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종회 소개
아주신씨 역사
중앙종회 사업
사랑방
족 보
아주신씨(鵝洲申氏) 人物(인물) 生涯(생애) 情報(정보) 메타
파란색 이름클릭시 상세정보 및 과거 취재자료를 볼수 있읍니다.
부, 조부 클릭시 족보 계도를 볼수 있읍니다,(父:윤유(允濡) 祖父:득창 (得昌) 상계(上系))
●신우(申祐) 父:윤유(允濡) 祖父:득창 (得昌) 상계(上系)
부친은 신원유(申元濡)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판도판서(版圖判書)‧군기시별검교사(軍器寺別檢校事)를 지냈다. 신우(申祐)는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봉상(奉常) 사헌부장령 (司憲府掌令)을 거쳐 호군(護軍)에 이르렀다. 일설에는 전라도안렴사(全羅道安廉使)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친의 3년상 시묘살이에 호읍(號泣)하기를 그치지 않아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죽순(竹筍)이 쌍출(雙出)한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내리고 살던 마을을 효자리(孝子里)라고 불렀다. 지금의 경북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이다. 상주(尙州) 단밀현(丹密縣)에 거주하였다. 일찍이 정몽주(鄭夢周) 에게서 대의(大義)를 들어 고려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개국하자 조카사위인 길재(吉再)와 고향 상주의 망경산(望京山)에 은거하였고 태조(太祖)와 친구 사이로서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행실은 『국사(國史)』‧『여지승람(輿地勝覽)』‧『삼강록(三綱錄)』에 실려 있다. 묘소는 경북 의성군 구천면 용사1리 산39번지에 있다. 우복(愚伏)은 묘표(墓表)를 김응조(金應祚)는 봉안문(奉安文)을 채문숙 (蔡文肅)은 유허비명을 찬(撰)하였다. 상주의 속수서원(涑水書院)과 청주(淸州)의 검암서원(儉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술은 『퇴재선생실기(退齋先生實紀)』 2권이 있다.
●신원록(申元祿) 父:수(壽) 祖父:준정 (俊精) 읍파(邑派)
1516년(중종 11)∼1576년(선조 9),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계수(季綏)인데,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에는 순보(順甫)로 되어 있다. 호는 회당(悔堂)이다. 퇴재(退齋) 신우(申祐)의 6세손이고, 참봉(參奉) 신수(申壽)의 5남 중 3남으로 형은 신석록(申錫祿)‧신택록(申宅祿) 동생은 신도수(申道洙)‧신헌록(申憲祿)이다. 열한 살 때 부친 환중(患中)에 수백리 떨어진 팔공산까지 가서 직접 약을 구해 오는 등 8년 동안 형과 함께 지극히 간호하였고, 「연친곡」 8수를 지어 불러서 편모(偏母)를 즐겁게 해 드렸다..
●신흘(申仡) 父:원록(元祿) 祖父:수 (壽) 읍파(邑派)
1550년(명종 5)∼1614년(광해군 6).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구지(懼之). 퇴계 문인 회당(悔堂) 신원록(申元祿)의 아들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였다. 1603년에는 조명(朝命)으로 『난중사적(亂中事蹟)』을 찬진(撰進)하였으며, 1611년에는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의 출향(黜享)을 주장하자 두 선생을 위해 당질 정봉(鼎蜂)과 함께 「회퇴변무소(晦退辨誣疏)」를 올렸다. 낙건서(洛建書)에 침잠하였으며, 자제교육에 전념하였다..
●신지효(申之孝) 父:몽득(夢得) 祖父:응규 (應奎) 귀파(龜派)응암공파(鷹巖公派)
1561년(명종 16)∼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 유학자. 자는 달부(達夫)이고, 호는 응암(鷹巖)이다.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증조부는 신한(申翰)이고, 조부는 신응규(申應奎)이며, 부친은 신몽득(申夢得)이다. 동생은 선성현령(宣城縣令)을 지낸 신지제(申之悌)이다. 1592년(선조 25) 왜진왜란 때 왜적의 칼에 맞아 죽어가면서 부모님을 더 이상 모시지 못하게 되어 불효를 저지르게 되었다며 한탄하였다. 유고로 1권의 『응암실적(鷹巖實蹟)』이 전하는데, 주목할 작품으로 「혈서습록(血書拾錄)」 등이 있다....
