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여덟 살에 모부인의 상을 당하자 집상(執喪)하여예제(禮制)를 마칠 때까지 성인(成人)과 다름없이 하였다. 어린누이가 막 태어나 강보에 싸여있었는데 울음 소리가 몹시 애달프니, 선생 또한 어린 나이였음에도 항상자신의 옆에 안아다 두고 부지런히 젖어미를 구하여 밤낮으로 보호하며 양육하여 조금도 게으르지 않으니 보는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어려서부터 의지를 굳게 하여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니 아버지이신 승지공(承旨公) 또한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 가르쳐서 장래의 대성을 기약하였다.
점차 성장하여, 안동(安東)의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2) 선생이 학행(學行)이있어 생도들을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책상자를 짊어지고 찾아가서 학업을 요청하니 당시 나이가 채 성동(成童 : 16세)이 되기전이었다. 학도들이 번갈아가며 서실(書室)에 불을 때었는데, 선생과 동반(同伴) 두 사람이 땔감을 주우러 갔다가 한 사람이 잘못하여 나무꾼을 밀어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떠민 사람이 법에 따라 관아로 체포되어 가자 세 사람이 서로 자신이 죽겠다고 다투니 관장(官長)이 의롭게 여겨서 모두 석방하였다. 김공(金公)이 항상 기특하게여기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말과 용모가 근엄하고 신중한데 공부도 또한 이와 같이 독실하게 하니 훗날반드시 큰 그릇이 되리라.”고 하였다.
1)가정(嘉靖) : 명(明)나라 세종(世宗)의 연호이다. 가정원년은 조선 중종(中宗) 17년(1522)에 해당한다.
2)김언기(金彦璣) : 1520~1588.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자는 중온(仲昷), 호는유일재(惟一齋)이다. 아버지는성균진사 주(籌)이고, 어머니는순흥 안씨(順興安氏)이다.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문하에서 남치리(南致利) 정사성(鄭士誠)·권위(權暐)·박의장(朴毅長)·신지제(申之悌)·권태일(權泰一) 등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어 당시 안동 학문 진흥의 창도자로 알려졌다.
열일곱 살에 산방(山房)에서 독서하는데, 용모가 아름다운 마을의 여인이 선생의 거처로 찾아와서밤이 늦도록 돌아가지 않으니 선생이 여인에게 회초리를 가져오도록 하여 타이르고 꾸짖으며 회초리를 쳐서 쫓아 보냈다. 그 여인이 드디어 감화하여 사실대로 그의 남편에게 실토하니 그 남편이 술과 음식을 가고 와서 사례하였다. 선생이 마음을 다잡고 행실을 통제하는 것이 이미 스스로 이와 같았다. 그후에 또 학봉(鶴峰)김 선생3)을 찾아가 뵙고 학문을 배웠다.
己丑擢文科, 拜司贍寺直長, 轉典籍監察, 出爲禮安縣監. 鶴峰先生惜其去, 先生以其便養赴任.
기축탁문과, 배사섬사직장, 전전적감찰, 출위례안현감. 학봉선생석기거, 선생이기편양부임.
기축년(1589)에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4)에임명되었다가 전적(典籍)5), 감찰(監察)6)로 옮겼으며,외직으로 나가 예안 현감(禮安縣監)이 되었다. 학봉 선생이 내직을 떠나는 것을 애석해 하자 선생은 부모님을 봉양하기에 편리하다고 하며 부임하였다.
