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卷6冊 : 世系圖, 年譜, 四周雙邊半郭 22.5 x 16 cm, 有界, 10行22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1 x 20 cm.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응조의 시문집이다. 할아버지는 장례원사의 농(農)이고, 아버 지는 산음현감 대현(大賢)이며, 어머니는 수의부위(守義副尉) 이찬금(李纘金)의 딸이다. 17세때 류성룡을 사사했으며, 1613(광해군 5)년에 생원시에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의 문하에서 학문연마에 힘썼다.
1623년에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 문과에 응시해 병과로 급제하였다. 형제 9명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병조정랑․흥덕현감․선산부사 등을 역임하고, 1634(인조 12)년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 후 다시 지평․장령․헌납․수찬․교리․부수찬․집의․사간․응교․승지․호군․공조참 의․대사간․한성부우윤 등의 관직을 인조․효종․현종 삼대에 걸쳐 역임하였다.
1637년에는 청나라 사신이 빈번히 출입하자 접대비 염출을 위해 삼분모회록법(三分耗會錄法) 을 제안해 이를 시행하게 하고, 그 뒤 필요 없게 되자 1658(효종 9)년에 폐지하게 하였다.
1638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8조를 건의했는데, 그 중 하나가 ‘명대의(明大義)’로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고 절의를 고집하면서 교린을 가볍게 단절함을 비판하였다. 1651(효종 2) 년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의 강(講)을 마치고, 근래에 문교(文敎)가 전폐됨을 개탄하고 학문 권장을 건의하였다. 1656년에는 예조참의로있으면서 마음을 닦아 본성을 기를 것,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사랑할 것, 문(文)을 숭상해 학문을일으킬 것을 건의하고, 1659(현종 즉 위)년에는 공조참의로있으면서 임금으로서 행할 도리를 상소하였다.
1664년에는 금성산성(金城山城)의군량미 문제로 예조판서 홍중보(洪重普)와 병조판서 김좌 명(金佐明)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현종은 삼조(三朝)를 시종한 신하로 나이 80세이며 먼 영남의 집에 있는 점을 고려해 사면하였다. 문장에 능했으며, 안동의 물계서원(勿溪書院), 영주의의산서원(義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사례문답(四禮問答)』․『산중록(山中錄)』․『변무록(辨誣錄)』등이 있다.
이 문집은 1776(영조 52)년 후손 김서필(金瑞必)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책머리에 이상정 의 서문과 책 끝에 이세택(李世澤)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시 372수, 권3에 교서(敎書) 2편, 소(疏) 10편, 권4에 차(箚) 4편, 계(啓) 3편, 서(書) 14편, 권5에 잡저 4편, 서(序) 4편, 기(記) 10편, 발(跋) 28편, 권6에 명(銘) 4편, 전(箋) 2편, 상량문 6편, 제문 41편, 권7에 여표(閭表) 3편, 묘갈명 28편, 권8에 묘지명 17편, 권9에 묘비명 3편, 행장 10편, 외집(外 集)에 묘갈지명(墓碣誌銘) 24편과부록으로 세계․연보․행장․묘지․뇌사(誄詞) 각 1편, 만사 10수, 제문 12편, 봉안문 2편, 상향축문(常享祝文) 2편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 가운데 「상여헌선생문목(上旅軒先生問目)」은 두 차례에 걸쳐 『가례(家禮)』가운데 의문 나는 부분 31사항에 대해 스승인 장현광에게 질의․문답한 내용이다. 예학(禮學)에 대한 저자의 남다른 관심을 알 수 있다.
「여조용주(與趙龍洲)」는 조경(趙絅)과 빙산서원(氷山書院)의 묘향위차(廟享位次)를 논란한 내용 의 글이다. 잡저의 「서애유선생변무록(西厓柳先生辨誣錄)」은 스승 류성룡이1592(선조 25)년 에 일본과 화친을 주장했던 일에 대해, 여러 보조 자료를 근거로 그 시말을 상세히 적어 후인의 오해를 막으려는 목적에서 지은 것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학사삼곡서(鶴沙三曲序)」는 자신의 학도지성(學道之誠), 연궐지침(戀闕之忱), 상시지탄(傷時之歎)을 노래한 「학사삼곡」의 서문이다.
도에 몰두하고, 임금을생각하며, 시대를 근심하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보였다.
「학사정사기(鶴沙精舍記)」에서는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을 강도(講道)하며 보낸 학사 정사의 주변 경관과 만년 생활의 자취를 그렸다. 「사례문답발(四禮問答跋)」에서는 자신의 선현의 예에 대한 논설을 모아, 그 차례와 절목이 번다해 지루한 것을 추려 4권 1책으로 묶어 『사례문답』을 엮게 된 경위를 밝혔다. 「청우재수성소(請遇災修省疏)」는 왕의 교서에 따라1648(인조 26)년 거듭된 가뭄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진 현실을 적시하고, 왕의 근검 수성을 자못 격렬한 어조로 직설한 것이다. 「청주이이첨소(請誅李爾瞻疏)」는 간신 이이첨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고, 그를 죽여 종사와 백성에 보탬이 되도록 청한 상소문이다.
시 가운데 「빈가사시사(貧家四時詞)」 4수에서는가난한 농민의 사계절을 사실적으로 노래해 애민의 뜻을 보였다. 「화전가사시사(和田家四時詞)」 4수는농가의 사계절마다의 정경을 차례 로 읊었다. 이밖에 여러 작품에서 수심독행(收心篤行)하는 선비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문장은 당시 명백하고 간엄(簡嚴)하다는평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