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漢詩史에서 조선 중기는문예적 지향이 변화하면서 學唐이 대세로 자리 잡던 시기이다. 특히 문예가 부흥한 宣祖朝에 이르러서는戰亂에도 불구하고 역량이 뛰어난 한시 작가들이 대거 출현하여 唐風으로 대표되는 詩壇의 번성을 주도하였다.
梧峯 申之悌(1562~1624) 선생 역시 이 시기에 壬辰倭亂과 丁酉再亂을 겪으며 많은 한시 작품을 남긴 문예 부흥기의 문인이라할 수 있다. 28세에 치른 과거에서 대책문으로 장원을 차지한 뒤, 내직으로있을 때는 同鄕의 관료들에게 학문적 성취를 인정받고 깊은 우의를 다졌으며, 외직으로 나가서는 의병을일으켜 나라를 지키고 지방민을 교화하는 데에 힘썼다.
梧峯集은 본집 7권 4책과 별집 1책으로 되어 있는데, 본집 중에1~5권이 한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뒤이어 간행된 별집에도 한시가 적지 않게 실려 있다. 전체 문집에서 반 이상을 차지하는 한시의 비중을 감안할 때, 오봉선생의 문학적 재능이 시를 중심으로 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오봉 선생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그리활성화 되지 않았으나 작년 한국국학진흥원에서 梧峯集을국역하여 간행한 뒤로 선생의 학문과 문학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연구 또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여기서는 고문서를 통해 선생의 관력과 생애를 살피고, 문집의 한시 중에서도 가장 많은 작품이지어진 창원 부사 재직기의 시를 중심으로 작품에 나타난 현실 인식을 살피고자 한다.
2. 官歷과 生涯
오봉 선생의 자는 順夫, 호는 梧峯, 본관은 鵝洲이다. 경북義城 출신으로 惟一齋 金彦璣를 師事하였으며, 1589년에 증광 문과에 甲科로 급제하여 내ㆍ외직을 두루거쳤다. 歿後에 의성의 藏待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오봉 선생의 관력과 생애는연보와 행장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삶의 전환기에 따라 출생부터 문과에 급제하기까지의修學期, 壬辰과 丁酉의 兩亂을 겪으며 내직과 외직을 오갔던 戰亂收拾期,창원에서 부사로 재직하던 昌原府使在職期, 체임 후 고향에 물러난 隱居期 등의 네 시기로구분할 수 있다.3)
1) 이 글은2019년 5월 31일 대만정치대학교에서 열린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과 2019년 12월 31일 한국한문학연구에 게재한 논문을 재정리한 것이다.
2) 이하의 고문서 자료는 한국학자료센터(htp:/archive.aks.ac.kr/)에서 수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