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봉석{申鳳錫(1631~1704)] :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석형(錫亨). 호는 자족재(自足齋).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 樞府事)를 역임한 신견(申堅), 어머니는 신효성(申孝誠)의 딸인 평산신씨(平山申氏), 할아버지는 신사도(申師道),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역임한 신심, 부인은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경(金鏡)의 딸 의인(宜人)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13세 때에는 부친이 통발 속의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자, 단지 잉어 한마리만 가지고 왔다. 부친이 그 까닭을 꾸짖어 묻자 신봉석은 “차마 모두 잡아오지 못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특히 효성 이 지극했다고 전해지는데, 부친의 병환 때에는 얼음을 깨어 물고기를 잡아오고 상분(嘗糞)하며 간병하였다. 또한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했다. 부친의 계(階)로 인해 선교랑(宣敎郞)에 통적(通籍)되었다.1657년 (효종 8) 한성시(漢城試)에는 급제하였으나, 성시(省試)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후 낙향하여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으며, 스스로 ‘자족재(自足齋)’라는 호를 짓고 편액(扁額)한 뒤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
2) 사찰 : 원문 (釋居)는 사찰 또는 절집을 말한다.
3) 탑만 남은 쓸쓸한 절 : 수정사를 말한다. 신라 신문왕 때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한다.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수량암(水量庵)라고 나와 있으나, 신경준(申景濬) 이 편찬한 『가람고(伽藍考)』에는 ‘지금은 수정사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