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은 명종 17년임술년 7월 19일 진시(辰時)에 아버지 몽득(夢得) 어머니월성 박(朴)씨를 부모로 하며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선생이 태어난 곳은 의성현 하천(下川) 신례동(新禮洞) 자택이었다.
선생의 윗대 조상은 거제도(巨濟島)ㆍ아주(鵝洲) 신영미(申英美)인데 왜구들의 계속된 침범으로 섬 전체를 비워주고 거창(居昌) 지역으로 집단 이주했다. 4대조윤유(允濡)때 상주군(지금은의성군) 단밀면 청신동으로 이주하였고, 5대조 우(祐)2)는그 부근의 상주 만경산(萬景山) 기슭과 그 부근 일대가 생활터전이었다. 9대조 시생(始生)은 상주에서 안동 풍북면(豊北面) 정사동(鼎寺洞)으로 이사 가서 1대조한(翰)이 안동에서 의성현 신례동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곳에서오봉 선생이 태어난 것이었다.
오봉 선생이 언제부터 봉양면 구미동으로 와서 살았느냐는 큰의미가 없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위해 다른 지역을 돌아다녔고 구미동은 관직을 은퇴하고 마지막 1618년 7월부터 작고한 1624년까지구미동과 건넛마을 천동(泉洞)의 제사에서 거주했는데 구미동은오봉의 아버지 몽득(夢得)과 3촌 몽필(夢弼, 한성판윤에 증직)이 지금의 ‘못안[池內]’이라는 곳에서 살기 시작했다.오봉 선생 나이 8세인 1569년 12월에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하였다. 선생의 몸이 야윌 정도로 슬퍼하는것이 어른과 같았다. 태어난지 겨우 10개월 된 어린 누이가있었는데 선생은 동생을 안아주고 업어주면서 슬피 울기를 그만 두지 않았고, 늘 자신이 거처하는 방안에두고 직접 유모를 구하여 젖을 먹였다.
9세 때 한번은 의흥(현재 군위군 의흥) 외가를 왕래하며 어머니가 거처하던 방을 보고는 문득 벽을 맴돌며 목놓아 우니 지켜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오봉 선생은 10세 때 계모 오부인(吳夫人)을 정성껏 섬기며 잘 따랐는데 어린 나이로서 누구나 해내기어려운 일이고 또한 남들이 미처 몰랐던 점이다. 오봉은 장성하여 23세에결혼하고, 28세 때 과거에 급제한 후에도 계모에 대한 효심은 늙어 죽는 순간까지 변함이 없었다. 오봉 신지제는 아버지 신몽득(申夢得), 어머니 월성 박씨(月城 朴氏) 사이에서태어난 3남 2녀 가운데 차남이었고, 형님은 지효(之孝)3), 아우 지신(之信)4), 누이는 김희맹의 부인이다.
이복동생으로 고창 오씨 계모가 낳은 지의(之義)5), 지행(之行)이 있고 그아래 지경(之敬)6),지훈(之訓)이 있다. 지행은 한성 판윤(증직)을지낸 3촌 몽필(夢弼)의후사로 나갔고 지훈은 요절했다.
오봉 신지제 선생은 창원 부사를 마지막 관직으로 하고 고향의성 구미로 돌아올 때는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아들 홍망(弘望)7)이 독자로 태어났고(선조3, 160.5.7.) 그때 오봉 나이 39세이었다. 고송(孤松) 신홍망은 인조 17년(1639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젊은 나이는 아니었다. 고송은 인조, 효종 대에 걸쳐 승정원 주서ㆍ성균관 전적ㆍ병조 및 예조좌랑ㆍ사간원 정언ㆍ전주판관ㆍ사헌부 지평ㆍ울산 부사ㆍ풍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대간으로 직언을 서슴치 않았으며, 도승지이시매(李時楳)의 모략으로 효종의노여움을 사서 한 때 압록강변벽동(碧潼)으로 유배를 갔다. 전주 역전에는 아버지 오봉(梧峯)ㆍ고송(孤松) 부자의 선정비가 서 있는데 두 분은 시기는 다르지만 우연한일로전주 판관을 각각 제수 받아 선정을 베푼 적이 있다.
고송 신홍망은 아들 셋(한로(漢老), 한걸(漢傑)8), 한백(漢伯), 딸 10명을 두었다.
시조 신영미의 16세손자인 한노, 17세손 숙범(叔範), 18세손 분구(賁龜), 19세손도삼(道三)9), 20세손 중인(重仁)으로이어지고 있으며 중인 선생의 동생 근인(近仁,1727~1791)이통덕랑(通德郞) 벼슬을 했고 필자의 7대 조부이다. 7대 조모 오천정씨(烏川鄭氏)는 친정이 가까운 군위군 고로면 양지동 앞산에 무덤이 있고 친정아버지는 승지(承旨) 관직을 지냈다. 필자의 부모 산소를 그곳으로 모셔서 7대 조모 오천 정씨는 지금까지 후손들의 성묘를 받고 계신다.
의성 구미의 오봉 종가에서 오랫동안 보존해 온 고문서 등은한국국학진흥원과 의성조문국 박물관에 기탁하였는데 조문국 박물관에 오봉 신지제부터 여러 후대에 이르기까지 호적에 관한 관청의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있다. 신홍망의 호적 기록은 다음과 같다.10)
2) 신우(申祐) : 호는 퇴재(退齋), 본관은아주(鵝洲)이다. 고려충혜왕(忠惠王) 때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봉상ㆍ사헌부장령ㆍ전라도안렴사를 거쳐 호군(護軍)에 이르렀다. 상주의 속수서원(涑水書院)과청주의 검암서원(儉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술은 『퇴재선생실기(退齋先生實紀)』 2권이 있다.
