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정권의 일본군이 임진왜란의 정전 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재차 침공하여 1597년 8월 27일부터 1598년 12월 16일까지 지속된 전쟁이다.초기에는 일본의 공세가 이루어지다가 명량해전을 변곡점으로 남해안의 왜성들에 틀어박힌 일본군에 대한 조ㆍ명 연합군의 공격 양상을 띠었다. 그러므로 정유재란 때 조선군은 대부분 공격 측, 일본군은 방어 측에서게 되었고,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을 제외하면 조선군이 결정적 승리를 거둔 전투는 거의 없는 교착 전쟁의모습을 나타냈다.
일본군은 보급이 제대로 안되고 전황이 불리하여 화의에 나섰고 명군도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후 자국의 이해를 우선시하여종전을 원했으므로 화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왕과 신료들은 세 나라 중에서 가장 많이 피해를 입었다면서화의를 반대하여 교섭에서 제외되었다.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은 군사제도를 개편하고 의병부대를관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방비를 강화해 나갔다.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철군하여 왜성을 축조하고 전투를 중단한채 주둔하였다. 남해안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1597년다시 전쟁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정유재란이었고, 이때 일본본국에서 새로운 병력 10여만 명이와서 참전했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파직과 원균의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남해안 대부분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육군은 8월 15일 남원전투에서대승을 거두었다. 일본군은 전공을 증명하려고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 전리품으로 일본에 보냈고(귀무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구 잡아 서양에서 온 노예상에게 매각하였다. 일본군은 또 8월 19일전주성 전투에서 조ㆍ명 연합군을 대파하여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군과 대치하기에 이른다. 명군은직산에서 왜군을 만나 몇 차례 전투했는데 이순신의 수군이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시키자 보급선이 끊어질 것을 염려하여 육군은 직산을 끝으로더는 진격하지 못했다.
1597년 12월 말에서 1598년 1월 초에 걸쳐 조ㆍ명 연합군은 울산 왜성을 공격했으나함락시키지 못했고 일본군을 군량이 극심하게 부족한 상태에서 고군분투하였다. 1598년9월 말에서 10월 초에 걸쳐 세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했으나 왜교성전투, 울산성과 사천전투에서 패했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죽자 왜군은 이를 극비에 부치고 본국으로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철수하는 왜군을 쫓아 함대를대파하여 승리했으나 전투 중에 전사하였고, 결국 두 차례의 전쟁은 끝났다. 전쟁의 여파로서 일본은 정권이 바뀌었고, 명은 금나라로 주인이 변경되었다. 조선은 많은 전쟁 피해를 남기었다.
-경작지 6%파괴
-문화재 소실(경복궁등)
-역대실록 등 귀중한 사서를 보관했던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
2. 대구 팔공산 회맹
1) 대구지역의 임진란과 의병
대구진(大邱鎭) 지역은 그 주변의 영산ㆍ창녕ㆍ현풍ㆍ인동ㆍ의흥ㆍ신녕ㆍ하양ㆍ경산ㆍ청도를포괄하고 있어 대단히 광범하였다. 이는 진주진에 소속된 지역 10개보다 적지만 안동진 9개 지역과 동수이다. 임진란 왜군의북상 루트와는 중로와 좌로에 관련되고있다. 중로는 동래-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로 이어졌고, 좌로는 동래-경주-영천-신녕-의흥-군위-비안-용궁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오봉신지제 선생과 경상도 의병 관계는 본인이 근무한 예안ㆍ안동과 고향 지역 의성(비안)ㆍ군위(의흥) 다음으로팔공산성, 팔공산 회맹과 깊은 인연이 있고 현장에서 2년동안 산성을 지킨 경험이 있다.
임진년부산포에 상륙한 왜군 제1번대가 대구 성을 점령한 것은 4월 21일 이었다. 경상도 순찰사 김수(金睟)가 보고를 받고 각 고을에 통첩을 보내 소속 군대를 거느리고 목적지에 집합하여 한양에서 오는 장수를 기다리게했다. 문경 이하 각 고을 수령들은 모두 자기 군대를 인솔하고 대구로 가서 냇가에 노숙하면서 순변사를기다린 지 수일이 지났으나 순변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가까이 오니 놀라 당황하고 이때 큰 비가 내려 행장은 젖고 군량마저 떨어지게 되어 군병들은달아나고, 수령들은 단기로 도망쳐 버렸다. 대구 진은 무려 10개의 부ㆍ군ㆍ현을 포괄하고 있어서 지역별 의병 조직을 일률적으로 서술하기는 어렵다. 영산ㆍ창녕ㆍ현풍 등에서 활발한 의병 활동을 수행한 것은 곽재우 부대라고 할 수 있고 그 이외 인동ㆍ의흥ㆍ신녕ㆍ하양ㆍ경산ㆍ청도에서의전투도 주변의 대규모 의병 집단과 연계되고 있었다.
