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 선생의 부모와 동기 가족 등에 대한 효와 애정은 앞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1569년 12월 선생이 8세 때에 어머니 박씨의상을 당하면서 몸이 야윌 정도로 슬퍼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으며 태어난 지 겨우 10개월 된 어린 누이를안아주고, 업어주고, 직접 유모를 구해 젖을 먹였다. 남들이 힘들어 가기 꺼려하는 예안 현감 자리도 본인이 퇴계 선생에 대한 추앙심도 있었지만 그 인근에 고향과부모가 계셔서 모시기 위함이었다. 임란초기에 고향(의성 봉양 천동)에 살던 형님(신지효)이 일본군에게 살해된 후 어린 조카를 종손 대접하면서 성장할때까지 물심양면으로 보살폈으며 노년에 이르러서는 1607년 아버지 좌승지공(신몽득)의 상을 당하여 7월비안현에 장사지내고 3년 동안 여막살이를 했다. 오봉은 1618년 7월에 구미에서 초가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으며, 평소 본인이 풍비(風痺)를앓고 있었는데 계모 오씨와 같은 시기에 병환이 심했으면서도 어머니의 병환을 걱정하였다.
오봉 신지제는 집안에 있을 때는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았고 몸가짐은 충신(忠信)을 위주로 하였다.158) 관직의 고저(高低)와 난편(難便)에는 관심을두지 않았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가까이서 효를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오봉은 스승 유일재 김언기의 사후에는 학본 김성일을 높은 산처럼 공경하고 섬기면서 따랐다. 이에 대한 부분은 학봉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과 청량산유람록 (조사보고)에서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1613년 창원 부사에 제수되어 5년 이상 역임하다가 1618년 체직되어 고향으로 귀환했고, 창원 부사 때에 지은 시(檜山雜詠)에는창원 지역의 풍습과 백성들의 고달픈삶, 그리고 군주에 대한 연민, 고향에대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회산잡영 에는 오봉의 애민의식을 살펴 볼 수 있는 시가 매우 많다. 그 내용 중에는 추위 때문에 물도 못 긷고 아침밥도 못 짓는 힘든 현실을 고발하면서 변방이라 왜구의 재침을방비해야 하는 실정과 흉년임에도 불구하고 경감 없는 세금으로 이중고, 삼중고를 겪고 있는 진지하게 표현하고있으며 오봉은 이러한 현실을 대궐에 알려 구제하고픈 마음이 간절하였다.
오봉은 재임 시에 세 사람의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 가장 오래 재위한선조 임금은 임진란 시기가 포함되었고, 오봉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지켜 선조에 의해 공신으로 책봉되었고, 1609년 2월 선조가 승하하자 여막 문을 나가 서쪽을 바라보고통곡했다. 광해군에게는 크게 따르지 않았지만 선조 사후 관직을 제수 받았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된 소식을 듣고 한양 도성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하직 인사를 하고, 예상했던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인조 즉위 때에도 승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건강 때문에 사직 상소문을 보냈는데 일부에서는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가 내린 벼슬을 거부한 것은 ‘충신은두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이라는 전통적인 선비정신과 비교하기도 한다.
2) 퇴계학에 몰입된 오봉의 구국 정신 실천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가 경상북도의도내 9개 지역에서 개최한 학술 논문을 정리한 경북지역 임진란사 3권 1질에 의하면 각 논고마다 일관되게 임진란을 극복한 원동력이 주자학의 실천 정신인 동시에 조선 유학 사승관계(師承關係)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159) 16세기 중후반에 형성ㆍ전개되어 임진란을 극복한 사상적 토대가 되었던 퇴계학맥의영남학파도 앞서 언급한 선대 유학에 연원을 두고 있다. 임진란기 퇴계의 직전제자(直傳弟子)인 류성룡은 영의정에 재직하면서 국정을 주도하였지만 특히대부분의 신료들이 주장했던 선조의 명나라 몽진(蒙塵)을 극구반대하여 관철시켰고, 명과 일본이 밀약한 대동강 기준 남과 북을 분할 점령을 막아냈다.
학봉 김성일은 초유사의 명을 받고 경상도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의병 창의를 독려하여 의병이 봉기하게 했을 뿐아니라, 전술한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 의병장 곽재우 간의 대립을 중재ㆍ해결하였다. 안동 지역의 경우 퇴계학의 발흥지인데 퇴계학의 주리론적(主理論的) 사유(思惟)는 궁극적으로도덕 실천의 기반이 되는 마음의 수양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실천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퇴계학은 주자학에 비해 한층 더 심학적 경향(心學的傾向)을가져서 마음 공부를 중시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실천에 목적을 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퇴계학을이은 대표적 인물이 류성룡과 김성일이다. 이들은 출사한 이후 평생 관직생활을 통해 도덕정치를 구현하였으며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목숨을 건 실천 정신을 드러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현실참여 보다는성리학적 사유를 통해 심학(心學)에 침잠했던 예안 지역 제자들은주로 목숨을 건 의병 활동을 통해 퇴계학의 실천 정신을 구현했다.
오봉 신지제와 류성룡 및 김성일과의 관계와 교유는 앞서 수차례 언급했다. 오봉은이두 사람의 선현을 통해 퇴계학을 배웠고, 또한 예안 현감 부임이후 임진란 기간에도 퇴계의 늙은 제자들과교유 및 전시하에서도 빠짐없이 도산서원의 강학을 통하여 퇴계의 사상과 정신을 이어 받았고 4년 7개월 동안 예안 현감을 연임하면서 이웃 안동 지역까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오봉이예안, 안동, 의성 지역을 중심으로 서애와 학봉을 스승으로모시면서 특히 예안을 시발점으로 하여 유학과 학맥을 이용하여 의병을 조직하고 국난 극복에 앞장을 서게 된 것이다.이와 관련된 구체적 내용은 다음 의병 활동 및 지원과 관련하여 다시 검토하기로 한다.
158) 황만기, 오봉 신지제의 학문 경향과 삶의 제 양상 , 영남학 69호, 경북대학교 영남문화 연구원, 2019,
임진란이국제 전쟁으로 확산되는 과정인 초기의 조선 침략 시기에서 보면 경상좌도 북부지역에 속하는 안동과 그 인근 지역은 일본군의 중요 침공로에서 벗어나있던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안, 안동에서 의병 창의가활발하였고 일본 전국 시대 무장중에서 최강이라고 언급되는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주력이 울산으로 후퇴하게 하는 영향력을 발휘하던 주요 군사 지역이었다. 일본군의주력 중에 1군은 평안도, 2군은 함경도를 침략한 부대이다. 안동 지역에서 2군의 후방을 요격하지 않았다면 1군과 합세하여 경기도를 위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란의 와중에안동도 참화가 비켜간 지역이 아닌 주요 격전지였음을 말해 주는 사례이며, 안동 지역의 임란사 연구가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주요 배경일 것이다. 임진란기 안동 지역에 대한 연구는 관군의 대응과 의병의소모(召募) 및 전투양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임진란이 7년이라는 장기권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군대와 전투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전쟁의 공간이었던 지역의행정 시스템이 어떻게 유지되고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임진란에서 경상도는 일본군이 최후까지울산을 근거로 저항하다가 퇴각한 지역이다. 더욱이 명나라 군대까지 주둔하게 되면서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는국제전을 치르는 양상까지 보이게 된다.
1) 진관 체제(鎭管體制)와 관방(關防)
안동은조선 왕조의 개국기부터 대도호부(大都護府)로 경상도의 대표적인행정, 군사거점도시였다.160) 안동의 지역적 위상은 세조 2년(1457) 지방 군사 조직으로 진관 체제를 정비하면서 재확인된다. 진관 체제는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가 관할하는 주진 아래에 첨절제사(僉節制使)가 관할하는 몇 개의 거진(巨鎭)을두고 그 밑에 절제도위(節制都尉), 만호(萬戶)161)등이관할하는 여러 진을 두어 유기적인 방어 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전국 행정 단위인 읍을 군사 조직 단위인진(鎭)으로 편성해 그 크기에 따라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으로 나누어각 읍의 수령이 군사 지휘관을 겸하는 것이다.
도마다진관 조직 들을 갖추어 도내의 군사들을 가까운 진관에 소속시킨 다음 유사시에 각 진관의 수령이 지역 방어를 담당하는 체제이다. 따라서 어느 한 지역의 방어 체제가 무너지더라도 인접 지역에서는 대적견수(對敵堅守)할 수 있는 방어 체제이다.
한편 경상도는 1407년(태종7) 낙동강을경계로 낙동과 낙서로 분도된 뒤 1436년(세종18) 도절제사가 파견되어 군권을 지휘했다. 경상좌도 병영은 1417년 경주에서 울산으로 옮겨진 뒤 존치되었다. 경상좌도의 병영은조선 전기 내내 울산에 있었다. 경국대전 체제에서 경상도는 안동진을 비롯하여 경주진, 상주진, 진주진, 김해진, 대구진의 6개의 거진이 있었다. 안동진은영해, 청송, 예천, 영주, 풍기의 5개 고을을 관할하였다. 안동진관을 지휘하는 부사(府使)는 정 3품관으로 병마첨절제사가 겸임하였으며, 판관(判官) 1명이 보좌하였다. 진관의군사는 번차(番次)에 따라 도성에 상경, 숙위(宿衛)하는 임무를수행하였고, 평상시에는 안동의 방어를 담당하는 유방병력(留防兵力)이었다. 안동 진관은 영해와 청송의 도호부(都護府), 예천ㆍ영천(영주 : 榮川)ㆍ풍기 등의 군(郡), 의성ㆍ봉화ㆍ진보ㆍ군위ㆍ비안ㆍ예안ㆍ영덕ㆍ용궁 등의 현(縣)이 소속된 체제였다.
조선 전기세조 즉위 초에 안동이 관할하던 지역을 좌향으로 구분하였는데 중익은 의성ㆍ의흥ㆍ진보ㆍ예안ㆍ청송ㆍ용궁ㆍ비안이며, 좌익은봉화, 우익은 순흥ㆍ예천ㆍ풍기ㆍ영천(영주)이었다. 1457년(세조3) 재차 진관의 조정이 있었는데 이것은 진관 체제를 갖추기 위한 시도였다. 안동진에는풍기ㆍ영천(영주)ㆍ봉화ㆍ의성ㆍ예안ㆍ진보ㆍ청송ㆍ군위ㆍ비안을속하게 하고, 상주진(경상우도)에는 선산ㆍ개령ㆍ금산ㆍ함창ㆍ용궁ㆍ문경ㆍ예천을 진관으로 배속시키는 조정이었다.
군제 개혁이활발하였던 세조대의 지방군은 장기적인 훈련을 시행하였다.162)1월과 1월에 행하는 진법 훈련과무예 훈련, 활ㆍ화살ㆍ갑주 등 병기의 제조와 정비, 관할지역 안의 읍성과 수축이었다. 이에 따라 안동 부사는 지방군의 무예를 훈련시키고 진법을 훈련시켜야 했다. 조선 정부에서도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안동부를 비롯한 일본군의공격 방향이 될 수 있는 경상도 각지의 읍성들을 수착하고 방어 시설을 구축하였다.
특히 당시안동부는 내지(內地)로서 성이 없었다. 경상도 내지에서 성이 없는 곳은 안동부 이외에도 대구부, 청도군, 상주목, 성주목, 삼가현, 영천군, 경산현, 하향현이었다.
안동부의성은 민간인들을 징발하여 수축하였고, 전쟁 발발 1년 전에관 주도로 읍성이 갖추어지고 외침에 대비하였다.
160) 이왕무, 임진왜란기 안동 지역 지방관과 관군의 역할 , 경북지역 임진란사, 3권,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2018,474~487쪽.
161) 종4품의 무관, 만호ㆍ천호ㆍ백호 등은 본래 그 관령하는 민가의 수를 말하는것으로 고려 때부터 마련된 벼슬, 병마만호와 수군만호가 있다.
162) 이왕무, 전게 논문, 476~47쪽.
2) 초기 전황과 행정조직
도요토미히데요시(豐臣秀吉)가 1585년 7월 일본의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였고 1587년 일본 대부분의 지역을 통일하면서 10여 년간의 전국시대를마감하였다. 동시에 조선의 복속과 명나라 정복의 구상까지 진척시키면서 대마도 번주(藩主)에게 조선 국왕의 알현을 요구하도록 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조선을공격할 것을 통보하였다. 임진란이 1592년 4월 14일 발발하고 경상도 좌우 병영의 군사들이 일본군을 상대하기위해 소집될 때 안동부에서도 군대가 동원되었다. 안동 진관 소속의 군사들이 신속이 동원되어 4월 17일 저녁에 선발대가 영천을 지나 경상좌병을 향하여 이동하였고 18일에는 본대가 후속하였다. 특히 안동 진관에서 출동하였던 군사들은석전군(石戰軍)이라 불리는 투석(投石) 전문의 정예 부대로서 155년(명종10)에 발생한 을미왜변에 동원되어 큰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조선군의방어 계획은 경상도 자체 병력으로 저지가 어려운 상황에서 횡적으로는 조령을 중심으로 죽령-조령-추풍령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종적으로는 이일-신립-류성룡으로 이어지는 방어 전략이었다. 안동부는 이런 전화 속에서 일본군 정예 부대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군제2군인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부대는 4월 21 일대구를 점령했다. 이들은 양산-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비안-용궁-문경-조령 등으로 이동하여 26일에풍진(豊津)을 건너 제1군인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합류하여 결국 침공 20여일 만인 5월 3일에도성을 함락시켰다.
이러한전쟁 참화의 긴장감이 맴도는 가운데 안동부에서는 부사 정희적(鄭熙績)이안동 읍성을 버리고 후퇴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경상좌도에서는 정희적만이 아니라 경상좌병사 이각(李珏) 수사 박홍(朴泓), 방어사 성응길(成應吉), 조방장박종남, 변응성 등이 모두 근왕(勤王, 왕을 보위)을 핑계로 진을 버리고 도망갔다. 정희적은 처자를 거느리고 함경도 길주까지 도망쳤고, 조방장 박종남은의성으로부터 사잇길로 해서 안동 풍산으로 후퇴하면서 창고를 모두 불사르고 갔다. 이일과 신립이 상주와충주에서 각각 일본군에게 참패한 소식을 듣고 4월 30일선조가 도성을 떠나 북으로 피난을 떠나자 지방 관원이 동요하며 자리를 뜨면서 초유의 행정 공백과 마비를 가져왔다.
안동 부사정희적이 도망간 상황에서 부내 관원들이 동요하여 정부는 예안현을 지킨 신지제를 1592년 5월 안동 부사를 겸하게 했다. 부사가 도망가면서 성내 창고들의 군기와곡식들을 분배하여 적을 상대할 군병의 모집도 수비 할 군기를 갖출 여력이 없었다.
특히 군량이분탕된 실정에서 일본군을 상대할 물력이 없어서 결국 안동을 포기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안동 인근 예안현감 신지제가 군병을 인솔하여 일본군을 상대하면서 안동의 군병이 합세하였으나163) 패하였기 때문에 인근 군현의 관군도 안동을 응원할형편이 못되었다. 일본군의 전격적인 이동은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 전체가 정상적인 행정망을 동원하여 군대를모집하고 적을 막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적의 주력은 한양으로 향하고, 안동, 예안은 소규모 분견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신지제는 예안, 안동의 관민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왜적을 몰아내는 작전을 세울 수 있었다.
3. 신지제의 의병 대책 건의문-1593년 경상좌도 관찰사 한효순-
임진란이일어남과 거의 동시에 전국적으로 의병 조직과 활동이 전란 초기에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시기적으로 빨리 의병장이 아닌 지방 행정 관리로서 164)직접 예안현과 안동부를 지키면서의병 조직을 이끈 신지제는 문무양면으로 직접 현장 경험을 한 결과를 중심으로 문제가 되고 의병의 조직과 운영에 대해서 개선 사항을 경상좌도 관찰사에게직접 건의하는 내용의 글을 올리게 되었다. 그 내용은 오봉문집에 실려 있다.
관찰사에게 올리다[上方白書], 계사년(1593)
삼가 아룁니다. 겨울이 다가도록 적의 군대가 물러나지 않아 신민의 고통이 이미 극에 다다랐습니다.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 왜 이리 더딥니까. 사람들은 대세가 이미 기울어서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마련한 시책이 부적절했던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에 저처럼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이 비루한 소회를 짧게 진달하고자 합니다. 한편으로생각해 보면 윗자리에 있는 분이 어찌 이를 분명하게 몰랐겠습니까. 다만 일찌감치 정책을 바꾸지 못해서겠지요. 게다가 고을 수령이 관찰사를 대할 때 저대로 체모가 있어 무례를 범하기 어렵기에 선뜻 말하지 못하고 주저한지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지금 아직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처리한 것을 보지 못해 성세(聲勢)가 갈수록 무너지고 줄어들고 있으니, 진실로 체통을 잃지 않으려고 가슴 아픈 일을 느긋하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아래에다 하나하나 열거하겠습니다.
첫째, 포상이 분명하지 못하여 사기를 진작시키지 못하는 점입니다. 생각하건대병126 • 梧峯 申之悌의 생애와 임진란 의병활동사들이 어찌 꼭 오학(烏獲 : 전국시대 중국 진(秦)나라역사(力士)처럼 천 균(勻)의무게를 들어 올릴 힘이 있고 신궁인 궁예(窮羿 : 중국 하(夏)나라 사람)처럼 네 화살을 모두 정곡을 맞추는 솜씨가 있어야 날랜병사라고 하겠습니까. 누구든 스스로 분발하여 저마다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한다면 절름발이 병사라 할지라도몽둥이를 만들어서 적의 단단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상대하여 쳐부술 수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 조정에서내린 사목(事目)을 보니 수급 하나를 벤 이는 급제의 자격을하사하고 둘을 벤 이는 6품을 하사하며, 셋을 벤 이는 당상관에임명하고, 왜군 장수를 벤 이는 가선대부에 봉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내용을 널리 알리자 군졸과 백성이 몹시 감동하여 분발하는 기상을 보였고 중앙의 관군과 지방의 병졸이 모두 분발하여 모집에 응했습니다. 그 중에서 의리를 조금 아는 사대부들이야 물론 관직과 포상을 기대하지 않으리란 걸 알지만 저 우매한 백성들은어찌 모두 임금을 친애하고 상관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알겠습니까. 그저 공을 바라고 포상을 구하는마음에 격앙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사이나라에서 공로에 보답하는 일이 전에 내린 사목의 취지와 너무 달라서 백성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대열을수행하던 수령에게는 금띠와 옥관자의 명예가 돌아가지만 창과 칼을 맞으며 싸운 군사들에게는 미관말직의 은총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아! 장수의 공이 참으로 크지만 조정에서는 장수의 공만 알고 군졸들의수고를 모릅니다. 공이 없는 사람이 위에 있고 공이 있는 사람이 아래에 있으니, 이에 군졸과 백성이 크게 실망한 데다 의욕마저 사라져 전혀 힘쓸 방도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군사를 지휘하는 자가 “정예병을 얻을 수 없고적의 군세를 감히 당해 내지 못한다.”라고 한다면 이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서입니다. 널리 알리자 군졸과 백성이 몹시 감동하여 분발하는 기상을 보였고 중앙의 관군과 지방의 병졸이 모두 분발하여모집에 응했습니다. 그 중에서 의리를 조금 아는 사대부들이야 물론 관직과 포상을 기대하지 않으리란 걸알지만 저 우매한 백성들은 어찌 모두 임금을 친애하고 상관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알겠습니까. 그저공을 바라고 포상을 구하는 마음에 격앙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래에영남 사람으로서 행재소에 달려간 이를 보았는데 선비에게는 관직을 제수하고 시골의 천민에게는 부역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귀의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니, 은총과포상이 사람을 격동시킬 수 있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라고 어찌 유독 그렇지않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만, 감사께서는 이런 사정을 조정에상세하게 아뢰었습니까? 아니면 조정에는 아뢰었지만 시행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까? 얼핏 듣기로는 관서지방에서 과거를 크게 실시하여 무예가 뛰어난 인재를3,30명이나 선발한다는데 제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굳이 이런 식으로 할 것 없고 바로 전날에 정한 포상 규정대로 군졸의 노고에 보답한다면과거 시험이 이처럼 구차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라가민심을 잃지 않으면 군졸들은 명을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서로 격려하여 일어날 것이니, 정예병을 얻기어렵다고 근심할 것이 없고 적의 형세를 당할 수 없다고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관작은 중요한기물이어서 함부로 베풀어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지금 같은 때에 어찌 관작의 경중을 따지겠습니까. 옛 사람이 출정할 때 성난 개구리를 보고 경의를 표한 것이 어찌 미물이 공경할 만하다고 여겨서 이겠습니까. 사기를 북돋우는 방법은 요컨대 이와 같을 뿐입니다. 병가의 말에 “후한 포상 아래에 반드시 용맹한 장부가 있기 마련이다.”라고 하였으니참으로 옳지 않습니까.
둘째, 군율이 공정하지 못해 사람들을 승복시킬 수 없는 점입니다. 군령은엄격함을 중시하여 죄가 가벼우면 장을 치고 무거우면 목을 벱니다. 이는 군대를 출정시키거나 군사를 동원할때 부득이 무거운 법을 써서 사람들에게 군율은 지엄한 것이어서 죽음도 각오해야 함을 알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결국은 장수가 그때 사정에 맞게 완급을 조절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지난번용궁(龍宮)전투 때 달아나거나 무너진 병사들은 군법으로 논한다면다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유독 병사들의 죄일 뿐이겠습니까. 부산에서 패한 뒤로 장수와 병졸들 중에서 후퇴하거나 달아났다는 죄명으로 처형된 이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 무지한 백성들은 마음속으로 아무 장수와 아무 사람은 아무 곳으로 달아나 숨었는데도 처벌이 없었다고 하고서이것을 예사로운 일로 여깁니다. 적을 마주쳐 다급할 때에 장수 가운데 간혹 불리함을 알고 일단 후퇴할때가 있는데, 그러면 병졸들은 “장수가 이미 물러났으니 우리도달아나야겠다.”라고 하며 마침내 예전의 습성을 답습하여 까마귀처럼 사방으로 흩어져버리니 그 죄는 용서하기어려우나 그 정상은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만약 한두 명의 목을 베어 군중에 효시한다면군문의 위엄이 분명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70여명이 한꺼번에 중벌을 받아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생기면 차라리 군율을 잘못 집행하는 일이 있더라도 군졸과 백성에게 상해를 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감사께서그들의 죄명만 알고 아직 실정을 살피지 못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은 굳이 논한 것 없습니다. 지금 여러 고을이 군대를 물린 뒤 저마다 책임자를 가두는 탓에 젊은 장정들은 전장에 나가고 노약자는 감옥에갇혀있으니 남은 사람이나 출정한 사람이나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에 부모나 자식이있는 경우는 그나마 괜찮지만, 부모나 자식이 없는 경우는 아내가 옥에 들어가고 남편이 변경에 출정하고나면 집을 지킬 이가 없어 살림을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날마다 사정을 호소하고 간혹 원망을 토로하여모두가 “왜구에게 죽지 않으면 굶주려 죽겠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어찌 잠시 윗사람을 원망하는 말이겠습니까. 인정과 도리를헤아려 보아도 그렇습니다. 백성이 삶을 지탱하지 못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병사를 어디에서 차출하겠습니까. 비유하면 나무뿌리가 병이 들면 가지와 잎이 절로 시들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아서 결국은 아무 소용없을 것이니이것으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줄 수 없습니다. 현감이 일전에 이러한 뜻을 두어 차례 아뢰었는데끝내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현감이 그 폐단을 범범하게 여겨 상세하게 전달하지 않고서 오래도록끌며 결단하지 않아서이니, 현감의 죄가 그야말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셋째, 비장(裨將)165)이 불필요하게 많은 점입니다. 대개 순찰사의 임무가전투에 직접 참여할 수 없으니 군무를 점검하고 군영을 단속할 때 그 사령이 10여 명만 있어도 부족하지않습니다. 굳이 어리석고 흐리멍덩한 무리로 구차히 그 숫자를 채울 것없으니 적을 토벌하는 일에는 관심이없고 창고의 곡식만 축낼 뿐입니다. 그 중에 어찌 용감하고 강개한 사람이 없겠습니까마는 적군 하나를베거나 수급을 하나 바치는 이가 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으니, 아마도 구애되는 바가 있어서 아직계책을 행하지 못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각 역참은 인부와 말을 감당하지 못하고 여러 고을은 군량 제공을감히 감당하지 못하여 무수한 정예병이 쓸모없게 되었고 그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감사가 처음모집할 때 마음이 어찌 이와 같이 하려고 하였을 뿐이었겠습니까.
