을 지어 채미헌이라 이름을 짓고 여생을 마치려 한다
채미헌상량문(採薇軒上梁文 )(1638) 12
1638년 채미헌을 세울 때에 지은 上樑文.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끝내 강화가 체결되어 모든 일이 어그러지게 되었다. 伯夷叔齊의 절의를 사모하여 미곡에 집을 짓고 명나라 神宗의 옛 은혜를 생각하며 살려고 한다
잠명(箴銘)
존양잠(存養箴) 14
存心養性하면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피력한 箴. 흐르는 세월 속에 어딘가에 치우지지 않고 天理를 함양하면서 살겠다
성찰잠(省察箴) 14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근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피력한 箴. 일과 생각이 서로 작용하여 善惡이 나누어지게 되니 근신하면서 사물의 기미를 살피고자 한다
동벽명(東壁銘) 14
동쪽 벽에 자신이 지향하는 삶에 대하여 적은 銘. 인욕을 억제하고 천리를 보존함에 조금도 소홀하게 하지 않아 聖賢의 경지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서벽명(西壁銘) 14
서쪽 벽에 유학의 道統에 대하여 적은 銘. 유학의 도통은 伏羲‧堯舜‧禹湯‧文武‧주공과 소공‧공자‧증자‧맹자‧주돈이‧정호와정이‧장재‧소옹‧주희로 이어져 찬란히 빛난다고 하였다
제문(祭文)
퇴재선조원향시제묘문(退齋先祖院享時祭墓文) 15
퇴재 신우(退齋 申祐)를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배향할 때 무덤에 제사를 올리면서 지은 제문. 고려말에 태어나 충직한 관리로 활동하였으나 나라가 망한 뒤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대나무가 돋아나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이제 고을에서 사당을 세워 배향하게 되었기에 후손들이 묘제(墓祭)를 지내면서 고한다
제한강선생문(祭寒岡先生文)(1620) 15
한강 정구(寒岡 鄭逑)(1543~1620)의 죽음을 애도하고 덕행을 기린 제문. 정구 선생은 도덕을 겸비한 유림의 종장으로 임금께 충성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으나 이제 돌아가시니 슬픔을 그칠 수가 없다
제여헌(祭旅軒)先生文(1637) 15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죽음을 애도하고 덕행을 기린 제문. 장현광 선생은 학문의 연원이 깊고 산림에 뜻을 두면서도 임금께 주소(奏疏)를 올려 극론하였는데, 이제 돌아가심에 한바탕 통곡한다
제이경정문(祭李敬亭文)(대빙계유생작(代氷溪儒生作),1629) 16
氷溪書院의 유생을 대신하여 경정 이민성(敬亭 李民宬)(1570~1629)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시문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일처리에 치밀하였다. 우리 고을의 서원은 공에게 힘입은 바가 큰데 갑자기 죽었기에 눈물을 흘리며 술잔을 올린다
제신하음문(祭申河陰文)(1639) 16
하음 신즙(河陰 申楫)(1580~1639)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공은 나의 知己로 재주가 뛰어났으나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에 술잔을 따르며 애도한다
제중제수찬문(祭仲弟修撰文)(1631) 17
수찬(修撰)을 역임한 동생 신달도(申達道)(1576~1631)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우리 형제는 1614년에 부모상을 당한 이후 서로 의지하며 살았는데, 작년에 계수(季嫂)‧누이‧사위가 연달아 죽고 올해 또 네가 죽으니 매우 슬프다. 너는 孝親의 정성과 忠君의 절개가 있었는데, 하늘이 이리 빨리 너를 데리고 가니 의지할 이도 없어 슬픔이 끝나지 않는다
호계선생유집권지삼(虎溪先生遺集卷之三)
창의록(倡義錄)
서(序)(1868) 1