대구는일본군 주력부대의 통과 지점인 동시에 후방 보급로로서 왜적의 최선봉인 제1번대의 통과 후에도 큰 병력을주둔시키고 있어서 의병을 조직하기는 어려웠다. 왜군이대구에 왔을 때 부사 윤현은 관내 군민(軍民) 2천 여 명을 인솔하고 공산성(公山城)으로들어가서 대구 읍성은 완전히 적의 소굴이 되었고 6월 말까지 대구에서 의병이 일어나지못했다. 대구 최초 의병장은 서사달이었고임진년 7월 그가 의병장이 되어 초집의병문
(招集義兵文)을지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준비하였다. 서사달은 처음 대구 출신 유림으로 공산성에 피난 중인 자, 인근 군현의 사림들이 중심이 되어 창의 기병하였다. 실제 공산성(公山城)은 대구ㆍ의흥ㆍ신녕ㆍ하양ㆍ성주에 둘러싸여 있었고 성 주위는1,358步 4尺이며 내부 넓이가25結 5卜인데 샘[泉]이 2개, 소거(小渠)가 3개가 있었다. 대구 의병 활동은 출발이 늦었고, 주위 특히 경상우도의 곽재우ㆍ김면ㆍ정인홍의활동에 영향을 받았고, 또한 대구 이북지역 안동ㆍ예안 등지의 유림이 중심이 된 의병을모방하였다.208)대구 의병은 임란 벽두부터읍성이 일본군의 수중에 있어서 활동이 불가능하여 입성 피난했던 공산성 안에서만 가능했고, 1593년 5월 일본군의 남하와 동시에 부총병 유정(劉綎)등의 명군이 대구를 거점으로 성주를 왕래하며 적의 북상루트를 봉쇄하고 의병의관군화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의병의필요성이 감소하고 식량부족으로 의병 유지 자체가 어려웠다.
2) 팔공산 회맹
팔공산은대구부로부터 약 30리 북동쪽에 떨어져 있는 1,192m 산으로이 산 중턱에 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산성은 이미 후백제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과 전투를 위해 축성한기록이 있다. 박물관의 발굴 팀원들이 즐겨 쓰는 말로서 “한번 싸움터는 영원한 싸움터”라는 말이 있다. 지금의 임진강 주변 군 주둔지의 관측 초소 등은 옛날 전쟁때도 동일한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팔공산성은 임진왜란 때 대구 읍성이 왜적에게 함락된 뒤줄곧 의병군의 진지가 되어왔다. 통칭 공산성은 석성으로 둘레1,560척ㆍ높이 4척ㆍ샘 2ㆍ거 3 등이 있다. 대구읍지(大丘邑志)에 의하면 성의 내부 넓이가 25結 5卜으로서 1만 5천 평의경주 읍성보다 약간 작지만 대구ㆍ의흥ㆍ신녕ㆍ하양ㆍ성주 등을 지원할 수 있는 요새지 였다.
의병장들의팔공산 회맹은 세 차례 있었다. 그것은 영남의 중앙에 해당하는 지정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요새지인 점이감안되었다. 제1차 회맹은1596년 3월 3일에 있었다.
58개 읍에 총 42명이 집합했다. 특히 도체찰사(都體察使) 영의정 류성룡, 체찰사 이원익, 경상좌방어사고언백, 경상좌병사 성윤문 등 고위 관직에 있는 인사들이 참여하였다.영남이 중심이지만 한양을 비롯한 남양ㆍ괴산ㆍ청주ㆍ충주ㆍ죽산ㆍ보성ㆍ나주ㆍ웅천 등 전국의 의병들이 동참하고 있다. 회맹록에 보면 류성룡과 이원익 등이 주맹(主盟)하였고 명ㆍ일간의 강화교섭이 순탄치 않았을 때를 대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2차 공산회맹은 6개월 뒤인 1596년 9월 28일에 있었다. 경주지방의병장이 대구지방 왜적 침입 소식을 듣고 정병 80명을 이끌고 대구로 왔고, 김응생 의병장 등이 정병 1,00여명, 울산지방 의병장 정병 20여 명이 팔공산으로 향했다. 경주부를 중심으로한 울산ㆍ영천ㆍ영일 등지의 의병 3,00여 명이었다. 이 대병은 9월 21일팔공산에 도착한 다음 날 전투에 임하여 크게 승리한다. 이 회맹에 참여한 의병장들은 정유재란을전제로한 서사토적지(誓死討賊之)를 결의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15읍 64명의의병장이 회맹에 참여했다. 경기지역에서 3명이 참석한 것은이례적이다.
제3차 팔공산 회맹은 1597년 정유재란이 터져 왜군과의 결전이 한창인 9월 2일에 있었다. 정유년 1월에 바다를 건너 온 왜군은 서생포, 부산포 등 남해안에 포진해있다가 7월 중순 왜군 주력부대가 부산 도착을 기점으로 다시 북진하기 시작한다. 먼저 이순신 대신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을 패사시켜 제해권을 장악한 다음 전라도 진출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바로 14만 병력으로 조선을 재침공한 정유재란이 터진 것이다. 팔공산 회맹은 1차ㆍ2차는정유재란 전이고, 3차는 정유재란 개전 뒤에 결성된 것이다. 1597년 9월 2일에 결성된 3차회맹은 29개읍, 30여 의병장에 의한 것인데 이 때 의병장의참여가 많았으나 아마도 누락된 숫자가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208) 경상북도, 경북 의병사, 249~250쪽.
3. 창녕 화왕산 회맹
오봉 신지제선생은 의병 활동, 전투 참가(관군 통솔), 회맹 참여가 적극적이었지만 현직 관직에 있기 때문에 의병장 모임이 중심이 된 명단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팔공산의 공산성 수성과 팔공산 회맹에 특히 적극적이었고 이어서 창녕의 화왕산(火旺山) 회맹으로 가서 곽재우와 합류하였다. 조정은 1597년 4월 곽재우를 방어사로 삼아 도체찰사에 소속시켰다.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남해의 수군이 왜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왜군의선봉이영남우도로 집결되는 듯하자 영남좌도의 의병장들은 왜군의 북진을 막기 위해 낙동강의 요새지 화왕산성을 지키고 있던 곽재우 진영으로 모여 들었다. 화왕산성은 창녕현에서 동쪽 4리 지점에 있는 757m 화왕산 정상에 있는 석성으로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창녕현 조에 보면 둘레 1,217보, 샘 9개, 연못 3개 군창 등이 있는신라 때부터 있던 옛 성이다. 여기에 왜의 재침략이 있기 직전 국가 방책으로 중창된 견고한 성으로 청야전(淸野戰)으로는 적격지였던 것이다.
