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장응일의 시문집이다.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며 증이조참판 장계증(張繼曾)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장열(張烈), 아버지는 월포(月浦) 장현도(張顯道), 어머니는 이부춘(李富春)의딸이다. 7세 때 종숙부인 장현광에게 입양되어 가학을 이었다.1629(인조 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1632년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1633년 유곡찰방 을 지냈다. 생부의상을 마치고 1636년 승문원부정자, 1637년 승문원저작이되었다가 다시 양부의 상을 당하였다. 1640년 이후 내직으로는 여러 관직을 거쳐 우부승지에 이르렀다. 1653년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다시 예조참의가 되었다. 1660년금산군수를 역임하였으며 1646년 헌납 재직 시 사사(賜死)의 명이 내려진 소현세자빈 강씨(姜氏)를 위해 구명소(救 命疏)를 9일간 계속 올렸다. 이 일로 인해 조야에서 장응일을 ‘청천백일 장헌납(靑天白日 張獻納)’이라고하였다. 1649(인조 27)년 장령으로 임명되자 훈신 김자점의탐욕을 논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1673년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에 변고가 있자 장례 때 부실하게 감독을 한 대신들의 죄를 청하였다가 무고를 당하여 황간으로 유배되었다. 1675(숙종 1)년 귀양에서 풀려나 우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76년 부제학과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나아가지 않았다. 장응일은 처음 벼슬에 나갈 때 장현광이 격려하기 위해 적어준 ‘충의공약(忠義恭約)’ 이라는네 글자를 평생 마음에 새겨 잊지 않았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며,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묵헌(黙軒) 이만운(李萬運)이 묘갈명을 지었으며, 신도비는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 535번지에 있으며 신도비문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지었다.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에 생전에 지었던 청천당(聽天堂)이 있다.
이 문집은 1976년 9세손 주원(冑遠), 11세손 병기(炳驥)가 편집, 간행하였다. 소(疏)의 「진언소(進言疏)」와 「구언응지소(求言應旨疏)」에서는임금의 뜻이 철석같아야 모든 일에 따라서 안정된다 고하여 한번 결정한 일이 박력 있게 추진할 것을 요구하였고, 「영릉석변시진언소(寧陵石變時進言疏)」는 1673(현종 14)년 공조참의로 있을 때 영릉의 변의 진상을 밝히기위하여 올린 것으로, 윤선도의 상소내용이 옳은 것임을 주장하였다.
「사우승지소(辭右承旨疏)」에는송시열 문도와의 첨예한 대립으로 빚어진 예설과 그에 부수 되는 여러 문제들이 제기되어 있으며, 「사부제학소(辭副提學疏)」에서는 부제학을 사양하는 뜻과 아울러 왕에게 진덕수업(進德修業)에 힘쓸 것을 부탁하고 환곡(還穀)의 폐단을 간곡히 논하였다. 잡저의「추정록(趨庭錄)」은 양아버지 장현광에게서 들은 경전의 훈고(訓詁)와 선현들의 일화, 각지방의 전설, 국가의 지나간 옛일, 그리고 장현광의 언행등을 적은 것이며, 「과정록략(過庭錄畧)」은 증손 대윤(大胤)이저자의 일생을 적은 것이다. 「경산지(京山誌)」는 이원정(李元禎)이지은 저자의 약전이고, 「신장(贐章)」은 그가 지구(知舊)들에게서받은 시문 을 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