1868년(고종 5) 10월 김대진(金岱鎭)이 倡義錄에 붙인 서문. 군여(軍旅)는 조두(俎豆)에 포함되어 있어 유자(儒者)가 힘쓸 바가 아닌데, 申適道가 바로 그런 일을 한 사람이다. 공은 어려서 정구와 장현광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사문이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창의하여 척화를 주장하였고, 난리가 끝난 뒤에 산림에 은거하다 세상을 마쳤다. 1867년에 도학과 충절로써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후손들이 문집 약간 권과 丁丙錄 1책을 내어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기에 적는다
지략(誌略)(1637) 3
신적도가 병자호란이 끝난 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관련 문자를 모아 엮은 책에 붙인 글. 나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倡義하였으나 강화가 이루어져 통곡하며 돌아왔다. 전후의 여러 문자와 日記, 조목 등을 모아 책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통유일향사우문(通諭一鄕士友文)(1627) 4
정묘호란 때 의성 고을의 士友들을 효유(曉諭)하기 위하여 돌린 通文. 오랑캐가 침입하여 조정과 국토가 유린되고 있으니 선비들은 충의를 떨쳐 일어나서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로 싸워 공을 세우기를 바란다
재유문(再諭文)(1627) 4
정묘호란 때 의성 고을의 士友들에게 돌린 두 번째 通文. 평소 독서하고 의리를 강구하던 선비들은 국가의 변란을 만난 지금 목숨을 바쳐 국난에 나가 충의를 떨쳐야 한다
삼유문(三諭文)(1627) 5
정묘호란 때 의성 고을의 사우들에게 돌린 세 번째 通文. 나라가 난리를 만나 임금이 몽진한 지금 충의를 떨쳐 일어나야 한다. 의병에 호응하지 않는다면 후일 임금께 아뢰어 죄를 줄 것이니 세 번째 통문에 호응하여 참여하기를 바란다
유각면모속유사문(諭各面募粟有司文)(1627) 5
정묘호란 때 의성 각면(各面)에서 곡식 모집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독려하기 위하여 돌린 글. 오랑캐가 침입하여 나라가 어지러운 지금 군량 모집이 시급하니 各面에서 곡식 모으는 일을 독려해야 한다
후록(後錄)(1627) 6
정묘호란 때 의성 各面에서 군량과 군기(軍器) 등의 모집을 독려하기 위하여 11개의 조목을 적어 보낸 後錄. 各面에서 軍糧과 軍器 등을 모집하는 담당자는 여러 상황을 참작하여 거행하되 한량‧향리‧역리‧사포수(閑良‧鄕吏‧驛吏‧私砲手) 등을 모두 의병으로 데려오고, 軍器는 본읍(本邑) 관아의 군기를 변통하고, 군량은 서로 상의하여 모으되 의병에 참여할 수 없는 이는 군량으로 대신토록 하고, 군량과 군기의 수송은 고을의 모든 사람을 차출하여 수행하고, 활쏘기와 총 쏘기에 능한 이는 죄를 지었어도 의병에 가담하려 한다면 허락한다. 이러한 조항을 따르지 않으면 법률에 의거하여 조정에 알릴 것이다
정좌도호소사(呈左道號召使)(장현광문(張顯光文)(1627) 7
정묘호란 때 경상좌도 호소사(號召使) 장현광(張顯光)에게 올린 글. 오랑캐가 쳐들어와 나라가 어지러운 지금 선생께서 호소사로 와서 병량 모집을 독려하니 신하된 직분으로 충의를 떨쳐 일어날 때이다. 영을 따라 의병을 이끌고 나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이며 차차 상황을 보고하고자 한다
정우도호소사(정경세문)(呈右道號召使(鄭經世文)))1627) 8
정묘호란 때 경상우도 號召使 鄭經世에게 올린 글. 의병을 이끌고 가던 도중 영리 이정훈(營吏 李廷薰)이 전달한 글 속에서 강화를 체결하려 한다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지난날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종묘사직을 보존했는데, 지금 강화를 맺는 것은 부당하며 앞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나가 싸워서 종묘사직을 보존하려 한다