●신지제(申之悌) 父:몽득(夢得) 祖父:응규 (應奎) 귀파(龜派)오봉공파(梧峰公派)
1624년(인조2) .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梧峰)‧ 오재(梧齋). 경상도 의성 출신.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1601년 정언(正言)·예조좌랑, 이듬해 지평(持平)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등을 거쳐 1604년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창원부사로 나가 백성을 괴롭히던 명화적(明火賊)을 토평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인조반정 초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예안현감 재직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집, 적을 토벌하였다. 간관으로 있을 때 직간하였고, 수령재임 때에는 치적을 남겼다..
●신적도(申適道) 父:흘(仡) 祖父:원록 (元祿) 읍파(邑派)호계공파(虎溪公派)
신적도(申適道)1574년(선조7) ∼ 1574년(선조 7)∼1663년(현종 4).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사립(士立), 호는 호계(虎溪). 조부는 관학교수(官學敎授) 신원록(申元祿)이고, 부친은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선무랑(宣務郞) 신흘(申仡)이다. 동생은 장령(掌令) 신달도(申達道), 장령 신열도(申悅道)이다. 33세인 1606년(선조 39)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8위로 급제한 후 벼슬은 행상운도찰방(行祥雲道察訪)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을 지냈고, 품계는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이르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의 칭찬을 크게 받기도 하였으나 관직은 낮았다. ...
●신달도(申達道) 父:흘(仡) 祖父:원록 (元祿) 읍파(邑派)만오공파(晩悟公派)
1631년(인조9) .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형보(亨甫), 호는 만오(晩悟). 참의 신원록(申元祿)의 손자이고,신흘(申仡)의 아들이다.조목(趙穆)‧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10년(광해군 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정계가 혼란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였다. 1623년(인조 1) 5월에 명나라 희종(熹宗)의 등극을 기념하는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그 뒤 문한관(文翰官)주 01)을 거쳐 1627년 사간원정언에 이어 곧 지평(持平)으로 승임되었다....
●신열도(申悅道) 父:흘(仡) 祖父:원록 (元祿) 읍파(邑派)난재공파(懶齋公派)
조선 후기의 문신.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진보(晉甫), 호는 나재(懶齋). 신흘(申仡)의 아들이며,교리 신달도(申達道)의 동생이다.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신열도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여 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06년(선조 3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 인조를 호종하였다.이듬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정랑·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1638년 울진현감을 지내고, 1647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어 민생에 대하여 상소하였고 뒤에 능주목사를 지냈다…..
●신홍망(申弘望) 父:지제(之悌) 祖父:몽득 (夢得) 귀파(龜派)오봉공파(梧峰公派)
신홍망(申弘望)1600년(선조33) ∼1673년(현종14). 조선 후기의 문신.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망구(望久), 호는 고송(孤松). 승지 신지제(申之悌)의 아들이다. 1627년(인조 5) 진사시에 합격하고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지평·정언·풍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1652년(효종 3)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도승지 이시매(李時楳)가 자못 패만(悖慢)한 것을 지평 이온발(李溫發)이 상주(上奏)하다가 탄핵을 당하였는데, 이 때 이시매는 자기의 밝음을 선현을 이끌어서 증명하려 하였다.이를 듣고서 직접 그 소(疏)를 보니 실로 모욕적이어서 이를 단독으로 왕에게 진달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당론을 타파하고자 하는 마당에 호당(護黨)한다 하여 탄핵을 받고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가 두달 뒤 풀려났다.1659년 풍기군수로 나갈 때 읍재(邑宰)가 연달아 관청에서 죽자, “내가 그 자리에 나가지 않고서는 요망스러운 말을 없앨 수 없다.”하고 부임한 뒤, 학교를 일으키고 교육에 힘썼다.저서로는 『고송집(孤松集)』이 있다.
●신채(申埰) 父:적도(適道) 祖父:흘 (仡) 읍파(邑派)호계공파(虎溪公派)
신채(申埰)1610년(광해군2)∼1672년(현종13). 조선 중기 유학자.자는 자경(子卿)이고,호는 인재(忍齋)이다.본관은 아주(鵝洲)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이다.부친 행상운도찰방(行祥雲道察訪)신적도(申適道)와 모친 파평윤 씨(坡平尹氏) 사이에서 4남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신연(申埏)‧신탄(申坦)이고, 동생은 신점(申坫)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홍여하(洪汝河) 등과 학문적인 도움을 주고 받으며 도의(道義)로써 교유하였다. 광해군 재위 중에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고, 인조가 등극한 뒤인 1646년(인조 24) 식년시에 진사 3등 10위로 합격하였다. 시문집으로 신상하(申相夏)가 편집‧간행한 4권의 『인재집(忍齋集)』이 전하며, 문집 중에서 주목할 작품으로 『대학(大學)』을 탐구하여 문답 형식으로 집필한 「답대학문목(答大學問目)」, 『중용(中庸)』‧『대학』의 관계를 연구한 「용학표리설(庸學表裏說)」,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자세하게 설명한 글로 「성학십도명(聖學十圖銘)」 등이 있다.
