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1598년에 전개되었던 임진왜란은 역사상 많은 희생과 영향을 끼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의 발발요인은 복합적이지만 전쟁 피해국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건국 후 20여년 만에 발생했던 민족의 일대 수난기였으며 동시에 사회 전반에 급속한 변화를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여러 측면에서 중요시 되어야 하지만 특히 국제 질서의 변동이라는 대외 관계사의측면, 조선왕조의 지속성 문제, 임진왜란의 성격, 시대 구분론 문제가 점진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쟁터였던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임진왜란은 승전도 패전도 아닌 미증유의 국난이었다. 이에 전쟁을어떻게 극복하였는가가문제일 뿐이었다.147)
일반적으로 ‘임진란’이라고 하면 2차 침입인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 왜란(倭亂)을 일본에서는 ‘분로구(문록文祿)ㆍ케이조(경장慶長)의 역(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 명明 신종의연호)의 역(役)’이라고부른다. 전후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 명, 일본 등 3국에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하기 시작한 사회가 임진란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로 나타났으며, 전화(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적으로 논밭이 황폐화되었다. 인구 감소와 농지 축소는 바로 세수(稅收)의 격감을 초래하게 되어 국가 재정에도 커다란 제약을 받게 되어 전후 복구에 상당한 시간과 부담이 소요 되었으며, 한편 사회적으로 서얼 문제, 노비의 방량(放良), 병사의 면역, 향리(鄕吏)의 동반직(東班職) 취임 등 신분상의 제약이 많이 해이해져 갔다.
또한 임진란을 통하여 국민들의 자발적인 애국심이 고취되었고자아반성의 계기가 마련 됐으며, 성현의 학문을 공부한 문화 강국으로서 오랑캐라는 왜(倭)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으며, 명(明) 나라에 대해서는원군 파병으로 숭명사상이 더욱 굳어져서 신흥 강국인 청(淸)을배척하여 두 차례의 호란(胡亂)을 부른 원인도 바로 임진란의후유증 중의 하나이다.
147) 김강식, 임진왜란과 경상우도의의병 운동, 해안, 201, 1~25쪽.
2) 임진란 전의 국내외 정세
(1) 국외 정세
임란 전 16세기는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임란은 직접적으로 조선, 중국, 일본의 국제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으므로 먼저 중국(명)과 일본의 정세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황제의 국가 권력이 중앙과 지방을 완전히 장악함에 따라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정치 체제를완비하였다. 이러한 정치 조직을 바탕으로 하여 본토의 지배에만 국한되었던 황제의 국가 권력이 주변 제국가에 대해서도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절대적인 권력의 확립에도불구하고 이러한 황제의 절대권에 의탁한 소수의 인물 또는 집단이 그 권력을 대행하는 형태가 발생하였다. 16세기이래 정권을 장악한 자는 황제의 사적 자문기관이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의 수석이나 내정에 봉사하던 환관 등 고급 관리였다. 특히 환관은이후 중국 사회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암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사정하에서 여진족의 통제는점차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따라 여진족의 세력은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148)
일본의 경우에는 전국 시대라는 오랜 혼란의 시기를 극복하고새로운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즉 족리막부(足利幕府)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각지에서 호족들이 활거하며 서로 치열하게 싸우는 전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새로운 세력이 지배층으로 등장하는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되고 있었다.일본의 호족들은 자신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을 더욱 철저히 장악하여 새로운 질서로서 가신과 양민들을 통제하였다. 이들은 또한 자기의 영역, 즉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평지에 성을쌓았는데 이러한 평지성 전술에도 변화를 가져와 보병집단 중심의 전술을 일반화시키게 되었다. 또한 일본은유럽인과의 접촉을 통하여 새로운 문물을 수입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는 총(銃)의 수입이었다. 이총은 전국 시대의 계속적인 전투를 통해 급격히 보급되게 되었다. 이 시기 전국시대 혼란을 극복하고 일본의통일 사업을 완성한 것은 풍신수길이었다. 그는 오랜 전국 시대를 극복하고 통일을 완성하였지만 급격히늘어난 무사 집단과 병사는 그의 정권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러한 불안을 미연에 방지하기위하여 풍신수길은 몇 가지 중요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① 토지와 농민을 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전국적인 범위에서일종의 토지 조사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검지(檢地)’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농민들은 토지를 버리고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것이 금지 되었다.
② 농민들로부터 칼, 창, 활, 총 등의 무기를 거두어들이는‘도수령(刀狩令)’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정책은 농민을 토지에 긴박시키고 무기를 회수함으로써 농민의 저항을 사전에 억제하면서 다른 호족의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책만으로는 통일 후 과잉 상태로 있던 제 호족들의 군사력과불만 호족 세력을 용이하게 제거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국내의 정치적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풍신수길은조선의 침략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의 조선 침략 계획은 1586년이전부터 계획하였다고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여 지리와 각종의 사정을 염탐하기도하였다.
