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시, 조선시대 관누정으로는 환선정(喚仙亭), 선화루(宣化樓) 망경루(望京樓) 연자루(燕子樓) 망북정(望北亭) 금학헌(琴鶴軒) 등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에 따르면 객관(客館) 내에 있다고 나올 뿐 그 건립시기나 내력 등은 알 수 없지만 1530~1759년경으로 추측하고 있다.
순천 객관(客館)에 있는 남수문(南秀文)이 남긴 기록에는 “고려 말년에 정치가 잘못되고 나라가 위태롭자 해적(왜구)이 극심하여 경기를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바다에 이어진 수천 리 땅이 버려져 적의 소굴이 되었는데 순천이 가장 화를 참혹하게 입어 빈 터만 남고 들에는 쑥대만 우거졌으니 한심한 일이었다. 조선이 일어나자 문화가 밝아지고 무력에 위엄 이 있어 섬 오랑캐가 공물을 바치어 화친하니 변방 백성들이 베개를 높이 하고 생업에 만족 할 수 있었다. 순천부도 충실해져 폐허는 성과 참호가 되고, 쑥대밭이 변하여 마을이 되어 인구의 많음과 물산의 풍부함이 남쪽 고을에서 제일이 되었다.(동국여지승람』권40, 순천도호부)는 부분이 있어 고려 후기 전라도에서 순천이 집중적으로 왜구의 침략을 입어 황폐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때 순천 객관과 망경루(望京樓)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객관(客館)을 부사(府使) 수우(守愚) 박환(朴煥 1584 선조 17~1671년(현종 12) 이 세웠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근거는 추측만 할 뿐 확실치 않는다. 신응태(申應泰 1643 ~ 1728)가 쓴 기문(歲丙辰榴夏上澣知府靑松沈膺泰書)과 사인·부제학을 거쳐, 1678년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던 유명현(柳命賢 1643 인조 21 ~ 1703 인조 29)의 시문이 승평지에 전하고 있다.
다만 규장각 소장 호남읍지(湖南邑誌 1871년, 奎 12175 아래)에 수록된 전라도 순천부 읍성의 그림식 지도. 순천시 금곡동․중앙동 일대에 있었는데, 서쪽이 높고 동남북으로 낮은 평지에 들어서 있었다. 복판본 지도인데, 망경루와 공북루 연자루는 성내에 있었고 환선정은 성밖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망경루에 대해 여지국서(與地國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지지(地誌)에 객관 내에 있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지봉서원(芝峯書院)과 옥천서원(玉川書院)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렸음을 의미하는 ‘今廢’라는 글씨가 필사로 덧붙여져 있다.
읍성의 모습을 거의 원에 가깝게 그렸지만 실제로는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에 가까웠다. 동서남북으로 4개의 성문이 그려져 있는데,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의 풍수적 명당 형국에 들어선 읍성의 경우 주산 방향에 성문이 없는 3개 대문의 체제를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순천읍성이 비록 완전 평지에 축조되면서 4대문 형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사또가 집무를 보는 동헌(東軒)인 아사(衙舍)는 동향을 하고 있었다.
조선중기의 문인 송암(松巖) 이로(李魯, 1544~1598)가 선조 25년 옥포에서 왜선 26척을 분멸한 이순신 장군의 최초 승전보이기도 하고, 계속되는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서의 승전으로 육지에서의 왜군의 진격에 발목이 잡히게 되는 왜란의 전환점을 맞는 시기 1593년(선조26) 3월에 호남에 가서 곡식 2만 석을 수송해 와 경상우도 각 고을에 나누어준 일이 있는데 이때 승평(순천)의 동헌에서 읊은 시가 전하고 있다.
성곽을 두른 청산은 연기 피어올라 희미하고 / 먼 숲은 무성하여 푸른 하늘에 접해 있네
남쪽 지방 열흘 머무는데 세 번 비 내리고 / 누대 빼어나지만 애써 돌아가기만 생각하네
靑山繞郭暗烟霏 遠樹依依接翠微 十日江南三遇雨 樓臺雖勝苦思歸/昇平東軒偶吟
조선중기에 지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망경루(望京樓)는 동헌의 폐문루였기 때문에 조선중기에 지어진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신증승평지에 이무렵에 쓰여진 망경루중수상량문(望京樓重修上樑文)과 순찰사 유명현(柳命賢:1643 인조21년~ 1643 숙종29)이 쓴 시 한 수가 전하고 있어 조선후기에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부제학을 거쳐, 1678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했던 유명현(柳命賢)1643 인조 21~ 1703 인조 29)이 순시차 들려 오르고 읊은 시(望京樓)가 전하고 있다.