3) 신지효(申之孝, 1561~1592) : 자는 달부(達夫)이고, 호는 응암(鷹巖)이다.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1592년(선조 25) 왜진왜란 때 왜적의 칼에 맞아 죽어가면서 부모님을 더 이상 모시지못하게 되어 불효를 저지르게 되었다며 한탄하였다. 유고로 1권의『응암실적(鷹巖實蹟)』이 전하는데, 주목할 작품으로 「혈서습록(血書拾錄)」 등이 있다.
4) 신지신(申之信, 156~1632) : 자는 원부(元夫), 호는 독현(独峴),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김언기(金彦璣)의문인이다.
5) 신지의(申之義, 157~1642):자는 의부(宜夫), 호는 괴헌(槐軒), 본관은아주(鵝洲)이다.
6) 신지경(申之敬, 1595~160) : 자는 직부(直夫),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장현관(張顯光)의 문인이다.
7) 신홍망(申弘望, 160~1673) : 자는 망구(望久), 호는 고송(孤松), 본관은아주(鵝洲)이다. 1639년별시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ㆍ지평ㆍ정언ㆍ풍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52년 사헌부 지평 재임시 탄핵되어 2달간 벽동으로 유배되었다. 저서로는 孤松集이 전한다.
8) 신한걸(申漢傑, 1625~1697) : 자는 시중(時重), 호는 삼지당(三知堂), 본관은아주(鵝洲)이다.
9) 신도삼(申道三, 1695~1742) : 자는 사달(士達), 호는 독성당(独醒堂),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1727년증광시 생원에 합격하였다.
10) 오봉 종가에는 시조 신영미(申英美)로부터 15대 손자 신홍망때 만든 고문서(160년대) 보첩(譜牒)이 보존되고 있다.
강희(康熙) 5년(166) 신홍망이 올린 호구 단자에 의거하여 의성현에서 발행해준준호구이다. 호적은 3년에1번 개수(改修)를 하게 되는데 이를 위하여백성들이 자가(自家)의 호구 상황을 적어 보고하는 호구단자 2통을 작성하여 올리면 관(官)에서는확인ㆍ정정하여 1통은 원적을 개수하기 위하여 관에서 보관하고 1부는백성에게 환부(還付)하게 된다. 한편 백성들은 소송시의 첨부 자료로서 또는 노비 소유의 자료로서, 혹은가문 유지의 자료로서 관으로부터 원적에 준해서 등급 받는 ‘준호구’가있다. ‘호구단자’는 백성이 관에 올리는 형식이고, ‘준호구’는 관에서 등급 받는 형식이나 두 가지를 혼용하여쓰는 경우도있다.
강희 5년(166) 신홍망의 준호구를 살펴보면, 금뢰면(金磊面) 구미리(龜尾里)에 거주하였으며 통훈대부 전 종부시정 겸 춘추관 편수관(通訓大夫前宗簿寺正兼春秋館編修官)의 지위이며, 나이는 67세때이다. 본관은 아주(鵝洲),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지제(之悌), 조부 몽득(夢得), 증조 응규(應奎)이며, 외조(外祖) 함안 조씨로조지(趙址)이며, 아내는영천 이씨이다. 이에 아내의 4조(父ㆍ祖ㆍ曾祖ㆍ外祖)를 기록하고, 노비도기록하였다.
강희 56년(1708) 12월 신분구가 41세 때의 준호구이다. 분구의 본관은 아주(鵝洲),아버지는학생 숙범(叔範), 조부 선교랑(宣敎郎) 한로(漢老), 증조부 통훈대부 행 사간원 정언(通訓大夫行司諫院正言) 홍망이며, 아내는옥천 김씨이다. 함께 거주하는 자로는아우 태구(泰龜)와 제수, 아들 셋은 각각 도연, 도유, 도홍으로 개명하였으며 자부는 예안 김씨이며 10여 명의 노비를 기록하였다.
신제원의 호적
도광(道光) 26년(1846) 신제원(申濟遠)의 26세 때 준호구이다. 제원의본관은 아주, 아버지는 학생 휴룡(休龍), 조부는 학생 조응(祖應), 증조부는정옥(鼎沃)이다. 외조는풍산류씨로 화조(華祚)이며,아내는 풍산 류씨이다. 동거인으로 계모 이씨가 있으며, 솔자(率子) 효상(孝祥), 솔제(率弟) 달원(達遠)과 귀의(貴宜)가 있다. 제원은 상원(相遠)으로 개명하였고, 이어 노비를 기록하였으며 후반부는 탈락되었다. 1849년 솔자 효상은 관익으로개명, 1852년 솔자 효상이 관익(寬翼)에서 관익(寬益)으로 변경, 1853년 솔제 귀의의 이름이 성원(聲遠)으로 변경, 솔제달원과 성원이 혼인하여 제수 이씨와 남씨가 추가되었다.
2. 본관(本貫)
아주 신씨의 관향(貫鄕)인 아주(鵝洲)11)는 옛날 거제군(巨濟郡=巨濟島)의 한 현단위(縣單位), 3개 가운데 아주현(鵝洲縣)의이름이었다. 이 지역의 책임자 관리는 신라와고려 때에 다르다. 고려때는 현감(縣監)보다 한 단계 높은 현령(縣令)을 두었다.
