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송孤松 신흥망申私望(1600〜1673)의 유배일기『장사일록長沙日錄』 은 1652년(효종3) 10월 9일부터 12월 21일까지 작성된 것이다 .10월 9일부터 17일까지는 한양으로 압송되는여정을 기록하였고,이후 11월 13일까지 약 25일 동안은 흥제원에서 유배지가 평해로 확정될 때까지 명을 기다리는 자신의 상황을 매일매일 기록하였다. 이때 신흥망이 장기간 흥제원에서 명을 기다린 것은 당초 벽동(현재평안북도)으로 정배된 후 조정에서 정배 철회 논란이 지속되다가 도중에 감등減等되어 중도부처중도부처中途付處 형벌로 변경되었고,이조차도대신들의 철회 요청으로 혼란이 야기되면서 유배지를 확정하는데 시간이 오래걸렸기 때문이다. 나머지 기간동안은 유배지로 출발해서 그 곳에서의 생활 그리고 해배되어 평해를 떠나는 날까지 기록하였다.
살펴본 결과『장사일록』은 다음과 같은 특징적 기록 경향을뚜렷하게 나타냈다. 첫째,유배형이 확정되어 집행될 때까지 조정의 논란이 지속되 었는데 그 속에서 신흥망개인이 겪은 상황이 정치적 배경과 함께 세밀 하게 그려져 있다.
『실록』이나『승정원일기』등의 역사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유배형 확정 과정이 실시간으로 기록된 셈이다. 물론 개인의 시선이라는 한계는 뚜렷하다. 둘째,신홍망은 유배 시작부터 끝나는 날까 지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돕던 인물들과 그들이 지원해 준 行資 등을꼼꼼하게 기록하였다. 대개의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나 호 또는 관직만 언급되기 일쑤여서 누구인지알기 곤란한 상황이 많은데,신흥망은 『장사일록』을 기록하며 인물마다 방점 표시를 할 만큼 공을 들였다. 인물표기 또한 당시 관직명을 정확하게 적거나 관직이 없을 땐 성명을 적어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셋째,유배당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말년에 일기 형식으로 재정리한 것이기에 신흥망이 유배 당시 지녔던 정 서가 객관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장사일록』은 신흥망이 추후에 다시 기록하면서 자신에게도움을 준 인물들을 꼼꼼하게 기록한 것 인만큼 단면적이기는 해도 당시 중앙 정계 인물들의 정치적 교류를 입체적으로 규명 해 볼 수 있고 신흥망개인 또는 문중의 인적 네트워크가 지역과 정치적 입지를 어떻게 넘나드는지 살펴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I. 머리말
유배일기는 ‘유배의원인’과 ‘유배형의 집행’이있어야 생산되는 특수한 일기이다. 유배일기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유배형을 받게 된 배경에서부터 유배 여정과유배지에서의 생활,마지막으로 해배 후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정까지를 담게 된다. 기록 당시 어떤 것에더욱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느냐는 기록자가 처한 물리적 상황과 정신적 상태 그리고 기록 성향이 복잡하게 얽혀 발현된다. 조선시대 유배형 시행은 정치적 배경이 긴밀하게 작동한 경우가 많았으며,동시에 유배인의 지위와 신분계급,처한상황에 따라 실제적인 운영도 편차가 다양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유배형을받아 어떻게 이동하고 또 어떻게 유배지에서 생활하는지가 기록자의 관심과 개인 성향에 따라 기록 내용의 편폭이 차이가 크고,또한 기록자의 감정이어떻게 흐르느냐에 따라서도 그 기록 내용은 전혀 다른 결을 드러내기도 한다.
