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는 역사(歷史)가 있고 치가(治家)에는 보첩(譜牒)이 있으니국사(國史)와 보첩(譜牒)이 공(公)과 사(私)와 광협(廣狹)의 다른 점은 있으나 그 방법(方法)은처음부터 일치(一致)하지 않음이 없는 고(故)로 족보(族譜)를 말하기를 가승(家乘)이라고하고 관계(關係)를 정(定)하고 세대(世代)를 분별(分別)하고 조상(祖上)을 이어받아 작은 역사(歷史)를이룩하는 한 가지 직분(職分)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부터 누구나 다같이 중요(重要)하게 여겨온 것이다. 신씨(申氏)의 관향(貫鄕)은 아주(鵝洲)이니 고려권지호장(高麗權知戶長)인 휘(諱) 영미(英美)로 시조(始祖)하고 판도판서윤유(版圖判書 允濡)와안렴사 우(按廉使 祐)께서 계승(繼承)하여 크게 번창(繁昌)한 뒤로 드디어 온나라에 소문난 종족(宗族)이 되었다. 그중 의성(義城)에 사는 이가 가장 번성(繁盛)하다. 번성 그 번성(繁盛)함은회당 원록(悔堂 元祿)과 오봉 지제(梧峰 之悌)와 호계 적도(虎溪適道)와 인재 채(忍齋垛)께서는 다함께 사림(士林)이 봉향(奉享)하고 고송 홍망(孤松 弘望)과회병 체인(晦屛 體仁)과 도와 정주(陶窩 鼎周)께서는 대대(代代)로 돈독(敦篤)하여 그와같은 이를 얻음이다.
학문(學問)의 연원(淵源)이 고향(故鄕)에 짝이있도다. 살펴보건데 의성(義城)은 나의 옛 고향(故鄕)이라왕래(往來)하며 들어서 안 바가 자못 오래된 지라 신군호직(申君鎬稷)과 익환(翼煥)이 그 보첩(譜牒)의 수단(修單)을 경영(經營)하면서 나에게 찾아와서 두번 세번 자세(仔細)히 말하여 서문(序文)을청(請)하니 두 분(分)은 대개 다 선대세계(先代世系)를고찰(考察)함이 밝은 까닭으로 그 수단(修單) 한 규모(規模)가 상세(詳細)하게 정리(整理)되어 진실(眞實)로 다른 사람으로는 그 사이를 더 얻을 바가 아니더라. 그리고 익환군(翼煥君)은 또 스스로 서술(叙述)한 예(例)를 종족(宗族)에게 소상(昭詳)히 말하여 떳떳한 성품(性禀)을 진작(振作)시켰고 족(足)히 효제(孝弟)로 하여금 대단한 분이다. 스스로 응당(應當)히 다른 사람에게 구(求)함을 기다리지 아니할 일이다. 나와 같이 어리석고 천식(淺識)한 사람이 어찌 감히 서문(序文)을 지어 더럽힐 수 있으랴. 다만,그 中에 可히 참고하고 의론(議論)할 사람이 있어서 정밀(精密)히 보첩(譜牒)의 방법(方法)을 말하며 오로지 세덕(世德)을 밝히고 또 반드시 삼가고 엄정(嚴正)하고 상세(詳細)하게 조사(調査)해서 체요(體要)를 삼는데 목적(目的)을두지 않으면 대개 믿음으로써 믿음을 전하고,의심으로써 의심을 전하니 보첩(譜牒)은 歷史와 더불어 한가지이다.
옛날에 공자(孔子)의 말씀에 나는 오히려 사기(史記)에 글을 빠뜨림에 이르렸다고 하셨에 그리고 歷史의 관문(關文)을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셨에 성인(聖人)께서 이와같이 결단(決斷)해서말씀하시니 어찌하여 그 선택(選擇)하는 바를 조심하지 아니하겠는가하물며 족보(族譜)라는 것은 우리의 조상(祖上)이 관계(關係)되고 우리 자손(子孫)의근본(根本)이 관계(關係)되는 것이며,또 모든 다른 문적(文籍)에 기록(記錄)된 것을보고 더욱 지극(至極)히 절실(切實)할 것이다.
또 세대(世代)가 거듭하여 가깝고 멀고 끊어지고 이어지고 이름과 공적(功績)이 나타나고 은미(隱微)하고 올렸다가 침체(沈滯)되고한마디의 말과 하나의 글자 한번 떠나가고 한번 나아옴이 반드시 그를 참고한바,믿을수 있어야 하고 의심(疑心)되고 일시적 방법(一時的 方法)은용납(容納)되지 아니한다.
진실로 혹(或) 신명(神明)의 희로(喜怒)를 살피지아니하고 또 장차 따르게 되면 可히 경홀(輕忽)히 함을 탄식(歎息)하지 않으려 내가 보건데 근세(近世)의 즐겨하는 말로 歷史라는 대게 구(求)함이 많으나 조상(祖上)의바탕을 고상(高尙)하게 하는 그런 폐단(弊端)이 가끔 있어 허공(虛空)을 파는데 이르고 유래(由來)를날조(捏造)하여 모두 궐의(闕疑)의 의리(義理)를 알지못하는고로 족보(族譜)라는 것이 역시(亦是) 그러하다. 연혁(沿革)의 흐름과 근원(根源)을 거슬러서 비석(碑石)에새겨진 글로써 스스로 있는 것을 쫓아서 可히 그칠줄을 알리라 이에 끌어와서 위에 올리고 미루어 합(合)해서 可히 신실(信實)치못한 지경(地境)에 다투고 변론(辨論)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祖上의 근본(根本)을 거짓에 빠지게 하고 또 다만 어떻게 할 것인가,나는 은근(隱勤)히 민망(悶惘)히 여겨 병(病)되게 여긴지오랜지라 이제 申氏가 족보(族譜)를 하게 됨에 그것이 면(免)함을 알았노라.
그로 인(因)하여 탄식(歎息)하며 한마디 말을 하며 또 法으로서 이 世上의 歷史를 말하는 사람은 판결(判決)할 바를 알 것이다.
※ 주(註) : 이 서문은 을사년(乙巳年 : 1965) 8월에 의성김씨 김황(金榥)이 찬문(撰文)한 것이다. 의성은 옛날에 문소(聞昭)라고이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