●신응태(申應泰) 父:심(鐔) 祖父:지익 (之益) 귀파(龜派)직장공파(直長公派)
신응태(申應泰)1643년(인조21) ∼ 1728년(영조4) . 조선 후기의 학자.본관은 아주(鵝洲). 초명은 응개(應漑). 자는 길래(吉來), 호는 용애(龍崖). 청주 출생.신심(申鐔)의 아들이며,모친은 광주반씨(光州潘氏)로 반봉익(潘鳳翼)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5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홀로된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일찍이 향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과거에는 끝내 오르지 못하고, 그 뒤 뜻을 달리하여 학문연구에 전심, 역학과 성리학에 깊이 들어갔으며 천문·역수에도 밝았다.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되자 이에 항변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써서 대궐 앞에 나아가 시위하는 등, 스승의 신원을 위하여 힘썼으며, 명의 신종을 제사지내자는 유림의 운동에 앞장섰다. 만년에는 후진 양성에 힘써 문하에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다. 저서로 『용애문집(龍崖文集)』 4권 1책이 있다.
●신심(申鐔) 父:지익(之益)祖父:로 (櫓)귀파(龜派)직장공파(直長公派)
조선후기의효자.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사패(士佩). 신지익(申之益)의 아들로 병자호란 때 적병을 만나게 되어 몸으로써 부모를막아지키며 부모에게 가해하지 말도록 애원하니 청나라 병사도 차마 해하지 못했다. 또 모친의 병환에단지(斷指)하여 구한 일도 있어 숙종조에 정려(旌閭)되었다.
●신협(申鋏) 父:지인(之仁) 祖父:로 (櫓) 귀파(龜派)직장공파(直長公派)
조선후기의효자.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사패(士佩). 신지익(申之益)의 조카로 모친의 병환에 단지(斷指)하여 효성을 다하여 효종조에 정려되었다. 청원군 미원면 화창리의 삼효각(三孝閣)은 신지익, 신심(申鐔), 신협 삼인의 효자 정문(旌門)으로현존한다.
●신정모(申正模) 父:덕순(德洵) 祖父:문석 (文錫) 읍파(邑派)호계공파(虎溪公派)
신정모(申正模)1691년(숙종17) ∼ 1742년(영조18) . 조선 후기의 문신.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경해(景楷), 호는 이치재(二恥齋).부친은 신덕일(申德溢)이며, 모친은 선성이씨(宣城李氏)로 이성구(李星耉)의 딸이다. 1719년(숙종 4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0년에 부정자, 1725년(영조 1)에 지평(持平)·정언(正言)·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등에 임명되고, 1727년 병조좌랑·강원도사·병조정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다가, 거창부사가 되어 부임하였다.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이를 막지 못하여 군위에 정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 뒤 암행어사 이흡(李潝)이 전과를 재조사, 보고하는 과정에서 그 죄상을 과장하여, 1735년 다시 흥양(興陽)에 정배되었다가 7년 뒤 적소에서 죽었다. 1864년(고종 1) 복관되었다.저서로는 『이치재집(二恥齋集)』이 있다.