(2) 국내 정세
16세기 조선 사회는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여러 현상 가운데 왜란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 군역과 군사 제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149) 15세기 초 조선 왕조가 성립되면서 소위 이인위본(以人爲本)을 바탕으로 하는 병농일치제적(兵農一致制的) 군역 제도가 마련되었다. 비록 병농일치제적 군역 제도라 하지만 토지제도와철저히 일치되는 소위 이지출역(以地出役)의 제도가 되지 못한이 제도는 당초부터 많은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양정(良丁) 중심의 병역의무자들이 토지 경제를 바탕으로 하며 편성되지 못하고 봉족(奉足), 즉 인적 보조만을 근거로 하여 편성된 결과 군사력이 유지될 기반이 확고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제도는 벌써 15세기의 시행 당초부터 불합리성이 노출되었지만그때마다 견제력 즉 토지 소유를 바탕으로 하는 군역 제도의 개편은 이루어지지 않고 계속 봉족제 범위 안에서의 대책만이 강구되었다. 따라서 책정된 군역 의무자의 수만 증가되었으며, 그 만큼 농민층의부담만 가중되고 그 결과 군역을 대신 지게 하는 일과 기피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피역(避役)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괴로운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남의 종이 되거나 중이 되는 경우가 허다 하였고 일정한 거주지를 가지지 않은 채 유랑하는 농민들이 많아졌으니, 군역 제도의 문란이 큰 원인이 되어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군역 문제는 또 관리들의 부정의 온상이 되어 갔다. 관리들이 농민의 현역복무를 오히려 막고 대신 그 대가를 받아 착복하는 소위 방군수포(放軍收布)가 유행하게 되었는데 대가액이 너무 높아서 정부가 공정가를정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1541년(중종36)에는 지방관이 관할 내 군역 의무자의 번상가(番上價), 즉 현역복무 대신 내는 대가를 일괄적으로 포(布)로 징수하여 중앙 정부에 보내면 병조(兵曹)에서 이것을 다시 각 지방의 군사력이 필요한 곳으로 나누어 보내어 그것으로 군인을 고용하게 하는 소위 군포제(軍布制)가 정식으로 실시되었다. 군포제가실시된 후 군포 수입이 모두 군사의 고용비에 쓰여지지 않았고이 때문에 군비가 약화되어 임진왜란 초기의 관군의 패전을 가져왔지만 어떻든 16세기에 있어서 군포제의실시는 오위(五衛) 제도를 근간으로 짜여진 조선 초기의 개병제적(皆兵制的)인 현역 복무제가 무너지고 오영(五營)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 후기의 용병제(傭兵制)와 의무병제의 혼합체 형태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러한 군역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군사 조직 또한 군역제도의 변화와 더불어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조선은 국초 이래 영(營), 진(鎭)을 중심으로하였던 지방 군사조직이 세종대(145)에 이르러 진관 체제(鎭管體制)로 재정비되었다. 진관 체제는 초기의 영ㆍ진을 중심으로 하는 방어체제를 보완하여 연해(沿海)지역 뿐만 아니라 내륙지역에도거진(巨鎭) 등을 설치하고 그 주변의 제읍(諸邑)을 분속시키되 그 체제는 서북변(西北邊)의 군익조직(軍翼組織)을 채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외침을 맞아 연해 지역의 진이 무너지더라도내륙 지역이 무인지경의 상태로 되지 않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의 각 도를 몇 개의 군익도(軍翼道)로 세분하고, 각군익도를 다시 중ㆍ좌ㆍ우의 3익(三翼)으로 편성하였던 것이다. 이후 군익도 체제는 세조 3년(1458) 10월 모두 진관 체제로 개편되었다. 즉 중요한 지역을 중심으로 중ㆍ좌ㆍ우익체제로 편성된 군익도 조직은 중요한 지역을 거진(巨鎭)으로 하고 그 주변 지역의 병렬적 제진(諸鎭)을 거진에 소속케 하는 조직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 조직에 따른 경상도의 방어 체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50)
진관 체제는 전국을 방위 지역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방위망이 지나치게 광범위 하여 실제 운용에 있어서는 비효율성이 드러나 그 기능을 잃어갔다. 여기에는군사들의 경제적 기반 취약의 가속화와 군사 지휘권을 가진 문관수령의 통솔 무능에도 큰 요인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정병(正兵)의 도망ㆍ유리 현상이 만연됨으로써 을미왜변 때에는 비군사층(非軍士層) 까지도 동원하는 이른바 제승방략(制勝方略)이란 응급적인 분군법(分軍法)이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제승방략체제는 운용상에 있어서 사실상 진관별(鎭管別) 자전자수(自戰自守)의 원칙을 포기하고 잔여 가용 병력을 모두 동원하는 총력전 체제로서 전선이 무너지면 후방이 수습될 수 없는 무방비상태에 빠지게 되는 전략상의 취약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승방략체제는 소규모 국지전에는절용될 수 있어도 대규모의 광역전에 대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승방략적 분군법에서는 수령에게 군령권이주어지지 않으므로 수령의 역할은 군령권자에게 군사를 인솔해 넘겨주는 것 뿐이었다. 요컨대 제승방략이란진관 체제의 붕괴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조선은 이처럼 허약한 방위 체제를 가지고 임란을 맞게 된 것이었다.
148) 경상북도, 경북의 병사, 영남대 민족문화 연구소, 190, 179~180쪽.
149) 상동, 180~182쪽.
150) 상동, 181쪽.
2. 전란 속의 당쟁∙ 당파
1) 국론 분열과 정국
임란 전의 조선 사회 변화는 제도적 변화만이 전개된 것이아니었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제도를 운영하고 유지하던 지배 세력이 분열하여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던 것이다. 알고있듯이 사화와 당쟁으로 불리어진 정쟁은 이 시기에 극심하였고, 이러한 정쟁은 물론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미치었다. 지배층의 분열은 결국 국가 기강을 문란케 하고, 백성을도탄에 빠지게 하여 민심을 크게 이반시키고 있었음은 필연의 이치였다. 명종 연간 황해도에서 극성을 떨쳤던임꺽정 등의 활동과 선조 1년(1578) 경상도 감영의 군인난동 사건 등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국가 기강의 문란에서 오는 지배층의 가렴주구는 백성들의생활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하였으며, 이것은 이른바 유민화(流民化)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백성들의 유망은 국가의 근본이 붕괴되는것으로 인식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당시의 급박한 사정을 퇴계와 율곡은 국왕에게 설명한 말 가운데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있을 정도였다.
■어찌 임금이 되어 정치를 하면서 백성들의 질병이 극에 달하고 기한(飢寒)이 절박한데도 모른 채 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은 먹을 양식이 없고, 치료할 약이 없는데 나라에서는 다른 일이 더 중요 하다는 핑계를 대고 인정(仁政)을 어기고 백성을 핍박하고 찍어 눌러 물과 불 속으로 몰아넣고있습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태평세월에 젖어가지고 아무도 나라가 흐트러지고 망하는 화근이 백성들의 원한이 엉킨데 서 연유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국가를 개혁하고 분기하지 않으면 다시 국가를 보전 할 가망이 없습니다. 이미 시대말적 징조가나타나서 인심은 해이되고 동요의 빛을 보이니 이때에 한가지 폐해도 개혁하지 못하고 안일을 일삼는다면 앉아서 망하는 것을 기다리는것과 다름없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정에도 불구하고 지방에까지 확대된 당쟁은 결코적은 문제가 아니었다. 선조 초부터 시작된 조신간(朝臣間)의 편당싸움은 지방의 동족 또는 향교나 동계학파 유생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당쟁은 전국적으로 뿌리박고 있어서 정계는 불안정하였고 일개 말직 무관의 임명에도 사정(私情)이 좌우하였다. 이러한 사정과는 반대로 일본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전국 시대에 양성된 군사와 조총의 보급, 전술의 개발 등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조선 침략을준비하고 있었으며 공공연히 명에 대한 침략을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이러한 급박한 사정에 이르러서야 일본의동향을 파악하기 위하여 조정에서는 황윤길과 김성일을 파견하여 정세를 살피게 하였는데 두 사람의 시찰보고는 서로 상반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현재까지모든 백성들은 기억하고 있다.
