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跋 등의 자료에 따르면 아들 申埰가 遺集 7책을 편집하여 후일에 간행하려고 宗家에 보관하였는데, 1874년에 화재가 일어나 모두 불타버렸다고 한다. 이에 후손들이 신적도의 遺文을 널리 수집하여 문집을 편집하는 한편 행장‧墓道文‧序跋 등을 받아 간행하였다.
권수에 柳必永의 서문, 권말에 申相憲‧郭鋾‧李中久‧申相夏‧申敦植의 발문이 있으며 각 권수에 목록이 실려 있다.
卷1에 歌와 操 각 1편‧시 42題 50首‧疎 3편‧書 16편, 卷2에 잡저 12편‧箴銘 4편‧祭文 6편, 卷3과 권4에 倡義錄이 실려 있다. 卷5와 卷6은 부록으로 卷5에 遺事와 行狀‧墓表 등 17편, 卷6에 師友遺札 10편‧제문 3편‧만사 22수‧贈恩賀章 39수‧후서와 발문 등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평소 친족 및 師友 등과 수창한 시편 내지 병자호란을 즈음하여 지은 시편이 많고, 柳成龍‧鄭逑 등을 애도하며 지은 만시도 14수가 실려 있다. 疏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斥和를 주장한 상소와 金燁‧金煜‧金燦 三烈士의 襃獎을 청한 상언이 있으며, 편지는 鄭逑‧張顯光‧鄭經世‧李埈‧李景奭‧鄭蘊 등의 師友 및 자식들에게 보낸 것이다. 잡저에는 性‧心‧情‧意‧志‧仁義禮智‧太極‧陰陽 등에 대하여 논변한 글, 집안사람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지은 글, 採薇軒을 건립하고 지은 기문과 상량문 등이 있으며, 제문은 申祐‧鄭逑‧張顯光‧申達道 등 師友 내지 집안사람들을 치제할 때 지은 것이다. 倡義錄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倡義 관련 기록을 모은 것으로 卷3에는 정묘호란 때 신적도가 士民과 義所에 보낸 글 및 號召使 張顯光과 鄭經世에게 올린 글, 임금의 敎書와 諭書, 號召使와 管餉使의 關文 등이 실려 있고, 卷4에는 병자호란 때 신적도가 의성현의 사민에게 보낸 글, 1636년 12월 20일부터 1637년 2월 9일까지 의병에 참여했을 때의 주요 일정과 주변의 동정을 적은 倡義日錄이 있고, 말미에 申坫‧姜蘭馨‧張錫英이 倡義錄에 붙인 발문 등이 실려 있다. 卷5에는 신적도의 학행과 충절 등을 적은 遺事‧行狀‧墓表‧墓碣銘 및 丹邱書院 배향 관련 奉安文과 祝文, 1867년 吏曹參議 추증과 관련된 狀啓‧草啓‧敎旨 및 告由文‧上言‧通文 등이 실려 있다. 卷6에는 張顯光‧鄭蘊 등이 신적도에게 보낸 10편의 편지를 모은 師友遺札, 鄭惟熟 등이 지은 3편의 제문, 金應祖 등이 지은 22수의 만사, 姜蘭馨 등이 1867년 신적도의 이조참의 추증을 기념하여 지은 39수의 祝詩가 실려 있다.
신적도는 좌승지에 추증된 城隱 申仡과 副尉 朴倫의 딸 순천박씨 사이에서 1574년(선조 7) 12월 29일 義城 陶巖里 집에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는 元祿으로 이황과 주세붕에게 수학하여 孝學으로 정려되었으며, 후에 호조참의에 추증되고 藏待書院에 배향되었다. 신적도는 申祐‧申元祿 등 충효를 중시하는 家學의 연원을 이었고, 또한 鄭逑와 張顯光의 문하에 출입하여 李滉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1605년(선조 38) 향시에 장원하자 柳成龍이 그 재주를 칭찬하였고, 1606년 막내 悅道와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부모상을 당하자 정성을 다하여 3년상을 치렀다. 仁穆大妃의 廢母論에 가담하였던 鄭造가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1620년 의성의 氷溪書院에 와서 院案에 이름을 적고 가자 칼로 없애버렸고, 후일 심문에 임해서도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號召使 장현광이 의성현의 의병장으로 추천하였고, 의병을 규합하여 북상하던 중 강화가 이미 체결되자 식량을 서울로 수송하고 대궐에 가서 척화의 상소를 올렸다. 임금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비답을 내리고 祥雲道察訪에 임명하였다. 부임한 뒤 몇 년이 되지 않아 말을 살찌우고 백성들을 소생하게 하였으나 병이 들어 돌아가게 되자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공덕을 기렸다. 1632년 齊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시 健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은숙배하고 돌아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이끌고 廣州 南漢山城으로 들어갔으나 이미 강화를 체결하는 과정인지라 상소를 올려 斥和가 나라를 그르치는 일임을 역설하고, 金尙憲‧鄭蘊 등과 통곡한 뒤 칠언절구 1수를 지어 자신의 뜻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1월 30일 임금이 끝내 淸主에게 항복하기에 이르자 고향으로 돌아와 鶴山 薇谷 아래에 採薇軒을 짓고 講學을 하며 지내다가 1663년(현종 4) 7월 1일 正寢에서 90세로 임종하였다. 12월 20일 安平面 鷹峯에 장례를 지냈다. 부인은 執義 師哲의 현손녀이자 僉正 淳의 딸 파평윤씨(1574~1660)로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㙫‧均‧埰‧坫이고, 딸은 金尙珏과 鄭復亨에게 출가하였다.
저자는 평소 동생 達道‧悅道와 시문을 수창하며 형제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였으며, 李埈‧鄭蘊‧趙絅‧全湜‧金應祖‧柳袗 등과 道義之交를 맺었다. 1856년(철종 7) 고을 사람들이 丹邱書院을 건립하여 배향하였고, 1867년(고종 4) 암행어사 朴瑄壽의 장계로 인하여 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