임진년(1592)에조선 팔도가 왜병에게 도륙이 되었는데, 선생이 이때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겸임하였다. 예안과 안동 두 고을의 병사를 규합하여 용성(龍城)7)에 나아가 주둔하여 저 무리들을 막으니 저 무리들이 도망하여 흩어졌다. 이를들은 사람들이 장쾌하게 여겼다. 현감으로 부임한 초기에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서 사형을 당해야 하는 죄수들이있었는데, 선생이 그 무리들이 두려워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가련히 여겨서 가르치고 타이른 후에 사면하니이로부터 현내에 더 이상 경계할 일이 없어졌다. 왜란이 일어나자 70여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와서 구원하여 화를 면하니, 대개 교화에 감동하여 은혜를 갚은 것이다. 순찰사가 선생이 홀로 관수(官守)를잃지 않았다고 보고하니, 임금이 예조정랑(禮曺正郞)을 겸임하도록 명하셨다. 이것 또한 특별한 예우였다.
3)학봉(鶴峰) 김 선생 : 김성일(金誠一 : 1538~1593)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이다. 안동의 임하(臨河) 출생이다. 이황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한 학자이며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서 경상도 지방의 의병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계사년(1593) 5월에학봉(鶴峰) 선생의 부고가 이르니, 위패를 만들어 곡을 하였다. 12월에 진주(晉州)에서 안동 가수천(佳樹川)으로 반장(返葬)하니 선생이몸소 장례식에 참석하여 제문을 지어 제사를 드렸다. 그 글에 대략, “보잘것없는불초 제가 선생님의 문하에 드나든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이 해에 흉년이 들어 구휼소(救恤所)를 설치하니 다른 고을의 백성들이 선생의 후덕함을 듣고 무수히 모여 드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들 또한 나라의 백성이다.”고 하였다. 마침내 이들을 차별하지 않으니 구제받아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선생은항상 나이가 어려서 퇴계(退溪) 선생의 문하에서 직접 배우지못한 것을 몹시 한스러워하였는데, 본현에 부임하고부터는 날마다 도산(陶山)에 가서 퇴계 선생에게 직접 배운 여러 장로(長老)들과 지결(旨訣)을 강론하고정무(政務)를 논의하여 결정하였다. 일찍이 근시재(近始齋)8) 김 선생과는 동년(同年)9)의 교분에 있었는데 국사(國事)에 몸을 바치기로 약속을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공이 의병장(義兵將)이 되었다가 군중(軍中)에서죽으니, 선생이 그의 가족들을 관아로 데리고 와서 보살펴 주었다. 그의어린 고아가 파리하게 야위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부인을 시켜서 세수시키고 빗질한 후에 먼저 죽을 마셔서 그 속을 부드럽게 하고 한 달이 지난 후에야밥을 먹게 하여 살아나게 되었다. 원근의 사람들이 선생의 높은 의리에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丙申, 瓜10)滿, 體察使啓請仍任.
병신, 과10)만, 체찰사계청잉임.
병신년에 임기가 다되었으나 체찰사(體察使)가 계청(啓請)하여 유임되었다.
8)근시재(近始齋) 김 선생 : 김해(金垓 : 1555~1593)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달원(達遠), 호는 근시재(近始齋) 또는시재(始齋)이다. 효로(孝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관찰사 연(緣)이고, 아버지는부의(富儀)이다. 예학에조예가 깊었고 임진왜란 때 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큰 공을 세웠다.
9)동년(同年) : 같은 해에 함께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말한다.
10)瓜 : 원문에는 ‘苽’로 되어있으나 ‘瓜’가 되어야 한다. ‘瓜滿’은 관리의 임기가 차는 것을 말한다.
11)辛丑 : 원문에는 간지가 빠졌으나연보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梧峰先生別集年譜>
丁酉, 拜司諫院正言, 遞授侍講院文學. 以親家在南, 近警無意遠宦, 從事巡營幕下二年矣.
정유, 배사간원정언, 체수시강원문학. 이친가재남, 근경무의원환, 종사순영막하이년의.
정유년(1597)에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다가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으로 바꾸어 제수되었다.친가가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경비하고 멀리까지 가서 벼슬할 뜻이 없었기 때문에 순찰사의 군영 막하에서 종사관으로 2년을 지냈다.
庚子春, 拜全羅都事, 不赴.
