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 미상. 본관은아주(鵝州), 호는퇴재(退齋)부친은신원유(申元濡)로고려충렬왕(忠烈王)때 판도판서(版圖判書)·군기시별검교사(軍器寺別檢校事)를 지냈다.
신우(申祐)는고려충혜왕(忠惠王) 때 무과(武科)에급제하여 벼슬은 봉상(奉常)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거쳐호군(護軍)에 이르렀다. 일설에는전라도안렴사(全羅道安廉使)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친의 3년상 시묘살이에 호읍(號泣)하기를 그치지 않아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죽순(竹筍)이 쌍출(雙出)한 일이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내리고 살던 마을을 효자리(孝子里)라고 불렀다. 지금의경북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이다.상주(尙州) 단밀현(丹密縣)에거주하였다.
일찍이정몽주(鄭夢周)에게서대의(大義)를 들어고려가망하고조선(朝鮮)이개국하자 조카 사위인 길재(吉再)와고향상주의망경산(望京山)에 은거하였고태조(太祖)와 친구 사이로서 형조판서 (刑曹判書)를 제수받았으나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행실은《국사(國史)》 《여지승람(輿地勝覽)》 《삼강록(三綱錄)》에실려 있다.
신우거려(申祐居廬)
호군신우상주인(護軍申祐尙州人) 호군 신우 샹 사이니 부판도판서원유졸(父版圖判書元濡卒) 아비 판도판셔 원 죽거 우거려삼년유이죽생우분전(祐居廬三年有二竹生于墳前) 위 삼 년 거려더니 두 대 무덤 앏픠 나거 인이위효감소치(人以爲孝感所致) 사이 요 효감의 닐윈 배라 더라 정려(旌閭) 졍녀시니라
신우(申祐)는 고려조에 벼슬하여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일찍이전라도 안렴사가 되었는데 고려조의 고사(故事)에 때때로 근시(近侍)의 관원을 여러 도로 내려 보내어 산천에 제사 지내고 백성들의풍속을 탐문하고 수령들의 근만(勤慢)을 살펴 출척(黜陟)하였다. 그것을 이름하여안렴사라고 한다.
신우는 혼탁한 세상에 처하여서도 능히 깨끗함으로 몸가짐을 하였으며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효성을 다하였다. 아버지인 판도판서(版圖判書) 휘윤유(允濡)가 졸하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묘 앞에서 호곡(號哭)하였는데, 대나무 두 그루가 묘 앞에 자라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효성에 감응한 소치라고들 하였는데 조정에 알려져 정려문(旌閭門)을 받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 마을의 이름을 효자리라고 하고, 그 앞을 흐르는 냇물을 효수천(孝水川)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사실은 국승(國乘) 및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2. 가족
조 : 신윤유(申允濡) 모 : 성주 이씨(星州 李氏)
신우는 약목 유씨(若木柳氏)와의 슬하에 아들둘을 두었는데, 이름이 광부(光富)와 광귀(光貴)이다. 광부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름이 사렴(士廉)과 사빈(士贇)이며, 사렴은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지냈다. 그의 현손인 원록(元祿)이 뒤에 또 효행으로 공의 아름다운 행실을 뒤이어 정려되었다.
아주신씨 문중에 이름이 있는 인물은 문학군(文學君) 신달도와그의 형인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 신적도(申適道), 동생인 예조 좌랑 신열도(申悅道)가 있다. 이른바 족형인 승지는 이름이 신지제(申之悌)로, 문명이 있어대과에 급제해 사류들이 추중하는 바가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수를 누리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은 이름이신홍망(申弘望)이다. 신달도의아들은 점(坫)과 구(坵)인데, 모두 준수하고 온아하다.