고려 현종 12년에는왜구 때문에 땅을 잃고 거창현(巨昌縣) 의 속현인 가조현(加祚縣)에 백성들이 거주하였다. 충렬왕때는 관성(管城)과 병합하였고 곧 현(縣)을 파(罷)해버렸다. 조선시대 태종(太宗) 14년에는 거창과 거제를 병합하여 제창현(濟昌縣)이라고불렀고, 세종14년(1432)에는 옛 섬으로 환원시켰다.12)
왜구를 피해 아주와 송변(松邊)을 버리고 거창으로 옮겨온 사람들은 아주촌(鵝洲村)이라는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다. 고려 24대 원종(元宗) 때는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있었다. 삼별초는 고려의 최씨 무신정권 때 집권자인 최우(崔瑀)가 도둑을 잡기 위해 만든 야별초(夜別抄)를 좌우로 나눠 좌별초ㆍ우별초라 하고 몽고와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병사들을 모아 신의군(神義軍)으로 조직하여 만든 군대를 합쳐 삼별초라 불렀다. 이 삼별초는 고려의 관군과 몽고군에 의해 쫓기는 처지가 되어 남해안의 진도,멀리 제주도 까지 쫓겨 갔으며, 한 편으로 경상도 쪽 해안 섬으로 숨어들어 가기도 했다. 여기서 거제도도 그들 삼별초에 점거당하고 관아의 관리들과 주민들은 삼별초를 피해 육지로 빠져 나와 결국 거창으로모여 살았다. 이와 같이 옛 거제도는 빈번한 왜구의 침입과 삼별초에 의해 점거 당하는 수난이 많았고속현 아주도 폐현이라는 허망한 역사를 본 것이다. 옛 아주 지역은 1971년대우조선(大宇造船)이 들어서서 세계 굴지의 선박건조회사가자리 잡고 있다.
아주현에는 고려조에 와서 성씨(姓氏) 제도가 등장하자 토호 세력(土豪勢力)으로서 맨 처음 성을 갖는 수장(首長)이 있었다. 그 수장은 신(申)의 성을 취하였는바 후일 신영미(申英美)로 알려진 아주 신씨의 시조였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중앙집권이여의치 않아 산재(散在)한 각 지역의 호족 세력에게 현(縣)이나 군(郡)을 다스리게 하는 책임자를 두었는데 그에게 호장(戶長)이라는 관직을 제수하였다. 거제 관내 속현으로 아주현, 송변현(松邊縣), 명진현(溟珍縣)이 있었는데 이들 3개의현은 왜구 때문에 폐현이 되었고 아주와 송변의 사람들은 내륙 지방인 거창으로 이주해 갔다. 이들은 집성촌을이루고살았는데 아주에서 온 이주민의 사람들은 아주촌(鵝洲村)이라불렀다.
아주 신씨 선대의 기록에는 아주라는 말에서 글자로 표기하기는아주(鵝洲)라고 하였다. 이아주에서 ‘주’라는 한자는 섬이라는 뜻의 글자인 ‘洲’를 쓴 것이다.13) 그러나 동국여지승람 및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표기되는 거제의 지명 편에는 고을이라는 뜻의 ‘州’였고 거창의 지명 편에는 바로 섬의 뜻인 ‘洲’로 표기한 것이다. 과거에편찬자의 표기는 다르게 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고증하자면 아주현이 폐현되기 전에는 거제에서 분명히한 고을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느 고을처럼 고을이라는 뜻의 ‘州’로표기한 것이다. 이를테면 거제의 아주(鵝洲)라 하였다. 거창 지역의 아주촌(鵝洲村) 표기는 실제 아주라는 고을 이름으로 표기하기는 문제가 있다고 해서 짐짓 고을의 뜻이 아닌 섬의 뜻인 ‘洲’의 글자를 쓴 것 같다. 섬지역의 관아와 주민이 옮겨와 거창 지역에 한동안 정착한 마을 이어서 그런 의미를 두어 한자 표기를 거제와 다르게 섬의 뜻을 둔 글자를 사용했다고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거창 편의 고적(古跡)이라고 표기한 부분에 ‘아주촌(鵝洲村)’이란 글이 있고 가조(加祚)에는 거제도에 속한 아주현(鵝洲縣)이있었다는 내용의 설명이 있다.
3. 시조
1) 시조
아주 신씨의 시조는 신영미(申英美)이고 그를 시조로서 1세(一世)로 하여 상계(上系)는시작되었다. 아주 신씨(鵝洲申氏)의 발상지는 한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큰 섬 거제도(巨濟島)의 한 지역이다. 이 섬의 행정 명칭은 거제군이었다. 신라 때부터 군(郡)으로불러왔던 큰 고을이었고 여기에는 아주현(鵝洲縣), 송변현, 명진현이라는 3개의 지역 단위가 있었다. 아주현에는 고려조에 와서 성씨 제도가 등장하자 처음으로 성을 가지는 수장(首長)이 있었다. 그는 신(申)의 성을 가진 신영미(申英美)이며그가 시조이다. 고려조정에서는 중앙 집권이 쉽지 않아 각 지역의 호족 세력에게 현(縣)이나 군(郡)을 다스리는 책임자를 두었는데 그에게 호장(戶長)이라는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 관직은 향직(鄕職)이라 하였고 지방 관리는 향리(鄕吏)였다.
중앙에서 관직을 갖고 있는 벼슬아치들은 사족(士族)이라 하고, 향리의사람들은 이족(吏族)이라고 불렀다. 이족의 자식들은 중앙으로 진출하며 벼슬을 할 수 있고 또한 사족으로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었다. 호장은 중앙에서 내려 보내는 관리보다 비록 지위는 아래이나 그 영향력은 컸다.중앙 관리가 지역 통치를 하는데 호장에게 문의하고 또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다. 호장의 자식이있으면 나라에서는 동정(同正)이라는 벼슬을 내리기도 하고이런 벼슬을 음직(蔭職)이라 하는데 바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위상과 신분에 의해 벼슬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영미의 아들 진승(晉升)의 관직은 산원동정(散員同正)이고, 손자 득창(得昌)은 영동정(令同正)이었다. 산원은 고려 때 2군 6위(二軍六衛)에 소속된 정8품의무관 벼슬이다. 여기에 동정이라는 직위는 산원보다 높은 정5품의무관벼슬이고 대개 향리(鄕吏)에게 제수되었다.
고려에서 권지호장(權知戶長)은 고구려, 백제, 신라삼국시대의 관직이다. 권지(權知)는 관리시보(官吏試補)의뜻을 가지고 있으며 임시로 어떤 공무(公務)를 관장한다는뜻도 있다. 호장직에 있으면 자손들이 과거 시험에 나갈 수도 있고 중앙 관서에 진출하여사족(士族)이 되는 기회도 있었다. 시조의증손 신윤유(申允濡)가 그 예의 인물이다.