경주에서 20여리 떨어진 화왕산성은 방어사 곽재우 군이 중점적으로 수비하고 있었다. 곽재우는왜군이 울산ㆍ밀양 등지에서 전라도 방면으로 진격해 오자 밀양ㆍ영산ㆍ창녕ㆍ현풍 등 4고을의 군사를 이끌고이 산성에 들어가 사수하기로 하였다. 1597년 7월 9일 방어사 곽재우와 회맹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참여한 열읍의 의병장은 80여명이었다. 7월 9일에는30여 명, 7월 18일 40여 명이 회맹하였다. 7월 19일날이 밝자 여러 의병장들은 각자 도략을 시험하였고, 20일에는 적병이 근처에 접근하였다. 이 내용은 이의온(李宜溫)의 용사일록(龍蛇日錄)에적힌 내용이다. 회맹에 참여한 의병은 60~70여 명이었고경주 출신들이 중심이었다.
의병과관군은 회맹으로서 화왕산성 사수를 결의하였고 곽재우의 주도로 군사 배치가 완료된 뒤에 가등청정(加籐淸正)이 이끈 왜병의 선발대가 도착하였다. 왜병의 기세에 눌려 성안의 군졸들은겁에 질려 떨고 있었는데 모두가 결사 항전을 결의하고 성이 함락되면 불을 질러 함께 죽을 것을 맹세했다. 의병진의완벽한 수비에 놀라 왜병들은 화왕산성을 우회하여 거창을 거쳐 남원으로 진격하였다. 1597년 7월 21일 영남의 의병 150여명, 의병 70여 명이 화왕산성에서 목숨을 걸고 회맹을 결의한 결과는일단 성공적이었다.
4. 오봉의 군사 관련 관직과 활동
1) 의병대장 곽재우와 협력
임진왜란때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곽재우(152~1617)를 지명할 수 있다. 그는관직에 나가지 않고 재야에서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41세로 경남 의령에서 창의 거병하며 정암진 전투를비롯하여 진주성, 창녕 화왕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내는데 성공하였다.그는 관군이 괴멸되어 국력이 쇠퇴할 때 의병진을 주축으로 경상우도를 지켜 왜군의호남 진입을 막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곽재우는 경북 달성군 현풍면 대동리에 세거하는 대족으로 할아버지, 아버지, 숙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고, 명종 7년(152) 8월 28일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곽재우는 임진란 군공으로 7월 유곡 찰방(幽谷察訪 5품) 첫 관직에서 2달 사이에 당상관이 되었다.
곽재우의병부대 조직은 매우 정연했고 중추적 인사들은 부사ㆍ현감ㆍ훈련 판관등 전직관료ㆍ중소지주ㆍ자영농 출신으로 구성되었고, 의병은 85%가 관군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의병 간부는 의령ㆍ삼가ㆍ초계 등지의 토착인 들로 유학적 교양을 지닌 사족ㆍ유생들이었다. 곽재우 의병군이 확고한 조직체를 결성할 수 있었던 것은 초유사 김성일의 도움이 컸다. 의병수가 2천명에 이르러 그들에게 지급할 무기와 군량미 조달이 어려웠는데처음에 관가에 방치된 것을 가져다가 의병에게 지급하였지만 이것으로 부족하여 무기제조ㆍ군량미를 자가 부담 또는 관곡으로 충당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큰 제약은 경상감사 김수와 나쁜 관계였다. 곽재우는 왜군의침략 때 김수의 병사와 수장 등이 도주하여 감사를 공박했는데 감사는 곽재우를 모함하여 역적으로 몰아 세웠다. 의병진은한 때 해체 위기에 있었으나 초유사 김성일의 중재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중 곽재우가 주도한 대표적인 주요 전투는 정암진의 승첩ㆍ현풍ㆍ창녕ㆍ영산의 수복전, 제 1차 진주전을 꼽을 수 있다. 정암진 전투는 임진년 6월이었고 상대 왜군은 경상도 담당 모리휘원, 전라도 담당 소조천륭경(小早川隆景)의 부대였다. 정암진전투의 승리로 낙동강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왜군선단을 격파하였다. 현풍ㆍ창녕ㆍ영산에 주둔한 왜군은 김해와 성주를 연결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7월 중순 정암진 승첩의 여세를 몰아 현풍을 위협하자 주둔한 왜군은 소문을 듣고 철수하였다. 이 지역의 확보로 경상좌도와 우도의 연락이 가능하였고, 왜적은 오직대구, 청도를 연결하는 중로로 통할 수밖에 없었다.
곽재우는고위 관직으로 성주 목사ㆍ진주 목사ㆍ한성부 우윤ㆍ함경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1598년 정유재란 때에는화왕산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오봉 신지제는 이때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달려가 곽재우와 동맹하여 의병 활동을 하였다.209) 곽재우가경상좌도 방어사로 있을 때 정유재란에 대비하여 현풍지역의 석문산성(石門山城)에서 화왕산성으로 옮겨 의병을 일으켰을 때 오봉 선생이 급히 찾아갔고, 창의록인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에이름이 수록되었다.