아버지 신윤유(申允濡)는 첫 이름이 원유(元濡)였다. 고려 관직의종2품인 봉익대부 판도판서 (奉翊大夫 判圖判書)겸 군기시사(軍器寺事)인데고려조가 막을 내리니 낙담하여 단밀로 왔다. 공의 충성된 절의를 세상 사람들은 당개(唐介)에 버금간다 하였다. 초하루보름마다 산 마루에 올라 개경을 마라보고 깊은 한을 풀었기에산이름도 망경산(望京山)이라 하였는데 중세에 만경산(萬京山)으로변경되었다. 지금의 구천면 청산리에 공의 묘소가 있는데 실전하였고 용사리에 단을 모아 세사로 봉향하고있다. 공은 아주 신씨의 의성 입향조이다.
종형인 신적도(申適道, 1574∼1663)는 자는 사립(士立), 호는 호계(虎溪)이다. 신적도는 신흘의 아들이며,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향시에 합격였으나, 벼슬은 찰방에 그쳤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뒤 학산(鶴山) 미곡(微谷)에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두문불출하였다. 저서에는『호계집(虎溪集)』이 있다. 이책은 후손 신상하 (申相夏)·신돈식(申敦植) 등이 간행하였다. 서(書)는 정구·장현광·정경세(鄭經世)·이경석(李景奭) 등 당대명유에게 준 것이 많다.
종제 신열도(1589∼1659)는 자는 진보(晉甫), 호는 나재(懶齋). 수(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호조참의 원록(元綠)이고, 아버지는 흘(仡)이며, 어머니는 전력부위(展力副尉) 박륜(朴倫)의 딸이다. 교리달도(達道)의 동생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여 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1606년(선조 3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정랑·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1638년 울진현감을 지내고, 1647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되어 민생에 대하여 상소하였고 뒤에 능주목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선사지(仙槎志)』와 『문소지(聞韶志)』가 있다.
3. 학문
향사 : 속수서원. 검암서원 학파 : 퇴계 학파
스승, 배움 이야기 등 신우는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에게 대의(大義)를 들었으며, 고려가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사위인 길재(吉再)와 함께 고향에돌아와 상주 만경산에 은거하였다. 태조 이성계와 친구간으로서 조선이 개국된 뒤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4. 생애
『퇴재실기』는 신돈식(申敦植) 등이 편찬하고, 1908년에 간행된 2권 1책의활자본이다. 권1에는 부록으로 묘표(墓表)·수갈고유문(豎碣告由文)·속수서원봉안문(洓水書院奉安文)·상향축문(常享祝文)·속원봉안시고묘문(洓院奉安時告墓文)·고유손우재선생문(告由孫愚齋先生文)·상주사림통문(尙州士林通文)·속원경현사상량문(洓院景賢祠上樑文)·경현사기(景賢祠記)·제쌍죽도(題雙竹圖)·사적(事蹟)·여묘도(廬墓圖)·정려도(旌閭圖)·밀성지(密城誌) 등을 수록하였다. 권2에 부후손조두문적(附後孫俎頭文蹟)17편을 수록하였다. 책머리에는 1908년에김도화(金道和)와 17세손신돈식이 쓴 서문과 신씨세계(申氏世系)가 있고, 책 끝에 유도헌(柳道獻)의발문이 실려 있다.
고려왕지 해설
고려(高麗) 왕지(王旨)는 지금까지는어느 문중에서도 발굴된바 없습니다.
아직 까지 학계에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퇴재(退齋)선조의 유일한 유품인 고려 왕지를 지금까지 소중하게 보존해 오신 언양공(彦陽公)의 주손 정환님이 2005년 1월 9일 KBS의 “진품명품” 프로그램에 출품(出品)됨으로서처음으로 학계(學界)에도 알려 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봅니다.
학계에서는 조선초기(朝鮮初期)의 왕지(王旨)도 아주희소(稀少)하여 국보급 유물로 취급하고 있는데, 고려시대 왕지(王旨)는말할 것도 없겠지요. 선조의 유품인 고려 왕지를 지금까지 소중하게 보존해 오신 언양공(彦陽公)의 주손 정환님의 노고를 높이 치하하는 바입니다.
