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集19卷10冊,別集6卷2冊,附錄2卷1冊(合13冊) : 四周雙邊 半郭 21.5x 18 cm, 有界, 10行22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2.5 x 21 cm.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문신인 이만도의 시문집이다. 휘준(彙濬)의 아들이며 경상북도 예안 출신. 1866(고종 3)년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가병조좌랑에 제수되 었다. 이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고, 홍문관부수찬으로서남학교수(南學敎授)를 겸하였다. 또한 대신으로서 선전관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 후 부교리․장령․지평․우통례(右通禮)․병조정랑․ 충청장시도사(忠淸掌試都事)․교리․응교․사간․집의․중학교수(中學敎授) 등을 역임하였는데, 가는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또한 시강(侍講) 및 빈대(賓對) 때에이만도가 상주하는 말을 고종이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1876년 일본대사 구로다[黑田淸隆]가 와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목소리로 공격을 하였다. 그 때 집의로서 탄핵문의문구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없앴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 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고,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역임 하였다. 그해 가을 양산군수에 제수되어 굶주리는 백성을보살피고 탐관오리를 소탕하는데 공을 세웠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역임하였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사임하였다.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벼슬길을 단념, 동부승지에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백동(柏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 놓고 경서를 연구하며 날을 보내다가, 1895년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을사오적의 매국 죄를 통렬하게 공박하는 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그해 8월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탄되자 유서를 지어 남긴 뒤 단식 24일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 문집은 1933년 조카 중철(中轍), 강호(康鎬)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소(疏)의 「의상봉사 (擬上封事)」는 1894(고종 31)년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흉계를 폭로하고 오로지 전통적 우호국인 청나라와의 협력관계를 적극 긴밀히 하여야 함을 강조한 내용이며, 「청참오적 (請斬五賊)」은 1905년 을사조약에 찬성한 오적의 죄상을 춘추대의에 입각하여 엄히 성토하고 그들을 처형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것으로 위정척사의 우국충정을 담고 있다.
「경연강의(經筵講義)」는 1869년 8월 7일부터 1875년까지 고종을 모시고 함께 경연에서 경의(經義)를 토론한 내용으로 저자의 경학 사상을 고찰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잡저의「송감쇄론(宋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