넷째, 군비 확충을 늦추어선 안 되는 점입니다. 대개 여러 고을의 군장(軍裝)이 한번은 병화에 불타고 다시 전쟁 중에 흩어졌습니다. 다급히 다시 갖출 것을 생각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할까 걱정인데, 지금특별히 신칙하는 명령이 없고 무기고에 남은 수가 많지 않으니, 한번 거사한 뒤에 활과 화살이 거의 바닥나면추후에 다시 거사하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여러 고을에서 또한 모두 성심을 다해 조달하려고하고있지만 대나무와 부레풀을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생각건대 대나무는 해변의 고을로 하여금 베어서 실어나르게 하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고 부레풀도 다른 도에 공문을 보내면 혹 구할 길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지금 가장 먼저 조치해야 할 일입니다.
아! 난리 초기에는 이 왜적을 여름에 토벌하지 못하면 가을에는 반드시 섬멸할 것이라고 여겼고, 가을이 되어서는 겨울이 되면 반드시 물리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지금 한 해가 저물었는데도 아직 서로 대치하여 결판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적들의흉악한 모략과 은미한 자취는 하루아침이나 하루저녁에 계획된 것이 아닌 듯합니다. 저들은 장구한 계책을강구하는데 우리는 늘 임시방편으로 대충 넘기고 있으니 또한 계책이 가볍고 얕지 않습니까. 지금 용궁과예천지역에 매복을 설치하고는 느긋하게 세월을 보내고 소탕할 계책 없이 수고롭게 시일만 허비하고 있는 탓에 병사와 군량이 모두 피폐한 실정입니다. 장차 궁무를 담당하려는 자가 모두 하나같이
“명나라군대는 언제 오고, 서쪽의 적은 언제 돌아가려나.”라고 말하고있습니다.
아! 명나라 군대가 오고 서쪽의 적이 돌아갈 기약은 없는데 병력이 고달프고 군량이 부족한 것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 앞으로 몇 달이 가게 되면 다시 어떻게 하려고합니까. 제 생각에는굳이 이렇게 무익한 매복을 둘 것 없이 여러 군진의 병마를 크게 모아 결전을 벌인다면 이것이 상책이니 부로들은 지금 가장 바라는 바입니다. 만일 아군의 역량을 살피고 적군의 형세를 헤아려 보건대 강약이 서로 같지 않아 쉽게 할 수없다고 한다면 차라리하책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경상좌도 중에 그나마 온전한 곳은 이 몇몇 고을뿐이니, 오는 봄에 유린당할 일이 절대 없으리라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제 생각에는대강 모집한 병사가 다시 흩어져 모으기 어렵고 힘들게 모은 군량이 거꾸로 도적을 먹이는 데 보탬이 되고 말까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험고한 지형을 선점하여 미리 대비할 장소를 마련하는 편이 낫습니다.이를테면 소백산(小白山), 청량산(淸凉山), 주왕산(周王山), 팔공산(八公山)등의지역은 그 험고함이 거점으로 삼을 만한 곳입니다. 이때에 미쳐서 그 형세를 살피고 무기를 준비한 다음근처의 군량을 이곳에 모아 끝내 범할 수 없는 형세를 구축해 놓고서 각 진으로 하여금 그 험한 곳을 나누어 지키고 서로 도움을 주며 때를 기다렸다가거사하는 것도 혹 한 가지 방법인 듯합니다.
아! 국난이 몹시 다급하고 죽을 날이 닥치기에 졸렬함을 무릅쓰고 함부로 이와 같이 장황하게 말씀드렸으니 참으로 벌을받아 마땅합니다.
163) 상동, 484쪽. 신해진 역주, 향병일기(鄕兵日記), 역락, 2014,15쪽 이후 참조.
오봉 신지제(1562~1624)는 임진란의 의병과 관련하여 두 개의 공신, 즉선무원종공신 1등과 호성원종공신 2등을 받았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다른 의병장(표10 참조)처럼 지명도가 높지도 않고,기록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오봉 선생의 임란 공적이 선조실록등에 실려 유명해진 것은예안 현감 겸 안동 부사라는 관직에 있으면서 직접 의병장의 위치에 있을 수 없었고, 임란 전시하에 계속해서예안과 안동일대에서 전시 행정, 즉 관군 통솔ㆍ의병 창의ㆍ지원ㆍ성곽 수축ㆍ주재 명나라 군사 지원 등일상 업무가 임란전쟁과 직접 관련되고 있어서 따로 언급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임란 직후 경상좌도 북부지역에서예안, 안동을 중심으로 직접 의병 조직과 지원에 앞장을 섰고, 특히예안의병조직 직후 이웃 안동은 한 달 늦게 의병 조직화에 관여하였다. 물론 그 당시(1592.5) 공석중인 안동 부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고 안동은 안동별읍향병(安東別邑鄕兵)이라고 하여 의병 연합조직으로 출발하였다.
안동 지역의의병 운동에 있어서 새로운 단계로 열읍(列邑 또는 別邑)의의병들이 8월20일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안동의 영향아래에 있는 그 인근 지역, 즉 예안ㆍ안동ㆍ의성ㆍ의흥ㆍ군위ㆍ비안 등지의 인사들이 안동 일직에 모여 의병조직을연합화하고,166) 본진을 안동에 두기로한 것이다. 오봉 선생이 직접 의병 전투에 앞장 선 것은 필자의 조사로는 용궁 지역 비안현ㆍ다인현, 의성, 군위 접경 지역 등 최소한3곳으로 확인되고 있다. 임란 직후 의병의 전투 활동은6개월~10개월 기간이었는데 대부분은 안동별읍향병이 인근 지역(영천, 경주 등)까지 출전하였다. 이 지역의 의병 활동은 예안현감으로 임란 기간 중 4년 7개월 근무한 신지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여기서 포괄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166) 1592년 9월에는 연합 분위기가 확산되어 영천, 합천 등의 의병진과도 합진하기로했다. 안동진은 위에서 열거한 지역 이외에도 봉화ㆍ영주ㆍ풍기ㆍ청송ㆍ진보ㆍ영해ㆍ영덕을 포함한다. 이들 지역은 진관 체제상 뿐만 아니라 정치ㆍ문화ㆍ학문적으로도 안동문화권으로 볼 수 있는 지역이다.
1) 예안의병의 조직
20만 대군을 이끌고 1592년 4월 13일부산 앞 바다에 도착한 왜병들은 4월 25일 상주를 함락하였고또 4월 28일 신립 장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함에 따라선조 임금은 도성을 비우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한편 상주가 왜적의 손에 들어가기도 전에 안동부사정희적(鄭熙績)은 영천(永川)에서 도망을 오다가 조방장(助防將)을만나 도망갈 계획을 세우고 평소 알고 지낸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관인을 버리고 도망갔다.(1592.5.14.)이 소식을 접한 안동 인근의 수령들은 죽음이 두려워 성(城)을 비우고 도망을 쳐서 행정 공백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불러일으켰다.167) 그러나 예안 현감 신지제 만은 평소와 다름없이 성을 지키며 치안 유지에진력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난 1592년은 선생의 나이 31세이었고 고향으로 가서 어버이를 문안하고 수연(잔치)를 베풀고 있었는데 왜구들이 갑자기 침입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예안 관아로 돌아갔다.
선생은고향에서 왜구의 변란 소식을 듣고 아우들에게 어버이를 모시고 난리를 피해 고을 동쪽 공곡(孔谷)에 숨게 하였다. 이곳은 현재 의성군 사곡면 공정리에 있는 골짜기로임란 당시 피난민들이 산속 깊숙한 이곳에 숨어들면서 마을이 생겼다. 선생이 급히 예안으로 돌아가려고길을 나서는 데 갑자기 예안 백성이라고 하는 건장한 병사 수십 명이 나타나 “원님을 모시러 왔습니다.”라고 하였고 임지에 도착한 뒤에도 늘 따라 다니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선생이괴이하게 여겨 물어보니, 바로 지난번에 풀어주었던 강도 무리들이 목숨 바쳐 은덕에 보답하고 싶어서 한일이었다.168) 1592년 6월 1일 신지제(申之悌)ㆍ배용길(裵龍吉)ㆍ김용(金涌)ㆍ김륵(金玏) 등이 의병 모집을 논의하고, 6월 1일 예안에서의병을 일으켰다. 이는 안동 의병 보다 한 달가량 앞선다. 의병은예안의 사족(士族)들이 중심이 되었고 이들은 근시제(近始齊) 김해(金垓)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다음과 같은 인사들이 주요 직책을 맡았다.
예안 현감겸 안동 부사 신지제는 두 지역 의병 조직의 중심이 되면서 예안의병대장 김해가 안동열읍향병의 대장까지 겸하게 한 것은 두 사람의 돈독한 관계 때문이다. 두사람 중 누가 전쟁으로 죽을 경우 살아남은 사람이 상대의 가족을 책임지기로 맹세하였고 신지제가 김해의 병사(1593)후 실제 그 약속을 이행하였다. 여기서 신지제의 의병 파트너김해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김해(金垓, 155~1593)
- 명종 10년(155) 안동 예안 오천리에서출생
- 임란 당시 38세, 예안의병대장, 안동열읍향병 대장으로 활약
- 난중일기ㆍ향병일기 남김
- 학업 : 퇴계 이황ㆍ조목ㆍ김성일ㆍ류성룡 문하에서 수학 퇴계문집 수정 작업(병산서원)
- 158 : 사마시 합격
- 1589 : 증광시 합격
- 관직 : 승문원 정자, 예문관 검열, 한림.
- 정여립 사건과 관련하여(정여립 생질에 의하여 천거) 파직, 곧 신원되었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 연구 중 임란이 일어남.
- 예안의병 창의 논의
신지제 현감
안동의 진사 배용길, 퇴계 사위 한림 김용(金涌) 가담.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 황명으로 예안 방문
6.11 : 예안에 모여 창의ㆍ거병(30명 모병) 횃불을 올림(향병일기 6.11)
170) 최효식,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 국학자료원, 204.
(2) 예안의병창의문
예안의향인이 분의하면서, 서로 일러 말하기를 나랏일이 이에 이르렀는데 우리들이 어찌 궁산에 숨어 엎드려 군부의위급함을 앉아 보고만 있겠는가. 이래서 중의가 전 한림 김해(金垓)를 대장으로 삼고, 진사 이숙량(李叔樑)에게는 글을 맡기고 생원 금응훈을 도총사로 삼고 글을 지어 별읍(別邑)에 포고토록 하였다. 전 군수 조목,전 현감 금응협, 김부륜 등은 쌀을 바쳐 군량에 쓰도록 했다. 전 학유(學諭) 류종개(柳宗介), 생원 임흘(任屹)이 춘양현에서 의병을 창기했다.
(3) 연려실기술제 17권, 「선조조 고사본말조(宣祖朝故事本末條)」 영남의병
○ 예안사람 전 한림 김해가 의병을 일으켰다. 종개가 죽음을 당한 후에 사람들은 모두 의병 일을 두려워하였다. 초유사가 격문을 띄워서 국은을 잊었음을 책망하고 의병에 나갈 것을 격려하였으며 안집사 김륵이 또한 통문을 내었다. 이에 영천(영주) 풍기선비들과 전 한림 김해, 생원 김응훈, 진사 임흘 등 여러사람이 모두 호응하여 잇달아 일어나니 군사가 만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김해의 결제를 받았다. 김해는본래 인망(名儒重望)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의지하였다. 좌도의 의병이 일직현(一直縣)에모여서 맹약할 때에 김해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는데, 뒤에 김면(金沔)이 본도의 대장이 되었음을 듣고 의병 문서를 강을 건너 김면에게 보내었다. 김면이열람하여 보니, 모두 유생들로 부대가 편성되었으므로, “이것들이야말로참된 의병이다.”라고 하였다. 계사년에 김해는 명나라 군사를따라서 경주에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수찬에 증직되었다.
○ 본관이함안(咸安)인 전 현감 조종도(趙宗道)는 전 직장 이로(李魯) 등과 함께 서울에 있다가 왜변의 소식을 듣고 즉시 본도로 돌아가며 약속하기를,“마땅히 의병을 일으킬 것인데,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동지와 함께 물에 빠져 죽을 것이지의리상 적에게 욕을 볼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때에이르러서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그 통문에“죽음이 비록 싫기는 하지만 천지에 적들이 그물처럼 둘러싸서 도망가 살 곳이 없으니, 비록살기를 도모하여 개ㆍ돼지처럼 치욕을 참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차라리 의리에죽을지언정 감히 살기를 바라겠느냐? 인(仁)을 위해 생명을 버리겠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 뒤 정유년에 종도가 황석산성(黃石山城) 전투에서 죽으니, 사람들은, “그문구의 말을 저버리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 금산(金山) 사람 박사 여대로(呂大老)와 권응성(權應星) 등이군사를 모아서 적군 토벌을 도왔는데, 응성이 임시로 대장이 되어서 김면과 지례(知禮)ㆍ금산의 적군을 협공하였다. 그뒤에 적군의 습격을 당하여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 창녕사람 생원 신방즙(辛邦楫)ㆍ충의(忠義) 성천희(成天禧)ㆍ정자(正字) 성안의(成安義)ㆍ유학 곽찬(郭趲)ㆍ보인(保人) 조열(曺悅) 등이 군사를 모아서 적군 토벌을 도왔다. 천희 등이 군사 십여 명을 거느리고, 창녕의 적군을 포위하고 종일토록교전하여 본읍의 군수라고 자칭하는 적을 쏘아 맞추자 3일 만에 적군이 성책을 불지르고 도망갔다.
(4) 이숙량의격문
나라를지키는 것은 성곽과 병갑(兵甲)에 있지 않고 사람을 얻어적을 방어하는데 있으며 부강과 위무(威武)에 있지 않고 의기를떨치는 데에 있다. …… 이른바 수령 방백은 어디 있으며, 병사(兵使), 수사(水使)는 어디 갔는가. 백성이 의탁할 곳은 수령이요, 수령을 통솔할 자는 방백이거늘……흥기한다는 것은 승첩에 영향이 있을뿐 아니라 고향을 지키면 일읍을 가히 보존할 것이요, 이를 본받는다면 열읍이 가히 안전할 것이며, 미루어 일국이 모두 이와 같다면 국가가 튼튼할 것이다.……능히 한다고하는 자는 충신ㆍ효자인 것이요, 토적을 게을리 하는 자는 불충ㆍ불효한 사람이다. 바라건대 제공(諸公)은그 또한 생각할지어다.
(5) 신지제의 첫 전투 참전
예안의병의중심을 이룬 사족들은 위의 36명의 구성을 보면 안동 권씨 1명, 봉화 금씨3명, 광산김씨 4명, 예안 김씨 1명, 의성 김씨 1명. 순천김씨 1명, 강릉 김씨 1명, 경주 손씨 2명, 영천이씨 8명, 진성 이씨 3명, 풍천 임씨 1명, 횡성조씨 3명이었다. 예안지역의 토착 세력은 봉화 금씨, 광산 김씨, 영천 이씨, 진성이씨, 횡성 조씨이며 의병 결집에 있어서도 이들이 다른 문중에 비하여 비교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한편 예안현감 신지제는 관군과 급조된 예안의병을 이끌고 용궁 전투에 나섰다가 패전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171) 이는 갑작스럽게 조직되어 군사 조련의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 오합지졸의 의병들이었기에 필연적인 전세였다.
이 전투에서배용길의 종제(從弟)인 배인길이 참전하여 수많은 왜적의 수급을참획하는 성과를 도출하였으나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남편의 전사 소식을 접한 아내 경주 이씨 또한 스스로목숨을 끊기도 했다. 전란 후 20여년이 지나 배인길의 충절각과그 아내의 정려각이 내려졌다. 많은 이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6월 2일 안동, 7월 1일예안이 왜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예안 현감 신지제는 왜적이 용궁에서 한양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두고을의 군대와 백성을 모아서 적의 길목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용궁 지역에 들어섰을 때 규합한 병사들이적의 기세에 놀라서 모두 흩어져 도망쳤다. 선생이 홀로 말을 타고 서 있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하마터면벗어나지 못할 뻔했는데, 문득 어디선가 건장한 병사 70여명이 왜적의 진영으로 뛰어 들어와 선생을 호위하여 빠져 나왔다.
당시 함께포위를 당한 관아의 하인 아이 하나가 선생의 말 뒤꽁무니를 부여잡고 있어서 앞으로 나가지 못했는데 병사들이 칼을 뽑아 내리치는 바람에 곧장 땅에엎어지고 말았다. 관아로 돌아 온 뒤에야 선생은 이들이 전에 풀어 주었던 강도 무리임을 알고서 “너희들의 뜻은 참으로 가상하나 도리어 사람을 해쳤다. 이전의 과오를고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병사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며 “피해를 입은 것은 작고 지켜 낸 것은 큽니다.”라고 하고서 하직하고떠났다. 선생은 늘 관아의 하인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가여워서마음이 좋지 않았다.
171) 황만기, 전게 논문, 423쪽.
(6) 향병일기172), 예안의병, 신지제 현감
1592.4.14 : 안동 판관 윤안성이 군사를 모아 거사하려고 3일동안 종을 쳤으나 사람들의 호응이 없어 도망쳤다. 신지제 만은 달아나지 않으니 관아의 아전들이 감히제 마음대로 어지럽힐 수 없어 그를 원망하는 자가 많았다.
6.1 : 신지제가 안동에 온 안집사 김륵을 만나 예안으로 오게 하여 예안의 노인장 선비들과 함께 군사(거병)모의를 도모했다. 그러나 이때 군사들의 명부가 완전 텅텅비어 있어서정비하여 배치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유생들을 이장(里將)으로삼아 각자 거주하는 마을에서 군정(軍丁)을 점고하고 일으켜왜구를 막도록 했다.
6.11 : 예안의 고을 사람들이 의기를 떨치며 서로 이르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우리들이 어찌 궁벽한 산속으로 달아나 숨고서 임금의 위급함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으랴.”하였다. 그리하여 중론에 따라 전 한림 김해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생원 금응훈을 도총사로 삼았다. 진사 이숙량이 격문을 짓고 여러고을에 널리 알리니, 각 고을에서 차출한 젊은이와 공사노비 30여명이 활쏘기와 전투를 익혔다.
7.17 : 배용길이 예안 현감의 공문을 가지고 임하현으로 나가 북쪽으로 구린촌을 향하면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각 고을에서 젊은이들을 뽑아 대정(隊正)에게 20여명을 나누어배정하였다.
10.20 : 예안에서 합진(合陣)하였는데 영병장(領兵將) 심지(沈智)가 약속 날짜에오지 않았다.
10.21 : 아침에 예안의 군대가 왔다.
172) 신해진 역주, 향병일기, 역락, 2014,15~70쪽. 임진왜란 당시 영남북부지역 의병들의전투일지이다.
2) 안동 지역의 의병과 연합편성
(1) 안동 지역의임란 초 상황
안동진은안동을 위시하여 예안ㆍ의성ㆍ군위ㆍ의흥ㆍ비안ㆍ봉화ㆍ영주ㆍ풍기ㆍ청송ㆍ진보ㆍ영해ㆍ영덕 등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지역들은 진관 체제뿐만 아니라 정치ㆍ문화ㆍ학문적으로도 안동문화권에 포함되는 지역이다. 임진란 의병에서경상도 지역 의병 활동은 경상우도에 집중되고 상대적으로 경상좌도의 의병 연구는 취약하였다. 이것은 경상우도지역이 임란 초기 일본군의 침략을 받지 않아 신속한 의병 조직이 용이하였지만 좌도 지역은 일본군의 후방 보급로에 위치하여 의병 조직에 어려움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의병은 일본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고 있었다. 당시의병 활동을 개관한 징비록(懲毖錄)에서 류성룡은 경상도의중요 의병장으로 그동안 널리 알려진 곽재우(152~1617), 김면(1541~1593),정인홍(1535~1623)등과 함께 예안의 김해(金垓)를 지목하고 있다. 이는 임진란 당시 김해의 의병 활동을 경상우도의다른 의병장 활약과 동일하게 높이 평가하였음을 보여 준다.
왜적의침략 소식은 동래가 함락된 4월 14일 관보를 통해서였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민심은 흉흉하고 관리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하였다. 더욱이상주가 함락되고 국왕선조가 한양을 떠나면서 민심의 동요는 더욱 심하였는데 그 중에서 관리와 양반들의 동요가 매우 심하였다. 임진년 5월 15일 안동읍내 척석인(擲石人)173)50명이 모여 토적하고자 하나 주장(主將)이 없고 전일에 부사 정희적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면서 관가 창고문을 열어 미포(米布), 군기(軍器)등을 마음대로가져가게 하여 각 고을마다 창고의 곡식이 일시에 텅 비게 되었고 군기 또한 분탕되었다. 지금 비록 군병은조발(調發)하고자 하나 고을이 온통 비었고 군량미 또한 마련할길이 없으니 부사 정희적의 죄는 죽여 마땅하다. 또한 향소(鄕所) 등에서도 한 사람이라도 막아 구하지 아니하고 모두 도망가 숨어 나오지 않았으니 통분한들 어찌하랴.
한편 4월 25일 상주를 함락시킨 왜적은 상주성을 거점으로 주위 군현에출몰하고 있었는데 신지제의 용궁 전투도 이때 일어난 것이다. 결국 왜적은 6월 2일 안동, 7월 1일 예안까지 들어왔다가 9일 안동을 거쳐, 19일 구담촌으로 퇴각하였다.
173) 척석인(擲石人) : 전쟁 중에 돌을 잘 던져 싸움하는 병사.
(2) 안동진지역 의병부대 조직
한편 예안지역의병 결성에 자극을 받아 그 직후시기에 춘양ㆍ영주ㆍ예천ㆍ의성ㆍ영해ㆍ청송 등지에서도 대거 창의 하였다. 이들지역의 주동자들은 다음과 같다.
■ 춘양 : 전 학유 류종개(柳宗介), 생원 임흘(任屹)
■ 영주ㆍ풍기 : 김대현, 곽수지
■ 예천 : 전 현감 이유, 진사 이광옥, 권욱
■ 영해 : 찰방 조현, 생원 이함, 유학 백견룡
■ 의성 : 신홍도(申弘道)
■ 의흥 : 이인호
■ 군위 : 진사 이영남, 홍위
■ 청송 : 민근효, 권계창, 어린
안동을중심으로 한 지역에 있어서 본격적인 의병조직은 경상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그것은이들 지역이 왜적의 피해를 크게 입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과 가산을 보존할 수 있어서 의병을 일으켜 도리어 왜적의 화를 자초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들 지역의 사족들에게 적극적으로 토적의 대열에 나오게한 것은 초유사 김성일의 초유문(招諭文)과 안집사 김륵의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김성일의 초유문이 이곳에 전해 진 것은 8월 5일이었고, 이후 예안과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의병의 창기가 본격화되어결국 안동열읍향병(安東列邑鄕兵)으로 발전하여 안동을 중심으로한 경상도 북부지역의 의병을 총괄하게 되었다.174)
초유사김성일의 초유문을 받아 본 배용길은 즉시 안동 전지역 사람에게 전하면서 여강서원(廬江書院)에 모여 창의를 의논하기로 했다. 8월 9일 여강서원 임하현, 송정 등지에서 모인 사람들은 우선 김용과 배용길을의병 창기를 위한 소모유사(召募有司)로 삼아 본격적인 창의를준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3일 임하에서 안동 인근의사우(士友) 수백 명이 기약도 없이 모이게 되어 그 때 바로의병조직을 구성하였다. 이때 구성된 의병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 대장(大將) : 생원 김윤명(金允明, 3일뒤 이정백(李庭栢)으로 변경)
■ 부장(副將) : 진사 배용길
■ 정제유사(整齊有司) : 김윤사(金允思), 이형남(李亨男)
■ 장서(掌書) : 이응타(李應陁), 남우, 권태일, 김득기
■ 향군도감(餉軍都監) : 김득연, 유복기
■ 동부주장(東府主將) : 권눌(權訥)
■ 서부주장(西府主將) : 권기
■ 북부주장(北府主將) : 권익형
■ 남부주장(南府主將) : 김약(金瀹)
■ 안동부 수성장(守城將) : 한림 김용(金涌)
이상과같은 정연한 조직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활동할 수 있는 병사는 모아지지 못했다. 각 지역의 이러한 문제를극복하기 위해서 지역 간의 연대가 절실하였다. 지역 간의 연대 논의는 자연스럽게 확산되고 있었는데 7월 15일 의성 출신 우경충(禹景忠)과 의흥의 박연(朴淵)이안동과 주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의병 연대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예안의병의 경험이있는 신지제 현감(안동 부사 겸임)이 중심이 되어 예안ㆍ의성ㆍ의흥ㆍ군위등지의 사람이 일직에 모여 동맹하고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김해(金垓)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정백과 배용길을 좌우부장(左右副將)으로 삼아 병호(兵號)를 “안동별읍향병(安東別邑鄕兵)”이라 한 연합 의병부대를 창설하였다. 이 조직은 안동을 본진으로삼아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 연합부대는수시로 합진하여 활동하였는데 9월에 일직의 운산역(雲山驛)에서 우선 합진하고 나아가 하도(下道)의 의병진과도 합진하고자 하였다. 운산역에서 합진한 이들은 군기를험하고 하고 장교를 엄선하여 풍찬노숙하면서도 위용을 자랑하였다. 이때 영주의 박록(朴漉) 의병부대, 비안의조단(趙端) 의병부대가 함께 동맹하기를 맹서했으며, 참여 못한 진보등지에서는 격문을 보내 의병 창기를 고무하여 점차 안동 인근의 전의병부대가 연합하게 되었다. 안동별읍(열읍)향병은 20여 일간 여기서 군사를 조련하고 조직과 대오를 정비하였다. 이때마련된 조직은 다음과 같다.
