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강서원은 1807년(순조 7)에 상현사(尙賢祠) 창건하였고 이듬해 신원복(申元福), 신홍도(申弘道), 신류(申瑠)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 1920년에 사림이 통문을 작성하여 부향하였다. 지금부터 3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서원에서는 향리의 인재들이 모여 밤낮으로 글을 읽어, 그 소리가 서원이 위치한 속칭 놀매골 골짜기에 울려 퍼지곤 했다고 한다. 1992년부터 1999년까지 사림과 후손들의 협력으로 개축 및 중수를 하였다. 현재 이 서원은 아주신씨 문중에서 맡고 있으며, 매년 3월 초정(初丁)에 향사하고 있다
배향인물
1)신원복(申元福, 1516~1584)
본관은 아주(鵝洲)이며 자는 중수(仲綏)이고, 호는 정은(靜隱)이며 의성출생이다. 조부는 신준정(申俊楨)이고 부친은 신수(申壽)이며 어머니는 의흥박씨 박자검(朴自儉)의 딸이다. 평소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서 1580년(선조 13) 효우로 천거되어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친몰후의 녹이라 하여 부임하지 않았으며, 운수향(雲水鄕)에 모옥(茅屋)을 짓고 ‘정은당(靜隱堂)’이라 하고는 자연을 벗 삼아 기거하다가 1584년(선조 17)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정은집(靜隱集)이 전하고 있다.
신원복(申元福)[1509~1584]은 1509년(중종 4) 경상도 의성현 남쪽 원흥리(元興里)[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서 출생하였다. 동생 신원록과 더불어 어릴 때부터 효우가 있어서, 이와 관련된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아버지 신수가 오랫동안 병환이 있었기에, 신원복은 동생과 함께 정성껏 시탕(侍湯)을 하였다. 18세가 되던 어느 날 의원이 말하기를 팔공산(八公山)에 가면 약초가 있다고 하였다. 11세였던 동생 신원록이 혼자 약초를 캐러 가겠다고 하자, 신원복은 이를 민망히 여기며 자기가 혼자 가겠다고 말했다. 이에 신원록이 말하기를 “부모를 위해 약초를 캐러 가는 것이니 하늘이 반드시 도울 것이다”하고 말하며 떠나니, 과연 무사히 돌아왔다. 이후 8년 동안 동생과 더불어 성실히 주야로 간호하였지만, 1533년(중종 28) 부친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친의 묘를 팔지산(八智山)[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아래에 마련하려 했으나, 주민들이 이를 금지하였다. 이에 신원복은 묘자리를 얻게 해달라고 지성으로 울면서 비니, 주민들도 감복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신원복은 가족을 이끌고 팔지로 이주하였으며, 동생과 함께 3년간 여묘살이를 했다. 여묘살이가 끝난 후에는 묘소 아래에 재실을 세웠다.
모친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직접 대변까지 맛보며 정성을 다하였으나, 결국 1575년(선조 8) 세상을 떠났다. 부친 묘소에 합장하였는데, 장례 때 신원록과
더불어 역부들이 해도 되는 온갖 집역(執役) 스스로 하였으며, 이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세 번씩 묘소에 가서 곡을 했다고 한다.
한편, 1543년(중종 38)에는 인근 고을로 부임한 풍기 군수(豊基 郡守)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을 지으려고 하자, 신원복은 동생 신원록을 보내어 그를 스승으로 받들게 하였다. 풍기에서 돌아온 신원록은 의성에도 서원이 필요함을 건의하였고, 형제가 의논한 끝에 김안국(金安國) 배향의 서원을 1556년(명종 11) 장천(長川)[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을 지나 흐르는 남대천 상류 지역] 위에 건립하였다. 1576년(선조 9)에는 장천 서원(長川書院)으로 사액을 받으니, 훗날 옮겨 지은 빙계 서원(氷溪書院)[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에 위치]의 전신이다. 동생 신원록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의 효성을 기리는 『효우록(孝友錄)』을 작성하였다. 1580년(선조 13) 천거를 받아 헌릉 참봉(獻陵 參奉)에 제수되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4년(선조 17) 세상을 떠났다.
저술로는 동생 신원록의 효성을 기록한 『효우록』이 전한다. 1책 8장의 등초본(謄草本)이 서울 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가계부터 시작해서 신원록의 임종까지 그 일대기를 연대기식으로 서술한 것이다. 이외 유집(遺集)이 있다고 『교남지(嶠南誌)』에 기록되어 있다.
의성현 팔지산[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의 동생 묘소 아래에 장례를 지냈다.
1807년 건립된 매강 서원(梅岡書院)[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매곡리에 위치]에 배향되었다. 매강 서원에는 손자 신홍도(申弘道), 증손자 신류(申瑠)도 함께 배향되어 있다. 배향 당시 봉안문(奉安文)은 류심춘(柳尋春)이 작성하였으며, 1920년 서원 중건 후 복향 될 때에는 이돈유(李敦裕)가 봉안문을 작성하였다. 한편 신원복의 묘갈명(墓碣銘)은 류규(柳氵+奎)가 1799년(정조 23)에 지었다.
2)신홍도(申弘道, 1558~1611)
본관은 아주(鵝洲)이며 자는 대중(大中)이고, 호는 정봉(鼎峰)이며 의성출생이다. 조부는 신원복(申元福)이고 부친은 신엄(申儼)이며 어머니는 선산김씨 김윤덕(金潤德)의 딸이다. 어릴때부터 영리하고 비범하였으며 선대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효제를 돈행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서사원(徐思遠)과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으며,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창의할 때에는 격문을 짓거나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수량문(收粮文) 등을 지어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1598년(선조 31)에는 조정의 명으로 명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변무소(辨誣疏)」를 짓기도 하였다.
3)신류(申瑠, 1606~1671)
본관은 아주(鵝洲)이며 자는 시수(時受)이고, 호는 청재(淸齋)이며, 의성출생이다. 조부는 신엄(申儼)이고 부친은 신홍도(申弘道)이며, 어머니는 함창김씨 김석룡(金碩龍)의 딸이다. 1645년(인조 23) 향당시(鄕堂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년간 조정에 있으면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저작박사(著作博士)·전적(典籍)·사도시정(司䆃寺正)·종적정(宗籍正) 등에 제수되었다. 외직으로는 예안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청재집이 전하고 있다.
건축물
현존 건물은 1910년경 중건한 사우(祀宇), 명교당(明敎堂), 주사(廚舍)가 있다. 서원의 배치는 강당(講堂)인 명교당(明敎堂)과 사당(祠堂)인 ‘상현사(尙賢祠)’를 병렬로 배치하고 있다. 명교당의 좌측에는 ‘경의문(景義門)’이란 사주문(四柱門)을 세워 강당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강당과 사당 사이에는 협문(夾門)을 설치하였고, 사당의 전면에는 사주문(四柱門)을 세워 외부에서 바로 사당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명교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며, 상현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