오봉 선생은 1613년 8월에 창원 부사에 제수되었는데 9월에 부임하였다. 남포(南浦)에서 오래간만에 뱃놀이를 하다가 신라 말 최치원 만년에 소요하였다는 정자 월영대에올라가서 휴식하면서 수창시를지었다. 그 다음해인 1614년 4월에 배를 띄우고 강을 거슬러 올라 곽재우가 거주하는 영산에 있는 정자(1602건축)를 방문하여 두 사람이 회포를 풀었다. 오봉선생문집 2권에 월영대에 관한 기행문이 실려 있고, 수창시 2수(首)도있다.
1617년 4월망우당 곽재우의 죽음에 오봉 선생은 곡을 하였으며, 오봉선생문집 2권에곽망우당 공의 시(詩)에 차운하여 지은 시가 2수(首)가 있는데 1616년에 지은 시의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날 곰과같이 용맹하던 장수가 疇昔熊羆將 주석웅비장
오늘은난새와 학처럼 고고한 마음 如今鸞鶴情 여금란학정
남극노인성을맞이하고 보니 相邀南極老 상요남극로
그 명성이해처럼 길이 빛나네 白日久懸名 백일구현명
2) 오봉의 군사 관련 관직 10년
조선 개국이후 20여 년 동안 큰 전쟁이 없었고, 임진왜란은 당쟁분열과 준비, 경험부족으로 왜적의 대군 진출 앞에서 전혀 대항을 하지 못했다. 전쟁 시 통상 군사조직 또는 관리체계 등에서 평상시의 시스템으로는 전투를 수행할 수 없어서 전쟁 기간 중 임시로일시적으로 필요한 군사 관직을 많이 만들고 현장에서 조정의 허가 없이 융통성 있게 운영하도록 했다. 이원고 집필 과정에서 새로운 군사 관직이 자주 등장하고 그 때마다 각주를 붙여 설명하기가 어려웠고, 때로는각주 등에서 중복을 피하기 곤란하였다.
오봉 신지제선생은 정유재란부터 10여 년 동안 창원 부사로 가기 전에 군대 또는 전쟁과 관련되는 관직을 맡아 왔다. 문집 번역에 참가한 전문가들은 오봉의 한시(漢詩)에대해서 모두 감탄하고 있는데, 필자는 오봉 선생이 임진왜란 등의전쟁이 없었다면 퇴계선생과 같은 학자로서 대성하였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문관으로서 오봉선생이 임진왜란 의병 활동 등의 경험에 따라 정유재란 이후 10년 동안 주요한 군사 관직을 제수 받아서문무양반을 겸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이 순찰사 종사관(1597.4)체찰사 종사관(1602), 경상도 군무안핵사(1603.8),통제사 종사관(1606.7)등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 이러한관직에 있어서 업적 등은 기록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원래는논문의 각주로 처리해야 될 군사 관련 관직명에 대해서 여기서는 본문으로 일괄적으로 정리하기로 한다.
209) 오봉선생문집 권2, 372쪽.
- 순찰사 종사관(1597.4) : 이때의 순찰사는 경상도 관찰사인 이용순(李用淳)이었다. 그가 먼저 산성에 들어가 각 고을의 수령 등을 독려하였으며, 오봉선생이 함께 들어갔다. 순찰사는 조선시대 지방 장관인 관찰사가 병란이 있을 때 겸하는 임시관직으로 종2품의 벼슬이다.
- 체찰사 종사관(1602) : 조선시대 군 관직의 하나이다. 나라에 전란이 있을 때 임금을 대신하여 지방으로 나가 군무를총괄하던 벼슬로 재상이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다. 류성룡은 1592년좌의정으로 병조 판서를 겸하던 4월에 임란이 일어나 도체찰사로 임명되고 1593년 충청ㆍ전라ㆍ경상 3도 체찰사 1595년 경기ㆍ황해ㆍ평안ㆍ함경도 체찰사로 임명되었다. 오봉 선생은 1602년 41세 때 사헌부 지평(3월)에 제수되었고 통훈대부(通訓大夫)210)에제수됨과 동시에 체찰사 종사관이 되었다.
- 경상도 군무 안핵사(按覈使) 차출(1603.8) : 조선시대 지방 군대에서 일어난 일을 조사하기 위해 보내던 임시 관직이다. 지방에 어떤사변이나 재난이 있을 때 주민의 안무(按撫)를 목적으로 파견하고정3품과 종2품이 맡고 있는 관직이 있지만 안무사(安撫使) 특히 군대의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군무 안핵사가 별도로 정해있다.
- 통제사 종사관(1606.7) : 이 곳은 각 분야의 장인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도 선생은 성품이 검소하여 행장이 해어지도록 새로 만든 적이 없었다. 이 때 서사원(徐思遠)211) 공이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통제사의종사관으로 임명한 것은 어진 이를 대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곳에 머무르며 혼자만 애쓰시니 습한 바닷가고을에서 지내는 탄식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총명하고 영특하여 무리 중에서 뛰어난 분을 늘 우러러 보았습니다. 벼슬하는 틈이 공부하라는 뜻으로 감히 존형에게 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사관련 조직〉
○ 권관(權管) : 변경지방의 각 진에 두었던 종9품의 무관 벼슬
○ 주병대장(主兵大將) : 병마와 군권을 주관하는 대장
○ 감사(監司) :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 8도에 1명씩 두는 종2품문관으로서 절도사 등의 무관을 겸하였다. 관찰사, 관찰출척사(觀察黜陟使)라고도 한다.
○ 병사(兵使) : 조선시대 지방의 군대를 통솔하던 종2품 무관벼슬, 정원은 15명으로경기도 1명, 충청도 2명, 경상도 3명, 전라도 2명, 황해도 2명, 강원도 1명, 함경도 3명, 평안도 2명이 있었으며, 그 중에 1명은 관찰사를 겸임했다.속칭 병마절도사라 하였다.