* 문언적 의미
언양공(彦陽公)의 주손 정환님이 보존 중인 고려 왕지의 내용은 “왕지 신우위신호위보승섭호군자지정사년사월입구일(王旨 申祐爲紳虎衛保勝攝護軍者 至正四年四月卄九日)”로되어 있는데, 그 뜻은 “왕지 신우를 신호위 보승의 섭호군에임명한다. 지정4년 4월29일” 입니다.
※ 이 내용을 현대식 문투(文套)로 새김에 있어서 “...섭호군자(攝護軍者)”의 ‘者(자)’字는 어조사(語助辭)의의미 일뿐이므로, 이 글자를 우리가 평소 관용적으로 쓰고 있는 ‘놈자’ 字의 의미(意味)로새겨서는 안됩니다. 그냥 “섭호군에 임명한다” 라고 새겨야지 “섭호군자가 되고”하는 식의 새김은 잘못된 새김입니다. 혹시 착오하시는 일이 있을까 하는 노파심(老婆心)에서 언급했습니다.
* 역사적 의미
◇왕지(王旨)
봉건시대 사령장(辭令狀) 제도인 왕지는 고려 및 조선개국초 국왕이 관원에게 내리는 각종 문서로서, 교지(敎旨)와 같은 의미임. 조선시대교지는 많이 보이지만 현존하는 조선시대 왕지도 흔치 않다. 조선조 초기의 왕지(王旨)에는 연월일 위에 ‘朝鮮國王之印(조선국왕지인)’이라는 새보(璽寶)가 찍혀 있는데 세종 7년(1425)‘왕지(王旨)’를 ‘교지(敎旨)’로 바뀌면서이 새보(璽寶)가 ‘施命之寶(시명지보)’로 바뀌었다.
◇신호위(神虎衛)
고려 때의 군사조직인 6위(六衛) 중의 하나. 보승(保勝)과 정용(精勇)의 두 부대로 나눈다. 보승은 5령(領)으로 정용는 2령으로나누었다. 1령은 1, 000명의 정규군으로 조직되어 있다.
◇보승(保勝)
고려시대 중앙군인 육위(六衛)와 지방군인 주현군(州縣軍)의군대조직. 육위에는 좌우위(左右衛) 10령(領), 신호위(神虎衛) 5령 등 모두 15령, 15,000명의 정원이 있었고, 주현군에는 5도(道) 및 경기(京畿)에 모두 8,600여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정용군(精勇軍)과 함께 당시 군사력의 중심을 이루었던 부대조직 단위이다.
◇섭호군(攝護軍)
고려말 조선초에 사용하던 무관직(武官職 : 軍職)으로 고려 때는 2軍 6衛의 장군(將軍 정4품)에 해당하고 조선 때는 부호군(副護軍: 종4품)에 해당된다. 고려전기에는 將軍이라고 호칭했으나, 원(元)나라가 고려조정의 내정간섭을 하면서 원나라와 같은 직제와 호칭은모두 바꾸도록 하는 치욕을 당하여 장군(將軍)이 섭호군(攝護軍)으로 개칭되어 조선 태종 초까지 사용되다가 1467년(세조 13) 관제개혁때 부호군(副護軍)으로 개칭하고 법제화되었다.
◇지정사년(至正四年)의 연대
원(元)나라 연호로서 고려 28대 충혜왕(忠惠王) 5년(서기 1344년)에 해당되는데, 서기 2000년도를기준으로 환산하면 656년 전이다.
退齊 先生 墓表 (퇴재선생묘표)
상주 관할 구역의 단밀현에 작은 돌비석(小石碑)이 길 좌편에 서 있는데 ‘효자리’라고새겨져 있다.
옛 어른들로부터 전하여 오는 말에 의하면 안렴사 신공(按廉使 申公)이 거주했던 곳이라고 하며,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마다 공경해 마지않았다.