174) 경상북도, 경북의병사, 영남대민족문화연구소,190, 237~24쪽.
(3) 안동열읍향병(安東列邑鄕兵) 조직(추천된날짜)
■ 대장(大將) : 김해(金垓) 8월 20일
■ 좌부장(左副將) : 이정백(李庭栢) 8월 20일
■ 우부장(右副將) : 배용길(裵龍吉) 8월 20일
■ 본진정제장(本陣整齊將) : 류복기(柳復基) 9월 3일
김 륜(金淪) 9월 3일
김윤사(金允思) 9월 3일
■ 예안정제장(禮安整齊將) : 김택용(金澤龍) 9월 3일
이홍도(李弘道) 9월 3일
■ 의성정제장(義城整齊將) : 김사원(金士元) 9월 3일
신홍도(申弘道) 9월 3일
■ 군위정제장(軍威整齊將) : 이영남(李榮男) 9월 3일
■ 군위별장(軍威別將) : 장사진(張士珍) 9월 3일
■ 의흥정제장(義興整齊將) : 강충립(康忠立) 9월 3일
박문윤(朴文潤) 9월 3일
이호인(李好仁) 9월 3일
홍경승(洪慶承) 9월 3일
■ 내성정제장(奈城整齊將) : 남정순(南庭筍) 9월 5일
■ 비안정제장(比安整齊將) : 조단(趙端) 9월 5일
■ 영병장(領兵將) : 심지(沈智) 9월 3일
■ 간병장(揀兵將) : 우인경(禹仁慶) 1월 5일
권복원(權復元) 1월 5일
■ 조전장(助戰將) : 박호인(朴好仁) 9월 3일
■ 척조장(斥條將) : 권극인(權克仁) 9월 3일
■ 복병장(伏兵將) : 이선충(李選忠) 9월 3일
김사권(金嗣權) 9월 3일
조성중(趙誠中) 9월 3일
■ 좌위장(左衛將) : 김익(金翌) 9월 3일
■ 중위장(中衛將) : 김윤사(金允思) 9월 3일
■ 우위장(右衛將) : 신심(申伈) 9월 3일
■ 군량도총(軍糧都摠) :이영도(李詠道) 9월 3일
■ 전향유사(典餉有司) : 홍위(洪瑋) 9월 3일
권행가(權行可) 9월 3일
■ 모의사(謀議士) : 안동 김윤명(金允明) 9월 4일
군위 이보(李輔) 9월 4일
예안 금응훈(琴應壎) 9월 4일
선산 노경심(盧景伈) 9월 4일
■ 장서(掌書) : 김강(金堈) 9월 5일
금몽일(琴夢馹) 9월 5일
김윤안(金允安) 9월 5일
금경(琴憬) 9월 5일
권강(權杠) 9월 5일
정조(鄭澡) 9월 5일
신경립(辛敬立) 9월 5일
권득가(權得可) 9월 5일
■ 군관(軍官) : 김평(金坪) 9월 5일
최료(崔料) 9월 5일
이적(李適) 9월 5일
■ 도군관(道軍官) : 류복기(柳復起) 1월 5일
김윤사(金允思) 1월 5일
■ 병색군관(兵色軍官) : 김태(金兌) 9월 5일-총리군부책임(總理軍簿責任)
이외에전 현감 권춘란 쌀 10말, 소 한 마리, 전 도사 안제(安霽) 쌀 5말, 전 좌랑 이홍 전마(戰馬) 1필, 큰 소 한 마리, 군량 2섬, 장서 권강(權杠) 쌀 바침. 위의 조직은 경상도 북부의 전 지역을 망라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지역뿐만 아니라 전 사족적(士族的) 규모에서 연합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합적 의병부대를 조직할 수 있었던것은 이들 지역이 왜적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고 또한 왜적이 계속해서 주둔하지 않음으로써 연락과 정보 교환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퇴계를 연원으로 한 학문적인 일체감과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동인(東人)의 본산이었던 관계로 관권과 마찰이 없었으며 오히려 관권의 후원을받을 수 있었다.
(4) 안동열읍향병(安東列邑鄕兵)의 활동(1592.10~1593.5)
1592년 9월중순 김성일(金誠一)의 적극적인 중재로 인해 안동의 의병활동이 조정의 공인을 받게 되고 관(官)의 지원을 받으면서 10월 하순부터 본격적인 전투 활동에 나서게 된다. 이를 위해 먼저부대의 개편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10월 23일 5위(衛)로 구성된 부대를 3위(衛)로 개편하면서중위장(中衛將)에 안동정제장 김윤사(金允思)를 임명했다. 3위로부대를 축소한 것은 그 이전 다소 느슨한 형태의 연합부대에서 단일 체제의 부대로 개편된 것이다. 부대개편과 함께 소규모 부대를 각 처에 보내어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도록 향병일기에 나타난 사례를 보면다음과 같다.175)
■ 복병장 이선충과 조정장 권호인이 결사대를 거느리고 반암의 일본군을 기습하여 말 2필을 빼앗음(10월 27일) 일본군에 대한 소규모 공세에 착수함과 동시에 10월 25일 대장 김해는 본진을 안동에서 일본군의 출현이 잦은 서쪽으로 옮겨 예천의 노포에 진을 쳤다. 1월 3일 부장(副將)을 보내어 의성군 단밀과 문경군 반암 지역 등으로 나아가 관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안동 향병들의 중요 활동을 날짜별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176)
05 : 김윤사, 류복기를 도군관(都軍官), 우인경ㆍ권복원을 연병장(練兵場)으로 삼아 장병을 선발
06 : 대장ㆍ 좌부장이 순찰사와 도사를 만남, 예안현에돌아옴
07 : 대장이 군관과 장서를 거느리고 의성에서 감군(監軍)하기로 함.
11 : 좌부장이 의성에서 돌아옴
12 : 대장 예안으로 가면서 장서 신경립을 대동하고 순찰사와 회의함
군위별장 장사진 전사, 장사진은 왜구 천여명이 현의 경계를 침범하자 정병 수십 명을 거느리
고 적진에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고 추격하다가전사
13 : 군사를 3위(衛)로 나누어 휴식하게 함. 병마사가화살 제조금으로 30금을 지원함
14 : 대장이 돌아옴. 병마사가 포수를 파견하여화포를 시험 발포함
12.27 : 대장이 풍산에서 진천뢰(震天雷)를 가지고 옴
28 : 의성 정제장의 비첩(秘牒)이 옴
1593.1.01 : 복병장 이선충이 적진을야습하여 왜적을 사살하고, 칼, 창을 노획 이때 진천뢰를사용하여
큰 성과를 얻음
05 : 대장이 의성에 도착, 향교에서 정제장 김사원ㆍ신홍도, 우위장 신심을 만남
07 : 대장이 의성에 주재함
09 : 대장이 순찰사와 상의하여 권응수, 신심에게인동의 왜적과 싸우게 작전 지시
2.23 : 신선(申仙), 신담(申潭)등이 왜동(倭洞)에 설복하여 5급을참하고 칼 2자루를 획득
4.21 : 의병도대장 김면이 향병을 의성으로 출진시켜 인동의 왜적에 대비할 것을 요청함
29 : 명군의 선봉이 당교에 도착
5.02 : 복병장 김사권이 상주 송현에 설복하여 적장 1명생포
- 대장이 군사를 이끌고 밀양으로 이동
- 진양, 양산 등지로 이동하여 적을 토벌
- 적을 쫓아 경주에 이르러 이산휘와 합세하여 적을 대파함
- 경상좌도 의병은 안동 향병장의 절제(節制)를받게 함
6.19 : 안동 향병장 김해 경주 진중에서 병사함. 그이후 금응훈(琴應壎)이 대신 향병을 지휘하게 함
이상에서살펴 본 바와 같이 안동 향병의 조직은 상대적으로 늦었지만 북부지역 대부분의 의병을 망라하는 의병연합체였다. 그리고이러한 연합체적 조직을 이용하여 합동작전을 수행하거나 또는 다른 지역 의병과 활발한 공동작전도 수행하고 있었다.그러나 그활동은 여타의 의병과 마찬가지로 매복, 야습 또는 소규모의 게릴라식 전법을 주로사용했다. 안동 향병은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동쪽 지역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었고, 주목되는 것은 관군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전시 체제를 주도하던 정치 세력이 안동을 본산으로 하는 남인이었다는점 이외에도 안동은 전시 체제 아래 경상도 감영이설치된 곳이어서 감사(監司), 병사(兵使), 순찰사 등과 빈번한 접촉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 아래서 안동 향병은 관군과 잦은 합동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고, 특히관군으로부터 당시 최신식 무기 진천뢰를 지원받아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낙동강동쪽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안동 향병은 명군의 남하와 왜군의 퇴각과 더불어 활동 근거지를 밀양, 진주, 경주 등지로 옮기고 있었다. 안동 향병장이 안동 지역을 벗어나 경상좌도의병을 절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위력과 전공을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동 향병이 연합조직이었지만때로는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후술할 소천(小川)의 류종개(柳宗介) 의병활동, 군위 경계지역 인동(仁同)전투의 장사진 의병이었다. 안동 향병의 작전 지역은 밀양, 양산, 경주, 감포까지확대되고 있었다.
김해의안동열읍향병은 1593년 5월에 밀양지역에 주둔하면서 일본군의공격을 견제하였고 양산 등을 구원하러 출동하였다. 그 이후에도 일본군의 공격이 경주에 계속되자 향병부대를경주로 옮겨 이광휘(李光輝) 부대와 함께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당시 경주에는 도원수 김명원이 일시 머무르며 지휘하고 있었고, 경상좌병사고언백, 방어사 김응서, 별장 권응수 등이 경주에 군대를주둔시키고 있었다. 아울러 경상좌수사 이수일도 각 진의 변장을 이끌고 경주 인근의 감포(甘浦)에 주둔하면서 일본군의 북상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김해도 경상좌도 모든 의병부대를 총 지휘하여 일본군을 저지하고 압박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병환으로 6월19일 대장 김해는 진중에서 사망하였다. 1593년 6월중순 김해의 사망 이후 전란이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고 관군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향병은 광취무과(廣取武科)를 통하여 관군으로 편입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 전후 복구 사업에 종사하였다.
임란 시각 지역의 의병 조직과 활동에는 특히 전투 시 관군에 준하는 엄격한 규율이 있었고, 안동열읍향병에서는통일된 군율이 있어야만 했다. 군율은 의병 조직 및 창의 때에 규정하고 있는데 각 의병 조직마다 내용은거의 비슷했다. 영천지역 의병 군율의 요지는 다음과같다.177)
문경과예천 지역은 퇴계학의 발흥 이후 퇴계학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임진란이 일어나 문경은의병 운동의 격전지였고, 예천은 많은 의병 운동 참여자를 배출 한 곳이기도 하다. 이들 지역의 의병 활동을 다루는 이유는 문경, 상주가 경상우도에속하고 있지만 지리적으로 또한 문화적으로 안동열읍향병 조직의 영향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들 지역주둔 왜군들이 안동, 예안 등지로 출몰하고 있었다. 문경지역은 영남과 한양을 잇는 관문으로서 역할을 하면서 특히 상주의 문화적 자장 안에 들었다. 이
에 비해예천은 안동이나 예안과 바로 접하고 있으면서 직접적으로 안동문화권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퇴계학의전개와 의병 활동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임진란에서왜군들은 처음 부산을 상륙하여 수도 한양으로 북진했기 때문에 그들이 거쳐 가는 요충지인 상주와 문경 지방은 전투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문경 지역은 천혜의 요새인 조령(鳥嶺)과 교통상으로나 군사전략적으로 중요한 당교와 입점하였으므로 임란 시 양쪽에서 관심이 집중되었다. 선조 임금이나 류성룡도 조령을 지키지 못하면 충주를 지킬 수 없고, 충주가왜적 수중에 들어가면 바로 수도 한양도 방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차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령관신립 장군은 과거 여진족과 싸운 경험 때문인지 조령을 포기하고 충주 탄금대 부근에 배수진을 치고 항거하다가 참패하여 도성까지 잃고 말았다. 조선 왕조 때 도로망은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남북 방향의 X자 형태가기본적인 축을 형성하고 있었고 문경 유곡역이 포함된 영남로는 중심축의 하나로 수도 한양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남부지방의 간선 도로 구실을 하였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대마도가 왜구의 소굴이 되면서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보다 넓고 빠른 대로의 정비가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었다.
(1) 당교 전투(唐橋戰鬪)
당교는문경 지방 남쪽 지역인 함창 근처에 위치한 지역이다. 이곳은 일찍부터 군사적으로나 교통상으로 중요하여큰 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교는 현재 문경시 남쪽으로 상주시 함창읍과 경계한 곳이다. 당교 일대는 전통적으로 육상교통의 중심지이었고 또한 수상 교통이 편리하여 창고가 설치되어 있었고 당교 부근여러 고을에서 거두어 들인 세곡, 진상품, 조세 물품을 이곳조창에 보관했다가 도성으로 운반했다. 왜적들은 비안 다인(多仁) 지방에서 하풍진을 건너 함창과 용궁 땅으로 전진하여 당교에 진을 쳤다. 이들은중로(中路)인 상주 북천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 주력 부대가북상하던 때에, 영천과 신녕 그리고 의성을 거쳐 온 다른 부대 왜적들은 하풍진에서 낙동강을 건너 당교로와서 진을 쳤다는 것이다. 따라서 왜군들도 당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각 지방을 거쳐 온 왜적들도 여기를 중간 기착지로 삼고 장기간 체류하려고 했다. 따라서 우리측 관군과 의병들도 이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려고 했다.
당교의왜적을 공략하기 위해 정예군 2천명을 선발하여 권응수 장수에게 야간 기습작전을 펴게 하고,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북부지역 향병들도 당교 주둔 왜적들을 토벌하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10월 2일 안동열읍향병들은 당교로 출전하기 위해 풍산에 도착한뒤 다음 날 예천군 진지에 이르렀다. 10월 27일 복병장이선충과 조정장 박호인이 결사대를 이끌고 당교 근처에 있는 반암으로 들어갔다. 이날 향병 대장은 당교왜적 진영 목책(木柵)을 파괴하고 다수의 적을 사살, 무기노획을 하였다. 평소 당교에서 주둔하고 있던 왜군들이 안동, 예천 등 부근의 여러 고을을 노략질하고 있어서 안동 향병들도 이들을 주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이 지역의 일부 수령들은 산속으로 도망갔지만 예외적으로 변란 초기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은 항복 않고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했고, 용궁 현감 우복룡도 관군을 이끌고 용감하게 전투하여 그 공덕으로 승진하여 안동 부사로 나갔다.
(2) 상주 의병조직과 활동
왜군이상주에 들어오기도 전에 상주 목사는 이미 그 가족과 더불어 고을 서북쪽 산속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목사가없는 상주 고을에 왜군이 쳐들어온 것은 1592년 4월 24일 경이었다. 이때 순변사 이일(李鎰)은 함창에서 들어와 목사 대신 고을을 지키고 있던 판관 권길을 독려하여 군대를 모았으나 천명도 되지 않은 부실한군졸이었다. 이들을 인솔하여 읍성을 버리고 북천(北川)에서 왜적과 싸웠는데 우리 측의 열세가 그대로 나타난 졸렬한 전투였다. 상주북천 전투에서 승리한 왜적들은 병력의 일부만 상주에 남기고 대부분 북상하였다. 이들 잔류한 왜군들은읍성과 당교 등을 거점으로 계속 상주에 주둔하면서 약탈과 횡포를 일삼아서 이것이 상주 지역 의병 결성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상주는조선 초기 경상도 감영(監營)이 소재한 행정 중심지로서 도로망도정비되었고, 넓고 비옥한 토지를 가진 윤택한 고을이었다. 특히고을 동쪽을 관류하는 낙동강은 수상 교통에도 유리하여 남해안과 쉽게 교류할 수 있었다.
상주 지역은임진란이 발생하기 12년 전인 1580년 서애 류성룡이 홍문관책임자로 있다가 상주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힘을 기울여 추진한 시책은 향교 교육진흥에 주력한 것이다. 자신이 직접 향교에 나가서 유생들을 가르쳤는데,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의강의 그것이었다. 이때 그의 문도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 뒤 임란 때에 의병 봉기에 앞장서거나 고관으로진출할 수 있었다. 정우복, 이창석, 전사서 등이 대표적 인물이고, 이 지역에 아무나 행정책임자로 갈수 없다는 인식은 예안 현감처럼 오래전부터 조정의 인식이 변하지 않고 있었다. 1592년 7월 30일 황령사에서 상주 지방의 의병조직이 정식으로 갖추어 지게되었고 그 진용은 다음과 같다.178)
- 의병장 :이봉(李逢)
- 중위장 :이천두(李天斗)
- 좌막 : 전식, 송광국, 조광수, 조정(趙靖)
- 장서 : 채천서, 홍경업, 조정(좌막 겸임)
위의 상층부구성 이외에 상주와 함창에 거주하고 사족과 민인(民人)들이다수 참가했다.
- 신문숙, 김경추, 신추백, 권여림, 이사회, 이사광, 권종경, 정경세
- 의병장은 청주에서 궁수 18명을 데리고 와서 창의군에 가담
- 상주, 함창사족 40여명
- 청주 32명
- 선봉장 :이축, 사족으로서 무예에 뛰어남
- 의병부대 충보군 : 1592.8.16. 조직
○ 의병장 : 김홍민
○ 중위장 : 이제경
○ 좌막 : 장천뢰, 노대하, 조익
○ 장서 : 김홍미, 조익(좌막 겸)
○ 상주, 청주, 보은 등지 유신(儒紳) 70명, 사족 60명(상주인사, 보은인사)
○ 집결장소 : 속리산 자락
임진란때 왜군들은 상주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고 상주 읍성과 당교 등지에 잔류병을 주둔시켰다. 이 지역에대한 침탈이 계속되자 이 고을 사족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향토를 지키는 한편 인근 지역 안동열읍향병과도 긴밀한 협력을 계속해왔다. 상주 지역에서 공식적으로 결성된 의병 진영은 창의군과 충보군, 상의군 3진영이었다. 상주 의병의 특징은 충청도의 의병진(청주, 보은, 황간, 영동)과 서로 협력이 잦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두 지역 간의 접근성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안동열읍향병조직과는 서애 류성룡의 상주 목사 역할, 퇴계학 등의 학문적 영향에 의한 기본 바탕이 서로 연계되고있었다고 믿을 수 있다.
임진란초기 안동 부사(정희적)와 판관(윤안성) 울산으로 가다가 부사는 가족을 데리고 멀리 함경도 쪽으로도망갔고, 판관은 안동으로 돌아와 군사를 모으려 하다가 안 되어 풍기 지역으로 도주하고, 다만 예안 현감 신지제만 자리를 지키고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함에 따라 안동 지역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179) 한편 상주를 점령한 일본군 제 2군의 일부가 군위, 비안을 거쳐 4월 27일예천의 다인현(多仁縣)에 주둔하였다. 이 다인현은 현재 의성의 다인면이다. 이 일본군은 가토 기요마사휘하의 부대로 그는 영천과 신녕을 점령 후 부대를 2개 부대로 나누어 북상했다. 그중 한 부대가 안동부를 점령하려고 풍산으로 이동했으나 풍산에는 좌방어사 성응길의 조선군이 저지하고 또한 유명한안동의 투석군이 막았다.
경상좌도에서예안의 신지제처럼 초기에 봉화 지역에서 의병을 조직한 사람은 류종개이다. 그는 전직 전적(典籍)으로 예안 출신이었는데 홀로 향병 수백 명을 모아 험준한 태백산에들어가서 스스로를 지켰다. 경상좌도 북부지역의 의병은 다른 지역과 달리 초기부터 관군과 갈등이 적었고상호 협조와 연합 작전이 원활하여 이 지역에서는 의병과 관군의 명목이 혼용되기도 했다. 안동 지역에서조선군의 대응이 본격화되자 6월에 들어와서 일본군의 안동 지역에 대한 압박이 시작되고 6월 5일에는 용궁과 예천에 일본군이 출현했다. 6월 14일 일본군은 경상좌도 동북부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이동 명령을받고 두 개의 병력이 합세(길견원뢰吉見元賴 부대와 모리원강毛利元康 부대) 17일 상주를 거쳐 다인, 비안,도리원, 의성을 지나 2일 안동으로 들어와 수일동안안동 일대를 약탈하였다. 이들 병력이 도리원과 구미를 지나면서 건넛마을 천동에서 신지제의 형님 신지효(응암)가 산속에 숨어 있다가 왜병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제 4군은 강원도를 담당했고 함경도까지 북진했다가 명나라 군대의 참전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동해 지역을따라 남하하기 시작했는데 1592년 7월 상순 삼척에 도달하고, 계속 남하하여 평해와 울진, 8월에는 경상도 영해부에 도달하였다. 일본군은 울진에서 부대를 나누어 한 부대는 서진하여 태백산맥을 넘어 예안 일대로 들어왔다. 류종개의 의병부대는 이 일본군과 그들에게 부역하고 있는 조선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태백산 피난지를 지키기위해 조직된 것이다. 그의 부대에는 능력 있는 인사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 부장(副將) : 임흘(任屹)
- 김중청, 윤흠신, 윤흠도 형제, 김인상, 김철(김성일의 조카)
류종개는 1579년(선조12) 진사시에합격, 1585년 식년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와 전적(典籍)을 역임하고 향리에 돌아와 있던 중 임진란이 일어났다. 그의 가계에는다수의 무반 출신이 있었다. 그의 의병부대는 규모는 수백 명에 불과했지만 16조목의 약속과 7조목의 군령을 정하여 군율을 통해 엄정한 군기를유지할 수 있었다. 16조목의 약속 가운데 현재 알려진 것은 다음의10가지이고, 나머지 6조목은 군중의 체모와관련된 것이었다.180)
② 북소리가끊어지지 않으면 전진은 있을지언정 후퇴는 없으며, 함부로 후퇴하는 자는 벨 것이다.
③ 징소리가두 번 들린 연후에 후퇴할 것이요, 후퇴함에 뒤지는 자는 벨 것이다.
④ 군중의기밀을 누설하는 자는 벨 것이다.
⑤ 모이는기한에 늦게 이르는 자는 벨 것이다.
⑥ 사사로이민간의 물건을 취하는 자는 비록 그것이 작더라도 반드시 벌을 줄 것이다.
⑦ 군령을따르는 자는 상을 줄 것이고, 군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벌을 줄 것이다.
3천여 명의 왜적이 강릉, 삼척 등지를 거쳐 한 부대는 평해를 거쳐 경상도로 향하고 나서 소천, 재산(才山)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의병장류종개는 이들 적을 막으려고 했는데 안집사 김륵은 일부 병력을 보내어 류종개를 지원하였으며, 장서(掌書)인 윤흠신과 흠도 형제는 류종개의 막하에 종군하면서 적을 막았다. 이때 모든 정보를 종합해 볼 때 일본군 주력은 울진 서쪽 태백산을 넘어 봉화쪽으로 오는 것으로 판단하고 의병은봉화현 동부지구 산림지대에 잠복하였다가 급습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척후병과 보초들의 잘못으로 위치가폭로되었고 류종개는 힘 모아 싸웠으나 증원이 안 되고 류종개와 윤씨 형제는 전사하고 말았다.