●신지익(申之益) 父:로(櫓) 祖父:천령 (千齡) 귀파(龜派)직장공파(直長公派)
신지익(申之益)1588년(선조21) ∼ 1649년(인조27) .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거(舜擧), 호는 양일당(養一堂). 승지(承旨)를 지낸 오재(梧齋)신지제(申之悌)의 종제(從弟)로 학행(學行)이 있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였다. 어머니 병환에 목욕재계 후 북두칠성에 빌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다. 상(喪)을 당해서는 호읍(號泣)하다 혼절하기도 하였으며, 최질(衰絰)을 풀지 않고 집상(執喪)하는 등 효행(孝行)이 높아서 신지익과 사촌 신협(申鋏), 아들 신심(申鐔)과 함께 충북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솔골 삼효각(三孝閣)에 1703년(숙종 29) 효로써 정려(旌閭)되었다. 손자 신응태(申應泰)는 우암(尤庵)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고, 『사서제요도설 (四書提要圖說)』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행장(行狀)을 찬(撰)하였고, 공(公)에 대한 일이 『삼강록(三綱錄)』에 기재되었다. 청주(淸州)의 검암서원(儉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신봉석(申鳳錫) 父:견(堅) 祖父:사도 (師道) 읍파(邑派)화곡공파(華谷公派)
신봉석(申鳳錫)1631년(인조9)∼1704년(숙종30). 조선 중기 유학자.자는 석여(錫予)이고, 호는 자족재(自足齋)이다. 본관은 아주(鵝洲)이고, 경상북도 의성현(義城縣)출신이다.증조부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신심(申伈) 이고, 조부는 신사도(申師道)이며, 부친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신견자(申堅資)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덕을 지녔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1655년(효종 6) 응제시(應製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효종에게 지필묵(紙筆墨)을 받았다. 저서로 시문집인 『자족재유집(自足齋遺集)』이 있다.
●신중모(申重模) 父:염(濂) 祖父:하석 (夏錫) 읍파(邑派)만오공파(晩悟公派)
신중모(申重模)1683년(숙종9)∼1724년(경종4). 조선 중기 유생.자는 사범(士範)이다.본관은 아주(鵝洲)이다.부친은 신렴(申濂)이다.부인은 정랑(正郞)이후영(李後榮)의 딸 철성이씨(鐵城李氏)이다.어려서부터 자질이 훌륭하여 행동거지 행동거지가 남달랐다. 나부공(羅浮公)을 모시고 잠잘 때 자주 요강을 찾으면 자다가 놀라 일어나 가져다 드렸다. 일곱 살에 『십구사(十九史)』를 읽었으며 눈에 보이는 대로 바로 외웠다. 부친의 성품이 엄하여 아들이 하나임에도 조금의 여유를 주지 않았다. 열두세 살에 이미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읽었다. 당시 현감 정상호(鄭相澔)가 연회에 초청하자 어린아이가 왕래할 곳이 아니라며 거절하였다. 1707년(숙종 33) 부친이 서울에 간 사이 모친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옷도 벗지 않고 탕약을 달여 병구완을 하였으나 부친이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하였다..
●신체인(申體仁) 父:도만(道萬) 祖父:분구 (賁龜) 귀파(龜派)오봉공파(梧峰公派)
신체인(申體仁)1731년(영조7)∼1812년(순조12). 조선 후기 유학자.자는 자장(子長)이고,호는 회병(晦屛)이다.본관은 아주(鵝洲)이고, 거주지는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금뢰면(金磊面)이다.통정대부(通政大夫)오봉(梧峰)신지제(申之悌)의 후손으로, 부친은 신도만(申道萬)이다. 퇴보(退甫) 김낙행(金樂行)‧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는 화장산(華藏山) 초당에서 공부하였으며, 30세 즈음부터는 경전(經傳) 및 천문지리(天文地理)‧의술(醫術)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이후 퇴계 학문을 이어받은 대산 이상정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280여 명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호문학단(湖門學團)에서 도학(道學)을 연구하며 벼슬길에는 뜻을 두지 않은 채 공손히 행동을 삼가고 이치를 탐구하여 『숭경록(崇敬錄)』을 저술하였다.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구재(苟齋) 김종경(金宗敬)‧묵헌(黙軒) 이만운(李萬運)‧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등과 교유하며, 호문학단의 6군자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금산서원(錦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신정주(申鼎周) 父:종인(種仁) 祖父:도발 (道發) 귀파(龜派)오봉공파(梧峰公派)
신정주(申鼎周)1764년(영조40)∼1827년(순조27). 조선 후기 유학자.자는 경백(景伯)이고,호는 도와(陶窩)이다.본관은 아주(鵝洲)이고, 거주지는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금뢰면(金磊面)이다.통정대부(通政大夫)오봉(梧峰)신지제(지제(申之悌)의 후손으로, 부친은 신종인(申種仁)이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일찍이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801년(순조 1)에는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의 『휘찬려사(彙纂麗史)』를 교정하였다. 뛰어난 문장으로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자경육잠(自警六箴)」과 「암실명(暗室銘)」, 1812년(순조 12)에 주민 교화를 위해 지은 「구장지(龜庄誌)」‧「구미촌향약(龜尾村鄕約)」 및 「만록(漫錄)」‧「호서기행록(湖西紀行錄)」 등이 6권 3책의 문집에 실려 전한다.