삼가 살펴보니 公의 휘는 우(祐)이며 고려 때 벼슬하여 관직은 장령(掌令)에 이르렀고 일찍이 전라도 안렴사(按廉使)가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때때로 임금이 가까운 신하(近侍)를 여러 지방에 보내서 명산대천에 제사를 올리고 백성들의 삶을 두루 살피면서 수령들의 잘하는 점과 잘못하는 점을밝혀 승급을 하거나 내쫓도록 하였는데 이를 안렴사(按廉使)라고하며 그 시대에 가장 선택된 사람이다.
公께서는 혼탁한 세상을 맞이하였으나 몸과 마음가짐을 밝고 고결하게 처신 하고 부모섬김에 효성을 다하여 아버지 (판도판서 휘 윤유(版圖判書諱 允濡))께서 돌아가시자 묘 옆에 띠풀집을 짓고 삼년간 아침저녁으로 묘 앞에서 목놓아 슬프게 울면서피눈물을 흘리니 눈물이 떨어진 자국에서 대나무 두 그루가 돋아났다.
사람들은 이것은 지극한 효도에 대하여 감응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워 크게 빛나게 했다. 이때부터公께서 살으시던 마을 이름을 ‘효자리’라고 한 사실이 국사및 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公께서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은 광부(光富)와 광귀(光貴)다. 광부(光富)도 두 아들을두었는데 사윤(士贇)은 현령이고, 사렴(士廉)은 언양현감이었다. 그 현손 원록(元祿) 또한효행으로서 공의 아름다움을 본받아 정려 된바 있다.
公의 8세손으로써 지금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인 달도(達道)씨는 나와 아주 친하게 지내는 벗인데, 어느 날 집안의 행장(家狀)을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께서 돌아가신 지가 이미수 백년 지났고, 의관을 갈무리한 곳(묘소)은 살으시던 마을에서 동쪽으로 십리쯤 되는 사포라는 곳에 서향으로 모셔져 있으나, 묘소 길에 아무런 표석이 없고, 또한 자손들이 먼 곳에 흩어져 살고있으니 벌초와 성묘를 제때에 하지 못한 체 오랜 세월이 흐르게 되면 봉분의 흙이 씻겨 나가고 평평해져 흔적이 없어지게 되면, 나무꾼이나 소먹이는 아이들이(樵牧)선조의 묘소 위로 오르내릴까 염려되고, 그렇게 되면 자손들도 그곳이 어딘가를 알지 못할것이며 그러다가 형적이 아주 없어진다면 그 높은 절개와 행실이 장차 전하여 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어찌 슬프고 또한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라고 하며, “족형 승지공이 살아 계실 때 모든 일가들과 더불어좋은 돌을 구하여 비석을 갖추기로 논의하였으나 미쳐 세우지 못하고 돌아가신 바 있는데, 원하오니 오늘공께서 우리 선대의 크나큰 덕에 대하여 글로 써 주셔서 돌에 새겨 두고 후세에까지 전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매우 고맙겠습니다” 고 하며 절하면서 감히 청하였다.
내가 생각해 보니 안렴공의 효성은 이미 귀신도 감동하여 조화를 부려 크게 빛나게한 것을 많은 사람들이 듣고 보았는데, 내가 어찌 못났다(蕪拙)고 하면서 이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사양 할 수 있으랴?. 돌이켜보면 나는 公으로부터 따진다면 상주 고을의 후학이며, 또한 외가로는 후손(外裔)이기 때문에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서 마침내 그 행장을 참고하여우(右)와 같이 서술하였다.다만 공께서 조정에 나아가 역임한 벼슬이나 집안의 내력(家居行誼) 등은 연대가 이미 오래되었고 문적을 살피지 못하여(文籍無徵) 부득이 자세히 쓰지 못하였다.