(5) 매년 7월 28일(음력) 의병 추모제
소천 지역전투에서 전사한 분들에 대한 조선 조정의 국가적 예우를 보면 류종개 의병장에게 예조 참의에 증직, 같이전사한 윤씨 형제, 김인상 등에게 포증(褒贈)했으며,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이들의 전(傳)을 수록하고, 별전(別傳)을 지어 정문(旌門)하라고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광해군일기 92권)
그 뒤구한말까지 류종개 의병대장을 비롯하여 무명의 의병들의 고혼을 달래기 위하여 관원 1인과 산직(山直) 12인을 배치하여 영혼을 위로했다. 경술국치 이후 관에서 제사를 받들지 못하자 민간 차원에서 일제의 삼엄한 감시 하에서도 소천면민(小川面民)들이 몰래 합동 분향을 해왔으니 그 정신이 면면히 계승되고있었다. 해방 후 소천면 단위 행사로 매년 음력 7월 28일을 기해서 제사를 지내다가 1985년 12월 봉화군과 봉화문화원이 합동으로 임진란 의병 전적 기념비를 건립하고 군민의 정성으로 적석탑(積石塔) 7개를 쌓아올려 매년 음력7월 28일 추모제를 지내다가 정부 차원에서 소천면에 충렬사(忠烈祠)를 건립하여 군(郡) 주관으로 매년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4) 의성(비안), 군위(의흥)
경상좌도북부의 남은 지역은 의성현, 비안현, 군위현, 의흥현 등 4개의 현(縣)을 포함하고 있다. 각 현은 독자적으로 소규모의 의병조직이 있었지만안동열읍향병이 조직될 때 조직에 가담하였다. 임진란과 관련된 기록이 각 현이 일본군의 중요 진출로였기때문에 일본군의 통행과 주둔, 노략질은 피할 수 없었다. 의흥, 군위, 비안은 임란시작과 동시에 좌로(左路)로서 ……울산-경주-영천-신녕-의흥-군위-비안-용궁-문경-조령-충주……중간 지점이었고 의성은 의흥에서 탑리를 지나 의성으로 들어온왜군은 바로 안동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의성, 비안, 군위 지역은 안동과 인접해 있고 특히 예안 현감과 안동 부사를겸한 신지제가 양쪽의 의병을 이끌고 이들 지역으로 출진한 바 있다. 그러나 구체적 임진란 자료는 임진란정신문화 선양회에서 의성군 당국의 비협조로 관련 연구와 세미나를 아직까지 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특히의성과 비안 자료를 찾기가 어려운 실정에 있다.
임진란지역 의병 조직의 선구자 오봉 신지제 선생의 고향으로 부모와 가족이 살고 있는 의성현에 대한 기록ㆍ자료가 너무 없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앞에서 누차 언급하였다. 특히 의성현ㆍ비안현ㆍ군위현ㆍ의흥현 4곳의임란 피해와 항왜 의병 활동에 대한 연구가 현재 의성ㆍ군위의 행정 당국의 비협조로 이곳 출신의 필자로서 위의 봉화 지역 임란 연구(경북지역 임진란사 2권) 기록을보면서 한심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고 있다. 임진년 1592년 5월 중순 이후 조선 각 지역을 일본군이 장악하자 이들에게부역하는 조선인들의 노략질이 심화되고 이에 따른 피해가 속출하면서 경상좌도 여러 곳에서 초기적인 형태의 의병이 일어났다. 5월말 일본군이 의성과 군위 일대를 약탈하자 품관(品官)181) 신씨(申氏)가 마을의 대소인(大小人)을이끌고 일본군을 막기로 하고 소수의 정병을 거느리고 가서 일본군 선발대의 의성 일대 진입을 막기도 했다. 그러나일본군 본대의 공격으로 의성 지역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182)경북 북부 일대에서 최초로 조직화된 의병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측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①먼저 안동 부근 예안은 현감 신지제가 6월까지고을을 지키고 있으면서 그때까지 이 지역에 대한 일본군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다른 지역 사족들이나 품관들이 일본군의 보복 등을 두려워하여 적극적으로 의병을 조직하기 어려웠던 것과는 여건이 달랐다.
② 4월에 경상도 안집사(安集使)로임명된 김륵(金玏)이 5월에 안동지역에 도착하여 의병 초모(招募)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예안 현감 신지제에게안동 부사를 겸하도록(1592.5)하고 김해(金垓)를 안동열읍향병 대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6월이 되면서 안동 지역여러 의병부대 사이에 연합 전선 형성을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③ 경상좌도북부지역의 의병은 초기부터 관군과 상호 협조, 연합 작전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조선군의 대응이 본격화되자 6월에 들어 예천ㆍ용궁ㆍ안동 등지에 일본군이나타나 압박을 하기 시작했다. 안동 일대로 침입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안집사 김륵은 6월15일 예안 현감 신지제와 용궁현감 우복룡(禹伏龍)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다인(多仁, 당시 상주에 편입)과의성의 일본군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조선군은 패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다. 조선군의 패배로 백성들이 흩어져예천의 동쪽 마을들이 모두 텅 비는 심각한 상황에 빠졌다. 선조가 임진란이 일어나자 김륵을 경상좌도의안집사로 임명한 것은 영주 출신으로 퇴계의 문인으로 지역 사정에 크게 밝다는 것이었다. 1592년 5월 중순부터 김륵은 도착 즉시 선조의 선유문(宣諭文)을 베껴서 각 고을에 배포, 창의를 도모 하였다. 김륵은 관할 각 지역을 순시하면서 지역책임자 수령의 업무 독려와 가장(假將)의 임명이었다. 민심 안정과 지역 재건을 위해 수령의 역할이 중요했기때문이다. 김륵은 수령이 도망간 예천ㆍ풍기ㆍ안동ㆍ의성ㆍ의흥 등은 학식이 있거나 품관인들로 가장(假將)을 삼아 지휘하게 했다. 예로서안동은 전 도사(都事) 안제, 전 검열 김용(金涌), 풍기는교서 박사 황서(黃曙), 의성 훈련권지 권희순, 예천 전 현감 이유, 의흥 품관 박연(朴淵), 군위 품관 장사진(張士珍)을 임명하여 관서업무를 담당하고 군사를 모집하게 하였다. 이들 지역은모두 안동 진관에 속한 곳이다.
1592년 6월초에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조정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사람들의 전언)용궁ㆍ예천ㆍ풍기ㆍ영주ㆍ예안ㆍ봉화ㆍ안동ㆍ청송ㆍ진보ㆍ영해ㆍ영덕ㆍ청하ㆍ흥해ㆍ하양등 14곳 고을은 아직 난리를 겪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그 수령 중에 용궁 현감 우복룡, 예안 현감 신지제, 봉화현감 황시 외에 나머지 수령들은 산골에 숨기도 하고, 간곳을 알지 못하고 있다. 안집사 김륵이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다인과 의성으로 척후를 보낸 병력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봉화ㆍ영주ㆍ풍기등에 군사를 보내 일본군을 소탕하려 했는데 중과부적으로 어렵다고 했다. 6월 초에 일본군이 용궁과 예천경계를 난입하여 침범하자 김륵은 봉화ㆍ예안ㆍ영주 수령에게 군사를 이끌고 용궁과 예천 반면으로 가게 했다. 그이유는 의성ㆍ다인ㆍ예천 등지를 쳐들어온 일본군을 그 곳에서 막아야만 안동을 비롯해 영주ㆍ풍기ㆍ봉화 지역에 진출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예천방면으로 진격한 4명의 수령 중에 용궁 현감 우복룡과 예안 현감 신지제 만이 퇴각하지 않고 진을 치면서일본군을 기다렸다가 6월 15일 예상치도 않은 상태에서 일본군의급습을 받아 아군의 인명 피해를 많이 낸 채 간신이 살아서 돌아왔다. 안동부에서 일본군이 철수한 시기는 7월 18일 무렵이고 이들은 풍산으로 후퇴, 7월 23일 구담으로 옮겨 갔다.8월 초 상주로 물러났다. 이와 같이 일본군의 퇴각, 이동은 7월 25일, 28일 영천성전투에서 일본군이 패전한 여파이며 일본군의 군위ㆍ의성ㆍ안동ㆍ예천 등의 고을에 진을 치고 있다가 영천에서 섬멸당한 뒤로 군위에 있던 병력은 철수해서개령으로 향하고, 의성ㆍ안동ㆍ예천의 일본군도 풍산으로 물러났다.
181) 품관(品官) : 품계(品階)를 가진 관리를 통틀어 이르는 말
182) 노영구, 전게 논문, 47쪽.
(1) 의성지역사족(士族)의 의병 지도부 구성
안동ㆍ예안지역에 인접해 있던 의성과 군위는 학문적으로 안동의 퇴계 이황의 학맥을 그대로 이어받고 직접적인 영향권 속에 있었다. 퇴계는 관직생활을 일찍 끝내고 저술과 제자양성에 집중하였으며, 안동지역과범 안동문화권으로 제자군이 넓게 형성되는데 이 시기에 가장 대표적인 제자가 조목, 김성일, 류성룡 등이다. 월천 조목은 15살때 38살의 젊은 이황을 스승으로 삼았고, 이후 예안지역을중심으로 한 퇴계학단이 형성되었다.
김부인(金富仁, 1512~1584), 김부필(金富弼, 1516~157)을 비롯한 오천 5형제와 금난수(琴蘭秀,1530~1604), 이덕홍(李德弘, 1541~1596)등이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혼맥과 학맥으로 얽힌 인적 관계를 형성하였고, 퇴계 사후 월천계열 또는 예안 학단으로 지칭되면서 퇴계학의중심이 되어 왔다. 학봉 김성일은 19세 되던 156년 퇴계문하에 나아갔고, 서애 류성룡은 21세 되던 해인 1562년 퇴계문하에 입문했다. 선배들인 월천계열 학인들에 비해 입문 시기가 늦었지만 이후 이들은 출사를 통해 퇴계학의 실천 정신을 현실 정치에서구현하려고 했다.
이후 퇴계학은 경상도 북부지역에서만 머물지 않고 낙동강 중류지역까지 확대되면서 한강 정구(鄭逑, 1543~1620), 여헌 장현광(張顯光, 1544~1637)으로 대표되는 성주와 구미지역으로 제자군이 형성된다. 의성지역의퇴계학맥과 류성룡, 김성일의 문하생들이 안동지역과 구별 없이 과거급제와 성리학자를 배출하면서 의성지역제일의 명문사족으로 자리를 잡는다. 조선후기인 170년 초부터 1894년 과거제도 폐지 때 까지 서인의장기집권으로 남인이 대부분이었던 영남지역은 과거 급제자 수가 현저히 줄었다.
조선 중기까지의성지역의 명문사족은 안동 김씨, 아주 신씨(鵝洲申氏), 영천 이씨 등이고 이들이 의성지역과 안동열읍향병의 지도부 위치에 있었다.
안동열읍향병(김해부대)에 참여한 인사들은 대부분 그 지역의 명망 있는 사족이었다. 의병장 스스로 진정한 의병은 사족 내지 유생이 주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경상좌도 의병의 명단을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김면(金沔)에게 보고하였을때 경상좌도의 의병이 모두 유생으로 편성된 것을 보고 ‘이것이 바로 참 의병이다.’라고 했다는 데서 잘 나타난다. 이들은 학통상으로는 대체적으로 이황의제자이거나 이황의 직전제자인 조목, 류성룡, 김성일의 문인들이었다. 또한 김해부대의 안집사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김륵(金玏) 역시 이황의 문인이었다. 이들 사이에는학문적인 일체감뿐만 아니라 혼인 관계도 겹치는 밀접한 사이였다. 안동지역 의병들이 관군과 큰 마찰 없이공동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김해부대의경우 안동ㆍ예안ㆍ의성ㆍ군위ㆍ비안ㆍ내성ㆍ선산 등 상당히 광범한 지역에 거치고 있다. 또 난중잡록에 따르면 예천ㆍ청송ㆍ영해의 의병장도 김해의 지휘를 받았다고 한다. 향병일기에 의하면 김해의 지휘를 받고 실제 전투에 참여한 부대는 안동ㆍ예안ㆍ봉화ㆍ영주ㆍ예천 의병이었다. 의성과 그 이남 군현의 의병은 대체로 자기 지역을 방어하는데 치중했다. 위에서언급한 의성지역의 능력 있는 사족들은 대부분 의병조직과 활동에도 앞장을 서고 있었다. 점곡 사촌 안동김씨 김사원, 김사정 등 3형제, 아주 신씨의 신심(申伈)ㆍ신흘(申仡) 형제, 신광도ㆍ신상도ㆍ신홍도 집안 그리고 지방 수령이었던 오봉 신지제와그의 숙부 신몽필(申夢弼), 백씨 신지효(申之孝), 안동 권씨 권신국, 권희순, 건마산성 전투에서 순절한 의성 김씨 형제들도 사족 출신들이었다. 이들에대해서는 뒤에서 개별 소개를 하기로 한다.
(2) 의성지역의 항전ㆍ전투183)
여기서의성지역은 현재의 의성읍, 비안읍(면), 다인, 단북지역을 포함한다. 가등청정(加籐淸正) 부대가 영천ㆍ의흥에서 군위ㆍ도리원ㆍ비안지역으로 진출했기때문에 의흥에서 탑리ㆍ의성ㆍ안동ㆍ영주ㆍ죽령 코스와 더불어 부분적인 전투와 저항이 있었다. 임란직후 상주의왜병들이 비안ㆍ도리원ㆍ구미ㆍ의성으로 움직여 안동으로 들어간 기록이 보인다. 지금까지 작은 충돌을 포함하여 6번 전투가 있었는데 드러난 것은 세 곳으로 건마산성(의성 단촌편과점곡면 경계)전투, 금뢰(金磊, 봉양면) 덕은동 전투, 단밀전투는의성군지(義城郡誌)등에서 거론되고 있다.
건마산성(乾馬山城)은 경상좌도 문소군(의성) 점곡면 송내리와 단촌면 병방리(幷方里) 경계에 소재한 건마산에 쌓은 성으로 일명 병방성(幷方城)이라 하며 이곳 주민들은 성재라고 부르고 있다. 건마산성 전투에는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김치관이 전투 상황을 기록한 종형건마산사절시사(從兄乾馬山死節時事)에 의해 전투상황과 피해상황을 어느 정도 알 수있으며, 조정에서 내려온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의 통솔을 받은 권희순이 크게 승리를 거둔 덕은동 전투는 단편적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김륵의 지휘를 받은 김희는 비안현을 거점으로 활약하다가 단밀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이외에 예안현감 신지제가 의병과 관군을 이끌고 의성에 있는 적을 토벌한 것, 군위와 의성 경계지역에서 전투, 용궁과 예천에서 의병이 다인을 공격한 것은 구체적인 전투 기록이 없다.
183) 의성의 임란사와호란사, (사)의성 향토사 연구회, 2015, 16~41쪽.
가. 건마산성 전투
건마산성전투에서 전사한 김응주(金應周, ?~1592)의 아들인 김치관(1569~161)이 김치중(金致中,150~1592)등 1숙5종반(一叔五從班)이 전사(숙부김응주와 치중ㆍ치화ㆍ치홍ㆍ치강ㆍ치공)하자 그 시신을 장례 지낸 후 전투상황을 종형건마산사절시사(從兄乾馬山死節時事)에 남겼다. 임진란이나던 해 7월 1일부터 연4일간 의병과 왜군이 각각 10여명의 인명 피해가 난 치열한 전투로 그 전투 상황을 비교적자세히 알수 있다.
의성이왜군에 의해 유린되고 4월 30일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몽진(蒙塵)184)의길에 오르자 안동부 서쪽 회곡리에서 고향인 의성 중사촌(점곡면 중리)으로 돌아온 김치중은 숙부인 응주의 격문을 돌리고 동지를 규합하니 권희순ㆍ김덕기 등 여러 명이 모였으며 숙부인응주의 건마산을 요새로 할 것을 제의한 대로 건마산에 돌과 흙으로 산성을 축성하고 왜군을 몰아낼 것을 준비하였으며 노약자는 병암정사(屛巖精舍)로 피신하게 하였다.
군위읍길은 왜군이 왕래하는 중요한 통로임을 알고 김치중ㆍ김덕기ㆍ장춘우 등과 더불어 백 명도 되지 않은 병력으로 적라산(赤羅山) 허리 부근에 왜군이 오기를 잠복하였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왜적이 오지 않아 건마산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1592년 6월 그믐에 왜적이 우리 부(府)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비와 군량미 등 준비를 갖추었다. 7월 1일 왜적의 선봉 40여명이 후평(後坪) 들판을 따라 돌입하자 일시에 뿔 나팔을불며 접전하여 무기와 갑옷 등을 다수 노획하였으나 안철수가 앞장서서 활로 적을 쏘아 죽이기를 그치지 않다가 왜군이 쏜 조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튿날에도또 다시 적이 공격해 왔고 3일째에도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격파하였다.4일째 되는 날 인근에 있던 왜군까지 합세하여 건마산성으로 밀고 들어왔으나 치열한 전투로 10여명을 사살하였다. 승세를 타고 성문을 열고 투격하던 중 잠복해 있던 적에 의해 패하였고 응주가 순절(殉節)하고 치홍ㆍ치협ㆍ김덕기ㆍ장춘우 형제 등 많은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김치중은 절벽에 몸을 던졌으며 김응하는 분을 이기지 못해 탄식하고 자결하는 등 의병도 1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184) 몽진(蒙塵) :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감.
- 건마산성 전투 의병간부 사망자(의성 김씨)
○ 김덕기(金德驥) : 향리 선비로서 김치중과 함께 전사.
○ 김응하(金應夏) : 류성룡과 이종(姨從)사이, 김치중의 백부(伯父), 자결.
○ 김응상(金應商) : 김응하의 아우, 임란때 김치중과 함께 분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절사(節死)
○ 김치중(金致中, 150~1592) : 서애 류성룡 문하, 서애 셋째 아들 류진(柳袗)은김공에게 수업 받음, 선비 권희순, 김덕기 아우 치화, 종제 치강, 백부 응하 등 10여명의 인원으로 창의
○ 단촌후평 들판에서 4일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고 10여 명을사살하였으나 안철수(安鉄壽), 김치하 등 10여 명이 전사했다.
○ 김치윤(金致潤) : 김치중의 동생으로 건마산성 전투에서 전사
○ 김협(金悏) : 김치중의 아들로서 전투에서 전사
○ 김치홍(金致弘, ?~1592) : 김치중의 종제, 건마산 전투에서 전사
○ 김치화(金致和, ?~1592) : 김치중의 동생, 건마산 전투에서 전사
○ 김치강(金致剛, ?~1592) : 김치중의 종제, 건마산 전투에서 전사
○ 김치공(金致恭, ?~1592) : 김치중의 종제, 건마산 전투에서 전사
○ 박종연(朴宗淵) : 향리 선비로서 창의하여 건마산성 전투에서 전사
○ 손대효(孫大孝) : 건마산성 전투에서 전사
○ 신광도(申光道) : 건마산성 전투에서 전사
○ 장계우(蔣桂友) : 장춘우 동생, 건마산성전투에서 전사
○ 장춘우(蔣春友) : 장계우 형님, 건마산성전투에서 전사
○ 조정원(趙正遠) : 마음 사람으로 김치중과 함께 전 참가, 전사
나. 금뢰(金磊, 봉양면)면 덕은동(德隱洞) 전투
1592년 7월건마산성 전투 후 권희순 등이 결사대 50여 명을 조직해 금뢰면(현봉양면) 덕은동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전투로 이에 대한 기록된 것이 적어 전모를 밝힐 수 없다. 전투를 주도한 권희순 공이 12월에 안동 판관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장기(영일만 모서리) 현감이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덕은동전투는 1592년 7월 이후 12월까지 시기에 전투가 있었고 이때부터 의성군 동부지역은 다소 평정된 것으로 보인다.
권희순(權希舜, 1548~1595)의 아버지는 청산 현감(靑山縣監)을 지낸 권상의(權尙宜)이며 단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처가가 있는 의성 사촌마을에 낙향하여 은둔하였다.
천문ㆍ지리ㆍ병법ㆍ산수등에 널리 통달하였고 젊은 나이에 향시에 세 번이나 합격하였고, 1583년 무과에 급제하여 문무겸재자(文武兼材者)로 칭찬이 자자하였다.1584년 정로장(定虜將)과 선전관을 거쳐 1585년에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 1586년 훈련원정내금위별시(訓鍊院正內禁衛別侍)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이일어나 안집사 김륵(金玏)의 천거로 의성수성장(義城守城將)으로 김치중공과건마산 전투에 참전하였고 김치중이 전사하자 제(祭)를 올리고결사대를 조직하여 덕은동 전투에서 적의 수급 23급을 베는 등 군공을 크게 세워 비안, 의흥까지 평온을 되찾았다. 1592년 안동 판관을 거쳐 장기 현감(長鬐縣監)으로 백성을 구휼하였고1595년 2월에 왜선 수십 척이 연일만(延日灣)으로 침공하는 왜적을 맞아 정예장사 30여 명을 인솔하여 전투 중유탄에 왼쪽 겨드랑에 맞으면서도 지휘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병창(病瘡)으로 귀향하니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공훈을 기렸다. 그 후 조정으로부터 1596년 훈련판관, 임진란이 끝나던 해인 1597년 훈련 도총부(訓鍊都摠府)등을 제수 받았으나 부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1598년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덕은동전투의 왜병은 선방산(船放山) 넘어 군위읍에 주둔하고 있던병력으로 판단된다. 덕은동에서 멀지 않은 장대, 삼산(오산, 고산 등)의 전투및 약탈도 군위 주둔 왜병 이었으며, 덕은동 뒷산을 넘으면 행정적으로 군위지역이고, 지보사 사찰도 군위읍 상곡리 산79에 소재하고 있다. 권희순 공과 팔공산 회맹(會盟)부터자별(自別)했던 사이인 박무선(朴茂先)이 엮은 행장(行狀)이 전해온다. 권희순의 묘는 점곡면 운암3리(지곡)에 현존하고 있고후손이 1974년 2월에 묘소에 빗돌을 세워 관리(음력 10월 2일에 제사)하고 있다.
덕은동전투에서 공을 세운 또 한 사람은 권희순의 서종숙(庶從叔) 권신국(權信國)이다. 그는 1592년 권희순이 조직한 결사대에 합류하여 왜적 23명을 베는데공을 세웠다.
다. 단밀(丹密) 전투
이 지역의전투는 단밀면 소호 4리이고 선산 구미시에서 넘어오는 왜적을 이 지역에서 맞아 전투가 있었으며 지금도이 마을에 군량터가 있다. 왜군의 주된 통로인 단밀 지역은 다인ㆍ단북ㆍ비안ㆍ안계 지역과 더불어 상주ㆍ낙동ㆍ문경ㆍ예천ㆍ조령ㆍ충주로 연결되는 곳으로 일본군의 전략적인 주둔지였다. 단밀지역은 김희(金喜, 1564~1592) 의병장으로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한 기록이외는 자료가 없는 실정이다. 김희는 고려말 충신 김제(金濟)의 후손으로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을지낸 아버지 김예복(金禮復)의 비안면 서부 2리(박연)에서 태어났다. 고을에서는 박학다식하여 추앙을 받았으며, 임진란이 일어나 의병장김해(金垓)가 잇는 안동열읍향병 소속 비안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단밀 전투에서 28세로 장렬히 순국하였다. 목 없는시신이 돌아오자 부인 안강 노씨(安康盧氏)도 남편 따라 목숨을끊었다. 임란후 조정에서 호조정랑(戶曹正郎)에 증직되었다. 동생 철(喆)이 왜군에게 잡히게 되자 칼로 자결하였으며 아내 남양 홍씨도 자결하였는데일본군이 철수한 뒤 집안사람들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회생하였다. 김희 공이 일찍 순국하여 후사가 없어막내아우 김계(金啓)의 맏이인 옥(鈺)으로 대를 이었는데 그도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비안의병장으로 출전하여 순국하였다. 묘는 비안면 장춘리에 현존하고있다. 김희의 의로운 순국의 뜻을 기려 박연(朴淵)마을 큰길가에 1981년 순천인 박노선(朴魯善)이 비문을 지어 세웠다.
(3) 임란과관련된 의성의 각 마을185) 성(城) 등
임란으로각 마을은 왜군에 의해 약탈되는 등 피해가 컸으며 특히 왜군의 주 통로인 다인, 단밀 등의 의성군 서부지역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동부 쪽인 옥산ㆍ산곡ㆍ춘산으로 사람들이 몰려든 것으로 보이며, 난리통에 새로 생겨나기도 하고 초토화되기도 하였으며 농지도 황폐화 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실은 임란과 관련된 마을은 202년 의성 문화원에서 펴낸 의성지명 유래ㆍ의성군지ㆍ의성읍지ㆍ향교지등이참고 되었다.
- 의성읍
○ 후죽(帿竹) 1리, 성상동(城上洞)
읍성은토축(土築)으로 둘레가4720척인데 폐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적혀 있다. 북부면 지역으로 성상도ㆍ성하동ㆍ성문동ㆍ북원을 합하여1914년 후죽이라 하고 의성면에 편입되었고 읍성이 있어 군영으로 병사 훈련시키는 활터였으며, 사포(射布)로 둥근 과녁에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쏜 곳이라 하여 과녁 후(帿)자와 대 죽(竹)자를 취하여 부르게 되었다.
