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1은 시 220수, 卷2∼5는 書 119편, 卷6은 잡저 10편, 권7은 序 9편, 記 12편, 卷8은 식발(識跋) 12편, 잠명(箴銘) 4편, 상량문 4편, 卷9는 제문 21편, 묘표 2편, 卷10은 묘지명 12편, 묘갈명 3편, 비문 2편, 卷11은 행장 9편, 전(傳) 1편, 卷12는 부록인 행장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후기 의성에 살던 처사 학자인 신체인은 비록 전원에 은거했던 처사로서 안질에 걸려 고생을 했지만, 독실한 학자로서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겼다. 내용이 간단하지 않고깊이가 있으며 분량도 많은 장문의 논설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저술을 검토해 볼 때, 당대의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들과 교유하고 그들의 학문적 업적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書에는 한미한시골 선비가 독서로 낙을 삼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누누이 그려져 있고 특히 저자가 평소 눈병으로 인해 고생하는 사연이 자주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김종덕, 유장원 등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과심오한 학문적 대화를 주고받을 만큼 깊이 있는 공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에게 보낸 편지가 매우 많다. 또 김종덕에게 보낸 편지에는 『심경강록강보』의 간행에 관련된 내용이 많다는 점은 특기할만한 사실이다. 그들은 편지를 통해 『심경강록간보』에 관해 많은 의견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덕은 『심경강록간보』라고 하는 조선시대 『심경』 관련 주석서 가운데 가장 방대한 저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거질의 문집을 남길만큼 당시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또 동암 유장원(東巖 柳長源)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유장원이 지은 『계집고증(溪集考證)』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계집고증』은 퇴계집에 대한 주해서로서 가장 내용이 충실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김종덕, 유장원 등 당대의 영남좌도에서 가장 핵심적인 학자들과 밀접한 교유를 나누고 있을 만큼 학문적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書 가운데 특히자질들에게 보낸 家書가 있는데, 그 중 거접(居接)에 참석하고 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거접에 참여하고 있는아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이 있어서 당시 거접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잡저(雜著) 가운데 「천학종지도변(天學宗旨圖辨)」은천주교에 대한 비판서이다. 근자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천주학에 기호지역의 총명한 인재들이 대거 중독되었다고적고 있다. 분량도 상당히 방대한 편이며, 저자의 서학비판에관련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 「중하상불재리면변(中何嘗不在裏面辨)」을보면 저자가 상당히 성리설에 해박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이 발하기 이전과 이후의 상태에 관한 논쟁은성리학에서도 매우 미묘한 부분인데, 저자는 상당히 치밀하게 장남헌과 주자의 학설을 분석하면서 비판하고있다.
신체인은 1731년(영조 7)에 의성(義城)에서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소질이 있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향시에응시하여 일등으로 합격했으며 1764년(영조 40)에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의문하에 입문했다. 신체인은 대산 문하에 입문하기 전에는 강와 임필대(剛窩任必大)(1709~1773)에게 배웠으며 후에는 구사당 김낙행(九思堂金樂行)(1708~1766)에게 질의하면서 도학이 있음을 깨달았다.1781년(정조 5)에 이상정이 사망하자 신체인은도학이 단절될 것을 우려하여 동문들과 함께 학문에 더욱 힘썼다.
1782년(정조 6)에 금연정사(錦淵精舍)가완성되자 왼쪽 방을 主敬齋, 오른쪽 방을 집의재(集義齋)라 이름 붙였다. 그는 세속의 영화를 구하지 않고 스스로 즐기고자했으며 집안 살림이 어려워 어떤 때에는 끼니도 잇기 어려웠지만 걱정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1786년(정조 10)에 빙계서원(氷溪書院)의 동주가 되었다. 신체인은 통강례(通講禮)를 행하고자 하여 주자의 월삭회약(月朔會約)을 모방하여 의절까지 마련하였으나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만두고 말았다.
만년에는 눈병으로 인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신체인은 눈을 감고 정좌하여 존양 공부에 힘을기울였다. 1807년(순조7)에 고을 현감 김상임(金相任)이 신체인의경술과 문장이 일세의 모범이 된다고 하여 천거하였고, 연이어 방백 윤광안(方伯 尹光顔)과 정동관(鄭東觀)이 각각 1808년과 1809년에신체인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1812년(순조 12) 4월 초3일에 세상을 버리니 그의 향년은 82세였다. 6월 24일속동 곤좌(涑洞 坤坐)에 안장되었다.
신체인은 한유(韓愈)를특히 좋아했으며 천문지리‧병가‧산수‧복서‧의약 등 섭렵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지만, 중년 이후로는 오로지 정주학에만 전념하였다. 성품이 간략하고 거짓이없었으며 언행에 있어 준엄함이 있었다. 평생을 가난하게 지냈지만 가난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최수구‧이종수‧김종덕‧유장원‧조술도(崔數咎‧李宗洙‧金宗德‧柳長源‧趙述道)등과는 도의결을 맺고 긴밀한 학문적교유를 지켜 나갔다.
신체인의 학문은 주경(主敬)을기본으로 하고, 정좌(靜坐)를요법으로 삼았으며, 정제엄숙(整齊嚴肅)과 정의관존첨시(正衣冠尊瞻視)의공부에 힘을 기울였다. 일찍이 경(敬)을 논하는 학설과 敬을 지키는 공부 방법이 모든 책에 서술되어 있으나 여러 군데 흩어져 있는 관계로 배우는 사람들이쉽게 알아채지 못한다고 하여 숭경록(嵩敬錄)을 저술하기도했다.
저자의 스승인 대산 이상정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상정이 남연서원으로 가서 영천의 선비들과 함께 심경강록간보를 교정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하면서, 이 사업은 선배들이 남긴 미완의 문자를 완전하게 하는 것으로 사문을 위해 다행이라고 했다. 또 저자 자신도 말석에 참석할 수 있다면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참석을 희망했다.
上大山先生(상대산선생)(庚寅)
우곡유집(雨谷遺集)의 교감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었다. 유집이 간행됨으로써 실천의 아름다움과 문장의 오묘함이 후학에게 끼칠 터이니, 사문을 위하여 일대 행운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다만 전질을 보지 못하고 유숙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공부의 공효와 일과를 다룬 부분을 산거해야 한다고 한 점에 대해 깊이 생각지 않고 경솔히 대답한 것 같다고 후회했다.
上大山先生(상대산선생)(辛卯)
대산 이상정에게 새로운 벼슬이 내렸음을 축하했다. 다만 신병으로 인하여 출발할 때 직접 찾아가 전송하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조만간에 찾아뵐 것을 기약했다.
上大山先生(상대산선생)(戊戌)
인적이 끊어진 조용한 시골에서 지내는 정경을 적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접빈객하면서 틈이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글을 읽고 있다고 했다. 가르침과 배움이 함께 성장한다는 옛말을 실감한다고 하면서, 가끔 의문이 생기는 문제점을 기록해 두었다가 문목으로 올리겠다고 했다. 단계 하위지의 충절을 읊은 시 한 두 편을 지었는데 졸렬한 문장이지만 한 번 보아달라고 했다.
上大山先生(상대산선생)(辛丑)
근자에 집안 아이가 선생의 문하에 나아갔다가 돌아옴으로써 대산 이상정이 벼슬에서 풀려나 시골에서 글을 읽도록 허락받았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대군자의 출처가 시운의 성쇠와 직결될 수밖에 없음이 한스럽지만, 후생말학들이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을 보면 하늘의 뜻이 우연은 아니라고 했다. 계문제자록을 받았음을 말하였고, 성학십도에 관해서는 자세하게 읽고 의심스러운 점을 질의했다. 종질 鼎五에 대한 가르침을 부탁했다.
여구사당금공(與九思堂金公)
구사당 김낙행에게 보낸 편지이다. 함께 공부하다가 책을 싸서 돌아온 후에는 별다른 일 없이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심경질의와 대학혹문을 빌려 와서 읽고 있음을 말하고, 심경질의는 단지 보기에 편하도록 소주를 많이 생략하여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대학혹문도 왕왕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비교‧대조할 수 있는 간행본이 없어 아쉽다고 했다. 빌려온 책이 필사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與九思堂金公(丙戌)
저자는 근자에 소호를 방문했다고 하고, 그것은 단순히 동생 집에 들리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대산 선생을 뵙고 자극을 받기 위한 것이었는데, 공부는 안 하고 오며가며 사람들과 허튼 수작이나 했을 뿐이라고 했다.
與剛窩任公(辛卯)
강와 임필대에게 보낸 편지이다. 藏院에서 10일 날 열리는 강회에는 노소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하고 거기서 강독하는 교재가 태극도설이라 하니, 그 규모가 보통과 다르고 교재 또한 우리같은 사람들로 하여금 흥기하게 하는 것이라 했다. 반드시 참석해야 마땅하나 마침 여동생 혼사를 앞두고 있어서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미안해했다.
여채상서(與蔡尙書)(濟恭○丁亥)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1720~1799)에게 보낸 편지이다. 저자 문중의 선조에 대한 비문을 번암이 지은 것으로 보이며, 번암은 비문에서 자손에 관한 기록을 항렬이 낮은 사람이 오히려 높은 위치에 있고, 전세에 살았던 사람이 후세보다 낮은 위치에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그 까닭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여채상서(與蔡尙書)(戊子)
번암 채제공이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옴을 축하하고, 아울러 지난번에 문제가 되었던 비문에서 자손에 관한 기록을 둘러싸고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문중 인사의 전언과 번암이 저자 문중의 장로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손에 관한 기록을 고친 것이 번암의 의사가 아니고 기록을 담당한 문중 인사의 소행이라고 한 것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다.
여이방백(병모)(與李方伯(秉模))
방백 이병모에게 보낸 편지이다. 성인이 군주의 지위에 올라있고 현인이 방백이 되어 바야흐로 태평성대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피력했다. 또 지난번 초청에 응하고자 했으나 갑자기 병에 걸리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음을 말하고 양해를 구했다.
답이후(答李侯)(弘源○己酉)
이홍원에게 보낸 답서이다. 달 반을 출타했다가 귀가하여 7월 19일자로 보내준 간찰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아울러 생선과 술을 함께 보내준 데 대해 감사했다.
답이후(答李侯)(辛亥)
이홍원이 저자가 살던 고을 수령을 하다가 이임한 것을 아쉬워하고, 잊지 않고 편지를 보내 준 데 대해 대군자의 신의라고 칭송했다. 이미 떠난 후에 편지를 읽으니 내용이 정중하고 필적이 완연하여 현리를 통해 몇 자 적어 부친다고 했다.
여유주유장(與柳洲柳丈)(乙酉)
유주 유풍(柳洲 柳灃)에게 보낸 편지이다. 부모님 모시고 근근이 생활하자니 독서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하물며 시를 짓는 일은 어느 여가에 생각이나 하겠는가라고 했다.
여유주유장(與柳洲柳丈)(
맑은 가을날 국화가 만개하니 그대가 마음껏 흥취를 즐길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면서, 보내준 편지에 가득 담긴 저자에 대한 칭송은 지나친 면이 있으며 이것은 저자에 대한 애정 때문일 것이라고 감사했다.
여근인당이장(與近仁堂李丈)(丁酉)
근인당 이의태(近仁堂 李宜泰)에게 보낸 편지이다. 고을의 장로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니 이제 남은 사람은 근인당 뿐인데, 마땅히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나 속무에 얽매여 가지 못한다고 했다. 집안 아이가 벼슬을 얻어 숙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전하는 말로 정신과 용모가 여전하더라 하니, 이는 존양의 결과로서 후학들이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라 했다. 아버지의 상중에 어머니가 죽은 경우, 기년복을 입는지의 여부에 대해 논의했다.
여춘수재이장(與春睡齋李丈)(壬寅)
춘수재 이명천(春睡齋 李命天)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벼슬을 받아 바닷가 고을에 근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곳 풍속은 어떠한 지, 서로 왕래하는 사우는 있는지 또는 장로를 존경할 줄은 아는지 물었다. 이함창이 마침 귀양을 왔다고 하니 같은 고을에서 서로 어울리는지도 물었다. 저자는 선조 오봉(梧峯)부군의 연보를 완성했는데, 이명천에게 보내서 교정을 받아보고 싶다고 했다.
여춘수재이장(與春睡齋李丈)(己酉)
봄바람이 차가우니 원근에서 들리는 소문이 모두 흉한 소식뿐이라 했다. 석전에 강진사가 또 죽었다고 하니 통석함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라고 했다. 문을 닫고 들어앉아 있으니 무료하기 한이 없는데 다만 다행한 것은 그대에게 벼슬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눈병이 심하여 전송하지 못함을 호소했다.