아주 신씨의 근원은 아주현의 호장 신영미에서 비롯되었다는것을 알 수 있는 문헌이있다. 이것은 조선조 왕명에 의해서 인물, 세헌(世獻)등에 관해서 편찬한 국가적 문헌으로 영조 때 편찬된 문헌비고(文獻備考)라는책이다. 시조 신영미는 고려에서 권지호장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 그윗대는 삼국시대부터 아주 지역의 호족(豪族)으로 거주해 왔고어느 지방 호족과 마찬가지로 성(姓)이 없다가 고려조에 들어와서성을 가졌다. 성을가진 후 토착지역 아주를 성의 본관으로 삼았고 향직인 호장을 수임하였다.
우리 아주 신씨 시조 영미(英美)께서는 거제 속현인 아주현의 권지호장(權知戶長)이라는 기록을 아주 옛날의 가첩 또는 보첩(譜牒)에서 보는데 그러나 그 윗대는 상고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그 당시 어느 성씨 문중을 막론하고 오래전 일이라 문적이 보존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의호장이라 함은 지방 토호족으로서 가진 향직이다. 즉 호족의 우두머리가 가진 관직인 것이다. 고려 때 5도(五道) 향리(鄕吏)의 정원을보면 10정(丁)이하의현(縣)에서는 4인의호장을 두고 있었다. 거제군지(巨濟郡
誌)에 보면고려 원종 12년(1271)에 왜구의 침범으로 인하여 거제주민과 아주 신씨 족속들이 육지로 옮겨가 거창지역 가조현에 피난하여 살았다고 한다. 이후 거제도는 151년간 왜구의 침입 때문에 호족의 자료가 없어졌다고 한다. 권지호장신영미를 시조로 하는 아주 신씨는 거제에서 거창으로 나아가 더부살이를 하다가 5세(世)에 이르러 상주로 이전하였고 6세가다시 의성 지방으로 옮겨 갔으며 이곳에서 종인이 번성하며 조선중기에는 사족(士族)과 이족(吏族)으로 세력이떨쳤다고 한다.
신영미(申英美)의 묘는 현 거제 아주동 옥녀봉 산록, 당등산 혈맥이고 풍수설에 의하면거위의 비상형이고 양 날개 사이에 위치하는 것으로 큰 명당 자리라 한다. 묘는 1972년 대우 조선 부지 조성 공사 시 후손들에 의해 이장하였으며 부장품은 고려 시대에 동조(銅造) 숟가락과 밥그릇이 출토되었다고 하며, 이장 시 67세~70세가량 7명~8명의 자손이 한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있었다고한다. 인적 사항을 기록하였으나 분실하였다고 하며, 주민들의구전에 의하면 8ㆍ15해방까지 20명~30명의 자손들이 묘제 행사를 하였다고 한다. 묘지 봉분은 컸으며 둘레는 약 사방 30m 정도이고 축대는 1단 정도의 높이로 쌓아져 있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당시 거제군 공보실근무자 이승철(李承哲)씨가 전한 것이다.
대우 조선소가 들어 올 당시 간송, 용사골, 장터몰, 당목(堂木), 탑골 일부 480세대가이주를 했고, 그 때 묘지도 이장을 해야 했다.
고려조에 등장한 어느 성씨도 그러하지만 시조의 부인에 관한것은 잘 기록되지 않아 마찬가지로 시조부터 3세까지 배(配)는 알 수 없다. 이로 인해 부인은 실전(失傳)으로 전해왔다. 고려중기 때까지 시조의 부인을 기록한 것은 사실에서 벗어난 것으로 학계에서는 말하고 있다. 부인이 기록된것은 4세인 윤유(允濡)때부터이고배(配)는 지평직(持平職)에 있는 이언(李堰)의딸이었다.
11) 아주(鵝洲) : 한자로 아주(鵝州) 또는아주(鵝洲)로 쓰고 있다.단순한 글자로 표기할 때는 아주(鵝州)로 쓰고아주(鵝洲)라고 할 때는 섬이라는 뜻이다.
12) 신기옥 편저, 아주 신씨의 역사, 아주 신씨 시조 바로 세우기 협의회, 209, 16~23쪽.
13) 상동, 183~184쪽.
2) 입향시조(入鄕始祖) 신윤유(申允濡)
각 성(姓)씨 시조의 출신지역이 다양하고 각 국가의 도읍지가 아닌 시골[鄕里]인 경우가 많다. 아주 신씨 시조 신영미 뿐만 아니라 고령 신씨 신숙주,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의 시조도 모두 호장 출신이었다고 한다. 원래본관은 시조의 출신지역 이름(지명)을 따서 작명하는 경우가많은데 그 곳에서 끝까지 종족이 살 수가 없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경우 또는 도읍지에서 지방으로 거처를 옮기는 경우도 있다. 고려 말기 이성계와 정치적 사상이 달라서 선산 구미 금오산으로 들어간 야은(冶隱) 길재(吉再)처럼 아주신씨도 4세째 윤유(允濡)가상주 만경산(萬京山), 상주 단밀면(丹密面) 청신동으로 거처를 옮겨 왔다.
입향 시조 신윤유의 고려 때 관직은 판도판서(版圖判書)이었다. 이것은고려 시대 판도사(版圖司)의 수장 관직이다. 충렬왕 때 상서호부(尙書戶部)를고쳐 부른 관직 명칭이며 그 때까지 재상급 관직으로서 조선시대 호조 판서(戶曹判書)와 같은 직위이다. 신윤유는 초하루 보름마다 산마루에 올라 개성을바라보고 깊은 한은 풀었기에 산 이름도 망경산(望京山)이라하였는데 그 후 만경산(萬京山)으로 변경하였다.
