影印本(木板本). - 서울 : 景仁文化社,1998. - 【韓國歷代文集叢書(2587-2600)】.
14冊 : 23 cm.
조선 말기의 유학자인 김황의 시문집이다. 명신 우옹(宇顒)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도산서원 원장을 지낸 극영(克永)이며, 어머니는 청송 심씨로 구택(龜澤)의 딸이다. 곽종석의 문인이다.
1909(순종 3)년 의령 남씨와 결혼하였고,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산청의 황매산(黃梅山) 서쪽 만암(晩巖)이라는깊은 산골로 이사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주리학(主理學)을 대표하던 곽종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더욱 문명을 떨치게 되었고, 그학통을 계승하였다. 1919년 스승의 명으로 곽윤 (郭奫 ; 곽종석의 조카)과 함께 상경하여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였고, 여기서 김창숙과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파리장서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이후거창에 내려와서 스승의 명을 받들어 진주․산청․삼가 등지의 유림을 순방하면서 장서의 취지를 설명하고 서명을 받았다.김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떠난 뒤, 왜경에 발각되어 제1차 유림단사건이 일어나자 옥고를 치렀 다. 오래지 않아 병보석으로풀려난 뒤 스승의 상을 당했고, 이때 24세의 젊은 나이로상례 (喪禮)의 중책을 완수하였다.
1926년에는 여러동문과 더불어 서울에서 『면우집(俛宇集)』을 간행하였다. 상해에 망명 중이던 김창숙이 이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김황은 김창숙의 은신처로 몰래 연락하면서 『면우집』 간행소에서 유림조직을 이용하여 모금 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김창숙이 가지고 간 거액의 자금이 뒤에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 주식회사투폭(東洋拓殖株式會社投爆) 등 독립운동에 사용되었음이 알려져 제2차 유림단사건 이 일어나자 9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1928년 만암을 떠나 산청군 신등면 내당촌으로이사 하여 강학(講學)을 시작했는데, 약 50년 동안 1천여명의 문도(門徒)를 길러냈다.
광복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이방학기에 몰려들어 내당서사(內塘 書舍)는 한때 전국유림의중심지로 일컬어졌다. 일제강점기 말 창씨령(創氏令)이 내려지자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는 끝내 보발(保髮)하여 전통유림의 모습을 고수했으며, 자녀들 도 식민지 교육기관에는 보내지 않았다. 그는 일제의 압력은물론이고, 일체의 비리와 무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도학(道學)의 정통을 지키면서 만년에 이르기까지 이를 널리 성심껏 후인 들에게 전수하는 데 힘썼다. 또한 이를 현대의 신 지식층에게까지 이어지게 하여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를 연결시키는 마지막 유종(儒宗)의 구실을 하였다. 그는동서고금의 모든 학문을 두루 섬세하게 섭렵하여 한주학파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기반으로 하는 도학을 정립하였다. 「근서천군전후(謹書天君傳後)」․「동유심학약도(東儒心學略圖)」 등에서는 심설(心說)을중심으로 독특한 성리학계보도(性理學系譜圖)를 만들어 이황-김우옹-이진상-곽종석으로이어지는 계보에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심즉리설의 학통을 지켰다. 그는 성리학적 논변에서 심즉 리설의개념을 분석하고 논증함으로써 논리적 치밀성을 바탕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사서삼경 등 역대경학(經學)에 대한 『쇄기(瑣記)』․『효경장구(孝經章句)』, 예학(禮 學)에 관한 『사례수용(四禮受用)』, 역사에 관한 『동사략(東史略)』․『역년도첩록(歷年圖捷錄)』․『독립제강(獨立提綱)』․『환영대조(寰瀛對照)』(연표), 시문집인 『익붕당총초(益朋堂叢鈔)』, 그리고 『일기(日記)』 등이 있다. 그는 도학의 가치규범 대신 물리적․실리적 가치가 우위를 차지한 시대에 살면서, 20세기의우리 사회가 겪은 사상사적 급류 속에서 심(心)이 공리(功利)에 미혹되어 심의 본체가 지닌 근원성을 확인하지 못하는 데서오는 의리(義理)의 상실을 경고 했다. 또한 도덕적 주체성을 자각시키고 정립하기 위해 이를 실천적으로 추구하여 도학의 정통성을 굳건히 지켰다는 점에서높이 평가된다. 1978년 12월 세상을 떠나자 많은 조객이운집하여 유월장(踰月葬)으로 장사지냈다. 1995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저자는 만년에자신의 시문 가운데 골라 ‘익붕당총초(益朋堂叢鈔)’라 제명(題名)하고 전집 67권 30책, 후집 33권 18책, 총 100권 48책으로 스스로 편집해 둔 바 있다. 그리고 『효 경장구(孝經章句)』․『사례수용(四禮受用)』․『동사략(東史略)』․『환영대조(寰瀛對照)』등의 별저를 일부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83년부터신진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저술을 함께 모아 전집 67권 7책, 후집 33권 4책, 별저 1책, 합 12책으로 편집하여 1989년에 양장본으로 간행하였다.