○ 방어사(防禦使) : 조선시대 외관직으로 각 도에 배속되어 요지를 방어하는병권을 가진 종2품의 벼슬, 병마절도의 다음 직위
○ 조방장(助防將) : 주장(主將)을 도와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 주로 관할지역내의 무예가 뛰어난수령이 이 임무를 맡았다.
○ 가장(假將) : 싸움터에서 어느 장수의 자리가 비게 되었을 때 그 보충으로정식 임명이 있기까지 주장(主將)의 명령에 따라 임시로 그직무를 맡아보던 장수.
○ 도순변사(都巡邊使) : 조선시대 군무(軍務)를 총괄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파견한 국왕의 특사(임란 때 신립 장군삼도순변사)
○ 도순찰사(都巡察使) : 조신시대 지방에서 변란이 일어났을 때 파견하는 임시군 관
직, 대개는 정2품, 종2품의 관찰사가 겸임.
○ 통제사(統制使) : 임진란 중에 설치된 종2품서반 외관직 정원 1명, 수군총지휘관으로 임진란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으로 하여금 경상ㆍ전라ㆍ충청의 삼도 총지위하기 위하여 특별 설치한 군직.
○ 초유사(招諭使) : 조선시대 임시 관직으로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불러모아 타일러 안정시키는 책임을 맡았다.
○ 진무(鎭撫) : 조선 초기 여러 군영에 두었던 군사 실무직으로 정3품 당하관부터 종6품 참상관 가운데 임명되었다.
○ 창의사(倡義使) : 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킨 사람에게주던 임시 벼슬
○ 소모관(召募官) : 전시에 군량, 마필, 정병 등을 모집하는 벼슬로 소모사(召募使)라고도 불렀다.
○ 파진군(破陣軍) : 특수부대로 적이 침입하면 화포를 가지고 선봉과 전후를맡은 군대이다. 화약 제조 기술 장인 화포장으로 편성
○ 파총(把摠) : 1594년 훈련 도감을 설치할 때 만들어 각 군영에 둔종4품의 무관 벼슬 이후 모든 군영이 답습했고 임기 2년에선전관이나 수령을 거친 자를 임명하였다.
○ 초관(哨官) : 조선시대 10명단위의 병사 집단인 초(哨)를 거느리던 종9품 무관 벼슬
○ 군기시(軍器寺) : 병기, 깃발, 무관이 입던 군복, 집기 등을 만드는 일을 맡아 보는 일을 했다.
○ 비변사(備邊司) : 군국 기무를 총령하는 관청 삼포왜란 때 창설되어 을묘왜란당시 상설 기구로 되고 임진왜란 때 전시의 군사, 정치 통할기구가 되었다. 도제조, 제조등의 관원을 두었으며 비국(備局) 또는 주사라고도 불렀다.
오봉 선생은임진왜란 예안ㆍ안동 지방에서 의병의 조직과 활동에 관여한 경험을 살려 정유재란 때부터 10년 동안 순찰사ㆍ체찰사ㆍ통제사등의 종사관으로서 또한 군무 안핵사로서 전쟁 시 수성(守城), 축성, 방어 작전, 무기ㆍ군량 보급 등 전반에 대해서 위 사람을 대신하여관리ㆍ감독 업무를 맡았다. 특히 정유재란 때 팔공산에 왜적이 침입했을때 평소 친분이 있었던 팔공산 주위의여러 현감 및 의병장을 독려하면서 함께 전투에 임하였다. 정유재란 때 대구로 들어 온 왜적들과 달성과공산(公山)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였는데 달성에서는 6일 동안 8번 싸웠다. 적도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의병도 10여 명이 전사했다. 1597년 9월 2일 왜적이 팔공산을 기습하였는데 대구 지역 의병장이 모두 참가했으나 25일 순찰사는 성을 버리고 도망갔고 왜군들은 산성으로 들어와 관사ㆍ창고ㆍ집을 모두 태우고 퇴각했다.
오봉 선생이맡은 종사관이 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일본군의 재침에 대응하기 위해하삼도로 남하한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은 영호남과 호서지방의 지방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을 하달하였다.
여러 장수들은군사를 거느리고 모두 관내의 산성으로 들어가고 대소사민(大小士民)들은집에 저장한 곡식을 모두 산성으로 운반해 들여서 청야(淸野)하고성을 지켜라. 오는(1597) 1월 5일에 종사관을 파견하여 적간(摘奸)212)할때에 영을 어긴자는 일체 군율로 시행할 것이다.
1597년 8월 15일 왜적에 의해 남원성이 함락되었는데 현감 곽준은 죽음을 무릅쓰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는 두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야왕의신하라서 죽는 것이 당연하나 너희 둘은 물러가 몸을 보전하는 것이 좋겠구나.”라고하자 두 아들이 말하기를 “어찌 아비는 죽어야 하고 자식은 달아나야 한다는 이치가 있겠습니까?”하고는마침내 함께 죽었다. 그리고 딸도 있었는데 이 때 이미 시집을 간 몸이라 산성을 나와서 자기 짝을 찾았으나찾지 못하고 말하기를 “나의 부모가 성 안에서 죽어있거늘, 나는뻔뻔스럽게도 성 밖에 나와 가장의 시신이 있는 곳을 찾았지만 지금 나는 따라야 할 가장이 없으니 차라리 죽어야겠구나.”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목메어 죽었다. 이를 목격한 성 안의 사람들의칭찬하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 순찰사 종사관 신지제(申之悌)가 보고한 장계(狀啓)에이르기를 ‘아비는 충성을 위해 죽었고, 아들은 효도를 위해 죽었으며 딸은 정절을 지키다 죽었으니 한집안에서 평소에 닦아 둔 소양(素養)이 있지 않고서는 어찌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사옵니까?’하였다. 조정은 듣고 가상히여겨서 조종도와 곽준을 제사지내도록 하고 각각 증직하였다.