의소전령(義所傳令)(1627) 10
義所에 보낸 전령. 호소사(傳令. 號召使)의 關文을 보고 士氣가 진작되었다. 의성은 문헌의 고장이자 충효의 고을로 국난을 당한 지금 여러 同志가 충의로 떨쳐 일어나 적과 싸우고자 한다. 이제 군기와 군량을 갖추고 영에 따라 의병을 진격시켜 적과 싸워 공을 세우고자 하니 여러 사람들은 힘쓰기 바란다
의소방유(義所榜諭)(1627) 11
義所에서 군량 모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독려한 글. 옛날부터 군량 모집은 군사의 급무였는데, 지금 조정에서 관향관(管餉官)을 파견하여 군량을 모집하려 하니 의병에 동참하는 여러 임원들은 힘써 참여해야 한다
교서(敎書)(附,1627) 11
정묘호란 때 仁祖가 倡義하여 오랑캐와 싸울 것을 독려한 敎書. 오랑캐가 침입하여 평안도와 황해도가 함락되고 나는 江都로 몽진하였으며, 적들은 安州를 지난 이후부터 여러 차례 글을 보내 강화를 요구하고 있으나 거절하고 있다. 군대가 패하고 군량이 떨어지는 등 전황이 매우 불리하니 충신열사가 창의할 때이다. 수령과 士民은 兵馬를 조달하고 식량을 운반하여 목숨을 아끼지 말고 國難에 나간다면 후하게 상을 내릴 것이다
유중외대소신료기로군민한량등(諭中外大小臣僚耆老軍民閒良等)(1627) 13
정묘호란 때 仁祖가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와 기로‧군민‧한량(耆老‧軍民‧閑良) 등에게 내린 유서(諭書). 나의 부덕으로 李适의 난이 있었고, 이제 또 오랑캐가 침입하여 나라와 백성이 위태롭게 되었다. 그동안 백성의 신망을 잃었기 때문에 이러한 처지에 있게 된 것이다. 현재 병량(兵糧)도 부족하고 智勇을 갖춘 이도 힘을 쓸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다. 號牌를 태우고 軍籍을 정리하여 유신(維新)하려고 하니 中外의 士民들은 忠義를 떨쳐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고, 국난에 나가 힘써 싸우기를 바란다
선유삼도사민(宣諭三道士民 )(1627) 15
정묘호란 때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충청‧전라‧경상 3도의 士民들에게 내린 선유서(宣諭書). 오랑캐가 침입하여 임금은 강도로 파천(播遷)하고 나는 分朝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고 있다. 삼남의 백성들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때에도 창의하여 국난을 극복하였다. 이제 오랑캐가 침입하여 위태로운 지금 兵糧을 모집하여 강도를 호위하고 한강과 임진강을 막는다면 중흥의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임금께서 호패를 불사르고 실제 軍案 이외의 것을 없애버리고, 죄수를 석방하고 백성들의 폐단을 없앴으니 倡義하여 공을 세우도록 하라
의소초유문(義所招諭文)(1627) 17
倡義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하여 義所에 보낸 글. 敎旨의 간절한 뜻을 보니 지금은 충신과 의사가 의병에 참여하여 임금의 위급을 구하고 신하된 자의 도리를 해야 할 때이다
호소사관(號召使關)(附,1627) 18
정묘호란 때 호소사가 경상도 열읍에 내려 보낸 關文. 국가가 불행하여 오랑캐가 침입한 지금 호소사의 명을 받아 병량 모집을 독려하게 되었다. 여러 고을에서는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을 모집하여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항교와 서원, 鄕所, 대소의 인원은 마음과 힘을 다하여 병량 모집에 참여하고, 군량을 많이 모집하는 자는 임금께 알려 조치하도록 하겠다
관향사관(管餉使關)(丁卯二月初六日到付,1627) 18