답춘수재이장(答春睡齋李丈)
지난번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많은 손님을 응대하며 잠시도 쉬지 않던 모습을 적었다. 저자는 영협에서 십여 일을 보내고, 남쪽으로 내려와 단구 이종형 집에서 이틀을 머물렀고, 동파에 이르러 수일을 머물렀다고 했다. 대평 표곡에서는 유상사 형제와 1박하면서 그가 편찬한 溪集考證을 열람하고 토론했다고 했다. 저자는 도합 30여 일을 여행했다.
여춘수재이장(與春睡齋李丈)(甲寅)
이명천에게 벼슬이 내린 것을 다시 축하하고, 찾아뵙고 축하하면서 가르침을 받고 싶지만 신병으로 인하여 가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또 손자가 시에 능하여 임금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니 장래가 기대된다고 했다. 다만 과거시험 날짜가 장대서원의 향사와 겹쳐지니,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했다.
여시이유장(與柴里柳丈)(丙戌)
시이 유성림(柴里 柳聖霖)에게 보낸 편지이다. 만산홍엽의 계절을 맞아 마음 맞는 장로들과 함께 속리산‧가야산‧금오산 등을 유람하면서 문장대‧해인사 등 경승지를 돌아보고, 최치원의 유적지를 답사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평소 문하를 출입하면서 세속을 벗어난 경지를 느꼈지만 만년의 근력이 여기에 이를 줄은 몰랐다고 했다.
여이가당조장(與二可堂趙丈)(丁未)
형제의 안부를 물었다. 저자는 전염병을 피하여 부모님과 함께 여름 동안 두문불출하느라 1년을 허비했다고 한탄했다. 저자에게 부탁한 글은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별도로 歌詩 3장을 서문을 붙여서 보내니 한번 보고 비웃어 달라고 했다.
답숭남신장(答嵩南申丈)(丁未)
숭남 신광익(嵩南 申光翼)에게 보낸 답장이다. 3월 17일자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봄날 경치를 즐기며 한가하게 사는 시골 풍경을 묘사하면서 신광익의 가르침을 구한다는 소회를 적었다. 마지막으로 시 한 수를 보내니 근자의 심경을 살펴 달라고 했다.
답숭남신장(答嵩南申丈)
5월 그믐에 보낸 편지를 받았다고 하면서 지난번 보낸 편지에 답장도 못했는데 연이어 편지와 시문, 그리고 예설에 관한 문목을 받으니 송구하다고 했다. 질의에 답할 지식은 없지만 몇 가지 의견을 적어 보내니 참고하시라고 했다.
별지(別紙)
신광익의 문목에 대한 답변을 별지에 적었다. 먼저 질문을 한 줄로 적고 답변을 적었다. 질의의 내용은 조주(祧主)의 방제(旁題)는 수정할 수 있는가의 여부, 庶子의 소생모를 무엇이라고 칭할 것인가의 문제, 적자손이 없는 경우 서자손이 봉제사를 할 수 있는지의 문제, 전란 중에 신주를 매안(埋安)하는 문제, 승중손(承重孫)의 妻에 대한 복제(服制) 문제 등이다. 별지의 말미에 정명고(鄭鳴皐)의 견해를 소개하기 위해 그의 편지를 첨부했다.
답숭남신장별지(答嵩南申丈別紙)
신광익의 예설에 대한 답변을 별지에 적었다. 마찬가지로 질의의 요지를 한 줄로 적고 이어서 답변을 적었다. 질의의 요지는 상복에 따른 冠의 종류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고, 승중손의 처에 대한 복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의 문제도 다시 논했다.
여숭남신장(與嵩南申丈)(己酉)
가을 기운이 낙동강 상류에까지 미쳤음을 말하고, 부모를 모시고 적막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근자에 손자를 얻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신광익의 임진록과 시편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흥감함을 느낀다고 했다. 변변치 못한 사람에게 또 다시 예설을 질의하니 졸렬한 견해를 별지에 적었다고 했다.
별지(別紙)
1787년 8월에 질의한 내용과 9월초에 질의한 내용인데, 요지는 복제에 관해 주자가례와 의례의 내용이 다른 문제, 후계자가 정이부체(正而不體)에 해당하는 경우 복제 문제, 같은 골짜기에 산소가 여러 기인 경우 별제를 하는 것이 옳은지 합제를 하는 것이 옳은지의 문제, 적서의 구분은 엄격하지만 골육의 은혜를 동일하므로 복제에도 차별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퇴계설에 대한 해석 문제 등이다.
答嵩南申丈
수일 전에 손이 찾아와서 편지를 건네주었는데 신광익의 초3일자 편지였다고 했다. 저자는 안질이 끝내 낫지 않아서 언제나 눈앞이 뿌옇다고 했다. 愼생원이라는 사람이 신광익에게 글을 청했는데, 신광익은 저자에게 부탁하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신생원의 이름은 일찍이 들었지만 일면식도 없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의 글을 보니 호걸지사임이 분명하다고 했다.
회병선생문집(晦屛先生文集)권지삼
書
여유곡권장(與酉谷權丈)(정린(正鄰)○庚戌)
유곡(酉谷)에 사는 권정린(權正鄰)에게 보낸 편지이다. 홍범구주에서 각각의 항목에 속하는 세부 항목에 대해서, 권정린이 이전에 저자에게 질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당시에 갑자기 질문을 받아서 잘못 대답을 했다고 하면서, 수정된 내용을 상세하게 서술하면서 자신의 경솔함을 자책했다.
여종장(與宗丈)(龍起○乙酉)
가장(家狀)을 짓는 일은 문중의 큰 과제이니 저자가 구구한 식견으로 함부로 손댈 일은 아니지만, 문중의 장로들이 관여할 처지가 못 되고 종숙께서도 떠날 시간이 급하여 부득이 맡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유사(遺事)만 수록하려고 했으나 모두가 가장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부득이 짓게 되었지만, 유사와 기타 문자도 부록으로 수록해야 할 것이라 했다. 제목은 안렴사신공실적(按廉使申公實蹟)이라고 했다. 그 외 몇 가지 수정해야 할 사항을 말했다.
여종형(與宗兄)(관모(觀模)○辛亥)
지난번 질의하신 아버지의 상중에 죽은 사람에 대해서 그 아들이 승중(承重)을 하는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경황 중에 잘못 대답을 했다고 했다. 아버지를 이어서 아들이 승중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지만, 변복(變服)의 상황이 아니라면 갑자기 승중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했다. 만약 조부의 소상(小祥) 전이라면 소상 때 승중을 하면 되고, 소상을 지낸 후라면 승중을 하는 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예법에 대해 저자에게 질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답강상사(答姜上舍)(己丑)
진사 강필면(姜必勉)에게 답한 편지이다. 북쪽으로 여행하고자 했던 계획은 결국 마가 끼어서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약속에도 운수가 있음을 알겠다고 했다. 보내준 시에 대해 품평하였다. 낚시하기 좋은 때가 되었다고 했다.
답강상사(答姜上舍)(辛卯)
보내주신 편지를 보니 내용이 간절하면서도 해학이 넘쳐 흐름을 알았다고 했다. 저자는 편지를 쓸 때 이런 점이 부족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노형께서 평소 남을 대하는 상정인지 물었다. 또 평소 수양이 깊고 얕음이 드러나는 것이며, 스스로 검속함이 지나쳐서 명랑함이 부족한 것을 한으로 여긴다고 했다.
답강상사(答姜上舍)(壬辰)
늘그막에 이르러 온갖 병이 꼬리를 물고 발생함을 한탄했다. 저자는 강필면보다 10여세 아래인데도 불구하고 역시 이러한 병통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남은 이빨이 몇 개 되지 않고 음식을 씹을 때 가끔 우스울 때가 있다고 했다. 淵上에 초가를 짓고 낚싯대를 매고 아침저녁으로 낚시하는 즐거움이 솔솔하며, 가끔은 사정(沙汀)을 불러내어 함께 즐긴다고 했다.
답강상사(答姜上舍)(乙巳)
시골에서 한적하게 지내는 즐거움을 묘사하고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골짜기에 꽃구경을 하다 돌아와서 능력껏 경전 수십 행을 읽는다고 하고 강필면에게도 즐거움을 함께 느끼기를 바란다고 했다.
여조첨지(의양)(與趙僉知(宜陽))
첨지 조의양(趙宜陽)에게 보낸 편지이다. 보내주신 편지를 보니 내용이 정중한 것과 더불어 필체가 그린 것 같기도 하고 쓴 것 같기도 하여 구십 노인의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조의양보다 십여 세 아래인데도 불구하고 신병은 날로 더하고 계획했던 학문은 진보가 없어 세상에 죄를 짓는 기분이라고 한탄했다. 그 외 빈한한 선비의 일상에 대해 적었다.
답조월하(答趙月下)(癸巳)
월하 조운도(月下 趙運道)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 받고 잘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고, 저자는 江上에 집을 짓는 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근자에 비가 와서 파종도 해야 하는데 수 삼 명의 종들을 데리고 힘닿는 대로 하고 있다고 했다. 부탁하신 국화는 보냈는데 비가 와서 뿌리가 마르지는 않을 것이라 했다.
여조월하곤계(與趙月下昆季)(己酉)
조운도(趙運道) 형제에게 보낸 편지이다. 지난번 만났을 때를 회상하면서 그간의 풍류와 학문에 관해 말했다. 선비 이치도(李致道)의 죽음을 말하면서, 스승의 家學이 땅에 떨어져 우리 당의 사풍이 손상될 것을 우려하였다. 서울지역의 물정이 더욱 부박해짐을 걱정하고 다행히 임금의 뜻이 저렇듯 확고하고 경연에서도 안동유림에 대해 언급하실 정도이니, 이러한 때일수록 처신에 있어 신중하고 자질들과 연소한 무리들이 혹시라도 수작함에 교만함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했다.
여조월하곤계(與趙月下昆季)(乙卯)
노쇠와 질병으로 두문불출하고 집안에 들어앉아 있는 저자 자신의 처지를 말하면서 개탄했다. 다행히 조운도 형제는 한 때의 불행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독서와 조섭을 하고 있다고 하니, 벗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조운도의 생애에 시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를 위로하면서 동병상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이후산(與李后山)(丙午)
后山 李宗洙에게 보낸 편지이다. 지난번 만났을 때 심경강록간보의 문제점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은 진실로 옳은 말씀이라고 했다. 간역 사업이 이미 다 끝나고 반질이 많이 되었다고 하지만, 지금부터 追改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끝내 후학들에게 혼란이 될 것이라 했다. 저자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천사 김종덕과 만났다고 했다. 그 외도 간보에 포함되어 있는 문제점에 관해 여러 가지로 사례를 들었다. 저자는 이러한 의심이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심하고 있는 것인지 두려운 마음이 들지만, 이종수는 그들과 함께 교감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말씀드린다고 했다.
답이후산(答李后山)(戊申)
역병을 피해 두문불출하고 집안에서 책을 읽고 있다고 하면서, 그러나 근본 공부가 취약하여 학업에 진보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주역에 나오는 敬자의 해석 문제를 두고, 이종수는 正常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저자는 始終의 개념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 문제에 관해 장황하게 양자의 입장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여이후산(與李后山)(丙辰)
눈병이 심해 학문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고 하면서 두문불출하고 집안에 들어앉아 있으니 정신이 더욱 황폐해지고 있다고 하면서, 이런 때에 엄격한 스승이라도 곁에 있으면 구렁텅이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라 하며 가르침을 구했다. 심경강록간보에 관련된 의문점에 관해 의견을 말하고 있다.
여김도언직보곤제(與金道彦直甫昆弟)(庚辰)
천사 김종덕 형제에게 보낸 편지이다. 직보형은 언제 산에서 내려왔는지, 이번에는 무슨 책을 읽었는지 물었다. 모든 사람이 과거시험에 매달려 있는데, 직보형 홀로 단정히 앉아 수양하면서 외부의 유혹을 물리치니, 후일 우리당에서 귀의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 했다. 저자는 스스로를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체를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사람이라 더 볼 것이 없다고 했다.