임진란의 중심지가 되어왔던 영남 지방은 중소 지주적 기반위에서 성장한 영남사림파(嶺南士林派)의 근거지로서, 특히 16세기 이래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학문적업적을 토대로 성리학적 향촌 질서의 확립이 두드러진 지역이었다. 그러나 제자들 단계에 이르러 강좌(江左)ㆍ강우(江右)의 분열을 보여 사론(士論)이둘로 나뉘고 중앙 정계에서는 당쟁의 시초 동인과 서인에서 남인과 북인이라는 세력의 분기로 나타났다. 즉선조 연간에는 학연이 붕당 형성의 요인이 되었는데, 이황은 학문으로 서로 숭상하고 조식은 절의(節義)로서 서로 높이게 되어 학문에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임진왜란의 전쟁 속에서 중앙 정국은 남인의 류성룡이 서인의도움을 받으면서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또 이러한 정국의 흐름에서 교유와 학연으로 연결되면서 당시조정은 크게 보아 동인과 서인의 대립 속에서 작게는 임진왜란 전부터 나타나고 있던 정인홍과 류성룡의 대립, 즉남인과 북인의 대립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문하를 동시에 출입한 중도적 성향의 김면(金沔)151)이 경상우도에서 평가 받을 수 있는 정국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임진란에서순수 의병 활동을 할 경우에도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당쟁과 무관하게 처신하기가 어려웠다. 위에서 언급한김면은 물론 곽재우도 결국 친 남인적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경상우도의 북인은 일본군의 직접적인침략에서 벗어난 지역에 거주하였으며, 합천에서 창의한 정인홍은 임란 이후 정국을 주도한 북인의 영수였다. 여기서 의병대장 가운데 당파에 가담한 인사는 다음과 같다.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서인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서인
임진왜란 전후의 시기는 전쟁 수행 과정의 책임 문제가 제기되면서정국의 주도권이 남인에서 북인으로 전환되어 나간 시점이다. 이러한 정국 변환 요인은 전쟁의 추이, 의병 운동과 연계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붕당 정치는 붕당화 자체가학파의 종장(宗長)이 이룩해 높은 학문의 본질과는 일정한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외형상 행적이 집착하는 형태로 전개됨으로써 붕당 사이에 첨예한 대립을보였던 시기였다.
선조연간의 정치는 한 마디로 붕당 정치의 성립기였다. 이를 다음과 같이 세분할 수있다. 동인과 서인이 심의겸의 처리 문제로 붕당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했던 ①붕당모색기, 동인과 서인이 정여립 사건을 전후하여 첨예하게 대립했던 ②혼전기, 임진왜란으로 국가적 비상사태에 직면하여 국왕이 정치를 주도했던 ③국왕주도기, 임진왜란의 지속으로 종전을 위한 회담이 제기된 ④남인주도기 임진왜란의 종전이후 전쟁 책임문제를 통해 정권을 주도한 ⑤북인 정권 성립기로 구분할 수 있다.
151) 김면(金沔, 1541~1593) :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庵), 본관은고령이다. 합천 군수, 장악원정(掌樂院正), 경상도 도의병대장(慶尙道都義兵大將),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로임명되었다.
2) 주화론(主和論)과 주전론(主戰論)
임진란 기간 중에 화의론(和議論)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경상우도에서는 곽재우를 위시하여 임란당시 책임지고 전쟁을 수습해야 할 위치에 있었던 인사들을 한결같이 화친하면 적이 침입할 수 없으며, 그동안우리의 군사를 기르고 백성을 안심시킬 수 있다는 실리 외교적인 입장에서 화의론을 제기하였다.152) 중요한 사실은 이들의 화의론은 전쟁 초기부터 주장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남인으로 류성룡의 주장을 들수 있다. 때문에 전쟁을 주장하는것은 옳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이분법적인 이해는 옳지 않다. 특히 임진왜란 중 국토의 황폐화를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임진왜란 후기의 주전론자와 주화론자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사실 임진왜란 초기에는 모두가 주전론을 주장하였지만 전쟁 후기에 나타난 남인의 화의론은현실적 고육책이었다. 문제는 종전에 임박하여 북인들이 이 문제를 쟁점화시켜 나간 점이다. 그렇지만 임진란 중 일본과의 강화 주장은 난후의 정국 장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쟁점이 되었으며, 강화 회담의 찬성자는 죄인으로 취급되기까지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이 상차(上箚)하기를
국가가 일본군에 대해서는 만세토록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이있을 뿐 한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으니, 강화의 설은 삼척동자도 말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그런데 류성룡은 수상의 신분으로 먼저 화의를 주장하여 인심을 풀리게 하고 국세를 약화시켰으니, 이는 실로 종사의 죄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성상께서 통촉하시고공론을 격발함에 힘입어 명분을 바로잡고, 죄를 정하여 국시가 다소 안정되었는데, 영의정 이원익이 연경에서 돌아오는 즉시 상차(上箚)하면서 류성룡을 위해 변론했으므로 공론이 일제히 분노하며 분통을 터뜨리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북인들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남인들은 화의론의 정당성을 굽히지않았다. 곽재우도 역시 화의론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화친이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 측의 태도에 따라 화친을 맺어서 스스로 힘을 길러 적에 대비하면우리에게 유리할 수 있다는 현실 중시의 실리 외교였다. 이처럼 화의론은 임진왜란 당시의 정국 담당
세력이었던 남인의 일치된 주장이었으며, 이것은 난 후에 책임을 추궁당하는 요인이 되었다. 곽재우의 화의론은난 후에도 이어졌다. 그렇지만 북인의 명분론적 주전론은 광해군 시기에 명나라로부터 후금(後金) 정벌을 위한 원병 요청을 받았을 때 자주 외교를 펼칠 수 있는기반이 되었으며 이러한 입장은 주자(朱子) 성리학을 절대시하면서재조지사(再造之思)의 입장에서 사대적인 친명 외교를 주장한서인과 차별성을 갖게 한 요인이 되었다.
한편 임진왜란 중에 경상우도 민(民)의 바람과는 달리 곽재우는 김면(金沔)의 사망 후에 경상우도의 병사에 임명되지 못했으며, 그가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들지 못한 점은 정치적인 이해를 요구한다. 이러한 공신의책훈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의 북인 정권기였다. 의병 운동의 공이 가장 컸던 곽재우가 선무공신이 아닌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북인정권의 곽재우에 대한 입장을 보여 준다. 이처럼 임진왜란 동안 곽재우 입장은 일본군의 토벌을 우선시하고있었지만 화의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남인 류성룡, 김성일, 이원익 등이 적극적으로 곽재우를 추천하고 옹호하였다. 전쟁 초기의곽재우와 김수(金睟)의 대립은 침략에 대한 극복방식의 차이에서발생한 것으로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공분 때문이었다. 곽재우가 임란 중 주장한 시책과 정책은 정국주도층이었던 남인의 입장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궁극적으로 곽재우도 관군의 장으로 활약하였다.