경자춘, 배전라도사, 부부.
경자년(1600) 봄에전라 도사(全羅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辛丑)除禮曹佐郞陞正郞, 秋除全州判官, 有治績, 州人立碑頌之.
(신축)제례조좌랑승정랑, 추제전주판관, 유치적, 주인립비송지.
신축년(1601)에예조좌랑(禮曹佐郞)에 제수되었다가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가을에전주 판관(全州判官)에 제수되어 치적(治績)이 있어서 전주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서 칭송하였다.
壬寅春, 拜司憲府持平, 旋遞爲體察使從事官, 爲全羅道暗行御史.
임인춘, 배사헌부지평, 선체위체찰사종사관, 위전라도암행어사.
임인년(1602) 봄에사헌부 지평12)(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에 체찰사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체직되었고, 전라도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었다.
을사년(1605) 여름에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지평(持平)이 되었다. 이 때 태풍과 홍수의 재앙이 생기자 임금이 구언(求言)13)을 하니, 선생이차자(箚子)14)를올렸는데 초문(草文)에 권간(權奸)이 국정(國政)을 장악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대사헌(大司憲) 박승종(朴承宗)15)이 성을 내며 그 말이 당시 재상을 핍박한것이라 하여 물리쳐서 아뢰지 않으니, 마침내 사직서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병오년(1606) 가을에통제사(統制使)16)의종사관(從事官)에 제수되었는데, 행장(行裝)이며 여러도구들이 찢어지고 해어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어떤 사람이 묻기를, “통영(統營)은 뛰어난 장인(匠人)들이 모인 곳인데 어찌 이처럼 남루하고 피폐할 수가 있는가?” 하니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통제사에게 안팎에서 물품을 요구하는 편지축을 보았는데 그 안에 쌓인것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내 어찌 차마 그 사이에 끼어 이름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12)지평(持平) : 조선시대 사헌부(司憲府)에 두었던 정5품 관직으로 정원은2인이었다.
13)구언(求言) : 나라에 재앙이 있을 때나 국정에 필요할 경우에 임금이 정치의잘잘못에 대하여 널리 신하들로부터 비판의 말을 구하던 일이다. 이 때 진달된 내용은 정책에 반영하는것이 관례였다.
14)차자(箚子) : 조선시대에 관료가 국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이다.
15)박승종(朴承宗) : 1562∼1623. 본관은밀양(密陽)으로 자는 효백(孝伯), 호는 퇴우당(退憂堂)이다. 1585년(선조 18)에진사가 되고, 다음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623년인조반정 때 아들 자흥(子興)의 딸이 광해군의 세자빈 (世子嬪)으로서 그 일족이 오랫동안 요직에 앉아 권세를 누린 사실을자책하여 아들과 같이 한낮에 목매어 자결하였다.
16)통제사(統制使) : 조선시대 임진왜란(壬辰倭亂) 중에 설치된 종이품(從二品) 서반외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수군(水軍)을 거느리는 총지휘관(總指揮官)으로삼도수군통제사 (三道水軍統制使)라고 하였다. 1593년에 이순신(李舜臣)이초대 통제사로 임명된 이래 고종 32년에 폐지될 때까지 모두 208명의통제사가 임명되었다.
丁未春, 除江界判官, 以親癠未赴. 夏丁外艱, 哀毁踰禮, 廬墓三年, 不出山門外.
정미춘, 제강계판관, 이친제미부. 하정외간, 애훼유례, 여묘삼년, 부출산문외.
정미년(1607) 봄에강계 판관(江界判官)에 제수되었으나 부친이 편찮아서 부임하지않았다. 여름에 부친상을 당하니 슬퍼하여 몸을 상하게 한 것이 예법에 벗어날 지경이었다. 3년간 여묘(廬墓)살이를하면서 산문(山門) 밖을 나가지 않았다.
己酉, 服闋, 時昏朝政亂, 除工曹正郞不赴.