또 자손이 많지만(衆多)모두 기록치 못하여 대략만 좌(左)에기록해 보면, 현재 벼슬에 있는 사람은 문학군(文學君)이 있고, 그의 형 적도(適道)는 상운 찰방이고, 동생 열도(悅道)는 예조좌랑이며, 그의 족형 승지공의 이름은 지제(之悌) 인데 문장이 뛰어나고 대과에 급제하였으며 많은 선비들이 기대를걸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수를 누리지 못하였지만, 홍망(弘望)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진사다.
문학군도 아들이 있어 이름은 재(在)와 규(圭)라고 하며 모두다준수하게 아주 잘 생겼다. 또한 내가 미쳐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많을 것이며, 이는 신씨의 복록이 다하지 아니함이라.
시전에 이르기를 효자와 같이 착한 일은 다함이 없이 오래도록 이어진다고 하였고, 또한 군자는 만년토록 복된 자손들이 영원히 이어진다고 하였으니 이는 공을 두고 말함이 아닌가? 오호라 아름답도다
묘표(墓表)를 지으신 분
정경세(鄭經世)(1563년~1633년)이며,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호(號)는 우복(愚伏)이고 尙州출생이다. 유성룡(柳成龍)의문인으로 선조19년에 문과 급제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義兵을 일으켜 공을 세웠으며, 경상도. 전라도 관찰사·대사헌(觀察使·大司憲)을 거쳐이조판서겸 대제학(吏曹判書겸 大提學)에 이르렀으며 좌찬성(左贊成)으로 증직 되었고, 시호(諡號)는 문장(文莊)이다.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특히 예론(禮論)에밝아서 김장생(金長生) 등과 함께 예학파(禮學派)로 불렸다. 도남서원연경서원 덕림서원(道南書院 硏經書院 德林書院)(이상 사액서원(賜額書院)) 고산원(孤山院) 에 배향(配享)되었다.
退齊先生 遺墟 碑銘 (퇴재선생유허비명)
단밀(丹密)은 尙州의 한쪽 모퉁이 후미진 곳에 치우쳐 있어서 世上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관동(館洞)이란 마을이 있는데 비석에 효자리(孝子里)라고 새겨져 있다. 그앞을 흐르는데 냇물을 효수(孝水)라고 하며 그 냇물 위에높게 서있는 것은 속수서원(涑水書院)이라고 하니 대개 고려때안렴사(按廉使)를 지내신 퇴제 신공( 退齊 申公)이 그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고려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대부의 예속(禮俗)에도 3년 복(服)을 입는 사람이 없었으며, 비록 박상충(朴相衷) 같이 어진 사람도 그가 보통사람과 다른 것은 관계에서 정진한데불과했던 것이다.
公은 효성이 지극한 성품으로 부친상을 당하여 3년동안 여묘(廬墓)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묘 앞에 나아가 피눈물을흘리며 슬퍼하니, 눈물이 떨어진 자국에 대나무 두 그루가(雙竹) 솟아났는데, 사람들은 효성에 감응(孝感)했기 때문이라고 해서 조정에 알려지고(上聞) 정문을 세우고 크게 빛나게(旌閭)하였던 것이다.
孟子께서 이르시기를 自身을 버리지 않고 그 父母를 섬기는 사람의 이야기는 내가들었으나, 自身을 버리면서 까지 父母를 섬겼다는 사람의 이야기는 내가 듣지를 못했노라
고 하셨다.
公은 일찍이 고려말기(麗末)의 어수선한 때를 맞이하여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호남에서 탐관오리는 내쫓고 어진 사람을 찾아 쓰는(黜陟) 업무를 처리하고 얼마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 종신(終身)을 하였으니 그곳이 바로 館洞里였다. 여지지(輿地誌)에 이르기를 밝고 깨끗한 처신은 進退에 道가 있었고, 公이 父母를 섬겨 그 孝道를 다한 것은 어찌 그 自身을 잃지 않았던 所致가 아닌가. 오호라! 公이 가신지 거의 3~4백년인데 밀성(密城)의周圍에는 孝子가 계속 이어져 나오게 되자 識者들은 公으로부터 연유 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公의 후예(後裔)들도 모두가 효우(孝友)로서행실이 아름다웠는데, 지금 가장 저명(著名)한 사람을 든다면, 원복(元福)은 孝友로서 조정에 천거(薦擧)되어一命을 받았고, 또 원록(元祿)은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旌閭)되고장대서원(藏待書院)에서 존향(尊享)되었다.