관향사 이준(李埈)이 경상도 여러 고을에 내려 보낸 關文. 나(李埈)는 어가가 강도로 파천한 지금 영남의 관향사로 임명되었고, 장현광과 정경세는 경상도 호소사가 되어 군량을 독려하고 있다. 군량은 전쟁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바이니 원근에서 재물을 가벼이 하고 의를 중시하여 적극적으로 군량 모집에 참여하기 바란다
호계선생유집권지사 (창의록) 虎溪先生遺集卷之四 (倡義錄)
유일향대소인원문(諭一鄕大小人員文)(1636) 1
병자호란 때 의성의 士民들에게 병량 모집에 동참하기를 독려한 유문(諭文). 오랑캐가 침입하여 변방의 성이 함락되고 어가가 파천하여 나라의 형편이 누란지세(累卵之勢)이니 이 글을 보는 이들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적을 토벌하는 데에 나서 충의를 다해야 한다
후록(後錄)(1636) 2
병자호란 때 의성의 사민들에게 軍糧과 軍器 등의 모집을 독려하기 위하여 5개의 조목을 적어 보낸 後錄. 各面의 有司는 병량을 모집하되 협박하여 받지 말고, 부유한 집안들이 재물을 내도록 하여 軍需에 보탬이 되게 하고, 군량은 미리 作米로 만들어 운반하고, 군량을 낸 이들을 책자로 만들어 올려 보내면 임금께 아뢰어 후일 논공행상의 바탕으로 삼겠다
통유도내문(通諭道內文)(1636) 2
병자호란 때 倡義에 동참하기를 독려하기 위하여 경상도 여러 고을에 보낸 通文. 오랑캐가 10년 만에 다시 침입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 나는 초야의 선비이나 화급한 이때를 만나 의병을 일으켜 국난에 나가고자 한다. 경상도 여러 고을의 士民들은 충의를 떨쳐 일어나 무리를 규합하고 관군과 협동하여 적을 토벌해야 한다
절목(節目)(1636) 5
병자호란 때 창의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하여 경상도 여러 고을에 보낸 14개의 節目. 관청에서 미처 징발하지 않은 장정을 모집하고, 정예 선발에 힘쓰고, 의병과 관군이 협력 체제를 유지하고, 군량 모집에 동참하도록 적극 깨우치고, 兵糧을 모집하면 반드시 책자에 적고, 각 고을의 사포수(私砲手) 중에서 관군에 속하지 않은 이를 응모하여 우림위첩(羽林衛帖)을 주고, 서얼허통첩(庶孼許通帖) 300장을 조정에서 받아 종사관이 白米 10석에 내주도록 하고, 군법을 어겨 좇지 않는 자 중에서 杖 20이하는 의병장이 처결하고 중한 자는 도의소(都義所)에 보고하여 시행한다
창의일록(倡義日錄)(1637) 8
1636년(인조 14) 12월 20일부터 1637년 2월 9일까지 의병에 참여하였을 때의 주요 일정과 주변의 동정에 대하여 적은 日錄. 1636년 12월 20일 창의의 뜻을 담은 유문(諭文)을 의성에 돌림. 22일 나를 의병대장으로 추대. 26일 弓手 150명과 砲手 230여 명 및 지휘원(指揮員) 50여 명 등 합 400여 명을 이끌고 도원(桃院)에서 숙박. 27일 이른 아침에 군인에게 밥을 먹이고 비안(比安)에 도착. 28일 안계(安溪) 도착. 1637년 1월 1일 咸昌 도착. 3일 조령(鳥嶺) 東院 도착. 5일 大秋院에 도착하여 각도의 관군과 의병이 검단산(黔丹山)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들음. 6일 의성 출신의 金燁 3형제가 3일에 雙嶺에서 모두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음. 7일 곤주점(困酒店)에 도착하여 조정에서 강화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개탄함. 9일 龍仁 도착. 10일 廣州 漢山에 도착하여 江都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음. 12일 조정에서 강화를 추진하며 각도의 병사와 의병을 퇴각하도록 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함. 13일 남한산성에 들어가 김상헌‧정온 등을 만나 강화의 부당함을 힘써 주장. 19일 최명길 등이 국서를 전달. 23일 오랑캐의 장사 100여 명이 칼을 들고 闕下에 도착하여 빨리 강화하기를 요구. 26일 세자가 최명길 등을 거느리고 오랑캐 진영에 감. 27일 출성하여 강화를 체결하기로 결정함. 29일 오달제(吳達濟)와 윤집(尹集)이 척화(斥和)의 죄로 하직하고 청나라 진영에 감. 30일 임금과 세자가 출성하여 淸主에게 항복. 2월 1일 척화를 주장한 제신(諸臣)과 마주하여 통곡한 뒤 고향으로 출발. 4일 충주에 도착, 5일 조령을 넘어 문경 도착. 9일 오후에 집에 도착