210) 통훈대부(通訓大夫) : 조선시대 정3품의문관에게 붙여진 벼슬 품계의 명칭 중의 하나.
211) 서사원(徐思遠, 150~1615) : 자는행보(行甫), 호는 미락재(彌樂齋)ㆍ낙재(樂齋)ㆍ고시자(顧諟子),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선공감 감역ㆍ청안 현감 등을 지냈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과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재집이 있다.
212) 적간(摘奸) : 부정한 일이 있나 살피어 캐내는 것을 말한다.
3) 전략 요충지 시찰ㆍ조사
(1) 봉화 청량산(淸凉山)
오봉 선생이 1594년 9월 봉화의 청량산을 조사ㆍ방문한 기행문이 문집에 실려있고 제목에서 청량산을 유람한 기록[遊淸凉山錄]이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한자 ‘유(遊)’의뜻을 유람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고 또한 훌륭한 산에 흥취되어 많은 시작품(詩作品)도 남겨 놓아서 방문 목적을 관광으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도있다. 그러나 그 이면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러하지 아니하다. 1594년가을 9월 1일에 정승 홍이상(洪履祥)213)이경상좌도관찰사가 되어 순시할 때 예안현을 찾아와서 관아의 일이 끝나자 현감 신지제를 불러서 “이 고을에 거점으로삼을 만한 험한 곳이 있다고 들었으니 그대가 가서 형세를 살펴보게.”라고 하였다. 무릇 청량산은 오봉 신지제 현감이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지만 아직 가지 못해 흔쾌히 수락하였다. 9월 2일 관찰사가 안동에 있으면서 비장 강효업을 보내 공문 한통을 주면서 오봉과 함께 가도록 하였다. 여기서 기행문의 앞부분의 일부를 소개하기로 한다.214)
1593년 겨울에 오봉 선생이 관찰사에게 글을올려 “먼저 험준한 곳으로서 예컨대 소백산(小白山), 청량산(淸凉山), 주왕산(周王山), 팔공산 등을 찾아서 그 형세를 살피고 무기를 준비한 다음각 진에서 나누어 지키며 서로 돕는 것도 혹 한 가지 방법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홍이상공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오봉에게 청량산의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오봉은봉화 청량산으로 가기 전에 도산면 가송리에 있는 고산(당시 지명은 일동)에서 평소 존경하는 금난수(琴蘭秀)선생과 동행했는데 그는 오봉이 온다는 소식을 알고 배에서 기다리다가 물길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서 퇴계 선생이 직접 쓴 짧은 시가 바위절벽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감상하였다. 필적이 마치 어제 쓴 것처럼 선명하였다. 청량산은 퇴계 선생이 왕래하며 유람한 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에 천 개 바위와 만 개 골짜기에 아직도 선생이지팡이 짚고 다닌 자취가 남아 있다. 오봉은 늦게 태어나 회고하면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났는데 퇴계를 사숙하고 싶은 마음이 청량산에 와서 다시 느끼게 된다고 술회하였다.
오봉은청량산에서 5일을 보내면서 매일 산행 기록과 풍기 군수 주세붕이154년 청량산을 유람하고 12봉우리(연화봉ㆍ선학봉ㆍ금탑봉ㆍ경일봉ㆍ연적봉ㆍ탁필봉ㆍ자소봉ㆍ자란봉ㆍ내장인봉ㆍ외장인봉ㆍ향로봉ㆍ축융봉) 이름 지명하였다. 이곳을 퇴계와 학봉이 다녀갔고, 오봉의 유익한 벗 달원(김해)과는일찍이 이곳을 함께 유람하기로 약속했는데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전란이 일어나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봉이청량산에서 유람할 때 스님들과 많은 담론을 했는데 스님이 보여 준 시축에 퇴계 시 2편, 학봉 선생 시 여러 편, 또한 평소 경외하고 사이가 매우 돈독했던김해의 시도 있어서 오봉은 청량산에서 이 세 사람의 시를 한꺼번에 받아 보면서 깊은 감회에 빠졌다.
213) 홍이상(洪履祥, 1549~1615) :1579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와 호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 이조 정랑, 이조참의, 안동 부사, 청주목사, 대사헌 등을 지냈다.
청량산방문 이튿날에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축융봉(祝融峯)에올랐다. 이곳에 오른 이유는 오래된 산성을 거점으로 진지를 구축할 수 있을 지의 가능성 여부를 확인하기위해서였다. 축융봉에는 궁궐터가 있는데 깨진 기와와 부서진 벽돌이 간혹 수풀속에 드러나 있고, 또 어정(御井)과 육부(六部)를 설치한 자리가 각각 있었으며, 남대문(南大門)과 수구문(水口門)이란 곳은 그 자취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산성의 축조 시기와 왕에 대해서는 역사적 자료의 한계로 인하여 상고할 수 없었다. 축융봉을 거점으로 산성 일대가 지리적으로 다소 유리한 위치에 있으나 함곡관(函谷關)이나 검각(劍閣)처럼 요새지로삼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오봉은 전쟁의 승리 요건으로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는 맹자의 말에 동의하여 인화가 가장 중요함을 이 한편의 시를 통해 강조하였다.215)
축융봉216)이 하늘 높이 솟고 祝融半天宇 축융반천우
그 옛날성가퀴가 남아 있네 雉堞古基餘 치첩고기여
지세의험준함에 기댈 만하니 地利猶堪據 지리유감거
천시는본디 비할 수 없지만 天時自不如 천시자부여
함곡관도믿을 수 없었고 函關曾未恃 함관증미시
검각도지키기 어려웠지217) 劒閣亦難居 검각역난거
지킬 방법은오직 인덕뿐이니 所守惟仁德 소수유인덕
이 말허투루 여기지 말아야 하리 斯言莫謂虛 사언막위허
임무를마친 오봉은 다시 어제 들른 금탑봉 일대로 이동하여 미처 보지 못한 곳을 유람하기에 이른다. 자연의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오봉은 어느새 내적 고민에 빠지게 된다. 고민을 풀 방법은 하루 빨리 벼슬살이를던져 버리는 것 이외에 아무런 해답이 없다.