입향시조(윤유)와 그의 아들 우(祐)의무덤은 현재 행정 구역으로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인데 장소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후손들은 현재까지 아주신씨 대종회가 중심이 되어 매년 10월 3일(개천절ㆍ공휴일) 이곳을 찾아와 제사를 지내고 있다. 구천면 청산리에는 제사 건물이 있고 2세 진승(晉升), 3세 득창(得昌)의 가묘(假墓)가 있다. 이곳으로 이전하여 입향 시조가 된 윤유는 개성에서 내려 왔지만 실제 아주 신씨 종원들은 다수가 거창에서 살다가이주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시조 신영미의 묘는 거제도, 2세와 3세의 묘는 거제도 또는 거창 지역의 어느 곳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3) 파조(派祖), 귀파(龜派)와 읍파(邑派)
아주 신씨 5세는우(祐)이다. 관직은봉상대부 사헌부 장령(奉常大夫司憲府掌令)과 전라도 안렴사(按廉使), 신호위호군(神號衛護軍)을 역임하였다. 봉상대부는 고려의 문관 벼슬로 정4품의 품계이다. 충렬왕 때 제정된 대부(大夫) 벼슬이었다. 사헌부장령은 문무 양쪽의 공직자들을 감찰하는 업무와 풍속을 바로 잡는 일을 하는 기관에 소속된 관직이다. 종4품에 해당되었다. 전라도 안렴사는 전라도 지역을 안찰(按擦)하는 직무이고품계는 종3품에속했다. 신호위 호군은 신호위라는 군 부서에 소속된 정4품의무관벼슬이다. 신호위는 고려의 육위(六衛)의 하나로 7개의 군영(軍營)을 거느리는 부대였다. 위(衛)는 군의 부서를 표시한 것이다.
특히 우(祐)는 효자로 유명하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의 문헌에 보면 관직은 호군이었는데 고려 말 혼탁한 세상사에 스스로 몸가짐에 조심했고 물러나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기를진력하였다. 아버지 판서공(判書公)이 졸(卒)하였을 때 묘앞에서 여막을 짓고 3년동안 조석으로 곡을 했다. 그런데대나무 두 그루가 분묘 앞에 자란 것을 보고 효도에 감동한 소치였다는 소문이 났다. 조정에서는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지고 노변 좌측에 효행을 기록한 효자비가 섰다. 그래서 이 지역을 효자리(孝子里)라부르게 되었고 지금의 의성(그 당시 상주) 단밀현 관동리(館洞里)이다. 단밀현은현재 의성군 지역이다. 그러나관동리는 상주시 외서면 지역이다. 당시의성현은 상주목(尙州牧)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단밀현을 상주지역으로 표기한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그 효성을 기려 묘우(廟宇)를 현 북쪽 1리지점에 지어 속수서원(涑水書院)이라 하였다. 배(配)는 류씨(柳氏)로 약목(若木)의 곤산 부원군 류익정의 여식이며 묘는 동쪽 10리 사포(蛇浦) 서향원(西向原)에 있다. 우(祐)는 상주 땅에서는 그의 효에 감동하며 짐짓 아버지의 묘전(墓前)에 쌍죽(雙竹)이 자랐다고한다. 특히 공(公)은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막역한 사이로 친구같이 지냈는데 형조판서의 재상 자리를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아주신씨 5세 우(祐) 광부(光富), 광귀(光貴) 두 아들을 두었다. 광부는 내부령(內府令)이고 광귀는 지봉주사(知鳳州事)이다. 내부령은 나라 안의 재물을 맡아 보는 관직이며, 지봉주사는 황해도봉산 군수의 관직이다.
아주 신씨는 6세부터읍파(邑派) 신광부와 귀파(龜派) 신광귀로 나누어진다.
邑派 : 申光富(內府令公)
龜派 : 申光貴(鳳州公)
- 縣令公派(士贇)
- 靜隱公派(元福)
- 判官公派(尙道)
- 鱉潭公派(泳道)
- 三百堂公派(志道)
- 華谷公派(師道)
- 溪峴公派(敏道)
- 虎溪公派(適道)
- 晩悟公派(達道)
- 懶齊公派(悅道)
- 安東派(以甫)
- 直長公派(幹)
- 鷹巖公派(之孝)
- 梧峯公派(之悌)
- 獨峴公派(之信)
- 槐軒公派(之義)
- 通德郞公派(之敬)
- 同知公派(之行)
- 參奉公派(應壁)
- 訓導公派(之忠)
- 果川公派(用甫)
- 北軒公派(暹)
- 敎授公派(善甫)
- 判事公派(佖)
- 扶餘公派(命周)
- 悟齊公派(鵠)
- 杏亭公派(鶴)
- 禦侮公派(希敬)
4) 중시조(中始祖)
아주 신씨 족친 또는 파조(派祖) 간에 시조에 대한 논란이 거듭되어 오는 가운데 현실적으로 위의 각 파조를 중시조로 하자는 의견이 많이 제기되고있었다. 중시조의 채택 또는 도입 여부는 각 파(派)에 따라서 다소의 사정이 다르다. 위에서 제시한 읍파(10개)와 귀파(18개)의 공통점은 각 파조의 연령이 비슷하고 특히 읍파는 도(道)자 돌림의 이름에서 6촌간이 대부분이고, 귀파는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의 6형제가 큰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아주 신씨 가운데 대표적인 파조는 오봉 선생이다. 우선 그는 족친 가운데 과거 시험에 제일 먼저 합격하였고, 임진란의공신에 책봉되는 등 그의 인물 평가는 절대적이다. 한편 읍파 가운데 적도(適道), 달도(達道), 열도(悅道)는 형제간이다. 과거급제도 부자간(신지제와 신홍망),형제간(신달도14)와 신열도15)에성취된 경우가 있어
서 28개의 파조가운데 불과 몇 개의 가문에서 대표적인 중시조가 선정될 수 있다.