○ 후죽 2리 성문동(城門洞)
조선조에성이 축된 터로 의성 초등학교에서 팔성리(성동)에 뻗친 성의문이 마을 입구가 되고 지금의 신선탕 근처에 있었기에 성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 팔성 3리 성동(城洞)-성산산성터[城山山城址]성동에 있는 성이 있었던 터로서 임진란 때 쌓았다고 함
○ 철파리(鐵坡里), 역마(驛馬)ㆍ화주배기 임진란 때 주민들이 쇠붙이와 같은 굳은 정신을 방패로 하여 왜적을 막아 내었다고 철패(鐵牌)라고 부르다가 철파가 되었다.
○ 구산 2리, 덕은동 밀양 박씨와 아주 신씨의 집성촌으로 입향 시조는 아주인신몽필 공이 입향하였고, 그의 아들 신지행(申之行) 공은 아버지와 임란 시 많은 재물을 바쳐 그 덕이 칭송되어 덕은(德隱)이라고 하였다.
○ 산성(山城)과 사찰(寺刹) 의성군의 여러 곳에 산성이 산재해 있으나 임진란과 관련된 것은 여섯 곳으로 나와 있다. 안계면의 고수성(古穂城), 금성면의 금성산성, 단촌의 건마산성, 봉양리 산성지(안계면), 의성읍의치선리성지(致仙里城址), 비안면 화장산성(花藏山城)이 있다.
○ 단촌면구계리 고운사(孤雲寺) 신라 신문왕 원년 681년 창건, 임란 때 사명대사가 승군을 지휘한 전방기지로 사용. 식량비축, 부상 승병의 뒷바라지를 하던 사찰, 대곡사(다인면), 빙산사지(춘산면), 수정사(水淨寺, 금성면)는 임란 때 승병들의 보급기지 역할을 했으며, 사명대사의 영정이 있다.
○ 치선리성지(致仙里城址) 치선리 산성은 대구-의성 간을 잇는 국도 동쪽에 해발 230m 산 정상에 위치하며 남대천(南大川)이 동에서 남서쪽으로 에워싸듯이 흘러 적의 움직임을 쉽게 확인할수 있고 적을 방비하기에 좋은 곳이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산성은 전체 둘레가 약 70m로 성안에 망루, 건물터, 봉수터, 문터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의성현지(義城縣誌)에 의하면 선조 30년(1597)에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수축한 것으로 되어있어 임란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산성으로 볼 수 있다.
(4) 의성ㆍ비안의의병장
의성현과비안현의 의병 조직은 안동열읍향병의 연합체에 포함되고 있었지만 개별적인 의병 조직은 가지고 있었다. 안동향병 조직에 이름이 올려있는 의성 출신 인사는 다음과 같다.
- 의성 정제장(整齊將) : 김사원(金士元), 신홍도(申弘道)
- 비안 정제장 : 조단(趙端)
- 우위장(右衛將) : 신심(申伈)
- 1592년4월말 현재 의성 의병장 2명
○ 박무선(朴茂先)
○ 김사정(金士貞)
〈의성 의병 완의약조(完議約條)186)〉
선비들이협의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적을 토벌하는데 몸을 아끼며 회피하려는 자는 온 가족들을 변방으로 이주시킨다. 그중에 더욱 심한 자는 나라를 배반한 법률로 논죄한다.
○ 여러고을의 정제향병(整齊鄕兵)187)들은 주장(主將)의호령에 따라 의진에 합세 하되 기일은 마땅히 재 통보를 기다린다. 상인(常人) 가운데 숨거나 회피하는 자는 모두 찾아내어 빠뜨림이 없게 한다.
○ 각자가강약을 판단하여 궁수 1오(伍)188), 검ㆍ창병 1오, 기병 1오, 보병 1오로 구성하고오(伍)에 각각 오장(伍長) 1인을 정하고 각 오에 별도로 대장(大長) 2인을 정한다.
○ 대장(隊長)과 25인이 대(隊)이다. 여장(旅長)은 4대(隊)가 여(旅)이다. 각각 정하며 대가 오를 통솔하고 여가 대를 통솔한다.
○ 계획과구상이 있는 사람은 나이에 제한 없이 진소(陣所)에 모여서좋은 계책을 진술한다.
○ 향중의부로(富老)들이 군량에 넣고자 하는 것들은 한 곳에 두고편의대로 수송한다. 허약하여 전장에 나아갈 수 없는 자는 건강하고 날랜 노비를 대신 넣는다. 자원해서 곡물을 바치려는 자는 1석(石)으로 수량을 정하고 거두어 한 곳에 두었다가 전시에 상납자가 스스로옮기게 한다. 부자에게는 수량을 늘리고 빈자에게는 수량을 줄이되 빈부에 대해서는 오로지 공론을 따르며감히 스스로 정하지 않는다. 상인(常人)이 상납하는 것도 받는다.
○ 군량을수합하는 유사는 각 고을에 두 사람을 정하되, 한 사람은 향리에서 수합하고 한 사람은 군영에서 활용한다.
○ 군기(軍器)는 직분에 따라 정비한다. 적진에나아가지 않는 자가 군기를 가지고 있으면 없는 자에게 나누어 준다.
○ 각고을은 진을 치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 조약을어기는 자, 기한을 놓치는 자, 대오를 이탈하는 자, 떠드는 자, 장난치고 게으른 자는 각각 경중에 따라 군율(軍律)로 다스린다.
187) 의병 조직에서 각소속 고을별로 독립적으로 설치된 조직으로 군수물자와 무기의 보급 관련 업무를 맡았다.
188) 오(伍) : 군대 5명 단위의조직을 말한다.
- 문소지(聞韶誌)189)의 김사원소개
김사원은일사 김광수(金光粹)의 증손으로 일찍이 이황의 문하에서 유학하여음양오행과 청수의 학설을 배웠다. 베풀기를 좋아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원근에서 그 소문을듣고 찾아오는 자들이 거리를 가득 메울 정도였다. 만약 부녀자들이 와서 구걸하면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바르게 앉아 그들을 구휼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규합하여 대장 김해에게 나아갔으니 그 충위가 이와같았다.
1592년 1월 7일 안동열읍향병 대장 김해가 군관과 장서를 거느리고 의성 의병진에 도착하여 감군(監軍)을 임명하였다. 1일좌부장 이정백이 의성 전황을 보고하였으며 12월 28일 의성정제장 김사원은 비첩(秘牒)을 대장에게 발송하였다.
1593년 1월 5일 김해 대장이 의성에 도착하여 향교에서 의성 정제장 김사원ㆍ신홍도, 우위장신심등과 왜적 토벌에 뜻을 같이 하기로 회맹(會盟)을 가졌다. 6일에는 의성 정대남 집에서 의흥 정제장 박윤문 이호인과 군위 정제장 이영용과 상론하였으며, 비안 정제장 조단은 의병 20명을 거느리고 합진하였고, 군위의 모의사 이보, 전향유사(典餉有司) 홍위 등이 도착하여 9일에 인동(仁同) 지역 왜병을 토벌할 것을 약정하였다.
의성 의병진은상주 함창(咸昌) 당교(唐橋) 전투에 4읍(의성ㆍ의흥ㆍ비안ㆍ군위) 향병들을 출전하기로 계획했으나 혹한과 굶주림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만취당김사원은 1601년 6월18일 63세로 별세하였다. 1592년 4월 말 초기 의성 의병대장의 한 사람 김사정(金士貞)은 김사원의 동생이다. 그 역시 안동김씨 집성촌 의성 점곡 사촌마을에서태어났다. 서애 류성룡의 외가가 이곳이고 류성룡도 외가에서 출생했다.1592년 4월 임진란이 일어나자 당시 41세인그는 형과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의병을 모집하고 경주 등 다른 지역 의병진과 연계하였다.
189) 문소(聞韶)는 의성의 옛 지명이며, 문소지(聞韶誌)는 지금의 의성군지(義城郡誌)이다.
○ 김사정(金士貞)
152년 3월 14일 의성ㆍ점곡ㆍ사촌 마을 안동 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났고, 김사원의둘째 동생이다. 임진란으로 의성 정제장인 백형은 경주 의진으로 향했고 곽재우 의병이 의령 신반에서 점거하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중형과 함께 달려가서 합병하였다. 의령 정진에서 목책을 세우고 곽재우와 함께 대항했으며, 정유재란 때 곽재우가 화왕산성으로 의진을 옮겼을 때 후송재 김사정은 여러 의병들과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지펴패하면 함께 죽을 각오로 대비하였다. 만년에 김사정은 고향 옆자리에 초당을 지어 후송재(後松齋)란 편액을 걸고 수양과 학문연마로 교육에 힘썼다.
○ 김사형(金士亨, 1541~?), 김한(金澣,1583~1652)
본관 안동, 자 도겸(道謙), 호독수헌(獨秀軒), 배(配) 순흥 안씨. 1573년 과거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성균관 박사(정7품)에 임명, 유생을 지도하였다. 김사정의 형으로 상주 당교 회맹에 의성 의병의대표로 참여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동생 사정(士貞) 아들 한(澣)과 곽재우화왕산 의진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특히 군량미 지원에 힘썼다. 김한은김사정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김사형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5세에 아버지를 따라 곽재우 의진에 의병으로참여하였다. 화왕성동고락에 이름이 올라있다.
○ 김회(金淮, 1578~1641)
본관 안동, 자 거원(巨源), 호경암(敬菴)이다. 15세에임진란이 일어나 아버지 후송재 김사정을 따라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진주 촉석루에 올라 비분강개한 심정을토로하였다. 1612년(광해군)4년 문과에 급제, 161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조천일록(朝天日錄)을 남겼다. 1627년동경교수(東京敎授) 임명,1632년 형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고자문경새재까지 갔으나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서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다가 64세로고향인 사촌마을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 김태(金兌, 1561~1609)
본관 안동, 자 사열(士悅), 호구담(九潭), 명종 신유년5월 풍산읍 소산리에서 태어났다. 임란이 일어나자 김해 대장이 이끄는 안동열읍향병에 군관으로 참여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36세로 분연히 창을 들고 일어나 창녕 곽재우 의진에 참여, 구국의격문으로 의병을 모아 출전하였으며 화왕산성 제현 창의록(火旺山城諸賢倡義錄)을 지어 당시에 참여한 151명의 인적 사항을 적었다.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으며 우복 정경세(鄭經世)등의 여러 제현들과 교유하였고 임란 후 여러 차례 천거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사후에 통정대부승정원 좌승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되었다.
(5) 의병 간부신홍도ㆍ신흘ㆍ신심 등
예안 현감신지제의 의병 창의에 영향을 받고 아주 신씨 읍파에 속하면서 나이와 항렬이 비슷한 다음 3인이 의성의병의 주요 간부로서 안동열읍향병 조직에도 가담하였다.
○ 신홍도(申弘道, 158~161)
본관 아주(鵝洲), 자 대중(大中), 호 정봉(鼎峰), 1592년임진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1592년 예안현에서 신지제와 김해가 의병을 창의할 때 동참하였다. 전란 초기 첨사(僉使) 배경남이패주를 거듭하며 도망치자 그의 죄상을 순찰사에게 알리고 장사진(張士珍)으로교체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1598년 명나라 유격장군 섭방영(葉邦榮) 부대의 주둔지가 안동에서 의성으로 옮기면서 병졸들의 횡포가 심하여 고을의 많
은 백성들이피해를 입고 흩어졌다. 이때 섭방영에게 편지를 보내 보급 문제에 대해 논의한 뒤 그들의 횡포를 진정시켰다. 160년 관찰사가 유일(遺逸)로천거하였으나 사양한 뒤 선암사 아래에 은거하며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 신심(申伈, 1547~1612), 신흘(申仡, 150~1614) 형제
신심 : 본관 아주, 자 희지, 호흥계ㆍ성헌 어려서 재주와 효행이 뛰어났다. 성장함에 따라 장현광ㆍ서사원과 도의를 맺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신흘과 함께 경상도 안동부 일직현에서 안동 의진 병영의 영남 의병대장 김해(金垓) 정세아(鄭世牙), 류종개(柳宗介)와 더불어적을 토벌할 것을 결의하였다. 고을에 큰 흉년이 일어나자 사재를 털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사헌부 감찰(監察)을역임, 경상좌도 내에서 왜적 토벌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의성지역 감찰 신심, 군위지역 장사진, 밀양 김태허, 함안안신갑, 성
주 도서, 울산 장오석, 고성 최강 등이다.
○ 신상도(申尙道, 1570~1615)
본관은아주, 자는 언유(彦由)이다. 할아버지는 신원록이며,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신심(申伈)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학업에 충실하였다. 임진란 때 창의하여 왜군토벌에 앞장섰으며, 관직은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에 올랐다. 묘소는 의성읍 치선리 산47에 있다.
○ 신몽필(申夢弼, 1542~?)
본관은아주, 자는 은경(殷卿)이다. 오봉 신지제의 숙부로 임진란 때 거액의 전 재산을 군량미로 쓰도록 관청에 헌납하였다. 임란 7년 동안 각 고을의 군량미 조달 실태와 의병들의 활동 상황을알리고 조정에선 대책을 세우도록 한양에 와서 조카 신지제에게 알렸으며 아울러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고 이것이 읍면리 동 단위 비밀 군량미 창고조성이 되었고 또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사후에 평민임에도선조(宣祖)로부터 증 자헌대부 한성판윤(贈資憲大夫漢城判尹), 배위(配位)엔 정부인고창오씨(貞夫人高敞吳氏) 교지(敎旨)가 내려졌다. 유훈(遺訓)으로 군량미를 비롯하여 군수품 준비를 게을리 하면 왜병에게 다시금짓밟힐 날이 닥쳐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 신지효(申之孝, 1561~1593)
본관은아주, 자는 달부(達夫),호는 응암(鷹巖)이다. 아버지는 몽득(夢得), 오봉신지제의 형님이다. 9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18세때 향교의 임원이 되고, 25세에 향인(鄕人)의 추천에 의해 향교의 교장이 되었다. 임란 때 왜군이 쳐들어와서계모 오씨를 모시고 천동 바로 인접지역 하천(下川)의 암혈사이에숨어 있는데 왜군이 가까이 들어오니 활로 쏘아 죽여 물리쳤으나 다시 적이 오자 같이 있던 어린아이가 울어 노모에게 화가 미칠 것을 걱정해 데리고피신 중 왜적에게 왼쪽 어깨에 큰 상처를 당하였다.
당시 선성(宣城, 예안의 옛 지명) 현감으로있던 아우 신지제에게 혈서로 “내가 해를 당한 것은 명(命)이라 할 것이나 노모는 다른 동생이 있으니 군은 오직 충성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이 옳을 것이다. 난리가 나 어수선하니 혹 화를 입어 전사를 당하더라도 그 유골을 찾지 못할까 염려되니 군은 발바닥에 ‘선성(宣城)’이란 두글자를 써서 표적이 되게 하라.” 한 뒤 며칠 후 향년 32세로생을 마감하였으며 부인 함창 김씨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응암실기(鷹巖實記)가 전해지고 있다.
(6) 신흘(申仡, 150~1614) 난적휘찬(亂蹟彙撰)
이 자료는위의 책을 신해진 교수(전남대)가 2010년 역주를 붙여 번역 간행한 것을 참고한 것이다. 신흘은 위의계보에 나타난 바와 같이 아주신씨 1세손 신원록(申元祿, 悔堂)의 아들 형제 신심(申伈)과 그의 동생으로 태어나 형제가 임진란 의성 지역의 의병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난적휘찬(亂蹟彙撰)은 1603년 편수청에서 찬집한 임진왜란 경상도 사적에 대한 조사 기록서이고, 당시방백이자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에게 올렸던 편지 전문으로 그때 이 편지를 받아 본 이원익은 “근거가 넓으면서 정밀하고, 글의 이치도 전아하며 깊이 체득할 만한기사로 갖추어졌으니 진실로 좋은 사관의 자질이로다.” 하였다고 한다.이 보고서 또 편지는 신흘 선생의 성은선생일고(城隱先生逸稿)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 내용 중에 오봉 신지제 선생과 관련되거나예안ㆍ안동ㆍ의성ㆍ군위 등 오봉의 의병 활동 지역에 관계되는 것을 발췌하여 적어 보기로 한다.
①1592년 5월 29일
왜적이군위(軍威)를 불태우고 약탈하다 의성의 봉양면 쌍계천(雙溪川) 마을(장대리)은 사망자가 거의 70명이었다. 품관(品官) 정태을(鄭太乙)의 처(朴氏)는 자신의두 딸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는데 부자와 부부 사이라도서로 돌아볼 수가 없었다. 들판이 시체로 덮이자 개들이 그것을 찢어발겨 먹으니 시신이 온전한 곳이라고는거의 없었다. 박씨의 개는 주인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면서 뭇 개들이 달려들면 사납게 으르렁거려 쫓고, 까마귀와 솔개 떼들이 달려들면 역시 똑같이 쫓았는데 태을이 2일만에 비로소 돌아오니 박씨의 시신만 온전하였다.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이 일이있기 전 같은 마을에 사는 품관 신씨(申氏)는 마을의 대소인을이끌고 왜적을 방어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이날 일찍이 왜적이 장대리를 향하니 신씨와 두서너 명의정병(精兵)들이 쫓아가면서 활을 쏘아댔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두 왜적이 말을타고 다가오자 신 품관도 서로 간의 거리는 겨우 10보 정도였다. 왜적이 칼자루를 잡고 곧장 달려들어서 신 품관을향하여 던지니 신 품관이 겨우 피했고, 왜적이 또 작은 칼을 뽑고서 머리를 숙이고 곧장 달려드는 지라신 품관이 활을 쏘았다. 그러자 왜적은 땅에 꺼꾸러졌다가 곧 일어나서 조금 전에 던졌던 칼을 집으려고하였다. 신 품관이 또 활을 쏘니 왜적의 가슴에 명중되어 왜적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나머지 왜적은 마침내 군위로 도망갔는데 이 마을에서 20리 정도거리였다.
안집사김륵이 도망간 지역의 수령 등 빈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시켰는데 안동 수성장 전 검열 김용, 훈련봉사 권희순을 의성 수성장으로 박사 황서를 풍기 수성장, 전현령 이유를 예천 수성장, 유학 박연을 의흥 수성장으로 임명하였다. 반면에 자리를 굳건히 지킨용궁 현감 우복룡, 영천 군수 이알, 봉화 현감 황시, 예안 현감 신지제 등을 파견하여 각 읍의 군병을 거느리고 예천에 주둔케 하였다. 이때 이알과 황시는 병이 나서 본래의 직책으로 돌아갔고, 우복룡과신지제만 군사를 거느리고 변고를 기다렸다.
②6월 15일
용궁 지역에서만난 왜적에게 패하여 군사 대부분이 죽다. 우복룡과 신지제등은 매우 위태로웠으나 요행히 화를 면했다. 다음날 왜적은 예천과 안동 등지를 쳐들어갔고 오래되지 않아 예안을 밀고 들어갔다. 군위가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의성은 이전에도 왜적이 늘 오가며불태우고 약탈하였다. 의성의 선비 김치중은 왜적이 의성현으로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에서 활을쏠 줄 아는 자들을 불러 모아 매복시켜 방어 계획을 세웠다. 어느 날 왜적이 그 마을로 돌진해 오는것을 보더니 사방에서 피리를 불게 하여 동시에 추격하고 활을 쏘도록 하자 왜적은 깃발을 버리고 달아났다.
○ 의성에사는 손몽각의 딸은 군위에 사는 훈도 김광우의 처인데 광우가 왜적에 의해 죽자 손씨도 곧장 물에 투신하여 자살했다.
○ 좌도에순찰하는 왜적이 주둔한 곳은 의성ㆍ군위ㆍ인동ㆍ영천ㆍ대구ㆍ밀양ㆍ경주ㆍ창녕ㆍ현풍ㆍ부산ㆍ동래 등의 지역이다. 우도는선산ㆍ상주ㆍ당교ㆍ개령ㆍ웅천ㆍ진해ㆍ고성 등지이다. 이 중에서 부산ㆍ김해 등이 왜적의 소굴로 가장 확고하고오래된 근거지였다.
○ 의성전 감찰 신심(申伈)이향병(의병)을 결성하여 군위에 있는 왜적을 토벌하고자 열흘사이에 수백 명을 모으고, 사유를 갖추어 초유사에게 서찰을 올렸다.(1592.6)
③ 1597년 1월
통제사이순신은 얼마 전까지 수군이었던 까닭에 서인(庶人)으로 폐해졌지만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원균(元均)은 이순신을 대신해서 한산도에 진을 쳤다. 원균은 평소 이순신에게 유감이 있었던지라 그의 마음은 이순신이 실패하면 흐뭇하게 여겨서 매사에 이순신이 한것은 반드시 반대만 하다가 휘하 장수들의 마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체찰부사(體察副使) 한효순이 순시하러 한산도에 도착하였는데 세 도의 수군장[舟師將]이 울부짖고 온 진(陣)이 와서 하소연하니, 삼도절도사(三道節度使)가 그 사실을 알고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금했다. 그 후에 순찰사종사관(巡察使從事官) 신지제(申之悌)가 한산도에 들어가 그 실정을 자세히 살피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원균은 여러 장수들의 마음을 크게 잃어 군대의 형편이 모두 어그러져서 위급한 때에 전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상황을 담은 서찰을 체찰사 막하(幕下)에 올렸는데 그것이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니옵니다.”라고 했다 한다.
③9월 10일
금오산성과공산성 두 산성은 군량을 쌓아둔 곳인데 일시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간담이 떨어졌다. 왜적의일진은 금산(金山)에서 성주를 거쳐 김해로 돌아갔고, 다른 일진은 상주에서 의성을 거쳐 도산으로 돌아갔는데 지나가는 곳마다 서로 교전을 하지 않았다. 의성현에서 류경춘(柳景春)의미망인 강씨(康氏)가 3명의왜적을 만났는데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며 협박하여 데리고 가려했지만 강씨가 따르지 않자 죽였다.
⑤ 1598.3
명나라군사 유격장 섭사충(葉思忠)이 예천에서 의성으로 군대를 옮겼다. 4월 의성 사람들이 그를 위해 나무 기념비를 세워서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선정에감사하며 문왕이 쉬었던 감당(甘棠) 나무를 자르지 않았던것과 같은 뜻을 나타냈다.
⑥ 신흘의생애와 난적휘찬
난적휘찬은 40여 년 전에 경상좌도 의성의 재야 유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성은 신흘 선생이 임진란 기간 중 경상도 지역에있었던 사적(事蹟)을 정리한 야사이다. 그는150년(경술년) 9월 9일 의성향교 앞마을에서 부친 신원록(申元祿)과 모친 숙부인 벽진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어머니를 모시고 황학산으로 피난하였다가 선조 임금의 파천 소식을 듣고 형님 흥계신심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따르는 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는 형님 신심을 맹주로 추대했고 당시의병 활동을 하던 김해, 류종개, 정세아 등과 일직현에서만나(안동열읍향병) 왜적에 대항했으며 근방의 4~5개 읍(邑)을 보전하는데 공헌하였다. 다음해 모친상으로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당대의 유학자 장현광, 서사원 등과 경전을 강론하였다.
1603년 조정의 명으로 난중사적을 찬집하였고 1608년에는 경상좌도 유생들의 영수로 당질 정봉 신홍도(申弘道)와 함께 회재 이언적의 억울한 일을 변명하는 상소를 올렸고, 161년광해군에게 퇴계를 비방한 정인홍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7) 이탁영(李擢英, 1541~1610) 정만록(征蠻錄)
본관은경주(慶州), 자는 자수(子秀), 호는 효사재(孝思齋)이다. 의성읍 상리리 현재 충효당(忠孝堂)터에서 태어났으며 공의 아버지가 17세 때 객사하시자 홀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셔 효성이자자하였다. 임란 때 51세로 경상도 순찰사 김수(金睟), 초유사 김성일과 같이 체찰사 류성룡 체찰부에서 의병 모집, 군량 조달, 전략 수립 등에 진력하였다. 임란 후 옥산면 금학리 성골에 피난 가 있던 눈 먼 어머니를 다시 모셔와 지극 정성으로 효도하였고, 나라에서 내린 벼슬자리를 사양하였다.
1592년부터7년간의 난중일기인 정만록(征蠻錄)은 임란의실상을 생생하게 기록하며 역사적 사료로 가치가 커 1986년 보물 제80호로지정되었고 한국 국학 진흥원에 보관되었다가 의성 조문국 박물관 개원 때에 전시하기도 하였다.190)숙종 때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에 증직되었고 임금의 사곡(賜穀) 은전(恩典)도 하사 받았다. 충효사 등 208년충효로 도로 개설과 함께 국고 보조금으로 축대 등 대대적인 정비를 하였으며 ‘효사재 이 선생 사적비’가 203년에 세워졌고 후손들의 뜻으로 경재 왼쪽에 ‘충효박물관’ 터를 마련하여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묘는 의성읍 여시계(餘時計)에안장되어 있다.