오봉은꿈에도 그리던 청량산을 가까스로 찾아 왔으나 전시(戰時)라는특수 상황으로 인해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바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기약할 수 없는 청량산유람을 못내 애석하게 여기면서 비록 짧은 여향이었지만 지식인의 자세를 잃지 않고 청량산유람기 를 남겼다. 우리나라에명산이 한 둘이 아니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이 일어나게 하는 산은 청량산인데, 퇴계 선생이 그 아래에사시면서 평소 왕래하며 유람하신 곳이기 때문이다. 온갖 바위와 골짜기에는 아직도 지팡이를 짚고 다니신자취가 남아 있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음풍농월의 제재가 되지 않음이 없었다.
오봉이청량산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곳에 퇴계라는 불세출의 현인이 살았기 때문이다. 오봉에게 있어서 청량산은단순한 유상(遊賞)의 대상이 아니고, 훌륭한 스승이자 삶의 철학인 것이다. 퇴계는 오봉의 나이 9세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오봉은 늘 퇴계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퇴계가 남긴 일언일구의 폭 넓은 학문세계는 인생의 지남철이 되었다. 또 퇴계의 족적이 묻어 있는 청량산은 오봉에게 있어서 퇴계의 인생관과 우주관을 살펴볼 수 있는 성지(聖地)였던 것이다. 오봉은젊은 시절 퇴계 제자 유일재(惟一齋)에게 학업을 익히는 도중에도청량산을 유람하려고 생각했었고, 과거 공부하는 10년 동안에도이곳을 그리워하였고, 벼슬살이로 전전하는 동안에도 청량산에 대한 향념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3일간의 짧은 여정으로 인해 청량산의 진면목을 체득하지 못한 오봉은 이듬해인1595년 3월에 다시 이 산을 찾아오게 된다.
214) 오봉선생문집 권2, 137~148쪽.
215) 황만기, 전게 논문, 202쪽.
216) 축융봉(祝融峯) : 청량산 12봉우리중 하나로 해발 845m이며, 남쪽 외청량산(外淸凉山) 구역에 속한다. 봉화군명호면 북곡리(北谷里)에 있다.
217) 함곡관(函谷關)도……어려웠지 : 천하의 험준한 요새라도 반드시 지켜 낸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이다. 함곡관은하남성(河南省) 신안현(新安縣) 동쪽에 있는 관문이고, 검각(劍閣)은 사천성(四川省) 검각현(劍閣縣) 북쪽의잔도(棧道)로, 모두 중국의 대표적인 요새 중 하나이다.
(2) 대구 팔공산(八公山)
팔공산과산성은 일찍이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격전이 있었고, 임진ㆍ정유왜란 때 왜적과 수많은 격전이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6ㆍ25전쟁 때도 지리산ㆍ팔공산ㆍ태백산ㆍ소백산 등지에서 후퇴하지 못한 공비들이 남아있어 소탕하는데 몇 년이 소요되었다. 나의 7대 조모 오천 정씨(속칭영천 할매) 무덤이 있는 소야(현재 군위 고로 양지동)도 신녕ㆍ영천읍 화산면과 인접하고 있는데 전쟁 중 3년 동안 공비들이다니는 연결 길목이어서 성묘를 가지 못했다. 팔공산은 1597년 4월 정유재란 때 오봉 선생이 경상도 관찰사로서 순찰사의 이름으로 종사관 오봉 선생과 함께 산성에 들어가 산성을지켰다. 그 때 의성 현령 여대로(呂大老), 의흥 현감 이대기(李大期), 경산현령 조형도, 경주 부윤 박의장, 신녕 현감 손기양, 청송 부사 박유인, 하양 현감 문관도, 울산 군수 김태허, 영천 군수 홍계남, 방어사 권응수 등 여러 사람과 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지키며 난리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였다. 손기양이 쓴 공산지(公山誌)에실려 있다. 이 때
○ 손기양(159~1617) 공산지 : 1597년 팔공산성에 대해 기록한 것으로정유재란에 대비하여 산성을 개축한 사실, 적의 침입으로 무너지는 과정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팔공산은높은 산은 아니지만 경상도 중앙에 위치해 있어 좌우를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대구부의 치소가이곳으로 옮겨졌고 성주ㆍ의흥ㆍ신녕ㆍ하양 등의 군민과 유림지사들이 많이 피난을 와 있었다. 대구 의병의중심인물은 서사원과 정구(鄭逑)이며 이들은 퇴계의 문하이다. 대구의 의병항쟁은 팔공산에서 시작되었고 서사원은 초집 향병문(招集鄕兵文)을 만들어 주위 유림들에게 알리고 항왜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특히팔공산성의 의병 활동은 왜군에게 한 때를 제외하고 의병 활동의 거점이 확보되고 있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조선시대 팔공산은 대구부로부터 북동쪽 약 30리에 위치한 1,192m의 산으로 그 중턱에 공산산성(公山山城)이 위치하고 있고 세종실록 지리지가 편찬될 당시 안동대호부에 속한 의흥현 남쪽40리, 부계현 남쪽 10리, 대구 임내의 해안현 북쪽 1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팔공산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임진왜란을 통해 그 존재가 본격적으로 조선사회에 부각되면서조선의 주요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1597년 1월순찰사 이용순은 관아의 권속을 이끌고 산성으로 들어가자 지방관들과 백성들도 역시 성안으로 계속해서 들어갔다. 순찰사가조금이라도 기한을 맞추지 않으면 모두 군율대로 시행하였는데 신지제와 과거 친분이 있었던 예안ㆍ안동 고을의 인접 고을의 수령(의성ㆍ군위ㆍ신녕 등)들도 형장(刑杖)을 맞았을 정도로 혹독하였다. 신녕 현감 손기양의 공산지(公山誌)에 보면청송 부사(박유인)ㆍ의성 현령(여대로)ㆍ의흥 현감(이대기)ㆍ하양 현감(문과도)ㆍ경산현령(조형도) 등이 가솔을 데리고 함께 들어왔다는 내용이보인다. 공산산성(公山山城)에대한 수성 준비는 몇 달 사이에 거의 완성되었는데 신지제가 순찰사(이용순) 종사관으로 4월부터 이곳에 와 있었다.