여김도언곤제(與金道彦昆弟)(壬辰)
도언‧직보 형제가 서로 격려하면서 학문을 하는 모습을 보니, 저자는 아직 知行과 敬義의 실질은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틈을 내어 평소 의문으로 여겼던 점과 사우간에 토론해 보지 못했던 부분을 가지고 형제분을 만나서 물어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점을 한탄했다. 지난번에 북쪽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귀로에 소호를 지나면서 대산선생을 만났는데 며칠을 머물렀지만 돌아오는 길이 촉박하여 질의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아쉬워했다.
여김도언직보경온홍보제곤제(與金道彦直甫景蘊弘輔諸昆弟)(戊戌)
김종덕‧김종발 등 여러 사람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번에 일을 치르면서 추위를 탔더니 병에 걸렸다고 하면서 늙음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조카 옥이 오면서 시 한 수를 갖다 주길래 보았더니 이별 후에 서로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고 했다. 천사 김종덕이 앞서 보낸 시첩의 말련이 가장 심절하고 구재 노형의 두 구절에도 사람을 격려하는 의사가 들어있어, 후생들이 감히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하는 등 주로 시에 관해 감상을 적었다.
답김도언제곤제(答金道彦諸昆弟)
편지와 시를 받고도 곧장 답장을 하지 못했음을 사과하고, 장문의 편지를 보니 백씨 형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 말이나 자획이 엄중확실한 뜻이 있고 조급함이 없으니, 이것이야 말로 오랜 수양의 끝에서 나온 것이라 연소한 무리가 가볍게 논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본래 시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의리의 향배나 말투의 허실에 구애되지 않고 한결같이 격률이 청아하고 뜻이 호탕함을 귀하니 여겨 혹여 도리와 상반되는 점이 있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당송 간에 중국의 시인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우리나라의 시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저자는 시를 짓는 자세에 관해서 김종덕과 장황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점은 저자가 시학에도 상당히 조예가 있는 학자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김도언(與金道彦)(壬寅)
단풍이 온산을 물들이는가 싶더니 얼음이 어는 한파가 함께 왔다고 하면서 안부를 물었다. 성우형과 주부형이 함께 환로에 나아가게 됨을 축하했다. 소호유고(蘇湖遺稿)를 베끼는 일은 지금 어디까지 진척되었는지 한 번 가서 보고 싶지만 여의치 않다고 했다.
여김도언(與金道彦)(癸卯)
竹泉의 부고를 들었다고 하면서, 이 사람이야 말로 말세의 인물이 아니었는데 환갑도 안 되어서 홀연히 가버렸다고 아쉬워했다. 비록 궁행 일변에 치우치는 면은 있었지만 확고부동하여 세속에 휩쓸리는 태도는 없었다고 했다. 대산선생이 역책한 후 우리 당은 귀의할 바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종질 정오(鼎五)는 뜻하는 바가 있어도 집안에서 책을 읽을 정도이니, 김종덕에게 보내서 배우게 하고 싶다고 하면서 내치지 말고 자신의 조카처럼 여기고 가르쳐 달라고 했다.
여김도언경온홍보제곤제(與金道彦景蘊弘輔諸昆弟)(乙巳)
구재(苟齋)의 죽음을 애도했다. 대산선생이 서거한 후 우리 당이 겨우 명맥을 이어온 것은 苟齋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인데, 구재가 죽은 것이 어찌 한 가문이나 한 고을의 불행에 그치겠는가라고 하면서 애통해했다. 구재는 김천사에게 동생 되는 사람으로서 동기를 잃었으니 천사에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여김도언(與金道彦)
구재가 죽고 나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도 더욱 면려하여 학문에 힘쓰자는 내용이다. 일간에 주자서(朱子書) 몇 편을 읽고 간간이 경전 몇 장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연구해 보았더니 마음에 깨닫는 바가 있었다고 하면서,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란 본래 活物이어서 잠시라도 방심하면 죽은 물건이 된다는 것이며 천리와 인욕, 誠과 僞, 人과 鬼가 갈라지는 길목이니, 진실로 공부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라는 점이라 했다. 나옹유고(懶翁遺稿)를 필사하는 일은 노형께서 많이 배려해 주신 덕분이 비로소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고 하면서, 언제 착수하게 될지는 몰라도 봄에는 한 장이라도 베껴서 김천사에게 보낼 테니 검토해 달라고 했다.
답김도언론치곡서(答金道彦論致曲書)(丙午)
학문적인 토론에 있어서 양자 간에 이견이 있고 그것이 쉽게 해소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김천사의 주장을 볼 때마다 새로운 의문이 생겨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道의 전체는 광대하여 어떤 사물도 포괄하지 않음이 없고 어떤 사물도 통섭하지 않음이 없으며 전체 가운데 한 부분은 각기 一曲을 이루고 있어서 마치 산수의 一曲과 같고 용이나 뱀의 一曲과도 같다는 취지의 말로써 이일분수의 성리학적 원리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이것을 치곡설(致曲說)이라 정의했는데 드물게 보는 긴 편지이다.
여김도언(與金道彦)(丁未)
일전에 김상사 자후 형이 와서 며칠을 머물고 갔는데 그는 백씨와 함께 주석 작업을 하고 있으며, 그들 형제와 함께 어울리면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우리가 그들의 작업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더라고 했다. 또 김상사는 심경질의간보와 행장 몇 조목을 보고는 죽은 벗의 진면목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지난번 편지의 치곡설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고 있다
여김도언제곤제(與金道彦諸昆弟)(戊申)
봄이 되어 만물이 소생하는 움직임이 도처에 있는데 저자는 겨우내 눈병이 도져 봄을 즐기지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책은 아예 보지도 못하고 지난번 김천사와 주고받은 40운 연구의 시를 찾아내어 아이를 시켜 읽게 하고, 그것을 들으면서 흥취를 돋구고 있다고 했다. 여안(汝安) 형이 작고했고 柳형은 모친상을 당했다고 알려주고 있다.
답김도언(答金道彦)(庚戌)
월전에 와운(臥雲)과 함께 횡계 옥간정‧태고와에 들렀다가 물길을 따라 아래위로 두 원로의 유적지를 찾아다녔는데, 서숙에서 며칠 머물면서 유집(遺集)을 열람했다고 했다. 살아생전에 수양하던 규모와 강론하던 지결을 만분지일이라도 느낄 수 있었는데,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에 갑자기 川城의 여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와서 갑자기 돌아오게 되었다고 했다. 강록간보는 필사가 완료되었으면 한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여김도언론심경강록간보별지(與金道彦論心經講錄刊補別紙)(丙午)
저자가 김천사의 심경강록간보를 열람하고 문제점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정리했다. 먼저 한 글자 낮추어서 문제되는 부분을 옮기고, 자신의 의견은 한 글자 올려서 정리했다. 이 지적이 실제 간보의 편찬에 얼마나 반양되었는지 모르지만, 심경강록간보 편찬에 저자가 끼친 영향이 상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여김도언(與金道彦)
난번 심경강록간보에 대해 저자의 견해를 적어 보낸 것은 이미 보았을 터인데, 어떻게 조금 참고가 되었는지 물었다. 근자에 영일정씨 정만양‧정규양 형제의 훈지양선생유고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서도 심경강록간보의 내용에 관해 언급해 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여김도언(與金道彦)(辛亥)
김천사의 형제들이 함께 절차탁마하는 것을 누누이 부럽다고 하면서, 저자 자신은 눈병이 악화되어 두문불출하고 책이나 읽는다고 했다. 문득 깨닫는 바가 있으면 아이를 시켜 적게 하지만 겨우 한 두 줄에 그치니 무슨 온고지신의 효과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심경강록간보의 제4권 맹자 과욕장 부주에 나오는 주자설에 관해 저자가 지난번에 했던 말은 완전히 억견이요 두찬이라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답김도언제곤제(答金道彦諸昆弟)
저자의 나이 60이 넘었다고 했다. 그동안 광영이라고는 없었다고 하면서 세 아이들과 둘러앉아 책을 펴놓고 성현의 말씀을 읽으면서 소요하고 근심을 잊는 것이 만년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고금의 현달들이 모두 이러한 상황에 처하는 도가 있었는데, 어찌 감정을 좇아 멋대로 하여 스스로 심성을 해치고 동지들에게 걱정을 끼치겠는가라고 했다.
답김도언제곤제(答金道彦諸昆弟)
저자의 나이 60이 넘었다고 했다. 그동안 광영이라고는 없었다고 하면서 세 아이들과 둘러앉아 책을 펴놓고 성현의 말씀을 읽으면서 소요하고 근심을 잊는 것이 만년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고금의 현달들이 모두 이러한 상황에 처하는 도가 있었는데, 어찌 감정을 좇아 멋대로 하여 스스로 심성을 해치고 동지들에게 걱정을 끼치겠는가라고 했다.
여김도언곤제(與金道彦昆弟)
만년에 궁색하게 사는 모습은 여전하고 안질은 곱절이나 악화되었다고 한탄하면서, 그럼에도 봄 동안에 여러 벗들의 도움 덕분으로 굶어죽지 않았다고 하고 특히 김천사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근체시 한 수를 보내니 화답을 바란다고 했다.
여김도언(與金道彦)
김천사가 자식을 잃은 데 대해 위로했다. 지난번에 노형께서 차마 당하지 못할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사실이 아니겠거니 했는데, 어찌 만년에 이런 일을 당했는가라고 위로했다. 저자는 자신도 연전에 다 키운 자식을 두 번이나 저세상으로 보냈고, 작년에는 조성소도 한꺼번에 자식을 둘씩이나 잃었는데 이번에는 노형이 이런 일을 당했다고 하면서 애통해했다.
여김도언(與金道彦)(甲寅)
김천사에게 첨추 벼슬이 내려진 것에 대해 확인하고 축하했다. 그러나 벼슬과 관련해서 의리에 맞는지의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또 가끔 서산재(棲山齋)로 가서 훈지 형제를 만나는지 물었다. 저자 신체인과 김종덕 그리고 정만양‧규양 형제는 특별히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혹시 흥이 올라 시를 짓거든 한 자 보내달라고 했다.
여김도언곤제(與金道彦昆弟)(丙辰)
동암(東巖)이 갑자기 세상을 떴음을 전하고 우리 당이 점점 외로워지고 있음을 걱정했다. 만가(輓歌) 두 수를 지어 보내니, 한번 보시고 교정해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했다.
여김도언(與金道彦)(癸丑)
맹자에 나오는 한 구절을 가지고 해석 문제에 관해 김천사의 견해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논증했다. 后山께서 남긴 한 마디가 후학들에게 끼친 은혜가 적지 않으니, 그는 강론과 토론을 중시함으로써 후배들이 선배로부터 영향 받는 바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자의 이견에 대해 허심탄회한 토론을 바란다는 뜻으로 보인다.
회병선생문집(晦屛先生文集)권지사
서(書)
여유숙원(與柳叔遠)(己酉)
유장원(柳長源)에게 보낸 편지이다. 중씨를 만나 유장원이 지은 계집고증(溪集考證)를 열람했다고 했다. 계집고증은 퇴계집에 대한 주해서로서 가장 내용이 충실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김종덕‧유장원 등 당대의 가장 핵심적인 학자들과 밀접한 교유를 나누고 있을만큼 학문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답이중측(答李仲則)(庚子)
李師靖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뒤늦게 집안 아이 편에 7월 그믐날짜의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몸이 노쇠함을 한탄하였고 저자나 이사정이나 우리 같은 사람이 공통으로 병통으로 삼는 것은 젊어서는 속학에 얽매여서 시간을 보냈고 늙어서는 기력이 쇠퇴함을 한탄하며 쓸데없는 말로 세월을 보내는 점이라 했다. 이사정과 저자 자신의 가정 형편을 서로 비교하면서 자신의 불우한 환경을 한탄했다.
답이중측(答李仲則)(壬寅)
산고(散稿)를 교감하는 일은 中本을 베끼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 했다. 김‧유 제형들의 의견도 그렇다고 했다. 집을 짓는 일은 농번기가 한창이라 손을 댈 수가 없는데, 흉년이 지극하여 계획대로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능력대로 책을 읽다가 틈이 생기면 지팡이를 짚고 산과 들을 소요하며 낙으로 삼는데 다만 함께 할 이가 없는 것이 한이라 했다.
답이중측(答李仲則)(甲辰)
저자가 부인을 잃은 데 이사정이 위문해 준 데 감사했다. 저자는 삼십 년 동안 두 번 상처를 했으며, 그 동안에 더욱 쇠약해졌지만 나름대로 성찰 보섭하여 여러 동지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했다고 했다. 유집(遺集)은 김사정이 두 번 교정을 거쳤으니 유감이 없다고 했다. 일전에 직보 형을 만났는데 그도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내놓았다고 했다.