가. 해제(解題)191)
이 역주(譯註) 정만록의 원본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의성 향리(鄕吏) 출신인 영리(營吏)로서 관찰사 김수(金睟)의막료였던 이탁영이 8년간의 전투상황을 정보차지(情報次知)의 직책으로 견문한 바를 기술한 전란 일기이다. 역주자는 원본의 형태면과내용면에 대하여 살피면서 약간의 고증을 시도하고 가치성에까지 다소 언급해 보기로 한다.
- 원본의 실태에 대한 고찰
여기에우선 원본의 체제와 서체(書體) 및 문체(文體) 등 형태적 실태와 사실(史實)로서 실상(實相)을 살펴보기로한다.
○ 체제 : 건곤(乾坤) 2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본은 가로가 23.5cm,세로가 31.7cm이다.건권(乾卷)은149쪽이고, 곤권(坤卷)은 186쪽으로 총 35쪽이며, 종이는 관아의 폐기 문서를 뒤집어 그 이면을 사용하였으니 초고본(草稿本) 임을 증명한다.
○ 문주(文主)와 필체, 문체 : 문주는 제자 이탁영(李擢英)이나 건권(乾卷) 말미는 다른 서자(書者)를 시켜 쓴 것이 보인다. 필체는 화려한 행초(行草)로서 행초체의 교본이 될 만하다. 문체는 서두(書頭)에임진변생후일록(壬辰變生後日錄)이라 일기 문체임이 틀림이 없으나이두문체(吏讀文體)는 장계(狀啓)와 공문서에 많이 보이고, 순한문체(純漢文體)는 격문(檄文)과 명장(明將)에게 보내는 패문(牌文)에 나타난다.
○ 작성된 년대 : 일록(日錄=日記)은 선조 25년(1592) 3월 9일에서 선조 32년 (159)까지의일기이다. 건권(乾卷)은임란이 끝나고 곧 성책(成冊)이 되었으나 곤권(坤卷)은 수년 후에 후일을 위하여 본도(本道)에서 수발된 장계나 공문서 중 중요한 것만 가려서 정서하여 가장(家藏)하고 함부로 남에게 공개하지 말 것을 서문(序文)에 적고 있다.
190) 의성의 임진란사와호란사, (사) 의성 향토사 연구회, 2015, 78~79쪽.
191) 이호응(李虎應), 역주 정만록(征蠻錄), 의성문화원, 192, 17~24쪽.
- 원본에 대한 내용면의 고찰
저자는임란시 영리(營吏)로서 총명ㆍ비범하였기에 관찰사 막료(幕僚)로서 문장과 기략(機略)에 뛰어나서 임진 3월 9일부터경상감사(慶尙監司), 병마절도사 김수(金睟)를 수행하여 경상좌도로부터 우도열읍(右道列邑)의 군비를 순시ㆍ점검하던 중 진주에서 3월 13일 왜군이 침입한 것을 이틀 후인 15일에야 알고 상사로 하여금 왜군을 영남에서 저지 결멸할 것을 건의하고 밀양에서 거창에 이르는 동안 방어에진력하였으나 왜적의 주력부대가 조령(鳥嶺)을 넘어 북진하므로근왕군(勤王軍)을 일으킬 것을 모색하여 상사로 하여금 전라ㆍ충청병(忠淸兵)을 합세하여 3도통합 근왕군을 편성하기 위하여 전주로 갔다. 전라군과 공주에서 충청군을 통합하여 6만 대군으로 수원 근처 독산성(禿山城)까지 퇴주(退駐)하여 초전에양호군(兩湖軍)이 패퇴(敗退)하게 되어 부득이 본도로 회군하였다. 임진년 9월 이후는 좌우도로 분도가 되어 도순찰사(都巡察使)를 따라 기획, 헌책(獻策), 기사(記寫) 등을 상세히기록하였고 교서(敎書), 이문(移文), 통문(通文), 격문(檄文), 공문등도 거의 재록(載錄) 되었다. 도체찰사 류성룡과 체찰사 이원익 막하와 긴밀한 연락으로 전세의 추이와 왜적의 동향과 동원의 완급과 운량방법(運糧方法) 등을 협의하여 시행하였고,민중의 심리를 깊이 파악한 실기(實記)이자 일기(日記)이다.
- 원본의 가치성에 대한 고찰
정사(正史)가 많이 수록된 정확한 일차 사료(史料)이다. 임란 기록중에서 일기체(日記體) 사료(史料)와 대비하면 다음과 같다.
①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수군의 전투 상황, 그리고 둔전(屯田)과명수군(明水軍)과의 협조 등은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나 내륙에있어서 적의 동태에 대하여는 그리 소상치 못하다.
② 약포용사일기(藥圃龍蛇日記) 좌찬성 정탁(鄭琢)이 임란 때에 선조대왕을 따라 의주까지 호종(扈從)하고 분조(分朝)에서 광해군을 도와 정무를 담당하며 각 도의 장계와 대명관계(對明關係)의 문서를 다루었던 상세한 일기이다. 그러나 전후 부분이 결락되어있고 북도(北道)의 기록은 비교적 상세하나 남도(南道) 실정을 너무 줄인 편이다.
③ 징비록(懲毖錄)은 임란 당시 영상(領相)이나 도체찰사였던 류성룡이 난중에 경험한 기록으로서, 후일을 경계하기위하여 퇴관후(退官後) 쓴 회고록이다.
④ 정만록은대명(對明), 대일(對日) 외교관계와 민정과 국세(國勢)를정확히 파악한 실기(實記)이다. 임진왜란은 경상도에서 시작하여 종말도 본도에서 끝났는데 전란의 발단과 원인 결과를 분석하고 승부를 막론하고상세히 기록하였으며, 신분과 지위에도 구애치 않고 사실대로 규명하였고 특히 수치적인 기술은 너무도 정밀하다. 또한 비참한 전란 중에서도 오로지 충효사상으로 일관된 실천적 효심은 후세의경종이 되고 귀감이 되는 기록이다.
- 원본의 보존 경과
효사재이탁영선생실기(孝思齋李擢英先生實記)에는 임인ㆍ계묘(1602~1603)년간에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경상 감사 이시발(李時發)에 명하여 영남지방의 임란사적(壬亂史蹟)을 채집케 할 때 저자도 정만록을 수찬청(修撰廳)에 제출하였고 왕이 재가(裁可)하여 정만록이라는 서제(書題)를붙였다고 하고, 인조 27년(1649)에 쓴 둔산기사(芚山記事)에는서평대감(西平大監)의 지시에 따라 수찬청에 제출하였으나 돌아오지않았다고 한다. 둔산기사는 저자의 둘째 아들인 이정훈(李庭薰)이 선고(先考)의 유사(遺事)등을 기록한 내용으로 효종 5년(1654) 별세할 때까지 정만록에 관한 추기(追記)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정만록의 계하(啓下)는 1654년 이후로보는 것이 타당하다.
정만록의사본은 친필 원고본 외에 몇 질(帙)이 있었다고 믿어진다. 둔산기사에 의하면 정만록을 수찬청에 제출하고도 본가에 소장한다 하였고, 경상감사의 봉계(封啓)에도 감영(監營)에서 수장하고 있다고 한 것을 봐서 적어도 3질(帙)은 작성되었을것으로 보인다. 후손들이 정만록과 계하정만록(啓下征蠻錄)을 구분하는 것은 2질 중수찬청에 환송된 것을 계하정만록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일본 식민지시기에 일본 경찰에 압수당할 때초고본과 계하본을 함께 빼앗겼다가 초고본만 반송하고 계하본은 일본인들이 가져간 듯하다.
일본에서도정만록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여 일본 경도대학(京都大學) 부속 도서관 하합문고장본(河合文庫藏本) 정만록을 조선학보 제7집에 발표하였고,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금서문고장본(今西文庫藏本)인 정만록 곤권(坤卷) 1책(冊)은 조선학보 제76집에 영인 수록되었다. 일본에서 발표된 정만록은 그 대본이 계하정만록인 듯하다. 유출된경위는 알 수 없으나 의성본(義城本)이거나 감영본(監營本)이거나 또는 수찬청본(修撰廳本)일 것이고 현존 원본(초본)은아니다.
이 정만록은저자의 본손(本孫)등으로 충효당에 보관하여 왔으며 일제 시압류되었다가 반환되고 6ㆍ25 동란에도 이우영(李宇榮)이 울산까지 대피시켜 무사히 보존하였다.
- 저자의 생애
저자 이탁영(李擢英)의 자는 자수(子秀)이고, 호는 반계(盤溪)이며, 고을 사람들은 효사재(孝思齋)라 불렀다. 경주 이씨 소판공 거명의 24세손인 그는 중종 36년(1541)1월10일에 의성현 지곡리(芝谷里)에서 아버지 연년(延年)과분성인(盆城人) 김철손의 따님인 어머니 사이에서 5대 독자로 태어났다. 선대는 경주를 거쳐 경기도 여주에 살면서 대대로벼슬을 하였다. 고려 말 그의 5대조 양오(養吾)는 사온서( 醞署)의 직장(直長)이고 동생존오(存吾)는 우정언(右正言)으로 신돈(辛旽)의 횡포를탄핵하였다가 집안이 모두 화를 입었고 이때 어린 독자 봉(鳳)은화를 피하여 정착한 곳이 바로 의성현 지곡리이다. 이탁영의 조부 건(健)이 호장(戶長)을 한 것을보아 생계의 수단으로 강리(降吏)를 자청하여 이적(吏籍)에 등재한 것 같다. 이탁영은어릴 때부터 비범하여 신동이라 불리었다. 21세에 의성현의 향리가 되고 다음해 이방이 되고, 23세에 경상도 감영의 영리(營吏)로발탁되어 출중한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때부터 40여 년간을영리로서 지방 행정업무를 관장하여 모든 영리들의 사표가 되었다.
학문에도정진하여 그의 회고록인 듯한 자성기(自省記) 30여권도임란에 잃었고, 지방행정 사례집인 고사록(故事錄)을 지어 감영에 비치하고, 그가 저술한 해이록(解頤錄)도 잃었는데 임진란의 기록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둔산잡기(芚山雜記)와 정만록을 남겼으나 정만록이외는 전하지 않는다. 임란 초기부터 관찰사 김수(金睟)의막료로서 모병과 군량 조달, 정보의 수집과 분석, 작전 계획의수립 등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계초(啓草)도 직접 작성하였다. 삼남(三南)지방의 근왕병을일으킬 때 주동적 참모로서 수원 지방까지 진격하였다. 초유사 김성일과 도체찰사 류성룡의 참모로서 7년간 참전하였다. 신분제도로 인하여 영리인 이탁영을고위직에 등용할수 없음을 한탄하였고, 보만당(保晩堂)도 충효와 재능을 겸비한 인재를 당대에 중용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평란이되자 전공으로 면향(免鄕)하고 관직을 추천하려 하였으나 국난을당하여 나라에 봉사함은 국민된 의무라 하여 굳이 사양하고 노모 봉양을 위하여 귀향함에 평생 복호(復戶)가 되었다. 그 후 향인들이 여러 차례 포상을 신청하여 자손들에게도복호되고 마침내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에증직되었다.
이탁영의효성은 천부적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 회갑 일에 드리고자 청어를 가족 몰래 눈 속에 묻어 두었던 일이있고, 15세 때 아버지가 기계(杞溪)에서 객사하자 사고무친(四顧無親)한어린 몸으로 장례에 소홀함이 없었고, 그때부터 홀어머니를 모시고 집안일을 맡아 처리하였다. 그는 감영 근무를 마치고 본가에 돌아오면 반드시 가묘에 배례하고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드린 후에야 집안일을처리하였다. 집에 있는 동안은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출타 중 견문한 바를 자세히 아뢰고 맛있는 음식을장만하여 드리고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참외나 수박도 재배하고 못을 파서 언제나 붕어를 길러서 봉양의 걸목을 만들었다. 그의 일기에는 매일같이 사직(社稷)과노모의 안녕을 기원하는 구절이 빠지는 날이 없었다. 노모가 오랜 피란살이에서 두 눈이 실명하게 되었음을알고 급히 휴가를 업어 근친하여 의사를 구해 치료하고 간호하였으나 끝내 광명을 찾지 못하자 “자식은어머니를 보는데 어머니는 자식을 볼 수 없구나.”하고 통곡하였다. 어머니가 86세때 이질(痢疾)에걸려 눕게 되자 사탕과 빨래도 자수로 하였고 결코 집안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끝내 노모가 별세하시자기진맥진한 몸으로 여막 3년을 마치니 지극한 효성은 세상을 감동시켰다.
이탁영은비록 시대적으로 중인(中人) 신분으로 태어나서 여러 가지사회적 제약으로 인하여 대성하지는 못했지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부모를 섬기는데 지성을 다하여 충효의 귀감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70평생을 살면서 이 사회에 큰 업적을 남기고 광해군 2년(1610) 1월 13일 그의 고택에서 서거하였다. 그는 5대 독자이면서 5남 6녀를 두었는데 그 후손들이 의성을 중심으로 70여 세대가 살고 있다.
- 보물로 지정된 경위
○ 1982년 8월 3일 이종주(李鍾周)가 서수생(徐首生) 박사에게 사적 가치를 감정 의뢰
○ 1592.05.08. : 4월 24일 의성을 지나오다가 피란처에 갔더니가족은 모두 성동(城洞)에서 피란 중
○ 1592.07.15. : 함양에 머물다. 청송에서 온 사람의 소식에의하면 의성에 있는 적의 소식을 들으니 좌병사는 청송에서 군병을 모아서 의성의 적을 잡는다고 하나 성공여부가 불안하다. 의성현에 있는 적을 성동에서 잡았다고 한다.
○ 1592.07.19. : 군위 윤응정의 편지를 보니 노모와 가족들은 성동에 계속 피난 중이고 현감은 궁사를 거느리고방어하고 있다고 한다. 의흥 현감 남이공(南以恭)의 3형제는 모두 참수되었다고 한다.
○ 1592.07.20. : 좌병사께서 청송부의 환상미(還上米) 7석을 보냈다고 하니 이것으로 열흘은 살겠구나. 생원 신지효(申之孝)가 피살되었고, 별감박무선과 서호성 양가의 처녀들이 붙잡혀 갔다고 한다. 신지효는 예안 현감 신지제의 형님이라 우리 고을사망자가 50명을 넘는다고 한다. 피장에 사는 한수(漢守)ㆍ산운(山雲)에 사는 김순학, 읍내의 안철수도 죽었다고 한다.
○ 1592.07.2. : 종일 장계할 초본을 만들고 나서 올리고 달밤에 홀로 앉아 슬픔에 잠기니 천지가 망망하다.
○ 1592.07.23. : 계속 함양에서 머물고 있다. 정승 류전(柳琠)의 부인과 가족은 남김없이 포로가 되고 아들 사인(舍人)은 자결하고, 정랑류영순의 3형제 첨지 권종의 부자도 피살되었다고 한다. 참혹한소식이 하루 세 번이나 들리니 오장육부가 타는 듯하다.
○ 1592.08.01. : 선산ㆍ상주ㆍ인동(仁洞), 효령(孝令), 군위에있던 적이 모두 성주에 모였다고 한다. 의성의 왜적은 지난 달 26일군위로 물러갔다고 하는데 성주로간 것 같다.
○ 1592.08.05. : 초계(草溪)에서머물다. 대구 부사도 접전에서 불리하고 좌병사도 경주성을 포위하였으나 역시 불리하여 아군들이 많이 죽었다고한다.
○ 1592.09.05. : 낙동 강변에 도착하니 우도(右道)의 사람들이 놀라서 모두 위험하다고 하였다. 밤중에 강을 건너서 말의입에 재갈을 물리고 적진을 통과하였다.
○ 1592.09.07. : 하양에 머물고 있다. 난리 중에 좌우로 감사를나누어 두었다. 김성일은 우도 감사가 되고 좌도 감사는 영해 부사인 한효순으로 바뀌었다. 도순찰사 김수는 인심을 잃어 한성 판윤으로 체임(遞任)되었다고 한다.
○ 1592.09.08. : 신녕에 왔는데 폐허가 되어 의흥에서 자다.
○ 1592.09.14. : 신녕을 지나 팔공산 도와하세 이르니 좌병사 박진(朴晉)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분은 순찰사의 군관으로서 근왕병을 일으켜상경하였을 때 고생을 같이 하였기에 죽었던 사람을 다시 보는 듯 즐거웠다.
○ 1592.09.17. : 새 좌도 감사가 의흥에 오셨다기에 가서 알현했다. 저녁에는청로역에 와서 잤다.
○ 1592.09.29. : 좌병사가 경주 왜적을 토벌하다가 불리하여 아군 사망자2천여명에 이르고 의성현 사망자는 30여명, 우병영에서도사망이 1,40여명 이라고 한다.
○ 1592.10.02. : 좌도 감사가 안동에서 의성현으로 왔다.
○ 1592.1.06. : 용궁에 있는 적이 예천을 치고 있다고 하여 감사가 의성현에 오지 않고 예안 방면으로 간다고했다.
○ 1592.1.18. : 안동에서 머물다. 도사(都事) 김홍진이 나를 불러 술을 내리고, 정만록을 올리라고 하였다.
○ 1592.1.20. : 길안현에서 점심을 먹고 어두워서야 의성에 도착하여 2일을묵었다.
○ 1592.12.01.~12.02 : 의성에서 머물다. 순찰사는 운산을거쳐 안동에 이르러 3일 동안 머물렀다.
- 1593(계사년) 1월
○ 좌도순찰사 한효순이 좌도의 여러 장수들을 데리고 인동에 있는 적을 토벌하려고 하였으나 적의 수는 많고 아군은 적어 끝내 접전하지 못했다.
○ 1593.04.04. : 당교의 왜적이 용궁과 예천으로 쳐들어오고, 인동의적은 의흥으로 쳐들어와서 살인ㆍ약탈이 심하였고 대구 부사(윤현, 尹晛)는 왜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데리고 팔공산에 숨었다가 다시 습격을 받아 겨우 목숨만 살아남았다. 3월 21일 인동(仁同)에서 적의 습격을 받아 부인ㆍ딸ㆍ며느리는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자제한 사람 노비 50여 명이 모두 죽었다 하니 참혹한 일이다.
- 1597(정유년) 09.20
순찰사이용순은 의성 향교 북산에서 결진하고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왜적은 바로 공산성(公山城)으로 쳐들어가니 성안에 가득한 무순한 군기(병기)를 빼앗기고 공산성에 있는 몇 만석의 양식은 당초에 수송할 때부터논란이 있었다. 즉 풍기ㆍ영주ㆍ청송ㆍ진보ㆍ안동 등 산군(山郡)의 허다한 곡식을 강제로 산성으로 옮기지 말고, 각 각 고을마다 깊고험한 곳에 쌓아두었다가 위기를 맞았을 때 노약자들이 합심하여 내리게 되면 전장에 나아가는 장사들도 반드시 부모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지 않을 것이고, 부모ㆍ처자들도 이 양식을 믿고 매복하여 적을 잡을 것이라 하고 이를 상책이라 하였는데 드디어 크게 실패하니이를 어찌할까?
- 1598(무술년) 4월
명나라군사 46,00명이 불의에 남하하여 예천ㆍ안동ㆍ의성ㆍ의흥ㆍ신녕ㆍ영천ㆍ상주ㆍ선산ㆍ성주 등에 나누어 주둔하게되었는데 경상좌도에 있는 양식은 겨우 한 달을 지탱할 뿐이고, 공사 간에 남음이 없어서 거국이 황황하여좋은 계책이 없었다.
○ 5월 명군 마제독(麻提督)이다시 내려와서 안동ㆍ의성ㆍ의흥을 거쳐 14일 신녕에 있는 오총병(吳摠兵) 진중에 이르러 왜적이 퇴각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회군하여 안동으로 돌아왔다.
○ 10월 명조(明朝) 양안찰(梁按察)이 성주에 주둔하니 접반사(接伴使) 윤국형(尹國馨)이 뒤따랐다. 군량을 계속 대지 못하여 순찰사 정경세는 날로 아문(衙門)의 꾸지람을 받으니 민망하기 그지없다.
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 통문(通文) 끝 문장192)
조정의상격(賞格)이 다음에 있으니 다같이 알게 하라. 상격은 적의 머리수로 규정하나니 양반이나 잡류(雜流)와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① 일수(一首)를 얻으면 등과(登科)로 하고,
② 이수(二首)를 얻으면 육품관(六品官)으로 쓰고,
④삼수(三首)를 얻으면 당상관(堂上官)에 올리며
④ 왜장(倭將)의 머리를 얻은 자는 훈신록(勳臣錄)에 올리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칭호를 내린다.
라. 임진 7월 15일 장계문 일부
경상좌도의여러 고을의 전황과 수령의 존부(存否), 왜적의 거치, 농사 형편, 버린 무기의 수습 군량 창고의 유무와 그 숫자 등을듣고 보는 대로 급히 보고하라는 전령이옵기에 견문에 의하면 다른 군읍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경주ㆍ영천ㆍ의성ㆍ안동ㆍ비안ㆍ군위ㆍ인동ㆍ경산ㆍ영산ㆍ창녕ㆍ현풍ㆍ청도등 군읍은 이미 분탕(焚蕩)되었다. 왜적은 방금 경주에 돌입하였고 부윤(府尹)은 기계현으로 피하였고, 영천 군수와 의성 현령들도 그 관내에 남아있다. 창고의 곡식 유무는 알 수 없고 본부(대구)의 창곡은 1만석 중 5만석은환상(還上)으로 나누어 주고 본창(本倉)은 왜적이 당초에 불 질러 태워 버렸다. 또한 하빈 등지의 3창고는 왜적이 지나간 후로 관내 주민들이 훔쳐갔고, 본부의 향교는 왜적이 차지하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노략질하고, 경산에있는 왜적들도 분탕을 치고 있으므로 산골에 씨 뿌린 농민은 제초도 못하고 있다.
마. 좌감사(左監司) 장계(狀啓)
경상좌도에서 6월 10일 후로는 흥해ㆍ청해ㆍ영덕ㆍ영해ㆍ진보ㆍ청송ㆍ안동ㆍ예안ㆍ봉화ㆍ영주(옛 지명 榮川)ㆍ풍기ㆍ예천ㆍ용궁 등10여 읍은 적이 오지 않았으나 지금은 용궁ㆍ예천ㆍ안동ㆍ예안ㆍ봉화는 적이 침범하였고 또 강원도에서 들어온 적은 영해부를 함몰시켰으니바닷가의 읍이 온전할 수 없습니다. 진보ㆍ청송ㆍ영주ㆍ풍기 4읍은아직은 무사하나 앞으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대개 30여성(城)이 조금도 깨끗한 곳이 없으니 신이 강을 건너 좌도로가더라도 발을 붙일 곳이 없는데다 더구나 나리를 만난 백성들이 폐농한 채 산에 들어가 있으니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고, 들에 남아 있던 사람이 모두 살상을 당하였으며, 장정들 중에 겨우죽음을 면한 사람도 군량과 군기가 없어 대책이 없습니다. 경산ㆍ하양ㆍ신녕ㆍ의흥ㆍ군위ㆍ의성의 왜적은 모두가버리고, 안동에 있던 적은 풍산으로 옮겨 갔는데 병사 박진(朴晉)이 안동에 들어왔으나 병력이 약하여 아직 공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2) 이와 같은 조치는실제 의병에서 천민, 노예 등을 동원하고 사기를 진작하는데 큰 성과가 있었다. 선무원종공신 대상자 9천여 명 가운데 3,20여 명이 면천(免賤)되는공사천민, 노예등이었다.
(8) 의성 출신관리로서 활약
가. 오봉 신지제(1562~1624)
본관 아주, 자 순부(順夫), 호오봉(梧峯), 의성군 금뢰면 상리(현재 풍리)에서 출생, 28세때(선조2, 1589년) 증광문과갑과에 급제, 학봉 김성일의 문인, 31세로 임진란때 예안현감, 안동 부사로 의병을 모집하고 경상좌도 북부지역을 의병장 김해 장군과 지킨 전쟁공신(선무원종공신 1등, 호성원종공신 2등), 팔공산, 화왕산등지에서 곽재우 의병장과 협력하면서 국난극복에 매진하였다. 1593년 경주 진영에서 김해 의병장의 순절이후 그 가족을 보살폈으며, 1613년 창원대도 호부사 재직 시 백성을 괴롭히던 명화적(明火賊)을 토평한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관리로서 퇴임말기(1610~1617)고향 의성 구미의 구미보(龜尾洑)를 축조(8km)하여 벼농사에 혁명을 가져왔고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구미보는운영되고 있다.