기유, 복결, 시혼조정란, 제공조정랑부부.
기유년(1609)에상복을 벗었다. 이 때 혼조(昏朝 : 광해군)의 정치가 어지러웠는데,공조정랑(工曹正郞)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경술년(1610)에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었다. 창석(蒼石) 이준(李埈)17)이시를 지어 주었는데, “대각(臺閣)에 이제는 후진들이 많아져서, 조정에서 그 누가 선생을 기억하리? [臺閣卽今多後進, 朝廷誰復記先生.]”라고하였다. 가을에 함경도 평사(咸鏡道評事)에 제수되었고, 신해년(1611)에는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7)이준(李埈) : 1560~1635. 본관은 흥양(興陽)이며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이다. 이조년(李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탁(琢)이고, 아버지는 수인(守仁)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계축년(1613) 가을에창원 부사(昌原府使)에 제수되니 계모(繼母)를 봉양하기 위하여 서둘러 부임하였다. 어떤 권세 있고 귀한 자가 노비(奴婢) 문제로 서로 소송하여 청탁을 해 오니 선생이 이를 엄중히 꾸짖었다. 이때정인홍(鄭仁弘)이 영상(領相)으로서 합천(陝川)에 있었는데, 먼 지방에서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니 벼슬아치들이 앞다투어 달려가 뵙고자 하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그러나 선생은 일절 그 문(門) 앞에가지 않으니, 정인홍이 비록 선생이 자신에게 붙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노하지 않았다. 어떤 일품(一品) 재상이창원부사가 궁궐에 보낼 면포 40필을 사사로이 이용하였다고 정인홍에게 고변한 자가 있었는데, 정인홍이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그가 어떻게 정사(政事)를 보는지를 듣고 있었다. 그가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고 하였다. 선생이 이 말을 듣고사실을 조사하게 하였으나 말을 만들어 낸 자를 찾지는 않았다. 선생이 체직되어 돌아가는데 그 사람이찾아와 길에서 사과하고 돌아갔다. 창원부가 전쟁으로 불타버린 후에 학궁(學宮 : 향교)이 무너져황폐했는데, 선생이 봉급을 털어 다시 짓고 여러 유생들을 모아 학업에 힘쓰도록 장려하였다. 사나운 도적들이 섬 가운데에 모여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원근에서 그 피해를 입었다. 선생이 군졸을 보내어 그 무리들을 체포하여 오니 이로부터 아무 일이 없게 되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특별히 승진시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하였다.
계해년(1623)에인묘(仁廟)가 반정에 성공하여 등극한 처음에, 선생을 발탁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겸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18)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19)에 임명하니 병으로사양하는 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항상 돌아가신 모친에게 끝까지 봉양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지극한통한으로 여겨 계모 오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계모의 병이 깊어지자 선생 또한 풍비(風痺)가 점점 심해져 위중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어머니의 병세가 어떠한가만을끊임없이 물었다. 맏형이 전쟁 중에 죽으니 그 말이 나올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고아가 된 조카를 가르치고 양육하였으며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고 제토(祭土)를 획정하여 주었다. 병중에도 오직 형의 손자들에게 독서할 것을 권하면서말하기를, “어찌 차마 내 형의 자손들로 하여금 무지몽매한 지경에 이르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본심의 전일한 덕성이 모두 이와 같았다.
18)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 경연(經筵)은 조선시대에임금에게 유학(儒學)의 경서를 강론하던 일인데 유교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경연관(經筵官)은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郎廳)으로 구성되었다. 당상관은 영사(領事) 3인, 지사(知事) 3인, 동지사(同知事) 3인, 참찬관(參贊官) 7인이다. 영사는 삼정승이 겸하고 지사와 동지사는 정2품과 종2품에서 각각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였다. 참찬관은 여섯 승지와 홍문관 부제학이 겸직하였다.