여황경초(與黃景初)(壬辰)
黃啓熙에게 보낸 편지이다. 지난 해 봄에 서울에서 만났을 때 허둥지둥하다가 조용히 얘기하지도 못했으니, 지금 와서 생각하니 둘 다 이해득실에 벗어나지 못했던 까닭이라고 생각되어 부끄럽다고 했다. 평소 수양의 정도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황계희의 의견을 물었다.
여조성여(與趙聖與)(庚辰)
저자에게 자형이 되는 조진도(趙進道)에게 보낸 편지이다. 조진도의 나라에 대한 불평이 문제가 되어 조정으로부터 경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릉의 정상사로부터 들었다고 하면서, 옛사람은 이런 경우에 理자로써 법으로 삼았으니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허물하지 않는다는 교훈에 더욱 힘쓸 것을 권유했다.
여조성여(與趙聖與)(乙巳)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그리움을 전하고 있다. 소호에서 사는 이생(李甥)이 조진도(趙進道)의 문하에서 독서를 하고 싶다고 하니 가상하기는 한데, 그 사람은 정밀하게 완상하는 점이 부족하다고 했다. 저자는 조진도(趙進道)가 그로 하여금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이치를 깨달으며 다소라도 득력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여조성소(與趙聖紹)(癸巳)
조술도(趙述道)에게 보낸 편지이다. 조술도는 앞에 나온 조진도에게 형이 되며, 저자와는 도의계를 맺은 사이이다. 조술도가 상처를 했던 것으로 보이며, 오랫동안 산야에 거처하며 수양한 사람이 어찌 일시적인 존망으로 인하여 천명의 조화를 잃을 것인가라고 위로했다.
답조성소(答趙聖紹)(乙未 )
병마에 신음하다가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편지에 적어 보낸 시를 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의 즐거움은 여기에 있음을 알았다고 했다. 저자는 나름대로 공부를 하면서 책을 놓지 않는데, 매양 근심으로 하는 것은 앎이 진실하지 못하고 행동이 힘이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조술도가 산중에 조용히 앉아 외부의 유혹을 단절했음을 부러워했다.
여조성소(與趙聖紹)(辛亥)
작년 겨울에 조술도가 서울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군자가 약속을 실천함의 어려움을 알았다고 했다. 생질이 와서 근자의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또 조술도가 지은 운교문답(雲橋問答)을 읽은 적이 있는데, 정학을 높이고 사학을 억제하는 공력에 대해 깊이 감탄했으며 그러나 마지막의 일단은 겸손함이 지나치다고 했다.
여이군보(與李君普)(辛丑), 별지(別紙)
이덕중(李德中)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덕중이 근자에 저술에 의욕을 갖고 있으며 저자에게 보내어 감정을 받고 싶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면서, 이것은 불치하문의 뜻이라고 했다. 저자는 한때 문장에 뜻을 두었지만 나태해져서 이제는 시문이나 지으면서 세월을 보낸 지가 오래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덕중의 요청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이덕중을 배반하는 것이 되므로 별지에 의견을 적어 보낸다고 하면서 別紙를 첨부했다.
답이군보(答李君普)(壬寅)
이덕중(李德中)이 저자에게 공부하는 순서를 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공부에는 모름지기 순서가 있으니, 먼저 四書를 착실하게 익힌 연후에 점차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중에서 대학의 경우에는 먼저 장구를 숙독하여 모든 경전의 벼리를 파악한 연후에 혹문을 읽어서 의리의 정밀함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장구를 읽지 않고 혹문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답이군보(答李君普)(戊申)
작년에 이덕중이 과거에 급제한 자식을 잃은 것을 애도했다. 족손을 통해 들어보니 여전히 그 일로 인하여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들었다고 하면서 위로했다. 우리들이 살아갈 해도 많지 않고, 수명은 조물주가 하는 일이니 이제 그만 슬픔을 거두고 진중하라는 내용이다.
여김중립(與金中立)(己丑)
진사 金中立에게 보낸 편지이다. 선배들은 차례로 세상을 뜨고 후배들이 귀의할 바가 없어지고 저자에게 과도한 기대를 갖는 데 대한 걱정을 피력하고 있다. 옛날을 그리는 시 한 수를 지어 동봉하니, 보시고 평가를 해 주시기를 희망했다.
답김중립(答金中立(甲辰)
가을에 저자가 상처를 했을 때 위문해 준데 대해 감사했다. 저자는 오십이 넘어 홀아비가 되어 지내는 형편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피력했다. 못 위에 정자는 별로 경치가 없지만 공사가 끝났기에, 분수에 따라 글을 읽고 아이들 공부를 돌보며 큰 걱정이 없다고 했다. 다만 법문이 무너지고 우리당이 날로 쇠퇴하여 김직보‧황경초 등 여러 준재들이 뜻을 이루지 못함을 한탄했다.
여김직보(與金直甫)(壬寅)
김직보(金直甫)의 공부와 수양의 정도에 찬사를 보내면서, 저자는 일찍부터 계획해 왔던 江上에 모옥을 짓는 일을 추진한 결과 겨우 삼수 칸을 이루었으나 재력이 바닥나 곤궁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자신이 과욕을 부린 것이 아닌지 의문이라고 했다.
여김행가(與金行可)(宗道○壬寅)
한발이 극심하여 민심이 흉흉하다고 했다. 굶주림이 불가피할 것 같은데, 군자가 평소 지키는 절개는 이럴 때일수록 더욱 굳건해야 하겠지만, 어떻게 초연하게 상정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라고 살기 어려움을 피력했다. 부탁하신 재명(齋銘)은 우졸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바이지만 고인께서 저자에게 부탁하신 일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하고, 시험 삼아 몇 행을 초를 잡아 동봉하니 살펴보시라고 했다.
답김사준(答金士濬)(乙巳)
김숭묵(金崇墨)에게 답한 편지이다. 시골에서 사는 선비의 삶을 적었다. 저자는 못 위에 새로 지은 집에 별 경치는 없지만 일간에 몇몇 학동들이 배우러 오고 친구들도 서로 내왕하면서 함께 공부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것이 선비의 즐거움이 아닌가 했다. 벗들과 향을 피우고 책상을 마주하여 주자서를 읽고, 밤에는 홀로 앉아 사물잠이나 숙흥야매잠‧야기잠 등을 반복해서 완미하니 그 이상 무엇을 구하겠는가라고 했다.
답유인백(答柳仁伯)(辛亥)
柳泰春(유태춘)에게 답한 편지이다. 오랜만에 편지를 보내주시어 여러 가지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신데 감사했다. 저자는 자식을 읽고 또 누이를 잃어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하면서 만년의 처지를 한탄했다.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처마에 닿을 지경이라고 했다.
답유인백(答柳仁伯)(己巳)
저자는 신병으로 고생한다는 것과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하면서도, 위나라 무공의 구십세 잠을 경계로 삼아 어찌 감히 자포자기하겠는가 라고 했다. 다만 안질이 너무 심해 어떤 때는 눈을 감고 과거에 공부한 것을 암송하기도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소위 책을 찢고 학문을 끊어 부처가 될 수밖에 없겠다는 말도 했다.
여정창백(與鄭昌伯 )(庚子)
정충필(鄭忠弼)에게 보낸 편지이다. 저자가 새로 지은 정사에 게시할 편액의 글씨를 부탁한 편지이다. 연전에 금문정사(錦門精舍)라는 네 글자를 받았는데, 집 지을 터가 불편하여 상류 쪽으로 수십 보 올라가서 터를 새로 잡으면서 정사 이름을 금연정사(錦淵精舍)로 바꾸게 되었다고 설명하면서, 번거롭지만 다시 편액 글씨를 써 주시면 저자 자신뿐만 아니라 초목과 고기, 새들 조차도 광영을 입을 것이라 했다.
답유사극(答柳士極 )(★(氵+奎)○甲寅)
산골 마을로 편지를 보내준 것에 감사하고, 사우들의 도움 없이 공부하는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유규의 문중에서 과거급제자가 나온 것을 축하했다.
여유사극(與柳士極 )(甲子)
집안 아이가 미동에서 돌아오는 길에 여관에서 만났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유규가 사는 낙동상 상류의 모습을 아름답게 상상했다. 만곡이 갑자가 고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살아남은 사람도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했다. 미동서숙에 파주의 김학사가 와 있다고 전했다.
답김계범(答金季範)(乙巳)
김종필(金宗泌)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세모에 그리워하는 심정이 절실하고 강 건너 가서 베게를 맞대고 하룻밤 유숙하면서 회포를 풀고 싶다고 했다. 보내주신 편지의 내용이 간절하고 동봉한 시의 내용은 옛사람이 남을 사랑하는 충정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라 했다.
답정상사(答鄭上舍)(履寅○庚午)
변절기에 안부를 물었다. 고령에 행차하여 청천옹(淸泉翁)을 만났는지 물었다. 지난번 고령에 갔다가 돌아갈 때 비바람에 묶여서 움직이지 못했던 사실을 당시의 상황을 들어가면 회상하였다.
여정상사(與鄭上舍)(丁亥)
안부를 묻고, 저자가 혼자서 공부하는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선후와 본말이 거꾸로 되었고 공부를 해도 대부분 허사가 되고 말며, 외물에 신경을 빼앗겨 존양을 해도 오래가지 못하고 쌓아도 두텁지 않다고 했다.
답이덕이(答李德而)(萬運,○戊戌)
학문의 어려움에 대해 서술했다. 과거 이만운이 저자에게 해 주었던 공부 방법에 대한 언급을 열거하면서, 자신의 무능으로 따를 수 없음을 말했다. 초년에는 과거공부에 몰두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시문이나 꾸미는 데 열중하여 한 사람도 내면을 들여다보며 마음 공부를 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답이덕이(答李德而)(壬戌)
지난 겨울에 저자의 집을 방문했다가 바로 돌아갔음을 회고하면서 아쉬움을 말하고 그후 편지를 보내주셨음에도 답장하지 못함을 미안해 했다. 봄기운이 완연한데 안부를 물었다. 나이를 들면서 외부에 대한 관심을 끊고 마음공부에 힘을 쏟고 있다고 했다.
여임공필(與任公弼)(輔○甲午)
저자에게 보낸 간찰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평생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간찰이 한 두 통이 아니지만, 철이 없었던 관계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경인년 11월에 받은 것뿐인데다 윗부분은 집안 아이들이 찢어버려서 부득불 새종이에 붙여서 보낸다고 했다.
답임공필(答任公弼)(癸卯)
임보가 동생의 초상을 치르고 있었고 저자가 답장을 보낸 것이다. 당시 동생의 아들은 천연두에 걸려 있었는데, 아버지 초상을 치르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임보는 이 문제를 저자에게 상의했다. 저자는 김진사의 주장이 옳다고 했다.
여이중수(與李仲綏)(己亥)
이경록(李經祿)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경록이 근사록을 열심히 공부한다는 얘기를 듣고, 이 책의 학습 방법과 내용에 관해 서술했다. 규모가 넓고 절목이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단계가 짜임새가 있고 본말 체용이 갖추어져 있는 책이라고 평가했다.
답이중수(答李仲綏)(辛亥)
이경록이 저자에게 스승의 의발을 계승했다는 언급을 한데 대해 천만부당이라고 사양하면서, 스승께서 서세하고 난 후 후학과 동지들이 서로 교학상장하면서 학문을 해 온 덕분에 학맥이 단절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지 저자 한 사람의 힘이 아님을 말했다.
답이중수(答李仲綏)(甲寅)
만년의 즐거움이 독서하고 학문하는 일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함께 서로 도우면서 학문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 저자의 눈병이 심해졌음을 언급하면서,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서 책을 읽지도 못하고 결국 육상산의 학문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고 했다.
여김여호(與金汝好)(始全○乙卯)
남인이 근자에 성은을 입은 사실을 언급하면서, 60년 동안 마음속에 품어왔던 원통함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 했다. 효성스러운 생각이 임금님의 귀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당의 후손들이 원근을 막론하고 모두 감읍할 것이니 자손되는 김시전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라 했다.
여이향지(與李向之)(辛亥)
李奎運에게 보낸 편지이다. 낙동강의 봄 경치가 볼만하다고 하고, 주자어류를 초록하는 일의 진척 상황을 물었다. 비슷한 연배들 가운데 이규운 만한 사람을 얻기 어렵다고 칭찬하고, 다만 늙은이의 정력이 소장들과 는 다르니 공부하는 절도는 엄밀하게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공부하는 방법은 십분 자애해야 한다고 했다.