일본군이공산성을 침입한 것은 1597년 9월이었는데 그 이전에 순찰사이용순은 양산의 일본군이 밀양을 거쳐 대구를 침범하려 하자 이를 막으려고 하였으나 대패했고 일본군은 바로 공산산성을 공격하여 비축한 병기와 군량을빼앗겼고 관사와 창고가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팔공산 회맹에 참여했던 경주 의병부대가 북상하던 중 팔공산에서왜적을 맞아 전투를 치렀는데 9월 6일부터 13일까지 영천에 주둔하면서 전투 준비, 9월 14일 대구 도착 경상좌우도 의병부대와 합류, 19일 팔공산에서 진을치고, 2일과 23일 왜적과 전투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은 상당한 손실을 입고 울산, 서생포로 남하했다. 정유재란은 1597년 1월부터일본은 주력 부대를 다시 보내 전쟁에 돌입하였는데 선조는 공문을 보내 여러 장수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관내 산성으로 들어가고 모든백성들은 각자 저장한곡식을 산성으로 운반하여 성을 지키도록 했다. 1597년 1월 5일 종사관 신지제를 파견하여 명령의 실행 여부를 조사하여 명을 어긴 자는 일체 군율로 다
스릴 것이라고하였다. 이에 따라 관민들은 대구의 공산산성(公山山城),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 하동의적개산성, 삼가의 악견산성, 합천의 미숭산성, 안음의 황석산성(黃石山城) 등에집결하여 일본군의 재침에 대비하였다.
임진란이후 공산산성이 다시 주목을 받은 해는 1596년이었다. 이때관찰사(순찰사) 이용순, 체찰사이원익의 제안으로 대구 달성에 경상도 감영을 열고 석축을 더 쌓았다.
대구가감영 자리로 주목을 받은 이유는 경상 우도와 좌도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인데다가 경상도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통로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1596년 4월 도체찰사 이원익의 명령으로 공산산성이 보완ㆍ수축되었다. 이 무렵 관찰사 이용순에 대하여 “순찰사 이용순은 대구에 있으면서늘 공산을 왕래하며 중요한 일들을 지휘하는지라 이용순을 가리켜 대구의 순찰사요 공산(公山)의 만호(萬戶)라 하였다.”는 평이 있을 정도였다.
1597년 조정에서는 대구가 경상좌도 우도를연결하는 중요한 지점으로서 사방에서 오는 곡식들이 대구를 거쳐 경주 및 울산으로 이송되었고, 조정에서는군량 마련을 위해 경상도 좌로ㆍ중로ㆍ우로에 각 책임자를 파견하고 이들은 해당 지역에서 곡식을 거두어 상주ㆍ대구ㆍ경주 등지로 옮겼다. 1597년 12월 대구로 이송된 군량이 쌀ㆍ콩을 합쳐 5천석이 되었고, 대구로 이송된 군량은 주로 공산성에 비축해 두었다. 정유재란으로 1597년 9월일본군이 팔공산에 이르자 순찰사가 영남 전 지역에 관물을 발하여 의병장들을 소집했는데 이 때 의병장들은 팔공산으로 병사를 이끌고 모여 전투가 시작되었는데회맹의 성과도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순찰사의 고집(도피)으로실패하고 말았다.
팔공산전투가 수습된 후에 왜적이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모인다는소식을 듣고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함께 국난 타개에 앞장섰다. 1597년 2월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재임할때 왜적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나서겠다고 세자인 광해군에게 청원하여 정략장군(定略將軍)으로 제수되어 활약하였다.난리가 끝나 갈 무렵에 선조의 부름을 받아 체찰사(體察使)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어 임진란 이후 의병및 전쟁의 경험을 살려 문관이었던 분이 무관으로서 겸직으로 두 가지 이상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오봉선생에게 선무원종공신 1등, 호성원종공신 2등의 훈공이 동시에 수여된 것은 그 분의 직급에 비하여 매우 이례적(異例的) 조치였으며 아버지(몽득), 할아버지(응규)에게 각각 증(贈)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와 가선대부 공조참판이 제수되었다. 또한 삼촌몽필(夢弼)에게는 증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판윤(漢城判尹)이 제수된 것도 특이한 조치로 판단되고 있다. 몽필에게 한성 판윤을제수한 것은 임진란 초기에 전 재산을 군량미로 바꾸어 관청에 헌납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