19)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 : 춘추관은 조선시대에 시정(時政)의기록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관원으로는 영사(領事 : 영의정이 겸임) 1인, 감사(監事 : 좌·우의정이 겸임) 2인, 지사(정2품) 2인, 동지사(종2품) 2인, 수찬관(정3품 堂上官), 편수관(정3품 堂下官∼종4품), 기주관(정5품·종5품), 기사관(정6품∼정9품) 등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이들은 모두 문관으로 임용하되, 다른 관부의 관원이겸하도록 되어 있었고, 이들 모두를 통칭하여 사관(史官)이라고 하였다.
甲子, 正月初八日, 考終于寢, 享年六十三, 葬義城縣西栗里村巳坐原.
갑자, 정월초팔일, 고종우침, 향년륙십삼, 장의성현서률리촌사좌원.
갑자년(1624) 정월초8일에 정침(正寢)에서운명하시니 향년(享年) 63세였다. 의성현(義城縣) 서쪽율리촌(栗里村) 사좌(巳坐) 언덕에 장례지냈다.
선생은 대대로 법도 있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천품이 인자하고기량이 넓고 굳세었다. 지혜와 능력 또한 일찍 드러내었고, 효도하고우애 있는 행실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었다. 일찍이 도(道)가 있는 스승에게 나아가 배워서 학문이 굉박(宏博)하고 조예(造詣)가 고명(高明)하여 이미 당세에 사우(師友)들이 추중(推重)하는 바가되었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들어오면 충성을다하여 임금을 섬겼고 외직으로 나가면 성심을 다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가는 곳마다 충정(衷情)을 다하였으니, 난리를만나서는 발분(發奮)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고 변고를 만나서는은혜를 생각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자신과 뜻이 다른 자들도 감히 그 허물을 찾지 못하였고 자신과 뜻을같이 하는 자들은 그 마음을 다하였다. 군자의 도는 진퇴와 존망을 알아야만 그 정도를 잃지 않아서 능히험난한 중에도 현명하고도 밝게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어서, 노련한 하급 관리들도 자신들이 평소에쌓은 실력을 다 드러내지 못하였다. 이것은 세도(世道)가 선생에게 요구한 것이니, 무엇을 더하고 뺄 것이 있겠는가?
아아! 지금 선생의시대로부터 319년이 흘렀다. 그러나 선생이 남긴 아름다움과넘치는 향기는 오늘에까지 이르러서도 오히려 우리들로 하여금 선생을 그려보며 추모하는 마음을 그치지 않게 한다. 이경정(李敬亭)20), 김망와(金忘窩)21), 이눌은(李訥隱)22) 등 여러 선생들이 지은 소장(疏狀) 묘갈(墓碣) 묘지문(墓誌文)들이 천 년 후까지도 증명하며 소리를 울릴 것이니, 아아, 위대하도다!
20)이경정(李敬亭) : 이민성(李民宬 :1570~1629)이다. 경상북도 의성 출신으로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자는 관보(寬甫), 호는 경정(敬亭)이다. 아버지는 관찰사 광준(光俊)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다.
21)김망와(金忘窩) : 김영조(金榮祖 :1577~1648)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자는 효중(孝仲), 호는망와(忘窩)이다. 아버지는산음현감 대현(大賢)이며,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김성일(金誠一)의 사위이다.
