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신씨의 시조는 신영미(申英美)이다. 신영미를 시조로서 1세조(一世祖)로 하여 상계(上系)는 시작되었다. 5세(五世)까지 행장(行狀)을 표기하면다음과 같다.
※ 1세(一世) : 신영미(申英美)
고려에서 권지호장(權知戶長)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웃대는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아주지역(鵝洲地域)에 호족(豪族)으로 거주하여왔던 것으로 여느 지방 호족과 마찬가지로 성(姓)이 없었는데고려조에 들어와서 성을 가졌다. 성을 가진 후 토착지역 아주를 성의 본관으로 삼았고 향직(鄕職)인 호장(戶長)을 수임(受任)하였다. 호장은 지역주민의 수장(首長)이었고중앙관서(中央官署)의 지방행정(地方行政)을 대신하여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자손들은 음직(蔭職)에올랐다. 음직은 조상의 덕으로 벼슬 자리에 오른 것을 말한다. 자(子)는 진승(晋升)이다. 고려조에 등장한 여느 성씨도 그렇듯 시조의 부인에 관한 것은잘 기록되지않아 마찬가지로 배(配)는 알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부인은 실전(失傳)으로전해왔다. 고려 중기 때까지 시조의 부인을 기록한 것은 사실에서 벗어난 것으로 학계에서는 말하고 있는것이다.
※ 2세(二世) : 진승(晋升)
관직(官職)은 산원동정(散員同正),산원은고려 때 2군6위(二軍六衛)에 소속된 정8품의 무관(武官)벼슬이다. 고려 초기에는 의흥친군(義興親軍)의 십위(十衛)에 소속된역시 정8품의 품계의 무관관직이었다. 여기에 동정(同正)이란 직위도 있는데 이것은 산원보다 높은 정5품(正五品)의 무관벼슬이고대개 향리 (鄕吏)에게 제수되었다. 특히 음직으로 벼슬에 오르는 사람은 처음 받는 벼슬로 이 동정직부터였다. 배(配)는 실전(失傳)
※ 3세(三世) : 득창(得昌)
관직은 영동정(令同正)이다. 고려에서 전교시(典校寺),사복시(司僕寺),전객시(典客寺) 등의 관청부서에 둔 벼슬인데 이 벼슬의 품계는 최고 3품 품계에서 최하 9품까지로 두었다. 조선시대에서는 각 부서 우두머리로 종5품에 속했다. 전교시는 각종 도서(圖書)와인쇄에 관한 업무를 보는 관서였고 사복시는 왕이 사용하는 가마와 말을 관리하는 관청이며 전객시는 외국의 사신을 영접하고 조공(朝貢)문제 같은 것을 담당하는 관청이었다. 배(配)는 실전(失傳).
※ 4서K四世) : 윤유(允濡). 초명은 원유(元濡)라고 하였다.
관직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배(配)는 지평직(持平職)에 있은 이언(李堰)의여식(女肩、)이다. 역사서동사찬(東史纂)어1 보면고려 충열왕(忠烈王) 6년 정월 임진일(壬辰日)에 승선(承宣) 신윤유(申允濡)의 본래휘(諱 : 이름)는원유(元濡)였는데 충선왕의 이름자와 음이 같다고 하여 윤(允)자로 바꾸었다. 당시왕명에 의해 왕과 같은 이름의 글자를 금하는 법령 이 있었다. 판도판서는 재상급 관직으로 조선시대 호조판서(戶曹判書)와 같은 직위이다. 나라안의 호구(戶 니)와 조세(租稅),공부(貢賦), 재정(財政)을 맡는 관청의 장(長)이었다.
승선(承宣)은 나라의 명령을 하달하고 궁궐을 호위하고 군사관계의 기무를 맡는 중추원(中樞院)이란 관청의 정3품에 해당하는 관직인데 여기에 좌승선(左承宣) 우승선(右承宣)이 있었다. 군사 병기를 만들고 보관하는 관청인 군기시(軍器寺)의 검교(檢校)라는 직책도 맡았는데 이것은 임시직이었다.
아주신씨의 선대가 남겨 놓은 사적기(事蹟記)에 다음과 같은 글 귀의 한자(漢字)의한 원문이 있는 것을 본다.