152) 김강식, 전게서, 256~261쪽.
3. 일본군의 침략과 항왜(抗倭)ㆍ의병 활동
1) 일본군의 침략 경로와 병력 규모
일본군은 선조 25년(1592) 4월 13일 부산포에 이르고 다음날 14일 선발대인 소서행장(小西行長)군(軍)은 부산성 공격을 개시한 지 10수 시간만에 이를 함락시켰고 다음 날에는 동래를 함락하였다. 그후 일본군의 후속 부대인 가등청정(加籐淸正) 등의 제 2번대, 흑전장정(黑田長政) 등의 제 3번대가 계속 상륙하였다.이로써 그 주력 부대는 동래로부터는 그 진로를 좌(左)ㆍ중(中)ㆍ우(右) 3로로 3분하여 한양으로 북상하고 또 수군 등의 일지대(一支隊)는 해안 지대를 서진하였다.그 진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왜적은 간선 도로를 따라 급 진격하였고, 그들은 동래성 등 몇 곳에서 완강한 저항을 받기도 하였으나 별 어려움 없이 북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4월 17일 왜변의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곧 이일(李鎰)을 순변사, 성응길좌방어사, 유극량 조기 조방장으로 삼아 왜적을 방어하게 하였고, 신립(申砬)을 도순변사, 좌의정류성룡 도체찰사(都 體察使)로 삼아 제장(諸將)을독찰케 하였다. 한편 경상도 순찰사 김수(金睟)는 적변의 보고를 받고 즉시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에 의하여각 고을에 통첩을 보내 각각 소속 군대를 거느리고 대구를 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상주 목사 김해, 함창 군수 이국필, 문경 현감 이원길 등은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성주에 도착하여 감사의 지휘를 받아 대구로 향하였으나 석전(石田)과금호(琴湖)에 이르러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주하고 말았다. 이 같은 사정을 조정(趙靖)의임란일기에서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구를 지키던 부사 윤현(尹晛) 또한 지키지 못하고 군인을 거두어 공산성(公山城)에 퇴진하여 적의 예봉을 피할 뿐이었다. 4월 21일 대구를 점령한 왜적은 24일 상주, 26일 문경을 넘어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였다.
적과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지고 만 병사들은 모두 대오를이탈하여 피난민과 더불어 산골짝으로 숨어 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경상도 일원은 백성들은 물론 군사도없는 텅 빈 무인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형편에 순변사 이일, 종사관윤섬과 박호, 군관 60여 명을 거느리고 23일 상주에 들어왔을 때는 오직 권길 만이 성을 지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들은겨우 80여명의 군사들을 모아 적에게 대응하였는데 조정은 임란일기에서 안타까운 사정을 적고 있다.
한양을 점령한 후 일본군의 장수들은 조선 팔도를 다음과 같이분담키로 협정하였다.
○ 경기도 : 우희다분가(宇喜多分家) 충청도 : 복도정측(福島正則)
○ 경상도 : 모리휘원(毛利輝元) 전라도 :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 평안도 : 소서행장(小西行長) 함경도 : 가등청정(加籐淸正)
○ 황해도 : 흑전장정(黑田長政) 강원도 : 모리길성(毛利吉城)
이상과 같은 왜군의 침입으로 특히 왜군의 상륙지이며 교두보인경상도는 수일 내 좌도 우도의 연락이 두절되고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왜적은 4월 중순 이후 경상북도 방면에 다음과 같이 약 3만 명의 병력을배치하였다.
○ 문경 : 장승아부원친(長승我部元親)등 3천명
○ 금산부근 : 입화통호(立花統虎)등 4천명
○ 개령 : 모리휘원(毛利輝元)등 2만명
○ 상주 : 도엽정통(稻葉貞通)등 4천명
주장 모리휘원(毛利輝元)은 안동, 예안, 문경, 무계 등 여러 곳에 그의 부대를 파견하여 지키게 함으로써 조령을 통하는 후방 보급선과 낙동강을 이용하는 수로선(水路線)을 확보하는데 힘쓰고 있었다.주로 개령과 진을 치고 있던 모리휘원은 침략지 민정을 본국 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취급하여 조세를 징수,장기 침략을 모의하였는데 이 때 모리휘원이 분담한 경상도에서 징수해야 할 석수(石數)는 2,87,790석이었다고 한다.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일본에서 대기 중이던 후속 제 부대들이 차례로 한반도에 상륙하였는데 10월에접어들자 일본은 경상도 방면에 그 당시 부산에서 한양까지에 이르는 주보급로를 좌ㆍ우도에 하나씩 보유하고 있었는데 각 로(各路)에 20여 톤을 설치하여각 둔의병력은 수백 명에서 1천여 명을 가지고 있었다.
위의 계산을 보면 경상도 방면에만 4만 명의 병력을 분산 배치한 결과가 된다. 왜적은 부산에서 평양까지중간에 충분한 후방 부대를 배치하여 후방 경비와 병참 업무까지 겸하게 하였던 것인데 1592년 8월부터 1593년 초까지 병력은 약 6만여 명이었고 그 중 4만 명이 경상도에 배치시키고 있어서 그만큼경상도가 작전, 군사, 교통 등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말해주고있다. 임진왜란에 참여한 일본군은 지역별로 동원된 군사였다. 풍신수길(豐臣秀吉)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서 중앙집권적 인민 군사 체제를 수립하였다. 전란 중에동원된 3국의 군사 수는 다음과 같다.153)
임진왜란에 3국이 동원한 군사수는 모두 10만명 규모로 엄청난 숫자이다. 이러한 많은군사 수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터였던 조선이 직접적인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임란 초기에 경상우도의 미 점령지는 피난민의 증가. 계속된 전투수행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기의 일본군 편성은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들어 온 일본 군사는17만 여 명이었다. 일본군은 한양후퇴 이후에도 경상우도에 많은 피해를 입게 하였다. 한양 후퇴의 결정적 이유는 군량미의 부족때문이었다. 1594년 초에일본군의 잔류 병력은 서생포 6,40명, 임랑포 2,50명, 기장 2,00명, 동래 6,00명, 부산 6,00명, 김해 6,00명, 가덕도 2,80명, 안골포70명, 웅천 10,00명, 거제도 8,00명 모두 43,00명이었고이후 1595년경에는 2만 여명이 부산 인근에 잔류하였다. 임진란 휴전 중에도 경상우도 지역은 계속해서 일본군의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고 있었다. 철수했던 일본군은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육군 15,00명, 수군 7,20명을 파견하고 조선에 잔류하고 있던 2만 여명을 합해 14만 여명의 군사를 편성하여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2) 임진란의 시대 구분
제1기 : 1592.04~1592.06 → 지도1
제2기 : 1592.06~1592.10 → 지도2
제3기 : 1592.10~1593.06 → 지도3(명나라 군사 진출ㆍ후퇴)
제4기 : 1593.06~1596.05 → 지도4
미증유의 전란인 임진왜란 초에 민중의 전위부대로 일어난 의병은처음부터 관군과 대립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특히 평시부터 민원의 대상이 되고 전시에 국사를 그르쳤던관군의 지휘자인 방백ㆍ수령들은 모두 국적(國賊)으로 단정하여이들을 먼저 처단하려하고 의구시하였다. 그러므로 점차 의병장을 통제하고 관군에 흡수시키기도 하였으며, 한편으로 제재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군관이 붕괴된 전쟁 초기에는오직 의병이 왜군을 막았으며 또 실제 그들의 힘으로써 국가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의지원이 이루어지고 관군의 진용도 점차 정돈됨에 따라 전쟁의 주도권이 명나라 군대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년동안 경상도 지방의 의병은 대개 초야에 일어난 의병, 수령이 모군한 의병, 조관이 소모관의 명칭을 띠고 기병한 의병으로 구분되며, 또한 승려의병(승군)도 있었다. 의병의대표적인 세력은 초야에서 의병으로 관의 소모(召募)를 기다리지않고 자진하여 창의한 민중의 용사였으며, 그 지도자인 장수는 대개 유생 또는 유생 출신의 전직 관료들이었다. 임진란의 피해가 가장 컸던 경상도 지역은 임진란 제3기 (지도3)까지 왜군에게 점령되었다가 회복된 지역도 있었지만 전쟁 시작이후 1년 남짓하게 왜군에게 점령당한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의병 활동에 있어서 의병과 관군의 알력 및 대립에 대해서는전에 언급한 바 있다.