유배일기로서 그 동안 학계의 주목을 받은 대표적인 자료는묵재 이문건 默齋 李文健 (1494-1567)의『묵재일기 默齋日記』와 효전 침로숭 孝田 沈魯崇(1762〜1837)의『남천일록』을 들 수 있다. 1)주지하다시피 이 두 자료는 비교적 긴 시간동안의유배 생활을 담고 있기에 배경부터 유배지에서의 일상까지 내용이 상세할 뿐 만 아니라 일기 분량도 방대하다. 2)이 외에 연구가 이루어진 유배일기는 비교적 짧은 분량이 많은데,'유배’라는 공통 범주 내에서 개별적 특징을 뚜렷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예컨대 이필익李必益 (1636〜1698)의『북자록北資錄』(1책)은관직이 없는 유생의 유배 생활이라는 점에서,3)윤양래尹陽來(1673〜1751)의 『북천일기北遷日記』(12장)는 유배지인 갑산까지의 유배 여정만 기록했다는점에서,4)김루金樓(1805~1866)의『난정일록難貞日錄』(1책)은 몰락 양반이 섬에서 겪은 유배 생활이라는 점에서,5)김광金鑛(1766〜1821)의『공축일기攻蓄日記』(1 책)은부녕으로 가는 유배 노정에서 많은 한시를 창작해 함께 수록했다는 점에 서,6)이재李裁(1657〜1730)의『창필객일蒼弼客日』은 유배 당사자가 아닌 아버지의유배를 시종한 아들의 기록이라는 점에서7)이러한 개별적 특징을확인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유배 당사자가 아인 유배압송관이 기록한 일기도 있다. 8)이상은 특징이 분명한 유배일기들만 거론했다. 이 외에도 유배일기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거나 사료로 활용해 유배형의 운영과 유배 생활 등을 연구한 사례를거론하면 그 성과는 더욱 확장된다.
孤松 申私望(1600〜1673)의『長沙日錄』은 1652년(효종3) 10월 9일부터 12월 21일까지 기록된 유배일기이다. 신홍망은 유배형이 떨어져 유배길에올랐지만 한성으로 압송되는 도중 감등부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이후 대신들이 부처 환수를 지속적으로 요청하였으나 효종이 끝까지 허락하지 않는 등조정에서의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비교적 긴 시간 동안 흥제원에서 명을 기다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신흥망을 물심양면 돕는 인물들이 다양하게 등장하는데,특히 조정의 논란에 가까이 있었던 현직 관리들이 많았다는 것이 이채롭다. 또한 신흥망이 자신의 유배 과정에 서 접촉한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지원해준 행자行資 등을 꼼꼼하게 기록하였다는것도 이 일기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개의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나 호 또는 관직만 언급되기 일쑤여서누구인지 알기 곤란한 상황 이 많은데,신홍망은『장사일록』을 기록하며 인물마다 방점 표시를 할 만
큼 공을 들였다. 인물표기 또한 당시 관직명을 정확하게 적거나 관직이 없을 땐 성명을 적어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본고는 신홍망의 유배일기가 이러한 특징적 경향이 있다는점을 포착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배형이 확정되지 못하고 지연되었던 논란의 과정을 그의 시선에서 재구성해보고이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을 분석해 그의 인맥 기반의 특징적 면모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의성 출신으로서 영남 남인 신흥망 개인과 그 가문의 당시 정치적 사회적 입지가 좀더 입체적으로 규명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아직까지 신흥망 개인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진 적이 없다.
1) 『묵재일기』와『남천일록』에 관해서는 연구 성과가적지 않기에 지면상 일일이 소개하지 않는다.
2) 『묵재일기』10책가운데 7책 분량 즉 1545년부터 1567년까지가 유배일기에 해당한다.『남천일록』은 20권 20책으로 심노숭이 1801년부터 1806년까지 기록한 것이다.
5) 김경옥,「〈간정일록〉을 통해 본 김령의 임자도유배생활」,「도서문화」37집,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2011 ;정진영,「섬, 풍요의 공간-19세기 중반 한 유배객의 임자도생활」,『고문서연구』43집,한국고문서학회,2013 ; 정진영,「섬,소통의공간 - 金樓의〈難貞0錄〉을 통해본 19세기 섬의 형상」,『역사와경계』88집,부산경남사학회, 2013 ; 김미선,「〈간정일록〉의 기록 성향과 특징」,『한국문학연구』
6) 박준원,「〈감담일기〉연구」,『한문학보』19집,우리한문학회,2008 ; 정우봉,「일기문학의 관점에서 본 <감담일기〉의특징과 의의」,『한국한문학연구』46집, 한국한문학회,2010,
7) 이병갑 외,『〈창구객일〉연구』,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14,
8) 조수미,「유배압송일기〈北征0記〉연구 - 유배인과압송관의 갈등 전개 과정을 중심으로」,『인문연구』92집,영남대 인문과학연구소,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