오봉 신지제가예안 현감 겸 안동 부사로 있으면서 본인의 부모 형제들이 살고 있는 의성지역의 의병지원과 왜군 격퇴에 큰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부터 10여 년 동안 관찰사, 순찰사, 체찰사의종사관으로 큰 역할을 했다.
신지제는문무겸비이었고, 육군뿐만 아니라 수군에 대해서도 관여했다. 1597년임란중 서애 류성룡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면서 이순신 장군에 대한 면사첩(免死帖)을 내릴것과 수군통제가위복권과 수군에 대한 과거시(科擧詩)의 독자성 인정 등으로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몰려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193)그 뿐만 아니라 한산도에 들어가서 원균의 작전 실패와 문제점을 조사하여 순찰사에게 보고하였다.
나. 윤국형(尹國馨, 1543~161)
본관 파평(坡平), 자 수부(粹夫), 호 달천(達川)이다. 아버지 윤희렴(尹希廉)이무오사화의 화를 피해 윤국형 공이 세 살 때 의성ㆍ가음ㆍ현리로 옮겨 왔다. 부인은 평양 조씨이다. 선조 무진년 25세 때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영북인(嶺北人)이었으나 의성 봉양에 정착하였으며 명종 때 진사였다. 충청도 관찰사 재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남에 순찰사, 병조참판, 비변사 당상이 되어 장병을 지휘, 방어에 힘씀, 난 중에 두 번의 파직이 있었으나 난 후에 복직하여 한성 좌윤(漢城左尹), 공조 판서(工曹判書)를역임하였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다. 공이 강학하던 옥계서당(玉溪書堂)은뒤에 봉양면 길천리로 이건 되었다. 저서로 기축청건저야언(己丑請建儲野言)과 문소만록(聞韶漫錄)등이전해오고 있다. 특히 문소만록은 수필집으로 임란에 대한내용도 다수 실려 있다. 옥계서당은 가음면 현리에 있었으나 1942년봉양면 길천 1리로 옮겼다. 임진란 전후로 출사하여 판서직에오른 달천 윤국형이 내려와서 의성 땅에 우거하면서 강학하던곳이다.
다. 이광준(李光俊, 1531~1609)
본관 영천, 자 준수(俊秀), 호학동(鶴洞), 군위 내량(內良)에서 출생하여 금성면 산운리로 이거하여 입향 시조가 되었다. 31세때 별시 문과에 급제 강릉 부사로 재임 중임진왜란이 일어나 격문을 돌리고 흩어진 백성을 모아 전열을 가다듬었다.임란 중에 왜의 향도인 왜차(倭差)가 양양(襄陽) 관노와 짜고 집에 몰래 숨어들었을 때 부인 평산 신씨의 기지로적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중화 군수(中和郡守)때 난민을 구휼하였으며 둔전(屯田)을설치하여 수확량을 늘려 이재민을 정착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난 후에 강원도 관찰사 겸 수군절도사에이르렀고 향년 79세로 돌아가자 왕이 칙사(勅使)를 보내 치제(致祭)하였고사후에 예조 참판에 증직하였다. 맏아들 이민성은 임란 때 공을 세웠으며, 정묘호란 때 의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아우 이민환은 강홍립(姜弘立)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포로가 되었으나 풀려났다.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져있으며 묘는 봉양면 신평리 하현에 있다. 2013년 후손들이 뜻을 모아 학록정사 바로 옆에 학동 선생과민성, 민환의 비를 세워 삼부자(三父子)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9) 비안(比安)
비안현은 261년간 신라와 통일 신라, 고려 초기를 거쳐 1018년(고려 현종 9년) 단밀현과 더불어 상주목(尙州牧)에 30년간 이관되었다가 1423년 조선조 세종 5년 비안현(比安縣), 1895년고종 32년 비안군으로 의성군과 함께 승격되었다. 임진왜란때 부산에서 영남중로를 통하여 한양으로 진격하던 가등청정의 주력부대는 비안현의 화장산성(花藏山城)에서 완강한 저항을 받아 그들의 진군행로를 바꿀 만큼 비안인들의 목숨을 내건 내 고장을 지킨 쾌거였다.
화장산성은비안현 산제리에 위치하고 있다. 축조 시기는 조선 선조 1592년으로추정된다. 이 산성은 흙과 돌로 쌓은 성으로 비안ㆍ안평ㆍ신평 등 3개면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하며 해발고도 370m 능선을 이용하여 둘레가 약 4km로 깊은 산중에 위치하며 천혜의 지형을 잘 이용한 산성으로 아직도 돌축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성안에는 큰규모의 자연동굴이 있어 임진란 때 비안현 관아의 여러 공문과 기물을 이곳으로 옮겨 보존할 수있었으며, 동굴 바로 위 멀지 않은 곳에 풍부한 물이 있어 의병과 피난민의 근거지가 되었다. 임진란 초기에 왜장 가등청정이 비안을 점령하고 이 산성을 점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뒤 북진 계획의 차질을 우려해서물러났다고 하며 임란이 끝난 후 화장(花藏)이라는 이름이붙게 되었다고 한다.
가. 비안현 의병
임진란때 의성과는 별도로 비안(比安)이 독립된 현(縣)으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왜군의 직접적인 관통 코스가 되고 있어서의성보다 피해가 컸고 왜군들의 내왕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병뿐만 아니라 전쟁ㆍ전란 상황에대한 기록이 거의 보존되어 있지 않다. 왜병의 침략 경로는 경주-영천-신녕-의흥-군위-(도리원)-비안-상주……의 가운데 있는 평야지대였다. 비안 역시 안동열읍향병에 귀속되어있었지만 지리적으로 볼때 상주, 예천, 문경 쪽으로 가는길로 통하고 있었다. 임진란 초기 군사 상황은 다음 지역은 군관이 없었고 성을 지키는 소수의 수성군(守城軍)이 있었다. 의성 28, 신녕 19, 의흥 13, 군위 10, 비안 19, 용궁 14
〈비안 향병일기〉
1592.09.05 : 비안의 의병 조단(趙端) 등이 약속을 듣고 싶어 하며 격문을 전해와 그들과 함께 동맹하였고 조단을 비안 정제장으로 삼았다.(안동열읍향병)
12.23 : 권응수가 정예병 40명을 이끌고 비안에서 인동으로 가서 중과 양인 중에서 왜적과 교류한놈 8명을 쏴 죽이고 사내 3명, 계집 1명을 사로잡아 현장에서 목을 베었다.
1593.01.06 : 비안 정제장 조단이 20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의사 이보와 회동
나. 의성의 향병일기194)
1592.04.14 : 안동 부사(정희적), 판관(윤안성)이 도망간후 예안 현감 신지제 만이 달아나지 않으니 관아의 아전들이 감히 제 마음대로 어지럽힐 수 없어그를 원망하는 자가 많았다.
06.01 : 예안 현감 신지제 안동에 온 안집사 김륵을 찾아가 회동
06.15 : 예안 현감 신지제가 용궁 전투에서 패하고, 안동선비 배인길 전사
07.01 : 왜적 예안으로 침공, 9일 안동으로 물러감
07.17 : 배용길이 예안 현감 공문을 가지고 임하현 구린촌으로 가서 의병을 일으킴
07.20 : 안동, 예안 사람들이 의성, 의흥, 군위 사람들과 일직에서 회동하여 안동열읍향병을 조직(대장 김해)
01.09 : 인동 정세가 불리하여 권응수, 신심이 정예병수천 명을 거느리고 갔으나 왜적의 복병에 걸려 후퇴
01.10 : 대장의 전령이 안동ㆍ예안의 향병이 인동지역으로 오는 것을 중지하라고 전달
01.15 : 순찰사가 안동을 떠나 의성으로 출발
03.06 : 안동 부사가 명나라 군사 뒷바라지에 관한 명령을 받기 위해 의성에 가서 순찰사를 만남
04.21 : 도대장(都大將)이 격문을 급히 돌려 향병을 의성으로 옮겨 진을 치도록 명령. 이것이한양에서 왜병이 명군에게 패하여 남하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비하기 위함
06.19 : 대장 김해가 경주의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막하 군관 김태 등이 병들어 누울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옆에 지키고 있었는데 남긴 기록은 모두 분실, 다음의절명시(絶命詩) 한 수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나라에보답하려는 평소의 충의로서 報國平生義
당당할사홀로 철갑옷 입었다네 堂堂一鐵衣
응당 다시싸우려고 남은 충혼만은 有魂應復戰
관에 싣고돌아가는 나를 꾸짖으리 嗔我載棺歸
〇 김해(金垓)의 죽음에 오봉 선생이 곡하다.195)
근시제(近始齊) 김공은 선생과 같은 해에 급제하여 교분이 매우 깊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공이 의병장이 되었는데, 선생이 그와 함께 이야기나누다가 “우리들이 마음을 합쳐 나라 위해 목숨 바쳐야 합니다. 만약불행한 일이 생기면 처자식을 부탁합니다.”라고 개탄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김공이 경주(慶州) 진중에서 병사하자, 선생이 슬픔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때 흉년이 들어서 가족들이굶주려 죽을 지경이었는데, 선생이 힘닿는 대로 도와 그의 어린 자식들을 관아에 두고서 부인(夫人)으로 하여금 직접 빗질하고 씻기며 먹이고 길러서 온전히 살 수있게 하였다.
〇 오봉이 김해를 애도하는 시196)
[1]
분분한풍진 세상 자네는 어디로 갔는가 風塵擾擾子何歸
덧없는옛 추억 옷 한 벌만 남겼네 舊事凄凉一薜衣
죽은 이알리 없지만 남은 이 괴로우니 死者無知生者苦
들보 비추던밝은 달빛 꿈에 선하여라 屋樑明月夢依俙
[2]
덧없는세상 영영 돌아오기 힘든 객이 되었으니 邯鄲久作難歸客
장례에곡하는 소리 끊임없이 들립니다 蒿里頻聞葬友聲
의로운영혼은 지금도 죽지 않았으니 義魄至今應不死
북두성이되어 행로를 비추겠지요 爲星爲斗照行旌
임진란으로선조 임금은 관서지방으로 몽진(蒙塵)하여, 선생은 감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왜적들과는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였다.여러 고을로 격문을 보내어 동지를 규합하니 원근에서 호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김해선생이 기록한 향병일기(鄕兵日記)에 의하면 경상좌도에서 최초의조직적인 의병은 현감 신지제와 과거 시험 동기로서 예안 출신 김해의 의병 기의(起義)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안의향인(鄕人)들이 분의(奮義)하면서 모두 모여 서로 일러 말하기를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어찌 깊은 산에 숨어 엎드려 임금님의 위급함을 앉아 보고만 있겠는가’하고는 자기 자제와 공사천(公私賤) 30여인을 내어 빈 땅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 생원 금응훈(琴應壎)을 도총(都摠)으로 삼고 전 한림(翰林) 김해(金垓)를 대장으로 삼아 거사하고 진사 이숙량이 문장을 지어 여러 고을에포고(布告)하였다. 전군수 조목과 전 현감 금응협과 김부륜 등은 모두 쌀을 내어 군사들이 먹을 것을 도왔다.
예안의병을조직한 다음 선생은 “내가 이미 의병을 모아서 거느렸으니 즉 추악한 오랑캐를 쳐 없애기를 기약하지만군사가 적고 형세는 약하여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미리 요량할 수 없으니 불행하게도 지탱해 내지 못한다면 나는 오직 한번 죽음으로써 국가에 보답할뿐이며 맹세코 구차하게 살지는 않겠다.”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말을 들은 자는 모두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용기가 더하여 기회에 따라 적군을 쳐부수니 성세(聲勢)가 크게 떨쳤다. 6월 1일에신지제 현감과 김해 대장이 중심이 되어 최초로 예안의 의병 조직이 완수되었는데 김해 부대에 참여한 인사들 대부분은 이 지역의 명망 있는 사족(士族)들이었다.
대장 김해는본진(本陣)을 안동에서 일본군의 출현이 잦은 서쪽으로 옮겨예천의 노포(蘆浦)에 진을 치고 부장(副將)을 보내어 의성 단밀과 문경 반암 등으로 나아가 관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김해의 안동열읍향병은 1593년 5월에 밀양으로 진을 옮겨서 일본군의 공격을 견제하면서 양산(梁山) 지방을 구원하러 출동하기도 하였다. 고향에 돌아와서 상장(喪葬, 부인의 장례)을마치고 곧 말을 달려 진소(陣所)로 돌아오던 중 경주에 와서발병하여 6월 19일 진중에서 별세하고 말았으니 향년 39세였다.
예안의의병 창의에 자극을 받아 그 인접 고을들이 대거 창의에 나섰는데 군위에서는 진사 이영남(李榮男), 홍위(洪瑋), 의흥이인호(李仁好)가 일어났다.안동열읍향병 조직에서는 군위 정제장 이영남, 군위 별장 장사진(張士珍), 의흥 정제장 강충립, 박문윤, 이호인, 홍경승 등이 가맹하였다.
의흥, 군위 지역은 앞에서 고찰한 왜병의 진출 경로로서 ……경주-영천-신녕-의흥-군위-비안……의 중간에위치하고 있어서 왜병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군위, 의흥지역 임진란 기록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의성, 비안처럼 임진란 정신문화 선양회 연구지역에서 누락되고 있어서의병에 대한 자료 확보가 쉽지 않다. 문헌상으로는 군위 지역 의병 전투는 군위와 선산의 접경 지역으로서흔히 군위에 편입시켜 거론하는 곳이 인동(仁同)이고 여기서는군위별장 장사진 의병을 꼭 서술하고 있다.
1592년 9월경상도에 주둔한 왜적은 제3차 경주 전투로 경주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퇴각하는 등 우리 측에 유리한 전국이전개되고 있었는데 군위현의 교생(敎生)으로 있던 장사진(張士珍)은 의병을 일으켜서 훈련하고 군기와 군량을 정비하여 군성이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때 일본군은 대구부에 본진을 두고 있던 목하중현(木下重賢)의 850명과남조원청(南條元淸)의 군사1,50명이 인동 부근에 주둔하고 있어서 군위 접경까지 침범하여서 약탈과 살인 등 갖은 만행을 하고 있었으므로 장사진은 분발하여 때때로출격하여 왜적을 격멸하였다. 그는 항상 전투에서 선두에 서서 몸소 적진을 깨뜨리니 의병들의 사기가 높아지고싸울 때마다 필승하였다. 9월 20일 수백 명의 왜적이 그의본진으로 쳐들어왔는데 그는 다만 수십 기의 정병을 거느리고 역습을 단행하여 적장의 목을 베어 적에게 보이니 적은 혼비백산 도망쳤다. 제1차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제2차인 9월 30일 전투에서 많은 병력으로20일 전투의 보복전에서 포위되어 전사하였다. 적의 사상자도 많아서 이후에는 수비에만 전념하고덤벼들지 못하여 군위 접경 인동부의 백성들은 안거낙식하였다. 그 이후 장사진 동생 장사규(張士珪)도 전사하고 6월부터 1월까지 많은 전투가 있었다.
여기서조선조에서 임진왜란 때 군위에서 순절한 장사진과 그의 종제 장사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현재도 군위 지역에서 기념비가 있고 높이 추앙 받고 있기 때문이다.197)이들 형제는 성주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킨 재종형인장봉한(張鳳翰)의 영향을 받아 왔다. 장봉한은 왜승 찬희(贊喜)와찬숙(贊夙)을 생포하여 의병장 김면(金沔)에게 보내는 공을 세웠다. 또한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상주 판관 재종형인 장홍한(張鴻翰)은상주 전투에서 순사하여 후에 장사진과 함께 일문삼절(一門三節) 또는 “삼의사(三義士)”라 후세인들은칭송하였다. 그리고 20여 차례 제수한 관직도 거부하고 학문에전념하여 성리학의 대가로 후에 영의정에 추증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은 종숙으로서 정의가 깊었으며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리고 진사 장잠(張潛)은종조부가 된다.
조선 영남명문 사족 가운데 하나인 인동 장씨 장안세의 후손인 장사진은 평소 훌륭한 선조들의 모습을 가슴 속에 새겨두어 충의가 있고, 용맹하고 담력이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후 자신의 고을 인근까지침범하여 약탈과 살생을 일삼는 왜군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장사진은 1차 전투에서 종제 장사규를 잃었고, 2차 전투에서는 한 팔을 잃었으나남은 외팔로 더욱 분격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장사진은 두문동 72현인 장안세(張安世)의후손이다. 부친 장윤, 모친 창녕 조씨 사이에 3형제(장사림, 사진, 사용)중 둘째 아들로 군위군 효령면 병수리(屛水里)에서 태어났다. 얼마후 성동면 오천리로 이사하며 형제들과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학문에 뜻을 두어 군위 향교에서 교생으로공부에 전념하던 중(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장사진은동료 교생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인동 및 군위 등지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킨 뒤 군위 지역까지 점령한 왜군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하고 의병진의이름을 복수군으로 칭하였다. 많은 전공을 세운장사진 의병의 기세에 놀라 이 지역을 침범하지 못하던 왜군은 1592년 9월 30일복병을 숨겨 놓고 장사진을 유인하여 기습하였다. 이 전투에서 장사진은 한 팔을 잃고 외팔로 싸우다가전사했다. 조정에서는 장사진을 특별히 절충장군(折衝將軍)의 품계와 함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추증하고 충열(忠烈)이라는시호를 내렸다.
1753년(영조29) 군위 현감 남태보(南泰普)가군위군 효령면 병수리에 장사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의 행적을 새겨 넣은 “국상 증 수사 장사진 고리비(國賞贈水使張士珍故里碑)”를 세웠다.현재 군위군 효령면 오천리에 장사진 당시에 만들었다는 장군천(將軍泉)이 있으며 효령면 인근 고을 사람들이 후손이 없는 장사진의 넋을 기리기 위해 충렬사(忠烈祠)를 세우고 매년 한식날에 제향(祭享)하고 있다. 장사진의묘소는 충렬사 뒤에 있으며 수군절도사 제단비(水軍節度使祭壇碑)가세워져 있다.
옛날부터영천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역로와 봉수가 이곳을 경유했으며, 또한전쟁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군사적 지위를 점유하고 있었다. 교통로는 영천을 중심으로 동쪽은 모량(牟良)을 거쳐 경주부, 남쪽은압량을 거쳐 청도와 대구방면, 서쪽은 신녕ㆍ군위ㆍ비안ㆍ상주ㆍ신녕에서 의흥ㆍ탑리ㆍ의성ㆍ안동으로, 북쪽으로는 청송 방면으로 가는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였다. 임진란때 4월 21일 경주를 무혈 입성한 가등청정(加籐淸正)의 2만여 왜군은이틀 만에 80여리를 진군하여 경주에서 영천에 도착하였다. 이때군수 원사용 후임으로 부임한 김윤국(金潤國)은 지레 겁을먹고 단 한 번의 응전도 없이 기룡산 묘각사로 도주하게 된다. 나머지 군관과 백성들도 흩어져 영천성은적에게 쉽게함락되었다.
영천 지역에서의병이 거론된 것은 5월 초였고, 여기에 가담한 인물은 정세아(鄭世雅), 정대임(鄭大任), 신녕의 권응수(權應銖)등이었다. 정세아는 전형적인 유학자인데 이 지역이 왜군에게 유린당하자 5월초 동료, 아들, 제자들과 함께 거병하여 90여 명의 의병들이 모였고 그가 이끄는 의병은 6월 5일 경주부 탈환을 맹약하는 문천회맹(蚊川會盟)에 가맹하였다. 정대임은 영천 북쪽 대전 마을 출신이고 정세아의 족제로나이 40세였다. 그 도의병 수백 명을 모아 정세아와 연계하였으며 5월 초 대동(大洞)에서왜적을 격파했다. 권응수는 선조 17년 별시 무과에 합격한무인이었다. 임진란 때 상관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이 겁을 먹고 달아나 버리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신녕 화산에 돌아와 동생 3명, 종숙, 향리인 10여명과함께 거병하여 왜적의 토벌에 나섰다.(난중실록 5월 20일)
권응수는 5월 6일 한천(漢川)에서 노략질하던 왜병을 격살하였는데 이들과 내통하고 있는 조선인 무리 20명을소탕하여 이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였다. 6월 박진(朴晉)의 좌병사가 되어 우도에서 좌도 청송으로 넘어와 합류했는데 이때 박진은 권응수를 조방장으로 임명했는데 그와 잦은마찰로 신녕으로 돌아와 지속적인 의병활동을 했다.198) 임진왜란영천 지역 전투에서 명기해야 될 사실은 영천 지역 의병장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의 관군과 의병이 협력해서 영천성을 수복한 전투이다. 영천성 복성(復城)전투는임진왜란 당시 우리가 육지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의 의미와 영향력이 매우 컸는데다음 몇 가지 사례가 있다.199)
① 영천성을수복함으로써 일본군이 경주성으로 도망갔고 이로부터 신녕ㆍ의흥ㆍ의성ㆍ안동 등의 일본군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게 되어 경상좌도의 군읍이 안전해졌다. 이는 모두 영천 일전의 공이다.
② 영천의승리는 1592년 7월에 있었다. 그때 경상도에 웅거한 일본군은 경주에서 안동까지 큰 뱀처럼 포진하고 있어서 아무도 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천의 일본군이 전멸하자 군위, 의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바람처럼 도망을 쳐서 3읍이 평안해졌다. 중로가 단절되자안동과 경주의 일본군은 서로 호응하기 어려워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읍이 회복되자 경상도 백성들이회생할 수 있었고, 군대 사기도 점차 회복되어 매복 공격이 성공하였다.①번 자료는 영천성의 복성에 대한 류성룡의 평가이다. ②번 자료는 최현(崔晛)의 설명이다. 영천성복성으로 경상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상호 연락이 끊어져 전쟁 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결국 후퇴하였다.
③ 이순신의명량해전과 영천성 복성전투가 임진란 중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 이 ③은이항복(李恒福)의 평가이다.
④ 박진이영남좌도에서 수복한 공로는 이순신의 공과 다름이 없는 것으로 영남좌도에 생기가 돌고 있다.
이 ④번의 자료는 선조실록의 기록이다.
임진란때 영천을 점령한 가토군은 신녕ㆍ의흥ㆍ군위ㆍ비안을 함락시키고, 문경에서 고니시의 군대와 합세하여 조령을넘어 충주로 갔다. 이와 함께 가토군은 영천이 영남지방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기각지세(掎角之勢)200)에대단히 여겨 천여 명의 군대를 남겨 놓았다. 영천 지역 의병들은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대장을 임명하여지휘 체계가 확보되고, 명군이 참전하면서 전황이 유리해지고, 의병들의승리로 사기가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영천 인근 지역의 의병부대가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영천성 수복작전에 나섰다. 이를 위해 단일 군현의 연합 부대가 아니라 안동열읍향병을 포함하여 최소 10개 이상의 군현에 연락하여 영천성 탈환 전투에 참가할 것을 독려하였다.
영천 읍성수복을 위해 당시 군사를 소집한 날짜가 7월 24일이었으며장소는 읍성 남쪽에서 멀지 않은 추평이었다. 왜냐하면 열읍 의병들이 이곳으로 속속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천 의병 연합군은 박연 전투에서 돌아온 즉시 행동으로 옮겼고, 권응수(영천성 의병대장) 의병진도 별도로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영천성을 탈환한 뒤 7월 28일피해 상황을 살펴보니 아군 전사자 83명, 부상자 238명이었으며 적은 50여명이 사살 되었다. 군마 20여필, 총통, 창검 90여 자루 그 이외 보안과 채단의 전리품이 있었다.
적에게잡혀있던 양민 1,090명이 풀려났다.
의병대장권응수는 무과 출신으로 훈련 봉사를 거치는 등 군사지휘 경험이 있어서 실전 승리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영천성작전 며칠 이후 8월 1일 적장이 군사를 이끌고 영천에서신녕쪽으로 향하고 있을 때 의병대장 권응수는 정대임ㆍ정세아ㆍ조성ㆍ박연 등과 더불어 싸워서 크게 이겼고, 병기와문서 등을 노획하였다. 영천 전투 이후 안동 이하 경상좌도에 머물고 있던 왜적들은 경주ㆍ영천ㆍ안동을잇는 보급로가 차단되어 상주 지방으로 철수하였고, 영천의 적은 경주로 후퇴하였다. 따라서 경상좌도의 수십 읍현이 보존되고 이 지역 백성들이 생기를 찾았다.
198) 엄진성, 임진란기 영천지역의 유학과 학맥 , 경북 지역 임진란사 1권, 2018, 30~45쪽.
200) 기각지세(掎角之勢) : 한 사람은 뒤에서 사슴의 다리를 붙잡고, 한 사람은 앞에서 뿔을 붙잡는다는 뜻으로 앞뒤에서 적과 맞서는 태세를 이르는 말이다.