후지(後識) 25
아들 신점(申坫)이 倡義錄 뒤에 붙인 後識. 府君은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였으며, 광주에 도착하여 강화의 그릇됨을 주장하였다. 난리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 미곡(薇谷) 아래 집을 짓고 살다가 임종하였다. 부군은 두 차례나 국난에 나가고 학덕이 높았으나 찰방과 참봉에 그쳐 온축한 바를 펼치지 못하였다. 평소에 견문한 바를 권말에 적어 붙인다
후서(後敍 )(1867) 26
강란형(姜蘭馨)(1813~1881)이 倡義錄 뒤에 붙인 글. 호계 신적도 선생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두 차례에 걸쳐 倡義하고 斥和를 주장한 분으로 창의는 김식‧정홍명(金湜‧鄭弘溟), 척화는 홍익한‧오달제‧윤집(洪翼漢‧吳達濟‧尹集)과 비슷하니 대의와 높은 절개는 천추에 빛날 것이다
발(跋)(1916) 27
장석영(張錫英)이 倡義錄 뒤에 붙인 跋文. 공은 家學과 心法의 正要를 얻어 학덕이 높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창의하여 척화를 주장하였다. 후손 돈식(敦植)이 공의 사적이 없어질까 걱정하여 공의 시문과 倡義 관련 기록을 간행하려고 하면서 나에게 글을 부탁하기에 적는다
호계선생유집권지오 (부록) 虎溪先生遺集卷之五 (附錄)
유사(遺事)(1667) 1
신채(申埰)가 아버지 신적도(1574~1663)가 임종한 4년 뒤에 찬한 遺事. 부군은 신흘(申仡)과 박윤(朴倫)의 딸 순천박씨 사이에서 1574년(선조 7) 12월 29일 도암리(陶巖里)에서 출생하였다.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에게 수학하여 1605년(선조 38) 향시에 장원하였고, 1606년 열도(悅道)와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부친과 모친의 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렀고, 1620년(광해군 12) 폐모론(廢母論)에 가담하였던 관찰사 鄭造가 의성의 氷溪書院에 이름을 적고 가자 칼로 없애버렸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號召使 장현광의 추천으로 의병장이 되어 창의하였고, 대궐에 나가 상소를 올려 상운찰방(祥雲察訪)에 임명되었다. 1632년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시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은숙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이끌고 행재소로 가서 척화오국(斥和誤國)의 상소를 올린 뒤 임금이 끝내 항복하자 집으로 돌아와 薇谷 아래에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살다가 1663년(현종 4) 7월 1일 正寢에서 90세로 임종하였다. 부인은 첨정(僉正) 순(淳)의 딸 坡平尹氏(1574~1660)로 鷄卵峴에 初葬하였다가 부군이 죽은 뒤 의성현 서쪽 安平面 鷹峯에 장례를 모셨고,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행장(行狀) 7