14) 신달도(申達道, 1576~1631) : 자는 형보(亨甫), 호는 만오(晩悟), 본관은아주(鵝洲)이다. 조목(趙穆) ㆍ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23년 정시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문한관ㆍ사간원정언ㆍ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하다 파직되었다. 후일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만오집이 전한다.
15) 신열도(申悅道, 1589~1659) : 자는 진보(晋甫), 호는 나재(懶齋), 본관은아주(鵝洲)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24년증광시 을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서장관ㆍ예조 정랑ㆍ사간원 정언ㆍ울진 현감ㆍ사헌부 장령ㆍ능주 목사 등을역임하였다.
4. 집성촌(集姓村) 의성 구미(龜尾)
1) 의성(義城)과 봉양(鳳陽)의 역사
의성의 역사는 신라 벌휴왕2년(AD 185) 가야나라 조문국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후 조문국은 신라에 합병되었다. 의성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문소군(聞韶郡)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태조 12년(929) 7월후백제 견훤의 군사 5,00명이 문소군을 침략하여성주(城主) 홍술 장군이 전사했다. 태조는 성주의 순국에 보답하고자 고을 이름을대의간성(大義干城) 4글자에서 2글자를 줄여 의성(義城)이라하였고 태조 23년(939) 의성부로 승격하였다. 의성은 고려 개국 공신 홍유(洪儒)의고향이기도 하며 그의 딸이 태조의 후비가 되어 의성부원대군을 출산하였다. 의성은 고려 현조 이후 안동부의속현으로 있다가 의성부로 승격하였다.
의성과는 별도로 비안현(比安縣)이 독립되어 있었는데 태종 1403년 유양(兪讓)을 현령으로 처음 임명하였다.비안현은 구한말까지 존재하였다. 봉양면(鳳陽面)은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하천면(下川面)과 금뢰면(金磊面), 석전면(石田面)이 합하여생긴이름이다.16) 이때 충북 제천군 봉양면(鳳陽面)도 면 단위의 같은 지명이 나왔고 지금도 중앙선 기차역의 명칭으로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봉양의 유래는 봉황(鳳凰)에서봉(鳳)과 조양(朝陽)에서 양(陽)을 따온 것으로시경에서 봉황은 아침 해가 비치는 곳(동쪽)에서 운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지명의 연유도 분명한 것은 아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주한 의성 신례동(중리 또는 상리)은 외진 산골로 천수답에 의존하는 환경이어서 의식주해결에 부적합했다. 반면에 구미동은 한양으로 가는 길목인 역촌 도리원이 있고 대구, 안동, 상주로 통하는 교통이 요지였고, 상리보다는 넓은 들에 의성과 금성에서 흘러오는 강의 합류점이어서 영농이 용이하고 어류도 많았다. 오봉의 증손자(淑範)는지내에 있던 종가를 헐고 현재 종택 위치를 중심으로 9칸을 건립하였다.이시기가 조선조 숙종 임금 때였다. 그 후 우리 조상은 오봉 부자의 버금가는 인물이 나오지못했고, 오랜 세월 풍우에 시달린 종택은 허물어지고 있어서 184년지손들의 도움으로 현재 종택으로 축소ㆍ개축했다. 그때까지 종가식구로 살아왔던 우리는 나의 7대 조부 근인(近仁,1727~1791)이 둘째 아들로서 종가에서 분가했다.
자연 부락이 하나의 집성촌으로서 50여년을 존속하고 있다는 것은 산업화와 개발시대에 있어서 매우 특이한 사실이다. 구미동은 오봉을 기준으로 할 때는 정확하게 말하며 50년에서 조금부족하지만(460년) 이 동네의 동편에는 같은 아주 신씨로서귀파에 속하면서 파조가 다른 훈도공파(訓導公派)가 먼저 들어와서살고 있었기 때문에 50년은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1970년대후반 고려대학교 교직원 산우회(안암산우회)에서 만난 가족사회학을연구하는 사회학과 최재석 교수(당시 한국족보학회 회장)가우리시골 동네(구미)가 임진왜란 전부터 조성된 집성촌이라고하였더니 혹시 그 때의 족보의존재 여부에 대해서 물어왔다. 그 때 나는 최근과 같이 완전히 활자화된대형 책자의 족보인 줄 알고, 없다고 대답했는데 사실은 보첩(譜牒, 가첩의 일종)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특히 우리 동네는 오봉 신지제의 경우 1589년 대과에 급제했기때문에 이 경우 과거합격자의 신상 등록ㆍ보고에는 조상과 성씨 본관의 기재가 반드시 요구되고 있었다.
구미와 같은 전통적으로 오래된 동네에 대해서 1812년 이미 20년을 지나온 동네를 소개한 신정주(申鼎周, 1764~1827)가 집필한 구장지(龜莊志)가 있다.(105쪽 분량)신정주는 본관 아주,자는 경백(景伯), 호는 도와(陶窩), 조선조 영조 갑신년에 봉양면 길천 2리(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재종숙(再從叔) 회병(晦屛) 신체인(申體仁)에게 글을 배웠는데 48세 되던 해에 20년간 내려온 구미ㆍ구산의 산천기지(山川基址)와 연
구장지는 위와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과거와 인물은문중의 세첩으로 아우른다고 항목에서 밝혔다. 항목마다 시와 산문으로 덧붙여져 대대로 학문한 문중의 긍지를나타내고 있다. 저자는 경자(庚子, 1812)년에 회병공의 고종록을 짓고 순조 14년 갑술(甲戌, 1814) 겨울 50세에중국 향약에 준해서 구미촌 동약(洞約)을 만들고 순조 27년 정해(丁亥, 1827)년 63세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18) 나의 집이 있던 곳으로 통상 ‘솔럼’이라고 불렀다. 1725년경 7대조신근인이 지은 집으로 206년 고옥으로 헐어 버렸고, 지금은넓은 빈터로 남아 있다.