이 원문의내용은동사찬(東史纂)에 보면 고려 충열왕 년 정월 임진에 좌승선신윤유가 본래의 이름이 원유(元濡)인데 충선왕의 이름자 원謜 과 같아 대신에 윤(允)의 글자로 썼고 판도판서 겸별도로군기시에 있었다 하는 내용인 것이다
※ 주(註) 동사찬(東史纂)은 동사요찬(東史要纂) 동사찬요(東史纂要)라고도 한다 신라와 고려의 역사가 기록된 책이다 조선 선조 때 오운(吳澐)이엮은 것이다 총 권 책
※ 5세(五世) : 우(祐)
관직은 봉상대부사헌부장령(奉常大夫司憲府掌令)과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신호위호군(神虎衛護軍)을 역임하였다.
봉상대부는 고려의 문관벼슬로 정4품의품계이다. 충열왕 때 제정된 대부(大夫)벼슬이었다. 사헌부장령은 문무(文武) 양쪽의 공직자들을 감찰하는 업무와 풍속을 바로 잡는 일을 하는 기관에 소속된 관직(官職)이란 것이다. 종4품에 해당했다. 전라도안렴사는 전라도 지역을 안찰(按擦)하는 직무이고 품계는 종3품에속했다. 신호위 호군은 신호위라는 군 부서(部署)에 소속된 정4품의 무관벼슬이다. 신호위는고려의 육위(六衛)의 하나로 7개의 군영(軍營)을 거느리는부대였다. 위(衛)는군(軍)의 부서를 표시한 것이다. 특히 우(祐)는 효자로유명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의 문헌에 보면 관직은 호군이었는데 고려말 혼탁한 세상사에 스스로 몸가짐에 조심했고 물러나서는 부모에 효도하기를진력하였다.
부(父) 판서공(判書公) 이 졸(卒)하였을 때는 묘 앞에 여막을 짓고 3년동안 조석 (朝夕)으로곡(哭)을 했다. 그런데대나무 두 그루가 분묘 앞에 자란 것을 보았다. 이것은 효도에 감동한 소치였다는 소문이 났다. 이에 나라에서는 정려문(旌閭門)이내려지고 노변(路邊) 좌측에 효행을 기록한 효자비가 섰다. 그래서 그 지역을 효자리(孝子里)라부르게 되었고 지금의 상주(尙州) 단밀현(丹密縣) 관등리 (舘洞里)이다.
(註: 단밀현은 현재 의성군 지역이다. 그러나 관동리는 상주시 외서면
지역이다. 당시의 의성은 현(縣)으로 상주목(尙州牧)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단밀현을 상주지역
으로 표기한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그 효성을 기려 묘우(廟宇)를 현 북쪽1리 지점에 지어 속수서원(涑水書院)이라 하였다. 배(配)는 유씨(柳氏)로 약목(若木)의 곤산부원군(崑山府院君) 류익정의 여식이며,묘(墓)는 동쪽 10리 사포(蛇浦) 서향원(西向原)에 있다. 이 유적원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祐)는 유교도덕의기본이 되는 3가지 즉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 사이에 지켜야하는 도리를 잘 지켰다고 소문난 위인(偉人)이었다. 상주땅에서는 그의 효(孝)에감동하여 짐짓 부(父)의 묘전(墓前)에 쌍죽(雙竹)이 자랐다.
우(祐)에게는 다음과 같은 말도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공은 특히 조선을개국한 이성계(李成桂)와 막역한 사이로 친구지간 같이 지냈는데조선 개국후 태조 이성계가 관직에 오를 것을 권했으나 고려의 신하였으므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심정으로 거절하였다. 그러나 공이 비록 관직을 받지 않았으나 이성계는공에게 형조판서(刑曹判書)라는 재상자리를 하사(下賜)했다.」
우(祐)를 기리는 배향(配享)의서원(書院)은 상주(尙州)의 속수서원(涑水書院)과검암서원(儉岩書院), 개성(開城)에는 표절사(表節祠)라는사우(祠宇)가 있다.
조선조 인조 6년(1626)에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었던 정경세(鄭經世)가쓴 묘표(墓表)의 글이 있다. 이 글 내용에서도 우(祐)의효(孝)에 관한 행적을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