가장 큰 문제의 하나는 관권과의 알력이었다. 의병을 주도한 재지사족(在地士族)과지방 수령과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그것은 관군의 거듭되는 패전으로 인하여 수령이 신망을 잃었기때문이다. 수령 또한 재지사족의 의병 활동을 통해서 향촌지배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데 불만이 있었다. 특히 재지사족은 패전의 원인을 수령의 탐학에서 결과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임란초기 영남지방 수령들은 대부분 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수령과 의병의 알력을 일부 정부가조장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잘못된 장계(정보 등)를 믿고 탐학하고, 싸우지도 않고 도망간 지방관을 두둔하거나 도리어승진시키고 있었다.
3) 조선군의 대항과 의병조직
(1) 임란 직전 향촌 사회의 실정
임란 직전까지 제도의 혼란이나 지배층의 분열은 단순히 그자체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하층 백성들의 삶의 문제와 직결되었고, 어려운 형편은 말로형언할수 없었다. 여기서 전란 피해지역의 중심에 있었던 경상도의 몇몇 사정만 살펴보기로 한다. 검토 대상은 충청도 단양군과 경상도 언양현의 경우이다. 두 지역의보고 근거 자료는 다음과 같다.154)
단양 : ① 157년군수 황준량 보고서 진민폐십조(陳民弊十條)
② 1579년(선조12) 군수 황응규의 보고서 단양군진폐소(丹陽郡陳弊疏)
언양 : 1567년(명종2) 현감 임훈 보고서 언양진폐소(彦陽陳弊疏)
단양 ①의 보고 내용 요약
■오늘날 피폐함이 극에 달해 생계가 어려워지고 공역(供役)으로파리해진 백성이 40호도 차지 않고 있다.
■한 집이 10호의 부역을 부담하고 한 장정이 1백 사람의임무를 감당하게 되어……
■단양 고을은 풍년이 들어도 반쯤은 콩을 먹어야 하고, 흉년을 만나면 도토리를 주워 연명
■본 군의 병역은 26명입니다. 오늘날 겨우 13명이 남아 있으나 단정(單丁)이고보솔(保率) 봉족(奉足)이 없어 13명 모두 번상할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빈 장부만 걸어놓고 있습니다.
■도망간 자의 공역(供役)은 일족(一族)에게 황전(荒田, 공물)은 없는 이웃에게 나누어 책임을 분담시켜 부세를 징수하여 기필코그 수를 채우려 하니 10묘의 농사로 어찌 배를 채우고……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단양의 인구가 40호에 불과할 정도로 피폐되었는데 1450년경의 단양의 호수는 235호(세종실록지리지)인데 10년 사이에 20호가 도리어 감소하고 있다. 백성들이 부담해야 하는 것은 병역 의무인 군역(軍役)과 토지세인 전세(田稅), 각종의특산물을 바치는 공물(貢物) 환곡 등이 가장 큰 것이었다.
언양의 경우에는 수군(水軍)인데 원래 책정된 96명 중에서 남아 있는 것은 507명이었다. 이렇게 군정이 감소한 이유는 군역 부담자의 사망과도망 때문이었다. 왜구는 이상과 같은 상황 아래에 있는 우리나라를 침입해 오자 관군은 일시에 붕괴되고, 우리 강토는 초토로 변하였다. 이로 인하여 적은 10일 이내에 부산에서 언양, 경주,영천 등지를 거쳐 충주에 이르러 침략 행위를 마음대로 행하였다. 이것은 그동안 거의 항전이없었다는 증거이다.
(2) 조선군의 군사적 상황
임진란 직전 경상우도의 군사 제도는 전국의 변화 추이를 보여주고있었다. 방어 체제는 진관 체제(鎭管體制)에서 을묘왜변 이후 제승방략체제(制勝方略體制)로 전환되었으며, 인구수의 지속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실제 군역은감소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의 진관 체제는 세조 연간에 거의 정비되었다. 경상도의 경우 내륙 지방과 연해 지방이 확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육군의경우 경상우도는 상주, 진주, 김해진관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진관 체제의 특징은 군사방어 조직이 생활권역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경상도에서는 낙동강의 좌도와 우도의 지리적 조건을 중시하여 군사 체제가 마련되었으며 경상우도 안에서도지리적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누어진 생활권역을 중심으로 진관이 설정되었다. 그런데 진관 체제가 제승방략체제로바뀌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조선 전기에 군정(軍政) 면에서 나타난 방위 체제의 변화로 발생한 지휘 체계의 혼란을들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방위 체제는 전시와 평화시를 막론하고 진관 체제에 의해 지방군이 국방을 담당하는체제였다. 그러나 방군수포(放軍收布)와 대립(代立) 현상으로군사 수의 감소가 발생하자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포괄적인 전략보다는 현실적 군사 운영 방식인 제승방략(制勝方略)이란 체제를 도입하였다. 사실 이 제도는 포납화(布納化)로 인하여 군사 수의 확보가 용이하지 않게 되자 불가피하게나타난 현실적인 방어 체제였다. 그러나 제승방략 체제는 진관별(鎭管別)로 하던 자전자수(自戰自守)의원칙을 포기하고 가용 병력을 모두 동원하는 총력 체제였기 때문에 전선이 무너지면 후방이 일시에 무방비 상태에 빠지게 되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류성룡도 제승방략이 경상도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지만시정되지 못하였다. 그는 제승방략이 여진 토벌 같은 국지전에서는 이미 지역 실정을 고려한 분군법이 시행되고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만, 방어 지역이 넓은 영남에서는 불가능함을 주장하였다. 그의 우려대로 일본과의 전면전에서 제승방략체제의 폐해를 가장 먼저 당한 곳은 경상도였다.
