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이름은 적도(適道)요 자는 사립(士立)이다. 호는 호계(虎溪)고 성은 신씨(申氏)이며 선조는 아주(鵝洲)사람이다. 조부 신원록(申元祿)은 호가 회당(悔堂)이다. 일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ㆍ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양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연원(淵源)의 학문을 들었다. 또한 효도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고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배향되었다. 부친 신흘(申仡)은 호가 성은(城隱)이고 사림(士林)에 석망(碩望)을 받았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순천박씨(順天朴氏)로 부위(副尉) 박륜(朴倫)의 딸이고 참판(參判) 박안명(朴安命)의 현손(玄孫)이다.
1574년(선조 7) 12월 29일 경오(庚午)에 공은 의성현(義城縣) 도암리(陶巖里) 집에서 태어났다. 신적도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에게 나아가 학문을 익혔는데, 정밀하고 간절하게 받아들여 견문이 날로 풍부해졌다. 이윽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강하고 질정을 구하여 거듭 칭찬을 받았다.
1605년(선조 38) 향시에 합격하였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그의 시권을 보고 탄식하기를, “의리(義理)가 조리있고 분명하니 세상의 유자들이 미칠 수 없도다!”라고 하였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선생 또한, “신적도의 견식(見識)은 그야말로 우리 당의 모범[矜式]이 되기에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1606년(선조 39)에 막내아우 나재(懶齋) 신열도(申悅道)와 함께 성균관에 올라 명예가 자자하였다.
1620년(광해군 12)에 적신(賊臣) 정조(鄭造)가 경상도 관찰사로 빙계서원(氷溪書院) 심원록(尋院錄)에 자기 이름을 기재하였는데, 공은 곧장 여러 유생들을 인솔하여 그 이름을 삭제하며 말하기를, “인륜을 업신여기는 난적(亂賊)이 어찌 잠시도 유림(儒林)의 반열에 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들은 자들이 위태롭고 두렵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1627년(인조 5)에 금나라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쳐들어오자 공은 분연히 일어나면서 “임금님의 수레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왕업이 매우 위태로우니 이는 신하가 되어 초야에서 구차하게 살아갈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원근지방의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며 의량(義糧)을 모아서 밤 세워 달려갔지만 적들은 이미 물러났다.
인하여 대궐에 나아가 수천 마디의 말로 상세히 하여 상소를 올리니, 인조가 후한 비답을 내리고 특별히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에 제수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금나라 오랑캐가 거듭 사나워지자 공은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선비들 가운데 용맹을 품은 자들을 모집하여 만 번 죽더라도 앞장설 계획을 세웠으나 쌍령(雙嶺)이 이미 함락되고 화의(和議)가 곧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행재소로 달려갔다. 눈물을 뿌리며 임금에게 글을 올려 나라를 판 죄를 죄다 아뢰고,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ㆍ동계(桐溪) 정온(鄭蘊)ㆍ용주(龍洲) 조경(趙絅)과 더불어 통곡하였다.
당시 재상 이경석(李景奭)이 일찍이 차자를 올려 특별히 아뢰기를 “신적도는 진실로 국가의 충성스럽고 진실된 신하입니다. 마땅히 관리로 발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공은 탄식하기를, “천지가 닫치고 상하가 거꾸로인데, 이 어찌 백발에 나아가는 날이 있겠는가?”라하고 이때부터 다시는 세상에 대해 생각을 단절하였다.
학산(鶴山) 미곡(薇谷)에 몇 칸의 띳집을 엮었으며 그 집에 “채미(採薇)”라고 편액하고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 날마다 춘추 서적을 읽으며 울분을 달랬다. 당시 사람들이, “소주(韶州) 수풀과 골짝에 대명일월(大明日月)이 있다.”고 칭찬했다고 이른다.
1663년(현종 4) 1월에 질병으로 정침(正寢)에서 죽으니 향년 90세였다. 이해 12월 24일 안평면(安平面) 매봉산[鷹峯] 부태(負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첨정(僉正) 윤향(尹淳)의 딸이고 참판(參判) 윤희(尹希)의 증손자이다. 부인은 공보다 먼저 죽어 계현(鷄峴)에 장사지냈다가 훗날 옮겨 합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