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 신지제 선생의 생애와 인품, 과거 급제와 30년간의 관직생활 임진란 당시의 예안ㆍ안동 지방의 의병 창의와 지원, 사적(事蹟)과 공훈(功勳)에 대해서는 구전 보다는 문집 또는 왕조실록을 통해서 기록으로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최근까지 문집 등이한문으로 되어 있어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오봉선생문집을 국역으로 번역하여 50페이지 책2권으로 2019년 7월 정부 예산으로 발간해주었다. 207년 8월까지40년간 재직한 고려대학 경영대학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2014년 아주신씨(鵝洲申氏) 재경종친회 초대회장을 맡으면서 조상에 대한관심을 더욱 돈독하게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저의 13대조부이신 오봉 할아버지의 효성(孝誠)과 충절(忠節)에 대해서 머리 숙여 존경하였고 위대한 조상을 모셔서 평소 대단한자부심을 가지고 살아 왔다.
특히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를 당해서는 많은 지방 수령들이 가족을 데리고 도망가서 행정이 마비ㆍ공백 상태가되었는데 오봉 선생만은 관아에서 의병 창의를 도모하고(예안) 안동부사(공석)까지 겸직하면서 경상좌도 북부지역을 왜적으로부터지켜냈다. 근무지로서 힘들다는 예안[難治之鄕] 현감을 임진란 기간 중에 4년 7개월을연임하면서 근무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분의 능력을 판단할 수 있다. 늦게 태어나 퇴계 선생에게 직접배우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생각하면서 예안 현감과 관직을 자청하였고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두 분에게도 사랑과 지도를 받아 왔다. 그러나 이 분들과는 당파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지냈다. 임진란이없었다면 오봉도 퇴계 선생처럼 학자가 되었을 것 같은데 시운(時運)이그렇지 못했으며, 임진란의 경험을 살려 정유재란(1597)부터 10년 동안 관찰사(순찰사), 체찰사(정승ㆍ영의정), 통제사 등의 종사관,군무안핵사(군대의 기무 사령부)로서 군대, 전쟁 등과 관련된 관직을 맡아왔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전란 후 선무원종공신(1등), 호성원종공신(2등) 등 2개의 공신록에 책훈(策勳)된것으로 입증되고 있지만 오봉 선생의 위상은 아주 신씨 전체 계파를 넘어서 국가 위기에 공헌하셨고, 조정에서내려진 불천위(不遷位) 제사(음력 1월 8일)의 전통이 지속되고 있어서 이 어른의 위대함은 후손들에게 전수되어 왔다.
오봉 신지제 선생에 대한 자손으로서 조상에 대한 관심은 내가 어릴 때부터 주위의 다른 형제들보다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집성촌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초ㆍ중ㆍ고ㆍ대학시절까지 한 동네에서 방학 때는 시간을 보냈고, 종가의 친구로서 병용이와는나로 하여금 잦은 출입을 하게 만들었고, 우리의 절친 관계는 60대이후에도 지속되어 왔다. 지난 5월 오봉선생문집의 교정 작업에 참여하면서 평소 오봉 선생에 대한 연구논문이 두 세편 밖에 없었고 그것도 최근의 일이어서 내가 큰 마음먹고 오봉의 생애와 임진란 의병 활동에 대한 연구를 추진해야겠다는 생각을 실천에옮기려고 하였다. 특히 임진란과 의병 활동은 다른 사람의 경우 전업적인 의병장으로 추대되고 그 공로로관직 제수까지 있었지만 오봉 선생은 예안현감인 지방 수령으로 현직 공직자로서 관군을 통솔하고 왜적의 방어 의무가 본인에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사사로운 성격의 문제가 일부 내포되고 있는 의병 활동을 다루는데 어려움과 한계가 있었다.
오봉 선생은 30년의 관직 생활 중에서 임란 때에는 지방 수령으로서 의병 조직과 지원활동이 계속되었고, 정유재란부터 10여 년간은 순찰사(관찰사) 종사관, 체찰사 종사관, 군무안핵사, 통제사 종사관 등의 관직을 맡아 전란의 연장선상에서 문관이었던 사람이 무관 업무까지 수행하는 신분이 되었다. 필자가 오봉 선생의 의병 활동 문제를 다루는데가장 큰 애로사항은 연구 자료의 부족이었다. 임진란 정신문화 선양회가 주관하는 경상좌ㆍ우도의 지역 임란사와 의병을 연구함에 있어서 의성(비안 포함)과 군위(의흥포함)지역 연구가 누락되어 큰 애로가 있었다. 의성현은 오봉의고향으로 부모 형제가 살고 있는 지역이고 특히 근무지였던 예안ㆍ안동과 바로 아래 동네이기 때문에 지리적인 연관성이 큰 사정이 있었다.
필자는이번 연구에서 완벽 또는 완성에 가까운 성과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고 있다.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하여관심이 있는 연구자 또는 오봉의 후손으로 연구하려는 사람이있기 바라며 그들에게 연구 바탕의 일부로서 기본 자료를 제공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연구가본인의 주된 전공 영역이 아니고 논문의 형식과 논리 전개 등의 과정에서 부족했던 점은 넓은 이해와 양해를 바라는 바이다.
오봉 선생의생애와 관직 생활에 있어서는 이번 오봉선생문집의 국역사업으로 선생의 업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예안ㆍ안동을 중심으로 전개된 경상좌도북부지역의 의병 활동에 있어서는 곽재우와 같은 직업적 전문 종사자가 아닌 지방 수령이었기 때문에 활동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의 연구에서 아쉬웠던 점의 하나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부터 1606년까지 10년 동안 고위 관직자(관찰사, 체찰사 등)의종사관으로서 앞으로 임진란과 같은 큰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정책 입안을 위하여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는데, 이기간 동안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 자료가 많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향후 연구 관계자들은 이 부문에 대하여큰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그리고 오봉 선생의 자손들과 종가에서도 오봉의 의병(관군 포함)활동에 대한 구전적, 전설적인수준의 이야기꺼리에서 탈피하여 좀 더 체계적인 연구자료 수집과 관심을 기울여서 한 단계 상등된 조사ㆍ연구가 있기 바란다.
이 자료를정리하면서 특히 임진란 정신문화 선양회에서 주관한 지역 임란사 세미나 자료집, 최효식 교수의 영남 의병사등 임진왜란 연구 등이 본인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오봉선생문집을교정보면서 번역에 참가한 전문가 중에 고려대학교 한문학 전공자가 중심이 되었고, 한문학과 심경호 교수가문집해제(文集解題)의 글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래된 자료 중에서는 대부분 고려대학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어서 삼복더위 중인데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자료정리를 끝낼 수 있었다. 특히 젊은 후세들을 위하여 가급적 한자를 적게 쓰려고 했지만 원고의 성격상한자 삽입은 불가피했다. 문집 국역에 참가한 김기엽 선생이 원고 입력에 도움을 주어 이것이 세상에 빛을볼 수 있었다. 또한오봉 종가의 힘든 일을 맡아서 수고가 많은 신명균도 평소 많은 격려가 있었다. 이 자료를 책으로 만들어 종가에 기증하려고 하니 본인이 못다 한 연구의 부족분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채워지기바란다.
❚ 예기(禮記) 「제통(祭統)」
선조의아름다운 행적이 없는데도 말하면 이는 세상을 속이는 것이요, 선함이 있는데도 알지 못하면 현명하지 못한것이요, 알면서도 후세에 드러내어 전하지 못하면 어질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