●신면주(申冕周) 父:홍교(弘敎) 祖父:황(煌) 읍파(邑派)만오공파(晩悟公派)
신면주(申冕周)1768년(영조44) ∼ 1845년(헌종11) .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성지(成之), 호는 시남(市南).부친은 통덕랑 신홍교(申弘敎)이며, 모친은 풍산유씨(豊山柳氏)로 풍창군(豊昌君)유운(柳澐)의 딸이다. 가학을 이어받았다. 1798년(정조 2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1805년(순조 5)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임명된 뒤 1818년 성균관전적, 1821년 사간원정언이되었다.이듬 해 이조좌랑을 거쳐 1826년 사헌부지평·함경도도사 등을 지냈고, 1828년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에 겸임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1829년 홍문관수찬이 되어서연(書筵)에서 강의하였다.1834년순조의 장례 때는 봉폐관(封閉官, 무덤의 구덩이를 덮고 봉분을쌓는 일을 감독하는 관원)으로 참석하였으며, 헌종 즉위 이후에도입시(入侍,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뵙는 일)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낙향 이후에는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시남유고(市南遺稿)』가있다.
●신상하(申相夏) 父:인협(寅協) 祖父:면목 (冕穆) 읍파(邑派)호계공파(虎溪公派)
신상하(申相夏)1839년(헌종5)∼1906년(광무10). 조선 말기의 유학자.자는 계순(繼舜)이고,호는 구암(矩庵)이다.본관은 아주(鵝洲)이다.부친은 신인협(申寅協)이고,생부는 신명호(申命浩)이다.영남학파의 학맥을 이은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평소 친하게 교유한 인물로 이돈우(李敦禹)‧김도화(金道和) 등이 있다. 유고로 1955년 아들 신성환이 편집‧간행한 4권 2책의 시문집 『구암유집(矩庵遺集)』이 전한다. 문집 가운데 주목할 작품으로는 지치 풀에 빗대어 사람도 향기 나는 사람이 되어야함을 풍자한 「자지가(紫芝歌)」와 스승 유치명에게 학문하는 방법 등에 대해 물은 「상정재선생(上定齋先生)」 등이 있다..
●신상헌(申相憲) 父:창협(昌協) 祖父:면벽 (冕壁) 읍파(邑派)호계공파(虎溪公派)
신상헌(申相憲)1842년(헌종8)∼1911년. 조선 말기 유학자.자는 찬보(纘甫)이고,호는 모암(慕庵)‧주정와(主靜窩)이다.본관은 아주(鵝洲)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이다.부친은 신창협(申昌協)이다.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였고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1910년(융희 4)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여 이만도(李晩燾)가 자결하자 애통한 심정으로 ‘동로도해(東魯蹈海)’‘서산채미(西山採薇)’의 어구로 만장(輓章: 죽은이를 슬퍼하며 기리는 글)을 지었으며, 일제가 주는 배급은모두 거절하였다. 일제를 벗어나려고 둘째 아들 신계환(申啓煥) 에게 간도(間島) 지역에대해 조사할 것을 명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시문집으로 3권 2책의 『주정와집(主靜窩集)』이전하는데, 시(詩)‧서(書) 외에 잡저(雜著)로 「인심도심(人心道心)」 「성(誠)」 「존양성찰(存養省察)」 등 주로 성리학과 관련된 저서를 남겼다.
●신석호(申奭鎬) 父:세기(世基) 祖父:희인 (熙仁) 귀파(龜派)과천공파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신석호(申奭鎬)1904년 ∼1981년 . 한국사학자.본관은 아주(鵝洲). 호는 치암(痴蓭). 경상북도 봉화 출생.신세기(申世基)의 장남이며,부인은 강남희(姜男熙)이다. 1910년부터 홍치유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18년 4월 경북 봉화공립보통학교에 입학, 3·1운동과 관련되어 1919년 6월 중퇴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4월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 1921년 3월까지 수학했다. 귀국 후 1921년 4월 중동학교에 입학, 1924년 3월 졸업했다. 졸업 직후인 1924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 1926년 3월 수료 후,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에 입학, 1929년 3월 졸업했다. 조선총독부 직속 기구인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이 되었고, 1930년 5월에는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에 임명되고, 1937년 9월 수사관으로 승진해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1930년 8월에는 청구학회의 편집위원이 되어 10년간 활동했다. 한편 1934년 진단학회의 발기인이 되었다. 1940년에는 기원2600년축전 기념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