김도화(金道和)가 후손 상하(相夏) 등의 부탁을 받아 찬한 신적도의 행장. 선생은 1574년(선조 38) 12월 29일 의성현 도암리(義城縣 陶巖里) 집에서 출생하여 정구와 장현광에게 수학하였다. 1605년 향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14년 부친과 모친의 상을 당하고, 1620년 관찰사 정조가 빙계서원의 원안에 이름을 적고 가자 없애버렸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서울로 가서 상소를 올리고 상운도찰방(祥雲道察訪)에 임명되으며, 1632년 齊陵과 健元陵 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이끌고 행재소로 가서 斥和誤國의 상소를 올린 뒤 고향으로 돌아와 鶴山 薇谷 아래에 採薇軒을 짓고 살다가 1663년 7월 1일 90세로 임종하였다. 12월 20일 安平面 鷹峯에 장례를 지냈다. 부인은 僉正 淳의 딸 파평윤씨로 㙫‧均‧埰‧坫 등 아들 넷, 金尙珏과 鄭復亨에게 출가한 딸 둘을 두었다.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있으며 1867년(고종 4)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묘표(墓表) 11
洪萬朝(1645∼1725)가 찬한 신적도의 묘표(墓表). 신적도는 어려서 鄭逑와 장현광(張顯光)에게 수학하였으며,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14년 부모상을 만나 삼년상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兵糧을 모집하여 출병하였으나 강화가 체결되자 대궐에 가서 상소를 올려 상운도찰방(祥雲道察訪)에 임명되었고, 이후 齊陵과 健元陵 참봉에 임명되었다.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출병하여 행재소에 가서 상소를 올렸다. 전식과 이경석이 출사를 권했으나 사양하고 귀향하여 미곡(薇谷)에 초가를 짓고 거주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부인은 僉正 淳의 딸 파평윤씨로 4남 2녀를 두었다
묘표후지(墓表後識 )(1901) 13
李種杞가 1901년 5월에 후손 相憲의 부탁을 받아 洪萬朝가 찬한 신적도의 墓表 뒤에 붙인 글. 1856년(철종 7)에 士林이 丹邱에 서원을 세워 제향을 올리고 있고, 1867년(고종 4)에 繡衣使 朴瑄壽가 장계를 올려 通政大夫 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묘갈명(병서) 墓碣銘(幷序) 13
李中轍이 후손 敦植의 부탁을 받고 金道和가 찬한 행장을 바탕으로 하여 지은 신적도의 墓碣銘. 어려서 從兄 정봉(鼎峯) 선생에게 수학하고, 임진왜란 때에 할아버지가 의병을 일으켰으며 아버지의 명에 따라 入山하고 난이 끝난 뒤에 장구와 장현광에게 수학하였다. 1605년 향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동생 悅道와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14년 부모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르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 거병하여 상운도찰방, 1632년 제릉참봉에 임명되었고, 1636년 의병을 일으켰으며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학산에 채미헌을 짓고 영재를 교육하다가 1663년에 세상을 떠났다. 孝友와 忠節로 이름이 났으며 사림이 서원을 세우고 조정에서 이조참의에 추증하였다. 부인은 파평윤씨로 4남2녀를 두었다
문소읍지(聞韶邑誌) 17
申悅道(1589~1659)가 편찬한 『聞韶志』 중 신적도 부분을 발췌한 글. 신적도는 1606년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정구와 장현광에게 수학하여 淵源之學을 얻었다. 정묘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찰방에 임명되었고, 1632년 제릉참봉에 제수되고,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척화를 주장하였다. 학산 미곡에 집을 짓고 살다가 임종하였다
단구서원상량문(丹邱書院上梁文)(1856) 17
1856년 丹邱書院을 지을 때에 柳疇睦이 찬한 단구서원의 상량문. 신적도는 충효가 뛰어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척화를 주장하였다. 신적도‧申悅道‧申埰 세 분을 단구서원에 모셔 景慕의 뜻을 부친다