經營賓館憶前候 約到樓成始一遊 世事參差違夙計 客情怊悵感新修
羅紈色奪層欄月 橘柚香傳萬戶秋 好是人生能適意 仲宣當日亦漫愁
유명현은 현종14년에 정시문과장원급제. 부수찬·사인·부제학·전라도관찰사·승지·형조판서 역임했지만 자신의 임지였던 전남 흑산도로 유배되는 아픔을 겪는다.
또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공조판서, 우의정 등을 지낸 신익상(申翼相 1634 인조 12~1697 숙종 23)이 전라도관찰사를 지낼 때 순시차 여수 고소대를 들리고 순천 망경루(望京樓)에 오르고 이렇게 감흥을 알린다. 그는 부친인 호은(湖隱) 신량(申湸, 1596〜1663)이 1634년에 구례 현감에 제수되어 이듬해까지 재직하였는데 이해 11월 2일에 구례현 관사에서 태어나 이 지역과는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한양 바라보며 홀로 누대에 기대北望秦京獨倚情백
발성성한 몸으로 먼 지방에서 대궐 그리네天涯戀闕鬢星星
공무 여가에 안석에 의지해 잠드니公餘隱几聊成睡
한 점 푸른 종남산이 꿈속에 선하구나夢裏終南一髮靑성재유고
만경루는 어느 고을에도 동일한 누각이 있었다. 순천 객사 동쪽에는 망경루(望京樓), 객사 앞 성 중앙지점(지금의 저전동)에 2층의 관풍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 남문교는 옛날 연자교라 하여 홍예형(아치)을 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순천을 두고 전라도관찰사 자격으로 들린 김길통(金吉通)은 시에, “한 면은 바다에 접하니 바닷물 소리 가깝고, 삼면이 산에 연했으니 푸른빛 깊네.一隅接海三面連山” 하였지만 조매(趙枚)는 "남쪽으로 큰 바다에 연했으므로 곧 해적들이 왕래하던 길목"이였다며 풍치는 좋으나 여락한 환경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일만 번의 크고 작은 외침으로 어디인들 온전한 고을이 있었겠는가.
목은(牧隱)과 포은(圃隱)의 문하(門下)에 들어 학문을 닦았는데 문장이 뛰어났으며 조선시대 1413년 예문관대제학 등을 지내다 세종이 즉위하자 다시 왕가의 태를 묻을 장소를 물색하는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로 발탁되어 전국을 누비며 벼슬길을 지낸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 1347~1434)가 어느날 어느때 순천(지금의 여수시 묘도)에 들려 읊은 시가 대신 말해주고 있다.
내 고향 어디 있는가 / 구름과 물결 너머 아득해 알 수가 없네.
하늘과 땅 쳐다보고 굽어보아도 / 백년 동안 기쁘고 슬픈 것 반반일세.
鄕國知何在 雲濤杳莫期 二儀寬仰俯 百歲半懼悲
나루터에 봄 물결은 넓디넓고 / 선창(船窓)에 저녁 달은 느리게 떠오른다.
남아로 태어나 나랏일을 할 것 같으면/ 하필 태평한 때만 그리워하는가
津春潮闊闊 船窓暮月遲 男兒如報國 何必遇濟時
고려 말 왜구의 침략에 어떠한 상태에 놓였던 순천지역, 소강남(小江南)으로 불릴 만큼 산수가 아름답고 물자가 풍부했던 순천지역은 왜구의 침략으로 살풍경한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로(李魯)는 당시의 시국을 이렇게 남기고 있다.
섬 오랑캐 한 번 칼에 침 뱉는데 / 세상에는 좋은 활이 없구나
천지는 슬프게도 비린내 넘쳐나고 / 산천은 부끄럽게 더러움으로 덮였네
島夷一唾劍 海內無良弓 天地悲腥漲 山川愧穢蒙
임금은 원래 성군이셨고 / 재상은 또한 충심이 많다네
어리석으니 누구에게 물어보랴 / 새들이 석양빛 속으로 날아가네
君王元自聖 宰相亦多忠 昧昧憑誰訊 禽鳥斜日風
그래서 이에따른 고유적도 무수히 사라져 갔다. 이제는 망각으로 찾을 생각초차 하는 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