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인인 권치의 시문집이다. 출신지는 경상북도 안동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권정 (權挺)이고, 할아버지는 권선(權愃)이다. 아버지 권익(權榏)과어머니 박서(朴湑)의 딸인 무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신완(申浣)의 딸인 아주 신씨이다.종조숙부(從祖叔父)인 병곡권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행동이간결하고 검소하여 사림 (士林)의 존경을 받았다. 1725(영조 1)년 증광시 생원3등 51위로 합격하였다. 그 후로 과거 에뜻을 두지 않았다. 1728(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때 권정규(權鼎揆)와 함께 서기 관(書記官)이 되어 출정하려고 했으나 관군이 적을 물리쳤다는 소식에 해산하였다. 1734(영조 10)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영남(嶺南)의 유림들이 국문(鞫問)을 당할 때, 아버지의 상중(喪中) 임에도 불구하고 국문에 임했다. 향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1남, 권부(權裒) 를 두었다. 약산(藥山) 아래의 감곡(甘谷)에집을 지어 토헌(土軒)이라 현판을 달고 유유자적 했다.
문집중 주목할 만한 것은 잡저의 「천인십도(天人十圖)」와 「거가십훈(居家十訓)」으로 이것 은 자신의 학문의 요령과 실천의 방법을 일목요연하게정리한 것이다. 또 「자훈(字訓)」과 「심 설(心說)」을지어 자손에게 훈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