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卷10冊 : 四周雙邊 半郭 20 x16 cm, 有界, 10行21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2 x 21 cm.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류성룡의 후손으로 순조 때 대사간을 지낸 류이좌의 시문집이다. 류성룡의 6세손이다. 서울태생으로 어려서 가난하였으나 외조부 이종춘(李宗春)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한 뒤 삼종대부 류규(柳濶奎)에게 심경․근사록․주자서 등 성리서를 배워 1794 (정조 18)년에 이미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류문(柳門)에서는 그와 함께 그의 당형 인 풍안군(豊安君) 상조(相祚)가 동방(同榜) 합격하여칭송이 자자하였고, 아울러 류성룡에게 사제문이 내리는 영광을 받았다.정조는 특히 호문(好文)의 주(主)로서, 그를 불러 자주시를 짓게 하거나 경서(經書)에 대한 토론을 벌이고 그의식견이 넓음을 칭송해 마지않았다. 그뿐 아니라 『주서백선(朱書百選)』 3본을 내려 도산(陶山)․옥산서원에 각 1본 과 그 자신의 강학 용으로 1본을 나누어 간직하게 하였다. 그는 국왕의 돌아봄을 입어 일찍이 옥당(玉堂)으로 분관(分館)되어 청환직(淸宦職)으로 나아갈 소지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정조의 권애(眷愛)는그의 식견을 높이 평가해서만이 아니라 당시 노론에 대한 견제 책으로 남인을 기용하는 정책 의 한 측면이기도 하였다. 1798년 그는 실주서(實注書)가된 이후에 잠시 주사(酒事)로 19일 간 귀양 갔다. 유배를 당한 적은 있으나 관도(官道)가 열려 정언, 지평, 부여현감(扶餘縣監)을역임하였다. 그러나 1800년에 정조가 죽자 1년 동안 소식(素食)만을먹고 국왕과 지난날 수작(酬酢)한 강제문자(講製文字)를 모아 『백세운결록(百世隕結錄)』 3책을 지었다. 그후 1802 (순조 2)년에 수찬이 된 뒤부터 부교리․수찬․장령․안변부사(安邊府使)․현풍현감(玄風縣監)․ 김해부사, 한성우윤․우승지․부총관 등을 지냈다. 그는 문한직(文翰職)을비롯해서 국왕의 사부 직(師傅職), 외임(外任), 중앙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치적을 남겨 2품 이상관이 되었고, 따라 서 그의 선조들도 추숭(追崇)되었다. 그리고 북평사(北評事)로 갔다 오던 1803년에는금강산 을 비롯한 산해제승(山海諸勝)을 역탐(歷探)하고 「금강록(金剛錄)」을 지어 북로토속(北路土俗) 을소개하였다. 또한 역시 북평사로 있을 때 흥학(興學)을 위해 양사청(養士廳)을지어 열읍 제생(列邑諸生)의 독서고교소(讀書考校所)로 했다든지 안변부사로 있었던 1807년에는 제생강 학(諸生講學)을위하여 학사절목(鶴社節目)을 만드는 등 교육사업에도 힘썼으며, 『번암집(樊岩 集)』간행, 『정우복연보(鄭愚伏年譜)』개간(改刊), 『퇴계집(退溪集)』중간 등 선인의 문집․연보를 개간(改刊)․중간(重刊)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이 문집은 서문과발문이 없어 자세한 간행경위는 알 수 없지만 후손 기목이 편집한 것으 로 보인다. 시는 집무의 여가에명승고적을 유람하고 소회를 읊은 것을 비롯하여 시사(時 事)나학문을 나타낸 것 등이 있으며 정조와 수작(酬作)한 시가 8수가 들어 있다. 소(疏)는 사직소가 대부분이나 「사동 경연겸청입재정선생 증작소(辭同 經筵兼請立齋鄭先生贈爵疏)」는 동지경연사의 직책을 사임하면서 정종로에게 증작을 부탁한 것이다. 「안변부응 지진민은소 (安邊府應 旨陳民隱疏)」는 안변부사로 있을 때 왕명에 의하여 안변을 비롯한 북계지방의 민정을 보고한 것으로 당시의 사회경제사 연구에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병산서원청액소(屛山書院請額疏)」는 그의 선조 류성룡을 모신 병산서원에 사액을 내려달라 는 청원소이다. 「경제의종열황제어필보첩후(敬題毅宗烈皇帝御筆寶帖後)」는 저자가 의종황제 (毅宗皇帝)의사무사(思無邪)라고 하는 어필삼자(御筆三字)를 그의 친구 김중우(金重佑)의 집 에서 보고 거기에 대한 제사(題詞)를 쓴 것이다. 「해동보첩후지(海東寶帖後識)」는 그가 시험 보러 서울로 갔을 때 어떤 사람이 폐서첩(弊書帖)을 팔고자 하여 보니 양사언(楊士彦),송인 (宋寅), 이산해, 한호(韓濩), 이우(李瑀) 등 명필(名筆)의 글씨와 김수우(金守愚)의후지(後識)가 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구하여 저자의 중군(仲君)에게 주니 중군(仲君)이극히 좋아 하여 수부잠석(手不暫釋)하다가 죽자 이에 대한후지(後識)를 그가 쓰게 된 것이라 한다.
「중용강의조대(中庸講義條對)」는 『중용』의 어제조문에 대한 답변으로 총 30여조에 달하는데,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설명하고 인심(人心)은칠정(七情), 도심(道心)은 사단(四端)이라 하고, 심(心)과 성(性)을 논함에 있어 심과 성은 동일한 것이나 이(理)와 기(氣)의 구분이 있어 인심 과 도심이 구분된다고 하였다. 잡저 중 「김해비어설(金海備禦說)」에서는 김해는 왜구가 우리 나라를 침범하는 길목인 동래에서불과 50리 거리에 있으므로 방비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군사를 훈련, 유사시에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을 역설 하였다. 기(記)에는 학문을 권장하고 후생을 교육하기 위하여 서당의 연혁을 설명한 「회산서 당기(晦山書堂記)」․「영양정사강당기(潁陽精舍講堂記)」등이 있고, 서(序)에는 임진왜란, 정묘 호란, 병자호란, 무신서적(戊申西賊) 때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선비 4인의 사적을 기록한 「영양사난창의록서(永陽四難倡義錄序)」와 생육신의 문집을 간행한 경위를 밝힌 「생육신집서 (生六臣集序)」가 있다. 그 밖에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참살된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의 일생을 기록한 「이대전선생전(李大田先生傳)」이 있다. 이글은 계유정란과 그 당시의 세정(世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될 만한 자료이다. 「교균역교서(敎均役敎書)」는 대동법(大同法) 및균역법(均役法)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