답임군보(答任君輔)(輐○癸卯)
공필의 동생의 상사에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물었다. 지난번 저자가 편지에서, 시기가 지나서 지내는 경우에는 禫祭를 지내지 않는다고 한 설은, 본래 이런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삼년상을 치른다고 할 때, 담제를 지내는 경우와 지내지 않는 경우를 나누어 설명했다.
답도성서(答都聖瑞)(尙郁○甲子)
산림에 처해 세상과 등지고 살고 있으니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동강선생유집은 저자가 평소 한 번 보기를 소원했던 문집이니 한 질을 보내주면 고루한 말학이 대군자의 성덕을 우러러 볼 수 있겠다고 했다.
답도성서(答都聖瑞)(乙丑)
지난번 만났을 때를 회상하면서, 산중의 고루한 사람이 대군자를 뵙는 기회였다고 술회했다. 지난번 보내드렸던 헌명(軒銘) 가운데 한 구절을 이렇게 바꾸고 싶어서 개본을 첨부하니 참조 바란다고 했다.
답강사욱(答姜士郁)(世文○丁未)
지난번 방문해 주신데 이어 편지와 시를 보내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시귀 가운데 ‘주인청풍’이라는 네 글자는 전혀 사실과 다른 과찬이라고 사양했다.
여이치춘(與李穉春)(壬子)
李㙖에게 보낸 편지이다. 윤월 27일자 경연에서 임금이 하신 말씀과 두번째 상소에 대한 비답은 남인을 인정해 주는 것이었고, 다시 복궐했을 때 상소를 물리고 인대하여 격려의 말씀을 내려주시었으니 하늘이 감동하고 사람이 감동했다고 서술했다. 또 일로 장보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내려 주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불세의 은광이라고 했다.
답이치춘(答李穉春)(乙卯)
무더위가 극심하다고 하고 안부를 물었다. 저자는 늙은 나무가 추위를 지나고 난 것처럼 생기를 잃었다고 했다. 더위에 안질은 배로 더하여 두문불출하고 들어앉아서 면벽한 중처럼 살고 있다고 했다.
여이치춘(與李穉春)(丙寅)
저자의 유배 생활을 적었다. 절해고도에서 풍속이 다르고 의료시설이 없는 사정을 적었다. 유배의 명이 떨어졌을 때 집안사람들이 모두 경악하고 당황해 했지만 저자가 담담하게 명을 받은 것은 가학의 덕이라 했다. 옛날 채서산이 유배되었을 때 아들 구봉이 배종했는데, 부자가 맹자의 야기장을 논하면서 초연하게 명을 받았던 일을 거론하고 이것이 군자가 평소 함양한 결과라 했다.
답이치춘(答李穉春)
저자가 유배에서 풀려 귀향한 후에 보낸 편지이다. 수 삭이 되지 않아 돌아와 전원에 누었으니, 우리 남인들이 모두 성은에 감사해야 하며 한 사람의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여김자야(與金子野)(★(土+宏)○乙卯)
남인에게 닥친 시련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김굉이 벼슬에서 밀려난 것을 위로하였다. 또 우리 무리들이 사우에게 배운 바가 있을 것인데도 이러한 불행에 침묵하고 있는 것은 무익한 것을 가지고 유익한 것을 해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근자 저자가 자식을 잃은 데 대해 위로의 편지를 보내 준 것에 감사했다.
여이치도(與李致道)(埦○癸卯)
저자의 스승인 대산 이상정의 아들 李埦에게 보낸 편지이다. 대산집의 교정에 관해 서술했다. 이완이 대산집 간행 건으로 저자를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내고 나서 큰 비가 와서 걱정했다는 사연을 적었다. 또 문집을 교감하는 일은 실로 중대한 일로서 한 두 사람의 동지가 이미 교감을 거쳤거니와 우매한 이 사람이 맡을 일은 아니지만 효자께서 유고를 끌어안고 와서 부탁하는 일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교감의 실제 내용에 관해 사례를 들면서 몇 가지 사안을 논의했다.
여이치도(與李致道)
인편에 보낸 편지와 문집 9책 및 백책 1책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완의 용의주도함을 칭찬했다. 보내온 9책은 한 차례 교감을 보았고, 전과 마찬가지로 의심스러운 부분에 대해서는 전지를 붙여 놓았다고 했다. 이 부분은 저자가 평소 선생을 모시고 들었던 내용과는 다른 것으로서 아들인 당신이 직접 판단할 일이며 일부러 다른 사람에게 발설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회병선생문집(晦屛先生文集)권지오
서(書)
답김경온(答金景蘊)(丙辰)
김종발(金宗發)에게 보낸 편지이다. 도학자의 심경을 묘사했다. 두문불출하고 병으로 신음하지만, 상에는 보리밥이 올라오니 배부르게 먹고 산수를 소요하니, 저자의 생도 반드시 불우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저자는 항상 정자의 “만물을 고요히 바라보니 모두가 자득(自得)하고, 사시가 아름답게 바뀌는 것은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구절을 읊조리게 된다고 했다.
여김경온(與金景蘊)(己未 )
호상에서 문집을 간행하는 일은 근자에 소식을 듣고 있는지 물었다. 저자는 이 일은 사문의 흥망성쇠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로서 한 두 사람의 의견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高山本은 급문 제장로들이 함께 힘을 모아 마감한 것을 본가의 자제가 정서하여 갈무리해 둔 것이라고 하고, 간행에 임해서는 다만 사소한 자획이나 오자 정도 고쳐서 간행하면 될 일이지 몇몇 사람이 마음대로 뜯어고치면 안 된다고 했다.
답김경온(答金景蘊)(辛酉)
겨울이 점점 깊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최근의 동정과 공부에 소득이 있는지 물었다. 선배들이 차츰 세상을 떠나고 우리 연배들 몇몇만 살아서 의지할 곳 없으니 한심하다고 했다.
답김경온(答金景蘊)(丙寅)
보내주신 편지와 물건에 감사했다. 편지 끝에 하신 말씀을 명심하겠다고 했다. 이침랑이 섬으로 유배를 떠났음을 언급하고 걱정하면서, 도유들이 들고 일어나서 상소를 해야 한다고 했다.
답안상삼(答安象三)(정덕(鼎德)○辛丑)
연전에 큰 고통을 당한데 대해 위로했다. 안정덕이 자식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식이 없지만 자식이 있는 것과 같고 의지할 곳이 없지만 의지할 곳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답신중원(答申仲源)(光孝○己酉)
가을에 신광효를 방문했을 때 함께 강과 골짜기를 배회하던 얘기를 하면서 옛날을 회상했다. 또 편지를 받아보니 취지가 간절하여 언외의 뜻이 돈독함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공부하는 단계와 방법에 관해서는 옛사람들이 정해 놓은 법칙이 있는데, 극재선생집에 서술되어 있는 것을 참고하라고 했다.
답신중원(答申仲源)(壬子)
지난 가을에 보내 주신 편지에 감사했다. 외부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학문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다만 함께 거처하면서 만년의 뜻을 나누지 못함이 아쉽다고 하면서, 저자는 눈병이 악화되어 사람의 안색을 구분하지 못할 지경이라고 했다.
여신중원(與申仲源)(癸丑)
가뭄이 천지를 뒤덮어서 아사자가 들에 가득한데 다른 병통은 없는지 물었다. 저자는 조용히 거처하면서 자연을 즐기고 있다고 하고, 정명도의 “만물을 고요히 관찰하니 모두가 자득하다……”는 시귀를 생각한다고 했다.
여신경회(與申景晦)(宅明○丙辰)
大阮 어른이 하세하고 난 후 3년 동안 빈소에 잔을 올리고 곡을 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것이 어찌 평소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모습이겠는가라고 미안해했다. 저자는 대원 어른의 뇌문을 적었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다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고 했다.
답김성필(答金聖弼)(勉儒○癸丑)
지난번 저자를 방문해 주신 것과 떠날 때 남긴 편지에 관해 언급하고 감사했다. 저자는 눈병으로 글자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라고 하고, 그러나 김면유가 편지에게 하신 말씀으로 스스로 경계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공부에는 순서가 있어 엽등을 안 된다고 했다.
답김성필(答金聖弼)(丙辰)
보내주신 편지에 감사하고, 다만 그 내용 가운데 명창비궤라는 표현은 저자에게는 과분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옛사람의 90세에 쓴 箴을 자신이 사용할 수는 없다고 했다.
답유태삼(答柳泰三)(象經○辛丑)
편지를 받고 차가운 봄철에 형제분이 모두 무탈함을 알게 되었다고 하고, 저자가 넉 사자를 써서 재실의 이름을 지음으로써 반성의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했다.
답조공보(答趙恭甫)(友愿○丙午)
눈병이 심하여 필묵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은 한 글자도 보지 못하니 한스러움이 그지없다고 했다. 보내주신 편지를 보니 뜻한 바가 독실하고 존양함이 진실됨을 알겠다고 했다. 저자의 나이가 조금 많다고 해서 추숭함이 지나치다고 사양했다.
답조공보(答趙恭甫)(乙卯)
가족을 이끌고 궁벽한 산속으로 옮겨 오니 한숨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12월 초순에 문득 지난달 26일자로 보낸 편지를 받고 황홀한 심정으로 읽었다고 했으며 즉시 답장을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 편지를 통해 만사 형통하고 학문에 큰 진보가 있음을 알게 되어 축하드린다고 했다.
답김응지(答金凝之)(宗駿○丙午)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렸다고 했다. 형제분 모두 학문에 진보가 있는지 물었다. 저자는 근자에 집안일이 조금 정리된 것 같다고 하고, 물가에 어량을 설치하여 큰 잉어를 잡아 회를 떠 놓고 회포를 풀었다고 했다. 그러나 둔감하게 살아가노라 그대와 같은 사람들과 만나 강론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했다.
답권숙존(答權叔尊)(得仁○丙午)
수구암 최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우리 당은 더욱 의지할 바가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저자의 소회가 권득인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저자는 산 속에서 적적하게 지내는데 가을기운이 소슬하니 인정이 그립다고 했다. 편지를 받고 경탄할 때도 있지만, 직접 만나서 제대로 토론하지 못하는 것이 한이라고 했다.
여장리경(與張履卿)(泰殷○己酉)
봄에 보내주신 편지를 보니 생각하는 것이 가상하다고 했다. 저자는 사는 곳이 적막하고 훌륭한 스승과 벗이 없어서 서로 격려하고 시속에서 벗어나서 향상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지 못하는데, 편지에 쓴 정성스러운 말씀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바가 있다고 했다. 오히려 지난날 편지를 주고받으면서도 한가한 얘기만 주고받았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언급하지 못한 채 20여 년이 흘러갔다고 했다.
여김개여(與金開汝)(良鍵○壬子)
김양건에게 보낸 편지로서 그는 예학에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김양건이 연소한 후배이지만 홀로 古禮를 행하여 시골의 사우들로 하여금 성대한 의례를 직접 경험하게 했고, 처음으로 선왕의 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게 했다고 평가했다.
여김개여(與金開汝)(戊辰)
子婦喪을 당했을 때 의절에 관해 논했다. 당시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자부상을 당했는데 저자에게 와서 의절에 관해 자문을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씨가 끝내 저자의 설을 부정하지 않았는지 묻고, 여러 가지 경우에 대처하는 의절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답김성위(答金聖爲)(壬戌)
김종탁(金宗鐸)에게 답한 편지이다. 시와 지문과 답장을 한꺼번에 받았다고 하면서 감사했다. 그 동안의 공부한 성과가 속학을 벗어났다고 하면서 칭찬하고, 그러나 깨닫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바로 敬의 공부라고 하면서 정자와 주자의 말 그리고 주서절요와 대학혹문의 내용을 들어 자세하게 소개했다.
답정이경(答鄭理卿)(台攝○戊辰)
정규양과 정만양 형제의 훈지양선생문집의 편집에 관해 저자의 의견을 피력했다. 정태섭은 훈지의 후손으로 보인다. 저자는 행장을 썼을 뿐만 아니라 제목 등 편집에까지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답이사휘(答李士彙)(甲子)
이국림(李國林)에게 답한 편지이다. 이국림이 성리설에 관해 질의했던 것으로 보이고 저자는 이에 대한 답변을 조목별로 별지에 적었다고 했으나 별지는 첨부되어 있지 않다. 대개 성인에게는 기질지성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의 문제를 다루었다.