봉안문(奉安文)(1856) 20
1856년 신적도를 단구서원에 봉안할 때 지은 李敦禹의 奉安文. 신적도는 충효를 겸하였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거의하여 척화를 주장하였고, 병자호란 이후 학산 미곡에 집을 짓고 書史로 自娛하였다. 신적도‧신채와 함께 家學을 계승하고 충효가 뛰어나기에 단구서원에 모신다
상향축문(常享祝文) 20
신적도를 단구서원에 모신 뒤 祭享할 때 올린 祝文. 신적도는 학문이 스승의 비결을 전하고 의리가 나라의 기강을 부축하였으니 제사가 끝이 없으리라고 하였다
수의박선수계문(繡衣朴瑄壽啓文)(1867) 21
경상도 암행어사 朴瑄壽가 1867년(고종 4) 조정에 신적도의 贈職을 주청한 啓文. 신적도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키고 상소를 올려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며 교육에 힘쓰다 임종하였다. 그의 忠義를 襃獎해야 하니 該曹에서 품신해주기를 청하였다
정원초계(政院草啓)(1867) 21
승정원에서 1867년에 신적도에게 증직해주기를 청한 草啓. 도승지 趙性夏는 경상도 암행어사 박선수의 別單에 의거하여 초계를 올려 道學忠節이 있는 故 察訪 신적도에게 贈職의 은전을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이조회계(吏曹回啓)(1867) 21
이조에서 1867년에 신적도의 증직과 관련하여 임금께 올린 啓文. 이조판서 曺錫雨는 경상도 암행어사 박선수와 의정부 초계에 의거하여 신적도에게 특별히 贈職의 은전을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1867년에 신적도를 이조참의에 추증하는 교지가 내리자 무덤에 고하고 副本을 태울 때에 이조판서 한계원(韓啓源)이 찬한 告由文. 신적도는 정구와 장현광의 학문을 이었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으며 孝友가 뛰어났다. 200여 년 동안 덕행이 드러나지 않다가 나라에서 이조참의에 증직하니 자손에게는 영광이고 공에게는 보답이 있게 되었다
연증시고묘문(延贈時告墓文 )(1867) 22
1867년에 신적도가 이조참의에 추증되자 후손 申相夏가 무덤에 고할 때에 찬한 글. 공은 충절과 학행이 뛰어나 나라에서 증직의 은전을 내리니 후손들이 감격한다고 하였다
도유생청가증상언(道儒生請加贈上言) 23
경상도 유생들이 신적도에게 贈職을 더해주기를 청한 上言. 충신 신적도는 어려서 정구‧장현광에게 수학한 사림의 宗匠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척화를 주장하였고, 학산 미곡에 채미헌을 세우고 은거하며 강학하였다. 200년이 지나도 나라의 은전이 없어 울적하였는데 1867년 박선수의 장계로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그러나 3품의 증직은 그의 貞忠大節과 實德正學에는 미치지 못하니 증직을 높여주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사림통문(단구서원타령시) 士林通文(丹邱書院妥靈時) 25
단구서원에 신적도 등의 位牌를 모실 때에 지은 金奭裕의 通文. 신적도와 신열도, 신적도의 아들 신채는 德學으로 사림이 경모하고 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충의를 떨쳤고 평소 孝友가 뛰어나 兩世三賢이 배출된 명문이다. 서원에 위패를 모시면서 사림에 통문을 돌리니 많이 참석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호계선생유집권지육(부록) 虎溪先生遺集卷之六(附錄)
사우유찰(師友遺札) 1
師友인 장현광(張顯光)‧정온‧이준‧김응조‧정유숙‧최현‧이경석‧이민구‧이경용‧이당규(鄭蘊‧李峻‧金應祖‧鄭惟熟‧崔晛‧李景奭‧李敏求‧李景容‧李堂揆) 등 10인이 신적도에게 보낸 10편의 편지. 장현광은 편지를 받고 날마다 성현의 서적에 침잠하는 것을 좋게 여겼고, 정온‧이준 등은 오래 헤어진 채 만나지 못하는 아픔과 知己에 대한 그리움을 적었고, 이경용은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문하는 정을 표현하였고, 이당규는 성균관에서 몇 달 전에 떠난 신적도를 그리면서 조만간에 방문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제문(祭文) 4
