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卷10冊 : 四周單邊 半郭 21.3 x16.3 cm, 有界, 11行21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2.7 x 21 cm.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이준의 시문집이다. 수인(壽仁)의 아들이며 류성룡의 문인으로1591(선조 2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가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경세와 의병을 모집, 고모담(姑母潭)에서 적군과 싸워 패했다. 1594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운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이듬해 경상도도사로 나가 『중흥귀감 (中興龜鑑)』을 편술, 왕에게 바쳤다.1597년 지평으로 류성룡과 함께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가 같은 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소모관이 되었다. 이어 예조정랑․수찬 등을 역임, 1604년 주청 사(奏請使)의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제용감정을 거쳐 교리가 되었으나 점차 대북(大北)의 횡포가 심해지자 사직했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어 교리․ 집의․응교 등을 거쳤고 1627(인조 5)년 정묘호란에 다시 의병을 모집하고 왕명을 받들어 전주에 가서 수만 섬의 군량미를 모은 공으로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가 되었다. 상주옥성서원(玉城書院)에 배향되었다. 편저서에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가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 문집은 서문과발문이 없어 간년은 미상이나 1871년 후쇄된 것으로 보인다. 소(疏)의 「청물논속오속부수군토적소(請勿論束伍屬復讐軍討賊疏)」는 정유재란 때 소모관으로서 왜병과 대적하는 속오병(束伍兵)의 편성문제를 논한 것이며, 「논융무소(論戎務疏)」는 후금(後金)의 내침이 분명하므로 방비를 강화하고 인심(人心)을 거두고 충현(忠賢)을임용하는 등 자립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논수성급수덕지요소(論守城及修德之要疏)」는 후금(後金)의 내침에 대비, 산성을 수축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임진왜란 때도처에서 아군이 쉽사리 궤멸된 것은 산성을 지키지 않고 평야에서 대적(對敵)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진폐소(陳弊疏)」는세자보도(世子輔導)를 잘하고 군인을 포함 인재를 양성하며군정(軍政)을 확립할 것 등을 주장하면서 각종 폐정(弊政)을 지적한 것이다. 「진시무소(陳時務疏)」는 보민지책(保民之策)을 강구하면서 왜적의 침입방어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며, 「청선장취양이위자강지본소(請選將聚糧以爲自强之本疏)」는 임진왜란 당시의 패퇴사태를 예로 들면서양장(良將)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영남둔전조치절목정양경리문(嶺南屯田措置節目呈楊經理文)」은 강병을 유지하려면 군량미의 비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지적한 후 유망민(流亡民)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경작케 하면 그들의 생활을 정착시킬 수 있는 한편 군량미의 비축이 가능하다면서 그 구체적인 실정과 조치를 밝힌 것이다. 「정사관문(呈査官文)」은인조반정의 당위성을 밝힌 후 인조의 위호(位號)를 조속히정해달라고 명나라에 요청한 것이며, 「정상국문(呈上國文)」은 조선의 형편상 명나라가 요구한 군비(軍費)를 제공할 수 없다고 밝힌 것이다. 서(書)는 거의 대부분 교제관계, 문집간행, 사무(私務) 등에 관한것이며 「여장방백(與張方伯)」에는 단양군민(丹陽郡 民)의 참상과 대책을 요구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일부의 소(疏)와 정문(呈文)에는 임진왜란 후 북방에서 밀려오고 있는 후금(後金)세력에 대비, 강력한방어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있다. 특히 산성을 수축하고 군량미를 비축하고 장수(將帥)를 비롯한 인재를 양성하고 군대를 정예화하고 보민책 등 내치(內治)에 힘써야 한다는 현실적인 주장들이 강조되어 있다. 이밖에 인조반정 전후의 정치관계, 정치적, 군사적 대명(對明)관계등에 관한 문제들도 언급되 어 있다. 따라서 본서는 왜전과 호란 당시의 현황과 방어책 등 국방문제와시정(時政), 대명 (對明)관계 등을 연구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