답이춘여(答李春如)(東發○癸丑)
지난 가을 두 사람이 나란히 저자의 거처를 방문했음을 언급하고, 이제 지난달 16일자 편지를 받아보니 두 분이 잘 계신다는 것을 알겠다고 했다. 저자는 늘그막에 산속에 살면서 다른 것은 여전하고 다만 눈병이 더위와 함께 극에 달하여 돌덩이처럼 앉아서 시간만 보내고 있다고 했다.
답종인이주형제(答宗人以周兄弟)(면조면주(冕朝冕周)○庚申)
아주신씨 문중의 면조·면주((冕朝.冕周) 형제에게 답한 편지이다. 저자는 문중의 연소배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만큼 총명하고 문아한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고, 유가의 법이 서책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나 그것이 성공하는가는 오로지 본인의 아취가 고상한가 아닌가, 뜻한 바가 굳은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분발을 촉구했다.
답송태경(答宋台卿) (癸丑)
송국병(宋國秉)에게 답한 편지이다. 선비로서 과거공부에 대한 갈등과 성리설에 대한 질의에 답변했다. 과거공부를 하는 것은 부모를 모시고 있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일이라고 하면서 퇴계가 같은 내용으로 제자에게 답변한 편지를 인용하여 답변했다.
답송태경(答宋台卿)(乙卯)
저자는 강가에 살면서 오랫동안 찬 기운을 받아서 신병이 된 지 오래라고 하면서 정월과 이월 상간에 횡사한 자가 여럿이라고 했다. 보내온 시를 보니 볼만하고 지금까지 공부가 상당하였음을 알겠다고 했다. 그러나 초학자가 힘쓸 분야는 시가 아니라 경서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라 했다.
답송태경(答宋台卿)(戊午)
편지를 받고 산속의 재실에서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고 종일토록 독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음을 말했다. 다만 깨달은 바가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일신상의 문제에 대한 깨달음인지 아니면 경전 내용에 대하여 전날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유 등 문장가들의 글보다는 유교경전을 많이 공부하라고 했다.
답조규응(答趙奎應)(星復○丁巳)
10월 15일자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낸다고 했다. 저자는 별고 없고 다만 사문도 발전하고 있는데 숙유들이 다 세상을 떠나고 만곡(晩谷)도 떠났다고 했다. 지난 가을에 저자를 찾아왔을 때 진정한 도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 편지를 받아보니 직접 만나서 하지 못한 진솔한 심정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노년에 조성복과 같은 연소한 학자를 만나게 되어 크게 의지가 된다고 하면서 성리학과 선비의 삶에 관해 장황하게 썼다.
답박화여(答朴華如)(在淳○己巳)
설을 맞이하여 안부를 물어준데 대해 감사했다. 저자는 병든 몸에 또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니 쇠약한 몰골이 한심하다고 했다. 박재순이 관례에 관해서 질의를 한 것으로 보인다. 관례를 시행하는 의미와 절차를 자세히 적었다.
답김련보(答金鍊甫)(就礪○丙辰)
상처(喪妻)를 한 것에 대한 위로와 심경을 적었다. 부부간에 한 사람이 먼저 죽는 것은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로서 지나치게 슬퍼하여 정신을 손상시키는 것은 천리의 조화에 어긋난다는 요지이다.
여조생형제(與趙甥兄弟)(居信居讓○癸亥)
저자에게 생질이 되는 조거신·조거양 형제에게 보낸 편지이다. 조만곡(趙晩谷)이 죽은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운명이라고 하지만 일시에 숙유들이 대부분 죽었으니 한 가문의 일이 아니라고 했다. 직접 가서 조문하지는 못하고 다만 몇 자의 만장(輓章)을 써서 소호리로 보냈는데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여이생형제(與李甥兄弟)(坰垧○乙卯)
생질 이경·이상 형제에게 보낸 편지이다. 조생원 편에 보낸 편지를 받았는지 물었다. 집안에 큰 우환을 당하여 고통을 어떻게 감내하는지 묻고 무덤에는 큰 피해는 없었는지 물었다. 지난번 편지에서 언급한 노인의 눈병에 관한 설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답김시언(答金時彦)(宗夏○丁卯)
이별한 후 연모했는데 편지를 받아서 반갑다고 하고, 편지를 읽어보니 말과 뜻이 속학을 벗어나 있어서 장차 크게 기대할 만하다고 했다. 지금 주자서를 읽고 있는 것 같은데, 절요는 권질도 적지 않거니와 내용도 초학자가 이해하기에 쉽지 않다고 하고, 먼저 중간 이하부분의 사우간에 왕래한 편지를 먼저 읽고나서 전반 부분을 읽는 것이 좋다고 했다.
답서파재종숙(答西坡再從叔)(乙巳)
서파(西坡) 재종숙 신도일(申道一)에게 답한 편지이다. 10월 12일자 편지는 어디서 부쳤는지 모르지만, 편지의 내용이 속학을 벗어나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구절로 가득하다고 칭찬했다. 요즘의 사풍이 저속할 뿐만 아니라 진실한 공부를 하는 사람이 드문데, 참으로 가상한 일이라 했다.
답재종숙(答再從叔)(己酉)
西坡 재종숙에게 보낸 편지이다. 재종숙이 아이종을 보내서 금장첩(錦莊帖)을 구하므로 베껴서 보내고 겸하여 시를 보낸다는 내용이다. 아이 종을 통해 보냈는데 아직 떠나지 않고 있어 단단히 일러 다시 보낸다고 했다.
답재종숙(答再從叔)(丁巳)
西坡 재종숙에게 보낸 편지이다. 곤궁한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갈지 걱정하는 내용이다. 재종숙이 보낸 편지에서 하신 말씀은 실질적인 것이어서 사람을 감탄케 한다고 하고, 빈한한 가정의 계획은 저자라고 해서 빈곤에서 벗어날 별다른 수가 없다고 했다. 다만 곤궁할수록 더욱 굳건하고 늙을수록 더욱 당당하게 하라는 교훈을 명심할 밖에 없다고 했다.
답족제(答族弟)(立仁○癸丑)
족제가 장황한 편지를 보내 주었는데, 내용을 보니 근자에 공부의 진전이 있음을 알겠다고 했다. 다만 쉽게 답할 내용이 아니라고 하면서, 맹자에 나오는 “반드시 일 삼는 바가 있도록 하되 기필하지는 말라.”, “잊어버리지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는 등 몇 가지 교훈을 가지고 참고로 하라고 했다.
여재종질정매(與再從姪鼎梅)(癸未)
타향에 있는 재종질 정매(鼎梅)에게 보낸 편지이다. 세밑이 가까워지고 있는데 너는 돌아올 줄 모르니, 타향이 고향보다 좋아서 그런지 물었다. 지금 무사한지, 독서는 하고 있는지, 소신을 버리지 않았는지 등 걱정하는 마음을 적었다.
與鼎梅(戊戌)
재종질 정매(鼎梅)에게 보낸 편지이다. 정매(鼎梅)가 가묘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에 관해 여러 가지 염려의 사연이다. 몇 일이나 걸려 당도했는지 병이 걸리지 않았는지 물었다. 가묘를 모셔간 이후 친척들은 모이면 그 얘기를 하면서 한탄한다고 하고, 떠나던 날 행색이 눈에 선하여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답정매(答鼎梅)(甲寅)
안질이 극에 달하여 답장을 쓸 수가 없다고 하고 시 한 수를 보내니 언외의 무궁한 뜻을 담고 있다고 했다. 굶어 죽는 것은 작은 일이고 절조를 잃는 것은 큰 일이라 했다.
여종질정옥(與從姪鼎沃)(乙酉)
족질 정옥(鼎沃)에게 보낸 편지이다. 장마와 더위가 극성인데 병이 나지 않았는지 걱정했다.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날짜를 따지지 말고 돌아오고 범사를 신중하게 처리하라고 했다.
여종질정오별지(與從姪鼎五別紙)(乙未)
족질 정오(鼎五)에게 보낸 별지이다. 글을 지을 때 유의해야 할 점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다. 문장은 정확함으로 귀히 여기고 속임수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사실을 귀히 여기고 허탄함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엄중함을 귀히 여기고 경솔하고 가벼움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는 등이다.
여정오(與鼎五)(己亥)
먹고 사는 데 별 탈이 없음을 알았고 강진사가 보낸 편지와 시를 보니 너를 매우 인정하고 있어서 안심이 된다고 했다. 다만 남들의 하는 말을 가지고 마음에 둔다면 종신토록 그것으로 근심하는 병통을 면치 못할 것이니 유념하라고 했다.
여정오(與鼎五)(乙巳)
상중에 있는 족질 정오에게 보낸 편지이다. 상중에 있을 때는 출입을 삼가라는 것이 옛사람의 법도이지만,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경우에는 이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남들과 수작을 할 때는 함부로 말하지 말고 행동거지를 번잡하게 하지 말며 오로지 공경과 근엄으로 하라고 했다.
답족질정주(答族姪鼎周)(辛酉)
족질 정주(鼎周)가 현판 글씨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허락하는 답장이다. 부탁하기 이전부터 진작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다만 병으로 글씨가 좋지 못하니 고쳐 써도 무방하다고 했다.
답종질정응(答從姪鼎凝)(癸丑)
종질 정응(鼎凝)(에 대한 답장이다. 정응이 주로 삼강령 팔조목에 관해 질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삼강령 팔조목이 공부와 공효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취지로 답변을 하고 있다. 양촌 권근의 도설은 비록 정밀하고 상세하지만 공부와 공효를 모두 포괄하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기자정진(寄子鼎辰)(甲申)
저자의 아들 정진(鼎辰)에게 부친 편지이다. 당시 정진이 아버지를 떠나 어머니와 함께 타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부를 잘 하고 있는지,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지는 않는지 물었다. 또 南선생에게 잘 배우고 혹여 태만하지 말며, 오늘 배운 것은 잘 익혀서 다음날 배송을 할 수 있어야 스승을 모시는 도리라 했다.
기정진(寄鼎辰)(壬辰)
아들 정진(鼎辰)에게 부친 편지이다.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았다고 하면서 처신을 잘 할 것을 당부하는 편지이다. 언행에 삼가고 함부로 행동하지 말며 시사에 관해 언급하지 말고 밤에 글을 읽는다고 안력을 낭비하지 말라고 했다.
기진아별지(寄辰兒別紙)(乙未)
아들 정진에게 보낸 별지이다. 정진이 그동안 쓴 글을 모아서 저자에게 보낸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아들의 글에 대해 전부 읽어보고 문제 있는 글에 대해서 하나하나 제목을 밝히고 일일이 문제점을 지적하여 방대한 분량의 평론을 별지에 적었다
기자정휘(寄子鼎輝)(甲寅)
아들 정휘(鼎輝)에게 부친 편지이다. 정휘가 거접(居接)에 참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휘가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출가하여 또래들과 어울렸으니, 학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고 언행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한 접중에는 연장자도 있을 터이니,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 외 단체 생황에 필요한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언을 하고 있다.
기자정휘(寄子鼎輝)(壬戌)
귀로에 오른 아들 정휘에게 보낸 편지이다. 심부름꾼이 당도했을 때 너는 이미 출발했다고 아쉬워하면서, 어제는 어디서 잤는지 오늘 명곡에 도착했는지 물었다. 출발할 때 아비가 해 준 말을 기억하고 있는지, 언동을 조심하고 특히 어른에게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 유촌·석전 등지를 지날 때 뵈어야 할 분들에게 빠짐없이 인사를 치르는지 등을 걱정했다.
회병선생문집(晦屛先生文集)권지육
잡저(雜著)
종손조응자사(宗孫祖應字詞)
종손 조응(祖應)에게 자를 지어주면서 지은 글이다. 조응의 자를 유승(幼承)로 지어 주었다.
창명집구도(병설) (牕銘集句圖(幷說)
저자가 숙흥야매잠을 흉내내어 자신의 공부 방법을 그림으로 도식화한 것이다.
천학종지도변(天學宗旨圖辨)
천주교에 대해 비판한 글이다. 근자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천주학에 기호지역의 총명한 인재들이 대거 중독되었다고 적고 있다. 서학비판에 관련된 중요한 자료이다.
중하상불재리면변(中何嘗不在裏面辨)
性이 발한 후에는 마음이 中의 상태에 있지 못하게 된다는 남헌장씨의 학설에 대한 비판이다. 주자설을 인용하고 비판했다.