6) 경주
경주 지역은경상좌도의 여러 고을 중 가장 큰 도회지로서 1592년 4월임진란이 일어난지 얼마 안 되어 일본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그러나 경상 좌병사 박진(1560~1597)과 경주 판관 박의장(朴毅長, 155~1615)201)이 이끈 조선군의 대규모반격으로 그 해 가을 수복된 이후 일본군 최대 근거지인 울산 서생포의 일본군을 견제하는데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다. 박진은 영천성 전투에 이어서 경주 부근 노곡(奴谷) 전투에서 승리하여 용기를 얻게 되어 안강에서 경주성 수복 계획을 세웠다. 권응수를군관으로 경주 판관 박의장을 선봉으로 하여 16읍 병사 만여 명, 의병장정세아가 고촌에서 모아온 병사 5천명과 계연에서 합류하여 40리길을 야행, 1592년 8월 20일 날이 밝을 무렵 경주성에 접근하였다. 경주성 수복전에서 주력군 60여명이 전사하고 실패하여 안강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이장손(李長孫)이 신무기로 제작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로 무장하고 9월 8일전군이 경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때 박의장은 왜적들이 밤낮으로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신무기의 위력에 놀란 왜군들은 전성을
버리고서생포 쪽으로 후퇴하였다.
박진과박의장이 경주성을 탈환하고 적들이 수송 못한 창고 곡식 1만여 점을 노획했는데 그 공으로 좌병사 박진은가선대부로 승품하고, 경주부윤 윤인함은 판관 박의장에게 먼저 입성하여 수성치병(守城治兵) 토록 하였다. 임진년 1592년 6월 조선군의 지휘 체계가 정비되고 의병을 중심으로 여러곳에서 조선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일본군의 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6월 당시 경상좌도에서 일본군이주둔한 곳은 의성ㆍ군위ㆍ인동ㆍ영천ㆍ대구ㆍ밀양ㆍ경주ㆍ창녕ㆍ현풍ㆍ부산ㆍ동래 등지였다. 부산ㆍ김해 등 주요지역을 제외한 곳의 일본군은 대체로 소규모 보루를 설치하고 목책을 두르고 인접 고을을
노략질하여병력을 시위하며 스스로 엄호하는 정도였다. 7월 초 한산도 해전으로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이 상실되고보급의 어려움이 나타나 각지에서 고립된 일본군의 반격이 7월 하순 개시되었다.
일본군은보급로의 안전 확보를 위해 8월 7일 한성에 주둔하던 벙력을경상도로 내려 보내고 명군의 참전과 조선군의 반격으로 (영천과 경주 탈환) 일본의 전략 수정이 불가피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 회담이추진되고 있는 동안에도 서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경주는 다른 지역과 달리 전투가 있었고, 정유재란때 피해는 매우 심했다. 경주 지역의 의병군은 1592년 6월 9일 문천회맹(蚊川會盟)을 통하여 결성되었다.
영남의거진(巨鎭)인 경주 읍성은4월 21일 왜군에게 함락되고 9월 8일에 탈환에 성공하기까지 일본군의 계속된 침공이 있었다. 경주의문천회맹에 참여한 의병장은 전체 경상도 12고을에서 132명이되었는데 이후 계속 늘어나서 340여명이 되었다. 이 가운데경주 지역 안의 의병장 수는 43명이었다. 경주부의 의병활동에서 특이한 점은 한 집안에 의병장이 여러 명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사한 의병장 또는 의병의 아내가자살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아들이 다시 의병(장)에 가담하는경우가 많았다.
경주성복성 전투는 1차 전투(임진 8.21)에서 실패했는데 일본군은 언양 방면 주둔군으로 1만여 명이었고조선군은 관군과 의병 합하여 37,00명이었다. 이때 조선군의책임자는 다음과 같다.
2차 경주성 복성 전투는 1592년 9월 7일~8일 경주 판관 박의장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1차전의 실패를 경험삼아수시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읍성을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하고, 신무기 비격진천뢰를 이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박의장은 작전권을 가지고 지역 사정에 밝아 1,00명 단위의 결사대를매복과 돌격대로 작전에 나섰다. 2차 전투에 성공하여 경주는 130여일만에 우리 수중으로 돌아왔다. 경주성 복성 전투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판관 박의장은 오랜 전투경험과 공로를 인정받아 경주 부윤으로 품격이 올라갔고 무인으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경주성의수복은 경상좌도 지역에서 조선과 명의 군사가 주둔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고, 반면에일본은 임란 초에 구축해 놓은 언양과 울산 간의 연락망이 차단되어 통신 및 보급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후로도경주성을 둘러싼 주변에서의 공방전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1593년 3월박의장은 군사 30명을 거느리고 대구 파잠(巴岑)에서 일본군 2천명을 격파하고 31급을수급하였다. 또한 말 123필을 노획했는데 조정은 박의장을통정대부(通政大夫)202)관직을 제수하였다.
201) 박의장(朴毅長, 155~1615) : 신지제선생과 서당 동기로서 땔감나무 당번 3인 중 하나이다. 그때사고는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157년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봉사,경주 판관, 부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인동부사 등을 역임. 임란기간 중 경주판관으로 경주 수성에 큰 공헌을하였으며 호조판서에 증직되었다.
202) 통정대부(通政大夫) : 조선시대 정3품의당상관(堂上官)에게 붙여진 벼슬품계의 명칭 중의 하나
5. 명군(明軍)의 참전과 실체
임진왜란은선조가 한양 도성을 버리고 의주(義州)까지 몽진하는 등 전국토는 전쟁터로 변하고 멸망 직전까지 이르렀다. 조선에 구원병을 파병한 명은 쇠락하고 도처에 민란이발생하여 후금(後金)이 일어났으며, 일본은 전쟁 주범 풍신수길(豐臣秀吉)의 정권이 망하고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집권하는 등 동아시아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명은 조선에 8년간 구원군을 파견하면서 막대한 병력과 재정을 지원하게 되어 내부에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다. 조선은 임란 초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던 임진강의 보루가 왜적의 공세로 무너지자 급박한 상황에서 왜적의 침입을조선 나라 안의 적으로 여겼던 명 조정은 마침내 구원병을 파견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국내에서는 도요내부론(渡遼內附論)203)이 제기되었다. 도요내부란 일단 국경선인 압록강을건너 요동(遼東)으로 가 명나라에 의탁하면서 국토를 수복한다는것이었다. 풍신수길은 분열된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통신사의 파견을 요구하였다. 1591년(선조24) 3월황윤길(정사), 김성일(부사) 등을 통신사로 파견하여 일본 군사들이 명나라로 침입하겠다는 답서를 받아 귀국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오랜 논란끝에 집권세력인 동인(東人)은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여 왜침이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우려했던 왜침이 현실로 나타나자 조선은 왜적을 조령, 죽령 등에서 차단하여 일단 경상도 안에서 막는 한편 전국에 근왕군(勤王軍)을 모집하여 반격군을 편성하고 왜적들을 격퇴하려고 했다.
기대를모았던 순변사(巡邊使)204) 이일(李鎰)의패전 소식으로 도성에서 민심이 흉흉 하였고 삼도순변사 신립(申砬) 군대마저충주에서 참패하자 4월 29일 평양으로 파천을 결정하고 광해군을세자로 책봉하였다. 이 과정에서 명에 구원병을 요청하자는 안이 나왔으나 결정을 보지 못했다.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진 5월 18일이후 구원병 논란이 있었지만 6월 1일 조정은 정식으로 숙천에서요청을 위해 대사헌 이덕형을 청원사 삼아 파견키로 했다. 6월 14일평양성이 함락되었고, 구원 요청을 받은 명의 조정에서도 국내의 복잡한 사정을 고려하여 쉽게 결정하지못했다.
203) 최효식, 임진왜란기 영남의병연구, 국학자료원, 203, 262쪽.
204) 순변사(巡邊使) : 왕명으로 군무의 책임을 띠고 변방을 순검하던 목사로서, 대개 유사시에 임명하는 임시특사.
1) 명군의 임란 참여 동기
조선은 6월 1일에 자체 방어책을 버리고 서둘러 청원사 이덕형을 중국에 보내명군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명의 파병 이유와 명분으로 왜적이 조선을 점거하고 몰래 중국을 범하려고 꾀하여조선의 군신이 종묘사직을 잃고 강변에 파천하였는데 우리 황상께서 공손한 속방을 불쌍히 여기어 장수에게 명해 군사를 일으켜 국경을 넘어 토벌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차로 요동광녕진수총병관(遼東廣寧鎭守總兵官) 양응훈(楊應勳)의 소속부대 조승훈(祖承訓)1,00명, 왕수관 1,00명 사유(史儒) 1,00명, 가정달자(家丁㺚子) 50명 등 총 3,50명이 6월 15일 조선에 파병되었다. 조승훈군은 7월 17일 평양탈환전을 전개했으나 장마에다 작전의실패로 패전하였다. 명은 심유경(沈惟敬)을 급히 파견하여 평양에 주재하고 있던 소서행장(小西行長)과 56일간의 휴전을 맺고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 송응창을 경략(經略)으로 삼아 왜적을 방비하는 군사 책임을 맡겼다.
1592년 9월영하(寧夏)의 변(變)인 발배(哱拜)의 난(亂)을 평정하자 천진ㆍ요동ㆍ영평ㆍ영전ㆍ해개ㆍ계주ㆍ산동ㆍ순천ㆍ보정ㆍ밀운등 중국 연해의 여러 도(道)에 군사를 집중적으로 배치하고조선에 대병력 파병을 추진하였다. 명은 다시 경략 송응창,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주사(主事) 유황상(劉黃裳) 찬획 원황(袁黃)으로 편성된 5만 병력으로 12월 25일 재차 파병하였다.
2) 명군의 활약과 추이205)
명나라군사가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원병을 파병한 것은 1592년 6월 15일부터 1600년 10월철군할 때까지 약 8년여 기간이었다. 조선에 파병된 명군은원군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지만 다른 한편 조선에 많은 피해를 주기도 했다. 명군의 참가 전쟁은 많았지만특히 역할이 컸던 곳은 평양, 직산 전투이었고, 반면에 패전한곳은 벽제(碧蹄)ㆍ남원ㆍ울산의 도산(島山) 전투이다. 여기서승전으로 평양 패전으로 도산 전투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평양 전투는 1593년 1월 6일부터 8일까지 전개되었다. 명나라에서 ‘영하의난’을 평정하여 무장으로 최고 자리에 오른 제독 이여송은 1592년 12월 25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출병하였다. 그는 류성룡에게 평양성의 지도를 얻어 작전 계획을 세우고 1월 6일 새벽 즉시 평양성을 포위했다. 이때 명군은 43,50병력을 3군(좌ㆍ중ㆍ우)으로 편성하고 조선군 1만여 명을 분속 배치하였다. 이에 반해 왜군은 1만 6천~7천명으로 평양성 북쪽 목단령에 2,00명, 성위 배치군 1만여 명, 성수비 병력 4천~5천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명군은 그들의 장기인 대포와 화기를 앞세워 공격하였고 9일 아침조명군은 평양성에 입성하였다. 전과를 보면 참수 1,285급(級), 말 2,585필, 기물 45건, 조선포로1,015명을 석방시켰다.
울산에서전개된 도산 전투는 임진왜란 마지막에 있었고 두 차례 전투에서 모두 명군이 패배하였다. 1차는 1597년 12월 2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이고, 2차는 1598년 9월 2일부터 10월 4일까지로공교롭게도 기간이 각각 13일간이었다. 왜군 제2부대 가등청정(加籐淸正)은정유재란 중 충청도 직산(稷山)에서 패퇴한 후 거점 확보를위해 도산성을 1597년 8월 20일 착성하여 12월 20일경 조명군이 공략하기 직전 완성하였다.
도산은울산 평야 태화강 변에 위치한 높이 50m 정도의 작은 산이다. 이성은 증성, 신성, 학성,신학성, 도산성 등으로 불리고 있는데 내성(內城)은 15m 석축위에 본성ㆍ제2, 3본성을붙여 짓고 외성은 성 밖에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다 생소나무를 베어다 3중의 목책을 만들었다. 이 성에서 태화강을 이용 왜군기지 서생포까지는 뱃길로 70리, 육로는 80여리로서 도산성은 왜군의 전초기지였다.
명군은조선의 남해안에 웅거하고 있는 최강적 가등청정(加籐淸正) 군을치면 사천(泗川)에 주둔하고 있는 소서행장(小西行長)도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명군 3,60명, 조선군 1,50명이합세하여 도산성에 있는 16,40여명의 왜군을 집중 공략 하였다. 이를위해 경주에 명군의 본부를 설치하고 군량을 공급하면서 대대적으로 도산성을 공격하였다. 명군은 도산에 50여 미터 근접한 고학성산(古鶴城山) 정상에 작전지휘 본부를 두고 조명군은 도산성을 10중으로 포위하였다. 전투 결과는 일본군의 지원병 도착, 명군의 전공 다툼, 한 겨울의 비와 추운 날씨, 명군 사기 저하로 명군은 스스로 철수하고말았다. 2차 전투는 9개월 뒤에 전개되었는데 조명군의 규모는 3만 명이었다.
일본군은성안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응사하였으며, 사천성 전투에서 조명군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경주로 후퇴하고말았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명나라 원군 중에서 육군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하고 연구되고 있지만 수군에 있어서는 구체적인언급이 없어 매우 유감스럽다. 필자는 이번 연구에서 명군 수군(水軍)의 숫자, 대장 이름, 소형선박(50척)에 대한 기록을 본 기억이 있는데 수군 전쟁의역사가 너무 이순신 장군에게 치우쳐서 명나라 수군의 역할과 활동에 대해서는 기록 자제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연구는 본인의 능력과 연구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 앞으로 전공 관계자 여러분들의 관심과 분발을 기대하는 바이다.
임진왜란중 명군이 내원(來援)하여 왜적을 물리치고 국토를 회복하는데큰 기여를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조선인들은 재조(再造)의 은혜를 입은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양자 간에 갈등 또한심각한 국면이 없지 않았다. 선조는 조선군에게 국토의 회복을 위해 명군과 연합하여 전투를 전개할 것을명령하였다. 처음에 명군과 조선군 간에 작전명령 지휘권에 관한 논란이 있었지만 조선은 원활하고 활동적인왜적 토벌을 위해 작전권을 명나라에 일임했다. 조선군은 평양성 탈환전부터 1만여 명이 명군과 합세하여 참전하게 된다. 그 중 정예 3,00명은 아예 명군의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고 선봉에 섰다.
명군 참전첫 전투가 된 1592년 7월 15일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장마 중에 3,50여 조승훈(祖承訓)군이 왜적 1만여명을 공벌할 때 조선군 정예 50여 명을 명군 5개조에 10명씩 소속시켜 선봉을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명군은 우수한 병기인대포, 철환(鐵丸)등을믿고 정작 전투에는 나가지 않으면서 조선군만 홀로 내몰아 싸우게 하는 등 계획 없이 적은 병력으로 공적만 세우려고 공격하였다가 패하고 말았다. 명군은 그 패인을 조선군과 장마철 절기에 떠넘기려 했다. 이여송제독은 초기 강화론자 심유경을 죽이려 하였고 평양을 탈환한 다음 자신의 공덕을 과시하면서 조선에 대해 태만하면 탄핵하고 정법을 행하겠다고 위협적인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경략 송응창과 총병들은 왜적을 섬멸ㆍ공략하기보다 오히려 강화에 더뜻이 있었다. 그래서 조선군은 부모 형제의 원수를 갚으려고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항거가 거세졌지만경략 송응창은 소위 금살패문(禁殺牌文)을 반포해서 격렬한항왜 전선에 제동을 걸려고 하였다.
초기 명군은평양성 탈환에 성공한 여세를 몰아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명렬한 기세로 남하하여 1593년 1월 26일 벽제관(碧蹄館)에서 왜군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의 1만여군과 싸워 패한 다음 기세가 꺾이고 개성으로 회군하였다. 이여송제독에게 평양으로 퇴병할 것을 강권한 총병 장세작은 조선군과 작전에 대한 견해 차이로 우리 순변사 이빈(李賓)을 발길로 차고 큰 소리로 꾸짖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명군은 조선측이 군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는다고 우리 고관 관량관(管糧官) 지중추부사 김응남, 호조참판 민여경, 의주목사 황진(黃璡)에게곤장을 때렸다. 조정은 김응남을 전 강원감사 류영길로 교체하고 명군 간부 애자신(艾自新)에게 뇌물을 주고 달래는 형편이었다.
1593년 6월진주 혈전이 있었다. 조선군은 ‘진주 목사가 일본인을 많이죽였기 때문에 원수를 갚겠다.’고 전라도 지방으로 진군하는 왜군을 진주성에서 방어하려 하였다. 이때 조선군은 명군에게 화급한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명나라 장군 유정, 오유충은대구, 참장 낙상지, 유격 송대빈은 남원, 유격 왕필적은 상주에 각각 주둔하고 있었지만 강화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출동하지 않았다. 명나라 유격 무승선(毋承宣)이란자가 총병 유정의 막사에서 명일 간에 진행 중인 강화 교섭이 조선군의 활약으로 실패할까 염려하여 조선의 장군인 박진(朴晉), 곽재우 등 4명을오라로 묶고 곤장까지 친 것은 양국 간에 커다란 문제로 제기되어 국왕이 진노하였고 경략군문(經略軍門)에 게첩(揭帖)을 보내항의하였다.
명나라수병도독(水兵都督) 진린(陳璘)이 수함(水艦) 50여척을 끌고 1598년 이순신과 합동 작전으로 많은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군 중 진린의 횡포는 극에 달한 감이 있었다. 진린의 군사들은조선의 수령(守令)을 때리고 함부로 욕보이기를 우습게 알았다. 찰방(察訪)206) 이상규(李尙規)를오라로 묶고 목을 베어 죽였다. 1598년10월 이순신은진린 군과 함께 절이도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는데 이순신은 왜적 71급
(級)을베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실적이 좋지 못했던 진린은 이순신으로부터40급을 빼앗았고 계유격(季遊擊)이란 자도 5급을 또 빼앗아 갔다. 진린은 이순신에게 압력을 넣어 26급만 벤 것으로 상부에 보고하도록 했다.
임진왜란기간 중 명군의 횡포는 주둔지의 모든 수령들도 곤욕을 치루고 있었다. 경상좌도 북부지역인 안동ㆍ의성ㆍ영천ㆍ경주뿐만아니라 문경ㆍ상주 어느 곳 할 곳 없이 거의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1592년 7월 명나라 참전을 알리는 교지가 지방에 전해지고 일본과 명군이 협상이 지속되면서 일본군은 경상도 남쪽 지방으로철수하고 그자리에 명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날 때 까지 결전 없이 명군의 주둔또한 장기간 이어졌다. 강화 교섭이 진행되면서 남하한 명군이 머무른 고을에서는 이들에 대한 접대와 지원이잦을 수밖에 없었다. 명군이 있는 고을의 인접 고을에서도 지원과 물자 배당을 함께 분담해야 되었다. 1598년 2월 조선에 온 명나라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가 충주에 도착하여 지공(支供)이 부실하다고 매우 노하여 충청도 관찰사의 종사(從事)인 송영구에게 곤장 15판(板)을 쳤다. 문경에 이르러서인부들이 모두 도망쳐서 주사는 더욱 화를 냈고 연기 현감 이문빈과 문경 현감 홍함을 잡아들여 가마를 메게 하고 비로소 출발하였다. 의성 현감과 비안 현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207) 선조 때 의성 현감 홍유의(洪有義)도 명장실대(明將失待)로나파(拿罷), 즉 명나라 장군을 잘 모시지 못해 파면되었다. 비안 현감도 선조 재임 중 파면된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9명에이르고 있다. 파면 사유로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태파(怠罷) : 태만으로 인한 파직
- 경파(京罷) : 도성으로 파면 됨
- 폄파(貶罷) : 비리로 인해 파직 됨
- 대파(臺罷) : 대간인 사헌부나 사간원에 의해 파면
- 파(罷) : 파면 됨
명군의주둔지에서 가장 힘든 지원은 군량미 조달이었다. 전국 농토에 군량미를 부과ㆍ징수해야 하는데 병화가 심하지않은 지역은 1결(結)에 3두(斗) 씩 징수하도록했다. 백성들이 부담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지경이어서 조정은 명군의 유병(留兵)을 약 2개월로 원했다. 명군 1인당 지급해야 될 경비는 월급으로 지급하였고 월량(月粮)으로 은 1냥과 은량(銀粮) 채소, 소금은 은 1냥 5전, 의혁대(衣革代) 3전, 고상(稿賞) 3전 등 모두 3냥6전이 된다. 따라서 2만명이 주둔할 경우 연간 1백만 냥이 되었다. 풍년의 경우 1년 세수가 쌀ㆍ콩ㆍ조 등 합쳐 23~24만 석이고, 쌀만 계산하면 14만 석이 약간 안 되는 형편 이었다. 명군에게 지급해야 되는 쌀의 양이 12만 석이었는데 종묘사직의 제사비용, 관원의 녹(祿), 온나라의 전재(錢財)를 털어도 명군 먹일 재정이 안 되는 형편이었다.
206) 찰방(察訪) : 조선시대 각 도의 역에서 역마의 일을 맡은 종 6품의 관직이다.
207) (사)의성향토사 연구회, 의성의 수령비, 2010, 17~120쪽.
4) 정유재란 경상좌도의 명군 주둔
조선통신사가일본을 다녀간 이듬해인 1597년 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주력 부대를 다시 보내 전쟁에 돌입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1군이 1597년 1월 14일부산 다대포에 상륙했고, 이어 고니시의 제2군이 웅천에 상륙하였다. 7월 8일 부산에 상륙하여 전라도를 수중에 넣었으나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1월 노량진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배하여 본국으로 퇴각하면서 전쟁도 막을 내린 것이 정유재란이다.
정유재란때 영천은 명군의 주요 주둔지였다. 과거 영천과 신녕에 명군이 주둔한 적은 있었으나 주요 주둔지는 아니었는데명이 일본과 강화 교섭이 진행되면서 1593년 8월부터 단계적으로철군하여 1594년 9월 대부분의 병력을 요동지방으로 철수시켰다. 조선의 재출병 요청으로 1597년5월 다시 출병하면서 영천은 명군의 주요 주둔지가 된 것이다.
1597년10월 일본군은 경상도 고성ㆍ남해ㆍ창원ㆍ양산ㆍ울산ㆍ사천 등 해안 지역으로 퇴각해 왜성을 축조하고 방어 태세로 전환했다. 조ㆍ명 연합군은 울산의 가토오 군을 먼저 공격하여 타격을 주기로 하고 울산에 집결했는데 이 과정에서 영천은남하하는 명군의 경로이자 후방 기지 역할을 했다. 1597년 4월명군 46,00여 명이 불시에 남하하여 영천ㆍ신녕을 비롯해 안동ㆍ예천ㆍ의성ㆍ의흥ㆍ상주ㆍ선산ㆍ성주 등에나누어 주둔 하였다. 이때 권응수가 명군의 군량으로 곡식 30곡(斛)을 바쳤다. 경상도로간 명군이 36,60명인데 그 중 2,70명이 경상좌도에주둔했다. 아래 표를 보면 안동 6,70명, 의성 6,10명, 영천신녕 5,90명, 의흥2,50명, 예천 1,50명이었다. 명의 오유충은 1597년 5월군(軍) 및 원역(員役) 3,397명을 인솔해 다시 들어왔고 영천에 오기 전에 충주에 진을 쳤다.
1598년 명군이 영천에 주둔하면서 민간의 부담과피해가 커서 선조와 비변사에서 난색을 표명하고 이전처럼 충주에 주둔할 것을 주문하였으나 이들은 거부하고 경상도의 명
군이 38,00여 명, 말 26,00필인데영천ㆍ신녕ㆍ의흥ㆍ고령 등에는 쌓아 둔 곡식이 없다면서 인근 지역에서 군량을 빨리 실어 와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명군의주둔과 함께정유재란 당시 영천에서 전투가 종종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경상도에서 활약한 조선의 주요지휘관 도체찰사 이원익 부사(副使) 한효순, 도원수 권율, 순찰사(경상도관찰사)
이용순이었다. 도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은 영천에 머물렀다. 1597년 7월 1일 가토오 기요마사(加籐淸正)가 팔공산을 침공하고 권응수 군대에게 크게 패하고 영천을 거쳐 서생포로 돌아갔다. 1597년 9월 29일에도경주 부사 박의장과 여러 장수들이 영천에서 싸웠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여 1598년 1월 류성룡은 선조에게 올리는 장계에서 경상도 군사로서싸움터에서 쓸만한 자는 울산ㆍ경주의 군사이며 그 다음이 영천의 군사라고 보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