군역제의 변동으로 인한 군사 수의 감소를 반영한 것은 불가피한것이었다. 종래 경상도는 김해, 대구, 상주, 안동, 진주 등 6개의 진관이 적과 대치하고 있어 한 진이 무너지면 다른 진이 대신하여 싸움으로써 일시적인 붕괴의 위험은 적었다. 그러나 군역의 포납화(布納化)와지방 수령들의 부패로 방군수포(放軍收布)와 대역납포(代役納布) 현상이 일반화 되었다. 이러한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사림(士林)들은 납포제(納布制)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포(布)의 불법적인 징수와 피역(避役)으로 인한 모순 때문에 선조 연간에 이르면 군사는 편제상에만존재하고 실병력은 거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임진왜란 전에 있었던 병란을 통해서도 총체적인 군정의 문란을지적할 수 있으며, 군사운영에서 나타난 문제점 또한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다.
① 군사를 군사 목적 외에 사용하는 문제 – 자신의 집을 짓는데 군사를 이용
② 수군을 개인 연못(제언)을 축조하는데 동원
③ 군사 운영상의 문제로서 번상(番上)의 거리가 먼 것으로 인한 고통, 불편
④ 조선 전기 수군(水軍)의 과다
경상우도의 경우 연해안 지역이 넓었기 때문에 수군의 숫자가많은 것은 이해가 되지만 해당 지역을 지킬 훈련된 영진군(營鎭軍)의숫자가 너무나 적었다. 이것은 육전(陸戰)에서의 어려움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며, 조선 전기의 방어 체계가 북쪽의여진 토벌과 남쪽의 왜구 침략에만 대응하여 편성한 결과 때문이다. 이것은 육지에서 전면전이 전개 될경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3) 군사 수의 감소
조선 전기 전국의 군역 자원은 성종 연간에 정군(正軍) 13만 명, 봉족(奉足) 3만명 합계 50만이었다. 급속한 군사 수의 증가는 세종ㆍ세조대의 군사제도의 정비 때문이었다. 조선전기에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였기 때문에 양인 이상은 모두군역 부과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군사 수는 1509년301,280명이었다가 임진왜란 직전에는 19,407명으로축소되었다.
이것은 15세기의보법(保法)에 따른 군역제의 근본적인 변경 때문이었다. 노비, 승려로 인한 병역 감소, 양인들의유리ㆍ도망으로 인한 군역 자원은 오히려 축소되었다. 그러나 국가는 방어상 전체 군대를 유지하려 하였고이에 번가(番價)의 징수를 위해 족징(族徵), 인징(隣徵)이 적용되면서 군역 체제는 붕괴 직전에 있었다. 조선 전기 경상우도의전체 정군은 1454년에 1,408명이었다. 그중에서 영진군(營鎭軍)은 1,323명뿐이며, 선군(船軍)이 8,36명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것은 경상도가 해안 방어를우선적으로 고려한 군사 편성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경상좌도와 우도의 군사 수는 1454년에 1,287명과 1,408명으로 합계 2,695명이었다. 147년 경상도의 정군은 35,517명, 봉족 94,810명으로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종 연간에는 10여만명의 군사 중 2만여 명만 파악되고 있다. 이것을 당시 방어해야 할 3개소에 3교대로 나누면 1개소에겨우 10명씩만 할당될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실제 군사수는 8천여 명뿐이었다. 이처럼 실제 군사 수와 국가에서파악한 군사 수는 1/10에 불과하였다. 한편 선조 초년경상도의 정호(正戶)는 7만, 솔정(率丁)은 20여만으로 파악되었지만 문제는 허수가 여전히 많았다는 점이다.
군역의 허수로 인한 징수 때문에 인징(隣徵)과 족징(族徵)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것이 유민의 발생을 촉발시키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처럼군역의 허수는 실제 군사 수의 허실을 초래하였다. 군역이 각 지역에서 감소하고 있는 원인은 백성들의도망 때문이었다.
경상좌도 언양현의 경우를 보면 1454년 시위군(侍衛軍) 7명, 영진군(營鎭軍) 4명, 선군(船軍) 156명으로 207명의 군사가 있었으며, 1567년에는 원호(元戶) 249호에 원정(元定) 96명이었으나 실제 507명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군역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은 국지적 현상이 아닌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지방 군ㆍ현의 호구와 군역이 감소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도망자의 쇄환(刷還)을 강행하였지만 선조대로 내려갈수록 군적은 더
욱 허구화되었다.
4. 임진란과 의병
1) 의병의 의미
일반적으로 의병이라고 하면 국난에 즈음하여 자발적으로 일어나서적과 싸운 민병(民兵)을 말한다. 그러나 기존의 민병에서는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에 대해 광의의 민병이라는 개념보다는 협의의 충의군(忠義君)으로만 이해해 왔다. 조선시대 16세기의 과도기성을 이해한다면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은 의병 운동에 참여해 활동한 상하 계층을포괄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민병이 적합하다. 그러므로 의병의 개념을 다각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임진란 시기의 의병은 정규군인 관군 이외에 승군(僧軍)등을 넓은 뜻으로 의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의병장을 중심으로 양반, 상민또는 천민으로 구성되는 의병과는 구별ㆍ호칭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155)
사전적 어의로서 의병의 개념은 의병은 폭도를 금하고 난리를구하는 자이며 관병이 아닌 지방민이 단결하여 무기를 스스로 조달하고 관의 봉록(俸祿)을 받지 않고 국토 방위를 맡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서이러한 의미의 의병 개념이 뚜렷해진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였다. 그 이유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성리학(性理學)이 학문으로 뿐만 아니라 민간 생활에 까지 뿌리를 내리게 되면서실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성리학의 이념에 충실한 성리학자들 주도로 의병이 활발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임란시기의병 운동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의병의 자발성(自發性)과자립성(自立性) 활동목표,창의동기(倡義動機)를 검토해야 한다.