부졸삼년내위모복설(父卒三年內爲母服說)
아버지가 죽고 3년 이내에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어머니를 위한 복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련된 자자의 예설이다.
채각헌동잠설의의(蔡覺軒動箴說疑義)
각헌채씨의 동잠(動箴)에 대한 의문을 적은 글이다. 동잠에는 철인과 지사를 구분하여, 철인은 생각함에 철저하고 지사는 행동함에 힘쓴다는 말이 있다.
서증류학사사현(태좌)( 書贈柳學士士鉉(台佐))
저자가 살았던 현의 서쪽 고을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을 격려하기 위해 지은 글이다. 어진 현령을 만나서 비로소 흥학의 기운이 도는데, 비록 숫자는 적지만 준재들이 많은 곳이니 열심히 공부하라는 내용이다
서증류학사사현(태좌)( 書贈柳學士士鉉(台佐))
유이좌가 저자를 방문하여 4언 8구의 시로써 격려해 준 짤막한 글이다.
유게빙계원벽문(留揭氷溪院壁文)
의성 빙계서원의 벽에 게시한 격려의 글이다. 본래는 절이 있던 곳인데 허물고 서원을 지었다고 했다.
독서류록(讀書謬錄)
저자가 독서를 하면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발췌하고 자신의 생각을 적은 독서록이다. 대학소학심경가례등에서 뽑은 내용들이 많다. 또 역사서와 주요 학자들의 일화나 주장도 언급했다. 분량이 많고 논의도 심오하다.
회병선생문집(晦屛先生文集)권지칠
서(序)
난리일기서(亂離日記序)
유유헌 남급이 쓴 난리일기에 대한 서문이다. 저자가 병산에 갔다가 비로 인하여 귀가하지 못하고, 유유헌의 증손인 남주서의 집에서 난리일기를 구해보고 쓴 서문이다. 난리일기는 병자호란 때의 일기로서 당시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일어났던 일을 적었다.
귀동일고서(龜洞逸稿序)
의성에 살던 귀동 신중인의 일고 서문이다. 불행히 일찍 죽었으므로 저자가 그 유문을 수습해 두었는데, 아들 백헌이 장성하여 원고를 다시 정서하여 간행하고자 하므로 저자가 서문을 서 주었다.
현재서공시론후서(縣宰徐公詩論後序)
의성현감으로 부임했던 徐공이 흥학과 설교에 열심이었던 것을 기념하여 그가 관내의 유생들과 주고받은 시론에 서문을 썼다.
기(記)
삼수헌기(三守軒記)
삼수헌(三守軒)은 안릉이공이 동해의 물가에 은거하면서 지은 집이다. 이공은 일찍이 허문정공의 병명에 나오는 三守三勿 중에서 특히 三守라는 말을 따서 자신의 택호로 삼았다.
낙소재기(樂素齋記)
낙소재(樂素齋)는 저자의 벗인 강사열의 재실 이름이다. 강사열은 상주 비봉산 아래에 재실을 짓고 이름을 낙소재라고 붙였다.
용강초려기(龍岡草廬記)
상주에 있는 용강초려에 대한 기문이다. 용강초려는 회룡(廻龍)이라는 호를 가진 상주 사람이 사는 곳에 지은 초려이다.
신락당기(新樂堂記)
신락당(新樂堂)은 진사 李仲則이라는 사람이 의선 일선리에 지은 집이다. 이진사는 안동에 살다가 의성으로 이주하여 집을 짓고 저자에게 기문을 부탁했다.
사우당기(四友堂記)
사우당은 이선술(李善述)이라는 사람이 지은 집으로 사우당이라는 명칭은 그의 선친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저자에게 기문을 요청했다.
김비헌기(金鎞軒記)
김비헌金鎞軒)은 강우에 사는 진사 洪晩癡의 집으로, 저자가 강우지방으로 유람을 갔을 때 만난 후 사운시를 보냄과 함께 기문을 요청했다고 한다.
금산형승기(錦山形勝記)
금연은 금산의 오른 쪽에 있는 동쪽 벼랑이다. 이곳은 금산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난 곳이므로 저자가 직접 정사를 지었다고 한다. 정사는 임인년에 시작해서 계묘년에 완공되었으며 본 문집에 자주 등장한다.
금산형승기(錦山形勝記)
금산은 의성에서 서쪽으로 30여 리 떨어진 곳이다. 이곳의 산수가 뛰어나므로 기문을 쓴 것이다.
체화당기(棣華堂記)
의성현 북쪽 지역에서 오래 살았던 金汝安이라는 저자의 친구의 집이다. 4형제가 있는데 우애가 남다르고 효도하여 집 근처에 별도로 집을 짓고 형제가 모이는 장소로 삼았다.
백석정기(白石亭記)
백성정은 낙동강 상류에 있는 정자로서 백석 강진양이 지는 것이다. 강진양은 일찍이 오룡동에 살았는데 인재가 많이 났으며, 백석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숭남정사기(嵩南精舍記)
숭남정사는 숭산 아래 남쪽에 위치한 정사이다. 저자의 장인 신공의 5세조 때부터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전후로 하여 많은 인물이 났고 공의 3형제 또한 부귀와 장수를 누렸다. 숭산은 일명 금오산으로 길야은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三一齋重修記
삼일재는 문경공 모재 김안국이 의성에 와서 강학을 할 때 80곡의 자금을 희사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인재를 육영할 목적으로 세운 재실이다. 맹자에 나오는 군자삼락 가운데 한 가지가 인재 육성이라는 뜻에서 의미를 취하여 삼일재라 이름했다.
회병선생문집(晦屛先生文集)권지팔
식발(識跋)
제망금강도장자축면(題望金剛圖障子軸面)
겸재 정선이 그린 「망금강도장자(望金剛圖障子)」에 대한 글이다. 저자의 종질인 정오(鼎五)가 가지고 와서 글을 요구하므로 쓴다고 했다.
장달산실적권후발(張達山實蹟卷後跋)
여말선초의 학자 장달산(張達山)의 실적에 대한 발문이다. 장달산은 길야은‧김농암과 더불어 이성계의 정권에 나아가지 않고 절개를 지킨 사람인데, 야은과 농암은 후대에 포창된 바 있으나 장달산만은 알려지지 않았다.
남계실기발(南溪實紀跋)
남계 이선생의 실기에 대한 발문이다. 저자가 직접 교정과 편집을 맡았는데, 세계‧연보‧일고 등을 원편으로 하고, 사우가 기증한 송덕비명‧제문‧뇌사‧갈지명 등은 부록으로 하여 전부 2권으로 구성했다.
회병선생문집(晦屛先生文集)권지팔
識跋
서행당고후(書杏堂稿後)
요절한 행당 김경림의 문집에 대한 후서이다. 저자도 어린 나이에 죽은 자식이 있었으나 자식의 글을 챙기지 못했는데, 행당의 글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행당의 아버지가 자신보다 현명했다고 후회했다.
윤사직무신일록발(尹司直戊申日錄跋)
영조 때 일어난 무신난(戊申難)에서 공을 세운 선산 지역의 의사 윤공의 사적에 대한 발문이다.
선조오봉선생별집개편후소식(先祖梧峯先生別集改編後小識)
저자에게 6대조가 되는 오봉 신지제(梧峯 申之悌)의 별집을 개편한 내용을 적은 小識이다. 문집이 이미 간행되었으나 후에 수습된 글을 모아서 저자가 직접 정리하여 별집 1권으로 묶고 지문을 썼다.
오봉선생사승지소후식(梧峯先生辭承旨疏後識)
오봉 신지제가 승지에 제수되고도 출사를 사양하여 올린 사직소에 대한 후지이다. 신지제는 폐주 당시 누차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다가 폐주가 물러나고 정권이 바뀌어서 승지에 제수되었지만 칭병하고 사양했다.
세첩권수소식(世牒卷首小識)
아주신씨 세첩에 대한 소지이다. 아주(鵝洲)는 거제의 속현이다. 혹자는 韓山의 구호가 鵝州이므로 아주신씨가 한산신씨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洲와 州는 별개의 글자이므로 같은 본관이 아니라고 했다.
응암혈서습록식(鷹巖血書拾錄識)
저자의 선조 申之孝가 임진왜란 당시 피란 중이던 응암에서 왜적의 칼에 찔려 죽으면서 남긴 혈서를 수습하고 뒤에 붙인 지문이다. 응암은 응동의 암혈이고 신지효는 저자의 6대조 신지제의 형님 되는 분으로 모친을 모시고 응암에 피란하고 있었다.
혈서습록권후발(血書拾錄卷後跋)
저자가 6대조 신지효의 응암혈서를 수습하여 정리를 끝낸 후, 다시 신지효 공의 후손들을 위해서 내용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뽑아서 발문으로 작성한 글이다.
양파실기발(陽坡實紀跋)
양파(陽坡) 홍언박(1309∼1363)의 실기에 대한 발문이다. 홍언박은 고려의 충신으로 본관은 南陽, 자는 중용(仲容), 호는 양파(陽坡)이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귀암실기권후발(龜巖實紀卷後跋)
귀암 김공의 실기에 대한 발문이다. 김공은 임오년에 절개를 지킨 인물로 유명한데, 그의 후손 영탁(英鐸)이 실기 1권을 엮어서 저자에게 발문을 요청했다.
잠명(箴銘)
원일잠(元日箴)(己酉)
원일 즉 정월 초하룻날 지은 잠이다. 천지간에 하나의 근원이 있어 사시사철 유행함으로써 만물을 생성시키고 발육시킨다는 등의 내용이다.
원일잠증족자정주(元日箴贈族子鼎周)(幷小序○丁巳)
족자인 鼎周가 궁벽한 곳으로 이사를 가서 가르침을 줄 사우가 없다고 하면서 저자에게 글을 부탁하므로 그를 위해 지은 잠이다. 내용은 위의 원일잠(元日箴)과 유사하다.
고재명(固齋銘)(幷序○壬寅)
저자가 살던 고을에 독실한 학자가 살고 있었는데 자신의 집에 고재(固齋)라는 편액을 걸고 있었다. 그 의미는 절조를 고수하겠다는 것이며, 저자에게 글을 요청하므로 이 글을 써 주었다.
좌우명(座右銘)(甲子)
저자의 나이 80이 되어 옛 성현의 가르침과 명언을 모아서 지은 좌우명이다. 4언 46구절로 되어 있으며 저자가 한가할 때 외우면서 스스로를 경계했다고 한다.
상량문(上樑文)
선묘이건상량문(先廟移建上樑文)
가묘를 이건할 때 쓴 상량문이다.
금연정사상량문(錦淵精舍上樑文)
금연정사를 지을 때 쓴 상량문이다. 금연은 금산의 오른 쪽에 있는 동쪽 벼랑이며 저자가 직접 지었다.
오계리사묘우상량문(梧溪里社廟宇上樑文)
오계리(梧溪里)에 묘우를 세울 때 지은 상량문이다. 오계리는 선유들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의산(宜山) 아래 동내 가운데 터를 잡고 세 간 규모로 지었다.
서산정사상량문(西山精舍上樑文)
서산정사(西山精舍)에 대한 상량문이다. 문정공의 덕업과 수은옹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영종 신묘년에 서산영당을 지었는데, 여기에 강당을 추가로 세우고 서산정사를 세운 것이다.
애뢰(哀誄)
한산이공(학정)애사(韓山李公(學靖)哀辭)
한산이씨 이학정(李學靖)에 대한 애사이다. 저자의 자서(姉壻)로서 51세에 죽었다.
조성백(석우)애사(趙成伯(錫愚)哀辭)
조석우(趙錫愚)에 대한 애사이다. 조석우는 저자가 어릴 때부터 신동이란 소문이 났던 사람이다.
최항진(崔恒鎭)에 대한 애사이다. 최항진은 어려서는 백부 처사공에게 배웠고 자라서는 대산 이상정의 문인이 되었다.
도죽천(길모)애사(都竹泉(吉模)哀辭)
도길모(都吉模)에 대한 애사이다. 도길모는 단계 북쪽에 살았는데 문예를 지향하는 고을 풍속을 교화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축문(祝文)
오계리사봉안문, 상향축문(梧溪里社奉安文, 常享祝文)
오계리의 묘우에 위패를 봉안할 때 쓴 축문이다. 저자가 어려서 배운 梧溪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상향축문(尙享祝文)이 첨부되어 있다. “호걸의 자품으로 순실한 학문을 했네, 화합하되 한 가지로 휩쓸리지 않았고 돈독과 박학을 영원히 지켰네.”라는 내용이다.
