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자 자족재(自足齋) 신봉석(申鳳錫, 1631~1704)의 시문집 3권 1책을 간행한 책판이다. 책판은전체 35장중에서 현재 33장이 남아 있으며, 결락은 2장이다.
저자
신봉석(申鳳錫)(저)
판심제
自足齋遺集
기탁처
아주신씨 자족재파문중
서문
발문
판각시기
1901년
완본수
35
현존수
33
결락수
2
인물정보
• 신봉석[申鳳錫, 인조 9년(1631)~숙종 30년(1704)].
본관 아주(鵝洲), 자 석여(錫予), 호 자족재(自足齋).
경상북도 의성 출신으로, 1655년(효종 6) 응제시(應製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효종에게 지필묵(紙筆墨)을 하사받았다. 선교랑(宣敎郞)의 품계를 받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657년(효종 8) 한성시(漢城試)에는 급제하였으나 성시(省試)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낙향한 후 스스로 ‘자족재(自足齋)’라는 호를 짓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1677년(숙종 5)에 숙종에게 올린 「진오폐소(陳五弊疏)」에서는 첫째 세금 징수의 폐단, 둘째 군역의 폐단, 셋째 가난한 백성이 더 가난해지는 폐단, 넷째 영남의 인재를 쓰지 않는 폐단, 다섯째 인재 등용의 폐단 등 당시의 폐단을 5가지로 요약, 지적하였다. 이어 「의청영남행경대동소(擬請嶺南行京大同䟽)」라는 상소를 올려, 대동법(大同法)의 영남 지역 시행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매우 효성이 지극한 인물로, 부친의 병환 때에는 얼음을 깨어 물고기를 잡아오고 변(糞)을 맛보며 병세를 알아보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했으며, 몸가짐도 단정하여 의리에 맞지 않는 행동이 없었다고 한다.
문집정보
구성 :
간역 :
『자족재집(自足齋集)』은 신봉석의 8세손 신용섭(申龍燮)이 편집하여 1921년경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자세한 간행 경위 등은 알려진 것이 없다.
목판정보
보관과정 :
아주신씨 자족재파문중(自足齋派門中)에서 기탁하여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 있다.
결락정보 :
전체 35장에서 현재 33장이 남아 있고, 2장이 결락이다.
서 : (3,4) / 1장
권3 : (1,空) / 1장
형태적특징 :
책판의 제작에는 감나무, 버드나무, 오리나무 등을 사용하였다. 각 판면마다 사주쌍변(四周雙邊)의 광곽(匡郭)을 새기고, 광곽 안에 세로로 계선(界線)을 긋고 글을 새겼다. 판면의 글씨는 10행 18자를 기준으로 단정한 해서체 돋을새김으로 판각하였다. 글씨를 쓴 사람은 알 수 없다. 판면의 중심인 판심에는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를 새겼으며, 상하어미 사이에 문집의 이름과 권차(卷次)와 장차(張次)를 새겼다. 판심의 상상비(上象鼻)는 백구(白口)이다.
책판의 판면은 반곽 기준으로 세로 17.3~19.3cm, 가로는 16.7~17.1cm로 비교적 균일하게 재단되었다. 전체의 크기는 세로 17.8~19.5cm, 가로는 41.8~44.9cm 내외로 재단하였다. 두께는 1.5~4.0cm로, 책판에 따라 차이가 많으며 무게도 708~1,604g 정도로 차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