적도(適道), 달도(達道), 열도(悅道) 등도 모두 다 효우로서 사림의 重望을 받았는데, 適道는 仁祖 5년과 15년의호란(胡亂)때에 의군(義軍)을 일으켰고, 達道는 和議를 反對했으며, 悅道는 죽음을 무릅쓰고 어가(御駕)를호위했으며, 흥효(興孝)도그 효행이 밀성지(密城誌)에 실려 있다.
지효(之孝)는 임진란(壬辰亂)에 倭人의칼에 베이어 임종(臨終)하면서 아우에게 血書를 써서보내기를 ‘國家를 위해서 죽으라’고 하였고,之悌도 孝友와 德行이 있어서 藏待書院에 尊享되었고, 지익(之益), 심(?), 협(鋏) 등도 모두 孝誠으로서 정려(旌閭)되었다. 홍망(弘望)은 孝友와청직(淸職)으로서 칭송을 받았고, 채(採)는 六行으로서천거(薦擧)되었고, 염(濂)은 孝道로서 지평(持平)으로 증직을 받았으니 오호라 어찌 그렇게 성(盛)한가? 公을 속수서원에 존향 하도록 한 것은 우복(愚伏) 창석(蒼石) 사서(沙西)등 여러 先生들의주장에 따른 것이다. 우복은 公의 묘비문까지 지어 올리는 등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다.
公의 후손이 많다고 하지만 公께서 사시던 마을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 혹시 없어질수도(惑湮沒)있어, 돌에글을 새기기로 뜻을 모으고 후손 道通씨가 서울 천리를 달려와서 내게 그 사적(事蹟)을 記述해달라고 부탁하기에 나는 일어서서 말하기를 “아름다운 일이로다. 뒷날 사람들이 정려(旌閭)에경례배(敬禮拜)함은 그 인물을 본받음만 같지 못하고, 인물을 본받음은 마음을 본받음만 같지 못하다 할 것이다. 또한 모든행동의 근원이 마음을 본받는 것보다 앞설 수 없다고 했으니, 만약에 밀성(密城)을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비석으로 인해서 그 인물을 경모(敬慕)하고 그 마음에까지 미쳐서 마을(鄕)에서는 고을(州)로, 고을에서는 나라(國)전체로, 마을마다 모든 행동의 으뜸으로 삼아 집집마다 훌륭한 인물이나온다면, 이 일이야 말로 하지 않아서는 안될 뿐 아니라, 풍속을가르치는데 도움이 크게 있을 것이니 내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라고 했다.
公의 휘는 우(祐)요 호는 퇴재(退齊)이며鵝州人이다. 公의 고휘(考諱)는 윤유(允濡)이며 版圖判書벼슬을 지냈으며, 곧은 절개를 지켜서 사람들은 唐介와 비교하였다. 새겨서이르기를 어지럽고 혼탁한 곳에는 가지 아니했으니 事跡이 어찌 그리 깨끗하며, 子息되어서는 本分을 다하였으니행적(行跡)이 어찌 그리 독실(篤實)한가? 申按廉의 옛고향에서 公이 남기신 아름다운 풍속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이것은 본받고 이것을 모범으로 삼을지어다.