22)이눌은(李訥隱) :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이다. 본관은 원주(原州)로 자는 천상(天祥), 호는눌은(訥隱)이다. 아버지는정언 주(澍)이며, 어머니는진주 유씨(晉州柳氏)이다.갈암 이현일과 밀암 이재를 스승으로 한 남인의 대표적인 문장가이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된 함안 조씨(咸安趙氏)이니형조판서(刑曺判書)에 증직된 조지(趙址)의 따님이다. 계해년(1563)에 나서 경인년(1650)에 별세하였다. 율곡(栗谷)의 같은 언덕에부장(附葬)하였다. 아들은홍망(弘望)이다. 선생이선성(宣城 : 예안)에있을 때에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을 구제하여 살렸는데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대가 선행을 많이 베풀어서 하늘이 장차 그대에게기이한 아이를 내려주려고 한다. ‘망(望)자’를 넣어서 이름을 지으라.”고 하였다. 경자년(1600)에 과연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고송공(孤松公)이다. 문과에 급제하였고정언(正言)을 지냈으며 사림에 인망이 두터웠다. 딸은 진사 이거(李擧)에게시집갔다. 홍망의 아들은 한로(漢老), 한걸(漢傑),한백(漢伯)이며, 딸들은 유중하(柳重河),진사 김시임(金時任),이조형(李朝衡),임세준(任世準),도이설(都爾卨), 권휴(權烋), 현감박문약(朴文約), 박망지(朴望之)에게 시집갔다. 그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그 후손 종기(宗基)23), 정기(正基)가 나를 찾아와서 비석에 새길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아득한 후생으로서 아는 것이 없고 말도 짧아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그러나 돌이켜 계의(契誼)의 소중함을 생각하고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드디어 참망(僭妄)함을 헤아리지 않고대략 시말을 서술하고 명문(銘文)을 이어 붙인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23)종기(宗基), 정기(正基) : 《오봉선생문집(梧峰先生文集)》과 <신도비(神道碑)>에는모두 ‘定基, 宗基’로 되어 있으나 김홍락(金鴻洛)의 《모계문집(某溪文集)》과《아주신씨족보(鵝洲申氏族譜)》에 의거하여 ‘宗基, 正基’로 바로잡았다.
24)미원(薇垣) : 사간원(司諫院)의 별칭이다. 중국에서는 중서성(中書省)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중서성에는 자미(紫薇)를 심었고 사간원은 중서성 소속이었기 때문에 조선조에서는 사간원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악조(鶚鳥)는 물수리인데강직하거나 훌륭한 인물을 비유한 말이다. 후한(後漢)의 공융(孔融)이 예형(禰衡)을 추천한 표문(表文)에 ‘지조(鷙鳥) 백 마리가한 마리 악조(鶚鳥)만 못하다’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 오봉 선생은 정유년(1597)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25)극림(棘林) : 가시나무 숲으로, 《예기(禮記)》에 보면 대사구(大司寇 : 법무장관)가 극목(棘木) 밑에서 옥사(獄事)를청단(聽斷)하였다고 한다.여기서는 사헌부(司憲府)를 지칭한 듯하다. 난조(鸞鳥)는 봉황의일종으로 역시 훌륭한 인물을 가리킨다. 오봉 선생은 임인년(1602)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
26)不忮不求 何用不臧 : 《시경(詩經) 패풍(邶風) 웅치(雄雉)》에 나오는말이다.
27)김홍락(金鴻洛) : 1863∼1943. 조선말기 문신으로 자는 우경(羽卿), 호는 모계(某溪),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부친은 김진억(金鎭嶷)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하였고 고종 때 진사에 급제하였으며 순종 때까지 여러 벼슬을 지냈다.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유고에 《모계문집(某溪文集)》이 있다.
28)서동균(徐東均) : 1902~1978. 대구 달성 출신의 근대 서화가이다. 석재(石齋) 서병오(徐炳五)에게 배워서 사군자(四君子)에 능했으며 글씨는 황산곡체(黃山谷體)를 잘 썼다.
29)병호(炳浩) : 1934-2013. 아주 후인으로 28세손이며 오봉종손 申元植의 차남. 경북 의성 출신의 교육자이며서예가이다. 1954년 의성국민학교에서 교단에 오른 이래 45년간중고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전국교육자연구발표대회 9회 입상. 사도실천기 전국현상공모 당선, 문교부장관표창, 제1회 성균관표창, 오늘의스승상 외 다수. 의성 조문국 사적지 경덕왕릉비 외 백여 기의 비문 글씨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