조곡세덕사봉안문, 상향축문(早谷世德祠奉安文, 常享祝文)
오성군(鼇城君)과 문정공(文靖公)을 모시는 상덕사에 위패를 봉안할 때 쓴 축문이다. 상향축문(尙享祝文)이 첨부되어 있다. 오성군을 위해서는 “해를 관통하는 정성과 충성으로 세상을 진동시키는 공을 세웠네, 백세토록 산천이 우러르고 흠모함이 무궁하네.”라고 했고, 문정공을 위해서는 “학문에 연원이 있고 사업에 가문의 전통 이었네, 사당에 음식을 바치니 선대의 충렬 더욱 커지네.”라고 했다.
회병선생문집(晦屛先生文集)권지구
제문(祭文)
제종백형문(祭從伯兄文)
저자의 종백형 처사공에 대한 제문이다.
제정상사만회공준문(祭鄭上舍晩晦公儁文)
진사 만회공(晩晦公) 정준(鄭儁)을 위한 제문이다.
제외왕모무안박씨문(祭外王母務安朴氏文)
저자에게 외왕모가 되는 무안박씨에 대한 제문이다.
제구사당금선생문(祭九思堂金先生文)
구사당(九思堂) 김낙행에 대한 제문이다.
제강와임선생문(祭剛窩任先生文)
강와 임필대(剛窩 任必大)에 대한 제문이다. 저자가 어릴 때 배웠다.
제조겸보문(祭趙謙甫文)
조겸보(趙謙甫)에 대한 제문이다.
제외구풍산류공문(祭外舅豊山柳公文)
저자의 장인 풍산유씨에 대한 제문이다.
제고서봉주정상사문(祭姑壻鳳洲鄭上舍文)
저자에게 고모부가 되는 진사 봉주정(鳳洲鄭)씨에 대한 제문이다.
제대산선생문(祭大山先生文)
대산 이상정에 대한 제문이다. 저자의 스승이다.
제종질정옥문(祭從姪鼎沃文)
저자에게 종질이 되는 鼎沃에 대한 제문이다.
제김직보문(祭金直甫文)
金直甫에 대한 제문이다. 천사 김종덕의 형제이며 저자와 교유했다.
제수구암최선생문(祭數咎庵崔先生文)
수구암 최선생에 대한 제문이다. 저자의 편지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제김사준문(祭金士濬文)
김숭묵(金崇墨)에게 대한 제문이다. 그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祭磨巖趙公文
磨巖 趙公에 대한 제문이다. 사미정에서 그의 형제와 함께 시를 읊기도 했다.
제숭남신공문(祭嵩南申公文)
숭남 신광익(嵩南 申光翼)에 대한 제문이다. 그에게 보낸 편지와 시가 많다.
제시이유장문(祭柴里柳丈文)
시이 유성림(柴里 柳聖霖)에 대한 제문이다. 그에게 보낸 편지와 시가 있다.
제이치도문(祭李致道文)
이완(李埦)에게 대한 제문이다. 저자의 스승인 대산 이상정의 아들이다.
제춘수재이공문(祭春睡齋李公文)
춘수재 이명천(春睡齋 李命天)에 대한 제문이다. 그에게 보낸 편지가 많다.
제이후산문(祭李后山文)
후산 이종수(后山 李宗洙)에 대한 제문이다. 그에게 보낸 편지와 시가 있다.
제김천사문(祭金川沙文)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에게 대한 제문이다. 저자에게 평생의 도반이다. 그에게 보낸 편지가 많고, 특히 심경부주 관련 글이 많다.
묘표(墓表)
종형처사공묘표(從兄處士公墓表)
저자에게 종형이 되는 처사공에 대한 묘표이다. 휘는 중인(重仁)이고 자는 군임(君任)이다. 숙종 신축년에 나서 영종 기사년에 죽었으니 향년 29세이다.
종질정옥묘표(從姪鼎沃墓表)
저자에게 종질이 되는 정옥(鼎沃)에 대한 제문이다.
회병선생문집(晦屛先生文集)권지십
묘지(墓誌)
고승훈랑진보현감송오이공묘지명(故承訓郞眞寶縣監松塢李公墓誌銘)
승훈랑(承訓郞) 진보현감 이진(李軫)의 묘지명이다. 이진의 자는 군임(君任), 호는 송오(松塢),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고용양위부사직윤공묘지명(故龍驤衛副司直尹公墓誌銘)
용양위 부사직(龍驤衛 副司直) 윤중방(尹重邦)의 묘지명이다. 윤중방의 자는 임경(任卿),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망우이립재묘지명(亡友李立齋墓誌銘)
저자의 망우 이약(李若)의 묘지명이다. 이약의 초명은 휘정(徽靖), 자는 중휴(仲休), 호는 입재(立齋)이다.
고통훈대부영일현감귀암김공묘지명(故通訓大夫迎日縣監龜巖金公墓誌銘)
통훈대부(通訓大夫) 연일현감 김근신(金謹信)의 묘지명이다. 김근신의 자는 효겸(孝兼), 호는 귀암(龜巖),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선고처사부군묘지명(先考處士府君墓誌銘)
저자의 선고인 처사 신도만(申道萬)의 묘지명이다. 신도만의 자는 대원(大原), 본관은아주(鵝洲)이다.
선생의 휘(諱)는 체인(體仁), 자(字)는 자장(子長), 호(號)는 회병(晦屛), 본관은 아주신씨(鵝洲申氏)이다. 증조는 숙범(叔範)이고 비(妣)는 문소김씨(聞韶金氏)이다. 조부는 분귀(賁龜)이고 비(妣)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옥천김씨(沃川金氏)이다. 부친은 도만(道萬이고 비는 문소김씨(聞韶金氏), 하빈이씨(河濱李氏), 영양남씨(英陽南氏)이다. 오봉 신지제(梧峯 申之悌)는 선생에게 6대조가 되고 고송 신홍망(孤松 申弘望)은 5대조가 된다. 선생은 1731년(영조 7)에 의성(義城)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소질이 있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8세에 어머니를 잃었고 계모가 들어왔다. 경오년에 柳氏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병자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어서 부인 유씨(柳氏)을 잃었는데, 당시 전염병이 기승을 부렸으나 직접 시신의 염을 하고 상례를 예법에 맞게 치루었다.
신사년에는 향시에 응시하여 일등으로 합격했으며, 1764년(영조 40)에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의 문하에 입문했다. 대개 선생은 어려서 강와(剛窩) 임(任)선생에게 배웠으며 후에는 구사당(九思堂) 김(金)선생에게 질의하면서 도학이 있음을 깨달았는데, 대산선생에게 입문하면서 더욱 위기지학에 힘썼다. 1781녀(정조 5)에 이상정이 사망하자 선생은 도학이 단절될 것을 우려하여 동문들과 함께 학문을 계속하였다.
1782년에 금연정사(錦淵精舍)가 완성되자 왼쪽 방을 주경재(主敬齋), 오른쪽 방을 집의재(集義齋)라 이름 붙였다. 선생이 세속의 영화를 구하지 않고 스스로 즐기고자 했으니, 그러한 뜻은 그가 지은 詩와 記文에 잘 나타나 있다. 갑진년에 또 다시 부인 장씨가 세상을 떴으며 집안 살림도 무척 어려워 어떤 때에는 끼니도 잇기 어려웠지만 어린 자식들을 돌보며 조금도 걱정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1786년(정조 10)에 빙계서원(氷溪書院)의 동주가 되었다. 선생은 통강례(通講禮)를 행하고자 하여 주자의 월삭회약(月朔會約)을 모방하여 의절까지 마련하였으나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만두고 말았다.
만년에는 눈병으로 인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생은 눈을 감고 정좌하여 존양에 힘을 기울였다. 무오년에는 맏아들 상사공(上舍公)이 세상을 떴다. 선생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둘째는 신동 소리를 들었으나 14세에 죽고 셋째는 17세에 죽었으며 이제 또 맏이마저 잃었다.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지만 정신력으로 이겨냈었다.
1807년(순조 7)에 고을 현감 김상임(金相任)이 선생의 경술과 문장이 일세의 모범이 된다고 하여 천거하였고, 연이어 방백 윤광안(方伯 尹光顔)과 정동관(鄭東觀)이 각각 1808년과 1809년에 선생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1812년(순조 12) 4월 초3일에 세상을 버리니 선생의 향년은 82세였다. 부고가 나가자 원근의 학자들이 사문의 큰 손실이라고 했다. 6월 24일 속동 곤좌(涑洞 坤坐)에 안장되었다.
선생의 재주는 출중했지만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는 데 구애되지 않았고 한유(韓愈)를 특히 좋아하여 한자문부(韓子文賦)를 저술했다. 구사당 김낙행은 선생을 일러 한퇴지의 골수를 얻었다고 했다. 그 외 천문지리‧병가‧산수‧복서‧의약 등 섭렵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지만, 중년 이후로는 오로지 정주학에만 전념하였다. 성품이 간략하고 거짓이 없었으며 언행에 있어 준엄함이 있었다. 평생을 가난하게 지냈지만 가난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옛사람의 명언이나 심경근사록의 구절을 뽑아서 네 벽에 게시했으며, 고금의 명언으로 창명십육구(窓銘十六句)를 지어서 그림으로 그리고 경계로 삼았다. 어려서부터 선배, 노장들을 좇아 배우기를 좋아했는데 오계‧구사(梧溪‧九思)의 문하에서 자신의 진로를 찾았고 大山의 문하에 귀의하면서 도학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게 되었다. 대산 이선생도 허여하는 바가 컸고 책을 교정한다든가 의리를 논할 때면 선생을 불러 함께 의논하였다. 한번은 일이 있어서 서울을 왕래하다가 순암 안정복 선생을 방문했다. 순암은 선생을 가리켜 남주의 호걸이라 칭하고 자신이 편찬한 동사강목을 꺼내서 보여주기도 했다. 번암 채제공도 신모를 보면 우리는 독서인이라 할 수도 없다고 하기도 했다. 최수구‧이후산‧김천사‧유동암‧조만곡(崔數咎‧李后山‧金川沙‧柳東巖‧趙晩谷) 등과는 도의결을 맺고 긴밀한 학문적 교유를 유지했다.
선생의 학문은 主敬을 기본으로 하고, 정좌(靜坐)를 요법으로 삼았으며, 정제엄숙(整齊嚴肅)과 정의관존첨시(正衣冠尊瞻視)의 공부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일찍이 敬이라고 하는 것은 성인의 학문에 일관된 바탕으로서 敬을 논하는 학설과 敬을 지키는 공부 방법이 모든 책에 서술되어 있으나 여러 군데 흩어져 있는 관계로 배우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고 하고, 숭경록(嵩敬錄) 한 편을 저술했다. 논경지결(論敬旨訣)과 지경연원(持敬淵源)을 구분하여 두 권으로 구분하고, 이어서 성경설‧경의설‧정경설(誠敬說‧敬義說‧靜敬說)을 서술했으며, 마지막으로 징성록(懲省錄)을 덧붙였다.
선생은 진한(秦漢) 이래로 공리심이 만연하고 의리심은 사라진 것은 오로지 왕백(王伯)의 분별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고 고금의 학자들이 王伯의 구분에 관해 변별해 둔 것을 모아서 책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착수하지 못했다. 또 동방에서 사특한 학문이 크게 떨쳐서 총명한 학자들이 많이 감염되었다고 하여 천학종지도변(天學宗旨圖辨)을 저술하기도 했다. 후학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소학의 쇄소응대의 절도에서 시작해서 점차로 대학으로 나아가도록 했으며, 어린 학도들을 위해서는 권학가(勸學歌)를 지어 암송하도록 했다.
옛날 빙계서원(氷溪書院)의 동주를 지낼 때, 그곳에는 본래 태흘단이 있어서 무지한 백성들이 북을 치면서 빌곤 했는데, 선생이 사당을 훼철하고 음사를 금지시켰더니 사람들이 결단력에 감복했다. 선생은 조급한 성질은 관용과 화해로써 다스리고 문장을 화려하게 하는 습성은 의리로 돌렸다. 강설은 자못 고착되었지만 평실한 곳으로 돌아왔고 처신은 까다롭던 습성에서 편안함으로 귀착되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동작에 절도가 있고 행보에는 규칙이 있었으며, 태만한 기색은 몸에 보이지 않았고 비패한 언어는 입에 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