① 의병의 자발성과 자립성의 측면이다. 의병과 관군을 나누는 기준은 자발성이 중요하였다. 의병은 관권에의하지 않고 자모(自募)에 의한 것이었고, 관군은 수령의 조발(調發)에의한 것이었다. 의병은 관군이 아닌 의병장의 지휘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관군에 비하여 어느 정도 자유로울수 있었다.한편 의병은 소모(召募) 방법에 따라 자모의병(自募義兵)과소모의병(召募義兵)으로구별할 수 있다. 특히 임란 시기에는 초유사(招諭使)156)에 의한 소모 의병도 많았으며소모(召募)에 의한 강제성을 띤 경우도 간혹 있었다. 엄격한 의미에서 전자의경우가 본래의 의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의병들은 원칙적으로 무기와 군량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으며,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② 의병의 활동 목표나 창의 동기의 측면이다. 이런 입장에서 의병은 향토를 중심으로한 지역 방위에 목표를 둔 향병(鄕兵), 한성 수복 및 실지(失地) 회복에목표를 둔 국가 방위적 성격을 띤 충의군(忠義君)으로 나눌수 있다. 전자의 예로는 영남지방과 함경도의 의병 활동을 지적할 수 있고, 후자는 호남 지방의 의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일차적으로일본군의 직접적인 침입을 받으면서 기병(起兵)하는 경우와그렇지 않은 경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임란시기의 의병은 해당 지역의 사정에서일차적인 기반을 마련하여 형성ㆍ활동한 지역 방위군, 즉 향병이었다. 그단적인 예는 의병 운동이 가장 두드러졌던 경상도와 함경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경상우도는 일본군의최초 침략지였지만 어느 지역보다 의병 운동이 빨리 일어나고 적극적으로 진행됨으로써 의병 운동을 선도하고 국난 극복에 기여하였던 지방이다. 아울러 경상우도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성리학이 보급되어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의 향당적인 기반이 광범하게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경상우도의 의병운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가는 임란 의병 운동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함경도는왕조로부터 지역차별을 받았던 지방이지만 의병 운동이 전개된 것은 지방 수호를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의병과 개념의 차이가 약간 있는 향병(鄕兵)의 역사적 유래와 조선 시대의 향병의 구체적인 사례를 보기로한다. 임란 시기의 향병은 중국사의 향병이란 개념과 차이가 있었다. 조선은중국(송나라)과 같이 상시적인 제도로서의 향병은 존재하지않았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조선 후기에 향병이 지방에서 번상하는 군병(軍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향병과 관련하여 주목 할 사실은 류성룡이 군제 개혁에서향병제의 실시를 주장한 점이다.
156) 초유사(招諭使) : 조선 시대 임시 관직으로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불러 모아 타일러 안정시키는 책임을 맡았다. 임란 초기 학봉 김성일은 초유사로서 활약이 매우 컸다.
2) 전국의 의병장
왜군의 속전속결 침략 전쟁으로 선조 국왕이 도성을 떠나 피난길에올랐다는 소식에 전국은 혼란 속에 빠지고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했다. 그동안 손쉽게 조선관군을 격파했던 이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의병들로 인하여 조선 정복의 꿈을 쉽게 이룰 수 없었다. 이때국왕은 의병장의 전공에 따라 벼슬을 주고 격려하였고, 전란 수습과 동시에 공신 책봉에 나섰다. 호남의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 호서의 조헌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관군과 의병이 서로갈등을 일으켰고 수신(帥臣)들이 거개가 의병장과 화합하지못했는데 다만 초유사 김성일이 중간에서 요령있게 잘 조화시켰기 때문에 영남의 의병이 그 덕분에 대우를 받아 패하여 죽은 자가 적었다.
국왕이 도성을 포기하고 피난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호남의병장 김천일이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였다. 3도의 군사가 무너진 뒤로부터 도성으로 향하는 주변에는완전한 살육과 노략질을 당했는데, 적에게 붙좇아 도성에 들어간 자도 많았다.
김천일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도성을 향한다는 소식을들은 국왕은 그를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하는 동시에창의사(倡義使)라는 칭호를 내렸다. 김천일의 의진이 수원에 이르러 독산고성(禿山古城)에 웅거하여 적에게 아부한 간민(奸民)을 잡아 목을 베니 돌아와 따르는 기호 지방의 사민(士民)들이 많았다.
곽재우(郭再祐)는 의주와 제주 목사를 지낸 곽월의 아들로서 일찍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19세부터지혜를 익히고 병서에 통달했다. 27세 때 아버지를 따라 중국을 다녀왔고, 41세 때 임란이 일어나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46세 때 정유재란이일어나 방어사의 직을 띠고 창녕의 화왕산성을 지켰으며, 48세 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부임했다. 62세 때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전 이조참의 이정암이 황해도에 의병을 일으키니 왕세자가 그를초토사로 임명하여 연안성을 지켰다. 왜병과 싸운 전공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제수되었다.
전 동래부사 고경명(高敬命)은 광주(光州)에 살다가적이 도성에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류팽노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라도 사람에게 격문을 보내었다. 당시 60세의 연로한 문관이었으나 주위의 추천으로 의병장이 되어 의병 6천명을모집했다. 전라도 지역 여산, 진산, 금산으로 진영을 옮겨가며 왜병과 전투를 벌였다.
조헌(趙憲)은 처음에 수십 명의 유생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공주와 청주 사이에서 장정을 모집하였으며, 순찰사와 수령이 관군에게 불리하다고 반대하는 것을 설득하였다. 청양현감 임순, 공주 목사 허욱이 영규대사로 하여금 승군을 거느리고 조헌을 돕게 하였다. 조헌은 청주, 온양, 서원, 금산 등지에서 전과를 올렸다.
임진란에 있어서 비록 전과는 올리지 못했지만 관군으로 충주전투 신립, 상주 전투 이일, 진주 혈전 김시민, 행주 대첩 권율, 평양 탈환 류성룡, 명량 대첩ㆍ한산도 대첩 이순신의 공적을 거론할 수 있다. 임진란제3기에는 명나라의 참전으로 왜병들이 남해안으로 물러났다. 의병장들은함경도 길주의 정문부, 금강산의 사명당(승군), 창녕의 성안의, 영산의 신갑, 광주의김덕령, 고령의 김면, 수원의 홍언수, 홍계남, 묘향산 서산대사(승군) 활약이 있었다.