19) 옛날 봉양초등학교 다닐 때(1948~1954) 소풍을 갔으며 통상 ‘산볼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20) 옛날 초등학교 4학년(1951) 사회과목 시험문제로서 “우리 학교 앞을 따라 흐르는 강의이름은 무엇인가?” 정
답은 남대천인데 나는 여름 한 철 친구들과 물장난하던 ‘가마소’라고 적어서 틀린 것을 기억하고 있다.
5. 생애
1) 성장 과정과 수학(修學)
(1) 7세 때 글공부 시작(선조원년 1568)
오봉 선생은 어릴 때부터 글 읽는 것을 좋아 하였다. 일찍이 책을 가지고 이웃 노인에게 가르침을 청했는데, 노인이 막텃밭을 매러 들어가서 오래도록 나오지 않자 선생이울타리 밖에서 울며 기다리고 서서 기어이 수업을 받고서야 돌아왔다.21)
(2) 13세(1574)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22)
13세 때에 안동 북쪽 고을 가야곡(佳野谷), 현재 안동시 와룡면 소재 하는 곳에서 김언기 선생에게 지도를 받았다. 김언기(金彦璣, 152~158) 선생은 광산 김씨,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에서 태어났으며 퇴계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1년안동시 와룡면 가야리에서 가야서당을 지어 제자를 양성하였다. 김 선생이 은거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후학을양성하여 그의 문하에 출입하는 이가 수백 명이었는데 오봉(신지제)도백형(伯兄) 지효(응암)과 함께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오봉 선생이 뜻을 가다듬고 학문에힘써서 아침부터 밤까지 게을리 하지 않으니 김 선생이 기특하게 여겨 “이 아이는 말이 신중하고 용모가중후한 데다 학문에 독실함이 또 이와 같으니 훗날 반드시 큰 인재가 될것이다.”라고 하였다.
오봉이 17세(1578)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4년 동안 가야곡에서 수학하였는데아우 지신(之信, 156~1632) 이도 뒤따라 와서 함께수학하였다. 그때 가야곡에서는 동학 70여명이 서당에 돌아가며불을 지폈는데 하루는 오봉 선생이 동료 권태일(權泰一)23), 박의장(朴毅長)24)과함께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동료가 실수로 나무꾼을 밀치는 바람에 나무꾼이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나무꾼의아들이 관아에 고소하여 밀친 동료가 잡혀가자, 오봉 선생이 “우리세 사람이 함께 갔는데 한 사람에게 죄를 덮어쓰게 할수 없다.”라 하고 관아로 따라 들어가서 목숨을걸고 서로 자신이 밀쳤다고 다투었다. 고을 수령이 한참 지켜보다가 마침내 고소한 자에게 “세 아이에게 모두 정승의 기상이 있으니25)차마 일개 촌부의 일 때문에 목숨으로 그 죄값을 치르게 할 수 없다. 관아에서 널을 갖추어네 아비를 묻어 줄 것이니, 너는 돌아가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봉 선생에게 “너희들은 염려 말고 돌아가서 글을 읽어라.” 하고, 이어서 서당 근처 마을에서 관아에 바치는 땔감을 서당에 바치게 하여 나무하는 수고를 덜어주고 이를 해마다 관례로행하게 하였다.
(3) 천방산 지보사(持寶寺)26)에서 독학(1578~1581)
오봉 선생이 17세로지보사에 와서 독학으로 공부할 때는 학업을 시작한 지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다. 지보사는 의성 구미에서나 신례동을 기준으로 하여도 크게 먼거리는 아니다. 옛날초등학교(구미)와 중학교(도리원)때 당일로 걸어서 소풍을 갔다 올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오봉이지보사에서 공부할 때 마을에 사는 어떤 아름다운 여인이 절을 왕래하다가 선생의 풍모를 보고 반하여 밤이 깊도록 돌아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선생이 여인의 속내를 알아차리고는 의로서 엄히 꾸짖고는 그 여인에게 회초리를 가져오게 한 다음 매질하고 돌려보냈다. 수십 일 뒤에 남편이 술과 음식을 가져와 주며 “공이 바른 도리를 들어서 마을의 부녀자를 가르쳤다기에 사례하러왔습니다.” 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그 여인이 선생의 말에 감동하여 돌아가서 남편에게 말한 듯하다.
(4) 빙산사(氷山寺)27)
1581년 오봉 선생 20세 되던 해 형님 응암선생과 함께 빙산사에서 수학하였다. 이사찰의 벽에 전에 공부한 윤국형 선생이 지은 시가 있었는데 오봉선생이 그 시에 차운 하였다. 윤국형은 1568년 문과에급제한 뒤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제학, 충청도 관찰사, 병조 참판, 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저서로 문소만록(聞韶漫錄)을 남겼는데 문소는 의성(義城)의옛 지명이다.
(5) 학봉 김성일(金誠一)28)
오봉 선생이 존경하고 지도를 받고 싶었던 인물은 원래 퇴계이황(李滉)이었는데 퇴계는 1570년 작고했기 때문에 오봉의 나이는 너무 어렸다. 오봉은 학봉선생 문하에서 공부하며 그의 고제자가 되었고, 과거시험 보기 직전 겨울 한 철 서애 선생을 찾아가서수학하였다.
학봉과 서애가 퇴계의 제자이기 때문에 오봉은 퇴계 선생의간접 제자라고 할 수 있다. 오봉은 퇴계에게 직접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서 예안 현감을 자청했으며 4년 이상 근속했다.