비문을지으신 분
채제공(蔡濟恭)(1720~1799) 본관(本貫)은 평강(平康). 字 백규(伯規). 號 번암·번옹(樊巖·樊翁). 시호(諡號) 문숙(文肅). 1735년(英祖 11) 15세에향시에 급제하였고, 충청도 암행어사(暗行御史), 부승지·이천부사·대사간(副承旨·利川府使·大司諫)을 거쳐 1758년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는데,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미워한 英祖가 世子를 폐위(廢位)하는命令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건의(建議)하여 철회(撤回)시켰다. 그 후 대사헌·예문관(大司憲·藝文館)과 홍문관(弘文館)의 제학(提學) 등 言論과 學文의 관직, 경기감사·개성류수·함경감사·한성판윤(京畿監司·開城留守·咸鏡監司·漢城判尹) 등의 지방행정직, 비변사당상(地方行政職, 備邊司堂上)과병조·예조·호조(兵曹·禮曹·戶曹)의 判書 등중앙 정치·행정직(政治·行政職)을 두루 역임하고 正祖때 우·좌·영의정(右·左·領議政)에 까지 이름.
국역에따른 설명
일부 파보에 수록된 유허비명을 아래 적시한 바와 같이 국역하는 과정에서 오류를범하여 원래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 천학비재한 후손이 현대식 문법으로 알기 쉽게다시 고쳤음을 첨언합니다. 24세손 明燮
아래
‘열도 호가서사 왈흥효이효 재밀성지 왈지효 사임진왜인 임절혈서기제 면사국(悅道 扈駕誓死 曰興孝以孝 載密城誌 曰之孝 死壬辰倭刃 臨絶血書寄弟 勉死國)’ 부분의해석을 “열도는 왕가에 호서해서 서사하여 말하되 효로서 충을 이룬다고 하였다. 밀성지에는 지효는 임진난에왜인의 칼에 죽었는데 임종에 혈서를 써서 아우에게 부쳐 국가를 위해 죽기를 권면 하였고”
라고 되어 있으나, 이 부분은 아래와같이 해석함이 타당 할 것이다.
悅道는 죽음을 무릅쓰고 어가(御駕)를 호위했으며, 흥효(興孝)도 그 효행이 밀성지(密城誌)에실려 있다. 지효(之孝)는임진란(壬辰亂)에 倭人의 칼에 베이어 臨終하면서 아우에게血書를 써서보내기를 ‘國家를 위해서 죽으라’고 하였고,
※ “왈흥효이효 재밀성지(曰興孝以孝 載密城誌)”라는 부분은“흥효(興孝 호 桂月堂)라는 인믈의 효행이 밀성지에실려있다”는 뜻인데, 국역을 하면서 “悅道” “之孝”선조의행적에 대한 형용사로 잘못 해석하여 본래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아니하였음. 密城誌에는 “之孝”선조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음 ※
‘공지향속수서원야 우복창석사서 제선생실주지 이우복 표기묘소 이천양지무감(公之享涑水書院也 愚伏蒼石沙西 諸先生實主之 而愚伏 表其墓所 以闡揚之無憾)’ 부분의해석을 “公이 涑水書院에 尊享될 때는 愚伏 蒼石 沙西의 여러 先生이 실로 주장했는데 愚伏은 그 墓所에 標誌까지 하여서 闡提하는데 遺憾이 없었던것이다.” 라고 되어 있으나, 이 부분은 아래와 같이 해석함이타당 할 것이다.
公을 속수서원에 존향하도록 한 것은 우복(愚伏) 창석(蒼石) 사서(沙西)등 여러 先生들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우복은 公의 묘비문까지 지어 올리는 등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다.
앞의 국역(國譯)은 원문(原文)의 뜻은살리면서 일부는 현대식 문법에 맞도록 표현을 바꾸었음을 밝혀 둔다. 그렇지만 배움이 적고 재주가 없어국역(國譯)하는 과정에서 원문의 뜻을 왜곡(歪曲)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을 감히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안렴사(按廉使) 할아버지의 후예(後裔)라면할아버님의 아름다운 행적(行績)을 본받을 수 있도록, 좀더 쉽고 좋은 내용으로 풀이하여 연락 해주기 바라며 다음에 다시 정리 할 기회에 기꺼이 반영할 것을 첨언(添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