정유숙‧이정벽‧김상원(鄭惟熟‧李廷薜‧金尙瑗) 등 3인이 신적도의 덕행을 기리고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3편의 제문. 정유숙은 지난날 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의 뛰어남과 林泉에서 自樂하던 풍모를 그리워하였고, 이정벽은 영남의 도학자로 盛德과 大業을 이루었다고 하였고, 김상원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창의한 충절을 기렸다
만사(挽詞) 6
金應祖 등 21인이 신적도의 학행과 충절을 기리고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22수의 만시. 金應祖(칠언율시)‧李景奭(오언율시)‧張應一(칠언율시)‧洪汝河(오언율시)‧申弘望(칠언율시)‧南海準(칠언율시)‧金尙瑗(오언율시)‧金尙瑜(칠언고시)‧南夢賚(칠언율시)‧金宗一(칠언절구와 칠언율시 각 1수)‧朴翊(칠언율시)‧金尙琦(칠언율시)‧金時忱(오언율시)‧洪仁量(칠언율시)‧朴廷薜(칠언율시)‧沈玖(칠언율시)‧朴檜茂(칠언율시)‧李爾松(칠언율시)‧金炫文(오언고시)‧呂孝閔(칠언고시)‧丁瑜(칠언율시)의 작품이 차례로 실려 있다
증은하장(贈恩賀章) 11
강난형(姜蘭馨) 등 32인이 1867년 신적도를 이조참의에 추증하자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39수의 祝詩. 姜蘭馨(칠언율시와칠언절구 각 1수)‧李明迪(상동)‧李彙承(상동)‧張錫駿(칠언율시)‧張龍逵(칠언율시)‧柳進徽(칠언율시, 幷序)‧柳芝榮(칠언율시)‧李用基(칠언율시, 幷序)‧李驥相(칠언율시)‧李以伋(칠언율시)‧李庭德(칠언율시)‧金濟寅(칠언율시, 幷序), 許元栻(칠언율시 2수)‧金容湜(칠언율시)‧黃建周(칠언율시)‧金濟源(칠언율시 2수)‧張祚遠(칠언율시)‧金炳礪(칠언율시)‧李相善(칠언율시)‧趙錫龍(칠언율시)‧丁義元(칠언율시)‧申致黙(칠언율시)‧南夔壽(칠언율시)‧宋泰寅(칠언율시)‧金喆銖(칠언율시)‧丁達敎(칠언율시)‧柳明均(칠언율시)‧李以鉉(칠언율시)‧金道和(칠언절구와 칠언율시 각 1수)‧申敦植(상동)‧許墉(칠언율시)‧金翰周(칠언율시)의 작품이 차례로 실려 있다. 대부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창의하여 국난에 나아갔던 충절을 기리고 경모하는 마음을 기탁하였다
후서(後敍)(1901) 22
후손 申相憲이 1901년 3월에 찬한 문집의 後敍. 선생은 학문이 깊고 충효의 행실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저술이 많이 유실되었기에 시문을 찾아 편집하고, 만사와 墓道文, 奉安文 등을 뒤에 붙여 간행하고자 한다
발(跋)(1916) 23
곽도(郭鋾)가 1916년 추석에 후손 申敦植의 부탁을 받아 찬한 문집의 跋文. 후손들이 신적도의 시문 약간을 수습하여 간행하려 한다. 선생은 文武를 겸비하였고, 遺篇 중 心性에 대해 논한 여러 說과 용학이도(庸學二圖), 창의록(倡義錄)에서 학문적 성취와 평생의 지향을 엿볼 수 있다
발(跋)(1918) 24
이중구(李中久)가 1918년 9월에 찬한 문집의 발문. 역대로 도덕과 절의를 겸비한 사람으로는 정몽주와 길재, 장현광(張顯光)과 정온(鄭蘊) 등을 들 수 있는데, 선생의 遺集과 사적을 보면 두 가지를 겸했음을 알 수 있다
발(跋) 1
후손 신상하(申相夏)가 1905년 3월에 찬한 문집의 발문. 아들 申埰가 遺集 7책을 편집하였고, 장차 간행하려고 宗家에 보관하였는데 1874년 화재로 모두 불타버렸다. 이에 여러 곳에서 遺文을 수집하여 겨우 문집을 편집하게 되었다
후손 신돈식(申敦植)이 1919년 10월에 찬한 문집의 발문. 선생은 학문이 깊고 절의가 뛰어난 분인데, 선대부터 문집을 간행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간행하려 의견을 모았기에 몇 마디 말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