3) 관직의 제수와 통제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의병장들은 초기의 일부를 제외하면대부분 관직을 제수 받고 관군이 되었다. 임진란이 경과되면서 전쟁 극복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고 국가의통제를 받지 않는 의병이 문제시되었다. 봉건 왕조의 입장에서는 단일 통솔권의 확립이 절실한 과제여서이것이 의병의 관군화로 나타났다. 임진란의 의병장들은 대부분 관직을 제수받았고 그 시기는 1592년 전쟁 초기부터 1598년까지이다. 초기에는 국가에 의한 의병 장려책이라는 의미가 있었지만 후기에는 의병 통제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주요 의병장들이 관군이 협조ㆍ지원을 받으면서 활동하였던 것은직접적으로 관직에 제수되고 난 이후부터였다. 이러한 모습은 의병장들의 출신 지역과 의병에 대한 인식에따라 달랐지만 대부분의 의병장들은 관직 제수를 거부하지 않았다. 의병에 대한 관군화 조치가 있자 김면, 최경회 등 상당수의 의병장들이 관직을 수용하였으며, 휘하의 의병들도관군에 편입되었다. 1594년 4월에는 여러 도의 의병을없애고 김덕령에게 익호장(翼虎將)이란 호(號)를 주어 의병을 일괄적으로 소속시켰다. 이후 의병의 독자성을 상실되었고 김덕령에게 소속시킨 의병의 수는 수천에서 수백 명으로 감소되었고, 이것도 군량의 조달이 불가능하여 많은 수의 의병을 강제로 귀농시켰다. 이러한조치는 무엇보다도의병이 반란군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의병장에게 관직을 제수한 시점이 소모의병(召募義兵)을 적극적으로 장려한1592년 6월 이후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치가초기 순수 의병 운동을 근왕병(勤王兵)으로 변질시키는 요인이되었다. 따라서 생존을 우선시하면서 의병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의병의 하층부는 의병 집단에서 점차이탈하였다. 의병장과는 달리 의병의 주축이었던 의병 하층부민들에게 아무런 대가도 주어지지 않아 반침략운동에서 반관(反官)적 운동으로 방향이 바뀌고 1594년부터 1596년 사이에 각지에서 전개된 반란으로 변질되고있었다.
의병 해체에 앞서 의병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여러 측면에서나타나고 있었다. 먼저 의병에 대한 국왕(선조)의 부정적 평가이다. 의병을 외침 극복위한 동력으로 파악하던 입장에서불과 반년 만에 봉건 체제 유지에 방해가 되는 세력으로 평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초기 의병장들은 각 도 또는 군ㆍ읍에서 명망 있는인물로서 향촌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졌으나 후기에 이르면서 의병을 사칭하고 우후죽순처럼 의병을 일으키고 사리를 채우는 사이비 의병장도 나타났기때문이다. 다음으로 임란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비변사(備邊司)의 대신들도 의병에 대한 부정인 평가를 보였다. 이항복(李恒福)은 의병을 관작이나 탐내는 무리라고 극단적으로 평가하였다.
의병 해체를 위한 첫 번째 조치는 1592년 1월 남방의 의병을 우성전(禹性傳)으로 하여금 통제하도록 하고,이어서 1593년에 경기ㆍ충청ㆍ전라도의 의병을 권율에게 예속시 키거나 각 순찰사로 하여금통솔하자는 논의가 거듭되었다.
4) 관군과 의병의 갈등과 조정
임진란은 우리 민족이 당한 가장 큰 국난이었다. 이 국난을 극복한 주체는 그 당시 정규군인 관군과 구원군인 명군보다도 민중의 의용군인 의병이었던 것이다. 임란이 시작되면서 국방을 담당한 관군은 쉽게 붕괴되어 전국토가 왜병의 점령 하에 들어가게 되니 지방 의사들이솔선하여 창의(倡義)하고 백성들이 이에 호응하여 왜병 정벌에앞장서서 침략군을 물리치고 국토를 보전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학봉 김성일은 임란기 나라가 매우 위급한 최전선 영남우도에서 초유사와 관찰사를 역임하면서구국 활동에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퇴계의 수제자로서 안동 임하현 출신이다. 그는 승문원, 예문관, 춘추관, 경영관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특히 영남 사림의 숭상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사람들의 의병 봉기에 힘이 되었고 관군과 의병간의 대립에 있어서 융화ㆍ화합할 수 있었다. 동시에 정계에서그는 동인(東人)의 수장격인 위치에 있었다. 통신부사로 일본에서 돌아온 김성일은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선조 25년임란직전에 형조 참의에 특배되었고, 4월 1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제수되었다. 그러나 임 란이 일어나자 통신사 일에 전세 보고를 잘못한 건으로 5세 때 나명이 우역편으로 전해지자창원에서 스스로 한양으로 가던 중 충청도 직산에서 갑자기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었다.157)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관군이 맥없이 붕괴되고 흩어지자 각지에서창의 거병한 의병진이 왜군 격퇴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따라서 의병장들의 활약이 커지자 지방의 군수권을가진 감사와 병사(兵使)가 서로 의병진을 시기하고 견제하려는갈등이 없지 않았다.
경상우도에서 첨예하게 대립된 것은 의병장 곽재우와 감사(監使) 김수(金睟)와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의병장 곽재우는 전쟁이 일어나자 4월 24일 의령에서 전국 최초로 거병하여 많은 공로를 세웠다. 무엇보다도 의령에서 낙동강의 정암진은 막아 왜군이 곡창지대인 호남 지방으로 진출 못하게 한 것은 임란기의 큰공로라 할 수 있다.
경상 감사 김수는 경상도의 병권을 장악하고도 왜군을 맞아피하고 싸우지도 않으면서 열읍에 공문을 보내 의병장에게 예속된 군병을 많이 빼앗아 갔다. 그래서 의병진이붕괴할 지경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이 크게 분노하고 곽재우는 공문을 보내 김수를 죽이려고하였다. 이 격문을받아 본 감사 김수는 주저하다가 자구책으로 곽재우는 역적과 다름없다고 정부에 보고하였다. 의주에 가있던 비변사의 관원들은 경상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일들을 알 수가 없었고 오히려 곽재우를 의심하기도 했다. 국왕선조는 두 사람의 갈등에 대해 결정을 못하고 김성일에게 조정하도록 했다. 김성일은 양자에게 서신을 보내어서로 화의하기를 강력하게 권했는데 이 때 김수는 근왕(勤王)한다는명분을 내세워 경기도 용인까지 갔다가 패배하자 그에 대한 분노가 한층 높아갔다.
김성일은 장계를올려 곽재우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고 김수는 즉시 근무지 영남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결국 두 사람은화해가 되었고, 이어서 곽재우는 김시민과 상호 협력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의병장 정인홍은 제용감정으로, 김면은 합천 군수, 박성은 공조 좌랑, 곽재우 유곡 찰방으로 제수하여 전공을 표상 하였으며, 판관 김시민을 발탁하여 진주 목사로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