오봉은 1591년 7월(당시 30세) 예안현에 부임하면서 바로 도산서원으로 가서 퇴계 선생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선생은뒤늦게 태어나 도산의 문하에서 직접 배우지 못한 것을 항상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오봉은 예안 고을에부임한 뒤로 매달 서원에 들러 사당에 참배하고 선생의 유적을 둘러보면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흥의 뜻을 붙이고 당시 퇴계 선생 문하에서 직접 배운원로로서 월천(月川) 조목(趙穆)29),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30),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31),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32) 등과 서로 왕래하고 교유하며 경전의 뜻을 강론하였다. 임진왜란으로군사를 징발하고 민생을 돌보느라 한시가 급박한 중에도 왕래를 멈추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오봉을 학봉의 고제자라고 하는데 1593년 진주성에서 작고할 때까지 서애와 더불어 오봉 선생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위에 있었지만 오봉은 윗분으로어느 누구에게도 찾아가거나 신세를 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봉 선생은 퇴계 선생을따라 큰 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21) 나의 큰 손자 주윤(209년 3월생)이가 이 나이에 유치원 다니면서 한자 공부를 시켰는데 가능하다고본다. 처음 1년 동안 방문 교사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내가선생님 역할을 했는데 한자급수시험 8급과 7급을 초등학교입학 전에 우수한 성적(우등)으로 합격했다. 나는 손자를 위하여 정년퇴직 후 고대 평생 교육원 방과 후 한자 교육 교사 자격을 위해 2학기 동안 공부한 적이 있다.
22) 김언기(金彦璣, 152~158) : 자는 중온(仲昷). 호는 유일재(惟一齋), 본관은광산(光山)이다. 도산(陶山) 근처에 살면서 서사(書舍)를 지어 ‘유일’이란 편액을걸어놓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문하에서 남치리(南致利)ㆍ정사성(鄭士誠)ㆍ권위(權暐)ㆍ박의장(朴毅長)ㆍ신지제(申之悌)ㆍ권태일(權泰一) 등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되어 당시 안동의 학문진흥의 창도자로알려졌다. 이황이 죽은 뒤에는 여강서원(廬江書院)을 세우고, 백련사(白蓮寺)를 철거하여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데 노력하였다. 저서로는『유일재집(惟一齋集)』 1권이있다. 안동의 용계서원(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23) 권태일(權泰一, 1569~1631) : 자는 수지(守之), 호는 장곡(藏谷), 본관은안동(安東)이다. 159년에는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등용되고, 이어서검열ㆍ승정원주서ㆍ시강원설서ㆍ정언ㆍ이조좌랑등을 두루 역임하고 병으로 사임하였다. 뒤에 다시 홍문관수찬으로복직하고, 이어서 이조정랑을 거쳐 영덕현령으로 4년간을 재임하면서큰 치적을 올린 공으로 왕으로부터 옷감을 하사받았다. 저서로는 『장곡집』이 있다.
24) 박의장(朴毅長, 155~1615) : 자는 사강(士剛), 호는 청신재(淸愼齋), 본관은무안(務安)이다. 157년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경주판관을 지내고, 경주성 탈환의 공으로 경주부윤을 제수 받았다. 임진왜란 때 세운 공으로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저서로는 관감록(觀感錄)이 전한다.
25) 그 때 땔감 나무하러 산에 간 세 사람은 신지제, 권태일(權泰一), 박의장(朴毅長)인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신지제를 제외한 다른 두 사람은 위의 각주 2), 23) 참고.
26) 지보사(持寶寺) : 현재 군위군 군위읍 상곡리(上谷里) 천방산에 있는 절의 이름이다. 내가 초등학교(의성 구미 소재)와 봉양 중학교(의성도리원 소재)때 두 번이나 봉양면 덕은동으로 소풍을 걸어서 다녀왔다.중학교 때는 산 위에서 실수로 큰 바위와 아래로 굴러 내려갔는데 그 밑에는 샘이 있었고 많은 학생이 운집되어 있었다. 다행히 바위는 샘 바로 위의 큰 도토리나무에 걸리면서 정지 되었다. 또한번은 6ㆍ25동란 군위군 우보면 달산동으로 피난 갔다가신녕ㆍ영천으로 가는 길이 막혀서 구미 집으로 돌아오는데 지보사를 지나 덕은동으로 넘어 오니 한 여름의 아침햇살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보사는 673년 신라시대 의상(義湘)이 창건하였고, 맷돌ㆍ가마
솥ㆍ청동향로 세 가지 보물을 지니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한다.
27) 빙산사(氷山寺) : 현재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氷溪里), 빙산 서쪽 기슭에 있는 절로서 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석탑만 남아 있다.
28) 김성일(金誠一, 1538~1593) :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본관은의성(義城)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8년증광시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봉교를 제수 받았다. 통신부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 순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잘못 보고한책임으로 처벌이 논의가 되었으나 류성룡(柳成龍)의 변호로화를 면하였다. 저서로는 학봉집ㆍ상례고증(喪禮考證)ㆍ해사록(海槎錄) 등이 전한다.
29) 조목(趙穆, 1524~1606) : 자는 사경(士敬)이며, 호는 월천 또는 동고(東皐), 본관은 횡성(橫城)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관직은 공조 참판에 이르렀으나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고 학문 연구에만 뜻을 두어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예안(禮安)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등에제향되었다. 문집에 월천집(月川集), 저서로 곤지잡록(困知雜錄)이 있다.
30) 김부륜(金富倫, 1531~1598) : 자는 돈서,호는 설월당(雪月堂),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55년 사마시에합격하고, 유일(遺逸)로천거되어 경릉 참봉ㆍ돈녕부 봉사 등을 제수 받았다. 1585년 전라도 동복 현감(同福縣監)에 부임하였다. 만년에향리에 설월당(雪月堂)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저서에설월당집(雪月堂集)이 있다.
31) 이덕홍(李德弘, 1541~1596) :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10여 세에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에 벼슬을 시작하였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따라 성천까지 호종하였다. 후에 호종의 공으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 주자서절요강록(朱子書節要講錄), 간재집 등이있다.
32) 금난수(琴蘭秀, 1530~1604) :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성재 다른 호는 고산주인(孤山主人), 본관은 봉화이다. 퇴계의 제자이며,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안동부 수성장이 되어 명나라의 원군(援軍)을 안내하고 군무(軍務)를주관하였다. 예안의 동계정사(東溪精舍)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성재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