전집 권1∼4에시․만시(挽詩) 962수, 연(聯) 12수, 사(詞) 13수, 조(操) 1수, 부(賦) 3수, 권5∼ 20에서(書) 689편, 권21∼38에 쇄기(瑣記), 권39∼47에 잡저 91편, 권48∼67에 소초(小 艸)로서(序) 149편, 발(跋) 66편, 기(記) 183편, 상량문 54편, 명(銘) 32편, 잠(箴) 8편, 찬(贊) 15편, 송(頌) 1편, 고축(告祝) 26편, 제문 77편, 애사 16편, 비(碑) 55편, 갈표(碣表) 243편, 묘지 34편, 장록(狀錄) 22편, 유사 9편, 전(傳) 5편, 가술(家述) 21편, 표호(標號) 35편, 증면 (贈勉) 59편, 자제(自題) 12편 등이수록되어 있다. 후집은 1960년 이후의 글을 모은 것으로, 권1․2에 시․만시 708수, 영련(楹聯) 6수, 권3∼9에 서(書) 598편, 권10∼33에 소초(小艸)로 서(序) 193편, 발 19편, 기 269편, 양송(樑頌) 23편, 명잠 50편, 찬송 6편, 고축 37편, 제문 31편, 애사 2편, 비표 160편, 갈표 528편, 묘지 22편, 장록 14편, 유사 10편, 가술 19편, 호설(號說) 35편, 증면 4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12책의별저에는 효경장구․효경외전 (孝經外傳)․사례수용․동사략․동국역년도첩록(東國歷年圖捷錄)․독립제강(獨立提綱)․역대기년(歷代紀年)․환영대조 등이 있다. 사서삼경 등 유교 경전에 대한 논설을일괄하여 ‘쇄기(瑣記)’라하고, 타인의 공덕을 칭찬하는 기․서(序)․송 등 이른바 장갈문자(狀碣文字)를 ‘소초(小艸)’라 일관한 것은 저자가 스스로 겸양한 까닭이다.
시문뿐 아니라 별저까지도 수록하였으므로 책명을 ‘중재전집’ 또는 ‘중재전서’라 해도 무방할 터였다. 그러나 굳이 ‘중재문집’이라 했는데, 이역시 같은 맥락에서의 제자들의 겸손이다. 모든 시문에는 저자 자신이 처음 편집할 때 반드시 저술 연대를명기하고 이를 연월 순으로 정연히 배열하였고, 또 후인들이 간행할 때 별저까지 통틀어 모든 문장에 구두점을표시하였 다. 그리고 제1책의 책머리에 총목차를 새로이 작성해넣었으므로 전후 사정의 이해와 열람 및 독해에 편리하다. 분량이 현재까지 간행된 우리나라 문집 중 최다분량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방대하므로 수록된 내용 역시 광범위하다. 수록된 내용 중 주목되는 부분은전집 권21∼47에 수록된 쇄기 및 잡저이다. 쇄기에는 「주역소차(周易小箚)」․「상서구독(尙書舊讀)」․「시경여의(詩經餘義)」․「춘추전언(春秋譾言)」․「주례차의(周禮箚義)」․「의례통독(儀禮通讀)」․「논어존의(論語存疑)」․「중용추역(中庸追繹)」․「근사록추역(近思錄追繹)」등이 있다. 잡저에는 「다 상소문(茶上所聞)」․「인설강의(仁說講義)」․「독명유학안(讀明儒學案)」․「독이만구조변한주통서차의(讀李晩求條辨寒洲通書箚義)」․「경학십도부찬(經學十圖附贊)」․「한주심즉리설전간재조변변(寒洲心卽理說田艮齋條辨辨)」․「예운론(禮運論)」․「간매천야록(看梅泉野錄)」․「상복고의(喪服攷擬)」․「철학촬요인서기후(哲學撮要因書其後)」 등이 있다. 여기에 수록된 제 논설과 곽종석․하겸진․조긍섭(曺兢燮) 등 여러 사우(師友)와 주고받은 서(書) 및 시․소초 등에 수록되어있는 많은 문서를 통해 경학과 이진상 - 곽종석 - 김황으로이어지는 심즉리설, 즉 주리설(主理說)에 대한 해박․온오(蘊奧)한 탐구 및 분석을 볼 수 있다. 이는 별저의 『효경장구』․『효경외전』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독명유학안」․「예운론」․「속변강씨춘추고(續辨康氏春秋考)」․「철학촬요인서 기후」 및 권20의 서(書)에 수록된 중화인(中華人) 하진무(夏振武)에게 보낸편지 등을 통해 근세 내지 당대의 중국 및 서양학계의 정황까지도 엿볼 수 있다. 저자의 관심과 학구가널리 동서양에까지 미쳤음은 별저의 『역대기년』․『환영대조』등의 저술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잡저의 「예복변증(禮服辨證)」․「혼례친영의(昏禮親迎儀)」․「관례간의(冠禮簡儀)」․「기제고의(忌祭 考擬)」등과 서(書)에 수록되어 있는 예(禮) 관계 논설은 실천도의(實踐道義)를 가장 중시하던 전통 유학의 면모를 능히 짐작하게 한다. 이 또한별저의 『사례수용』을 통해 한층 평이하게 제시된다. 전집 권1에수록된 곽종석 관계의 시 및 권10과 권20에 수록된 곽윤(郭奫)․김창숙과 주고받은 서한 등은 1919년의 파리장서사건 및이로 인해 파생한 제1․2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을 비롯한 전통 유림의 독립운동 사실과, 그들의 독립운동 내지 서양 문명에 대한 기본적 사고와 대응 방법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되는 문서들이다. 한편, 저자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는 잡저의 「조심재영사시소비(曺深齋詠史詩小批)」․「간매천야록」 등에서 알 수 있고, 이 같은 의식은 별저의『동사략』․『환영대조』를 통해 구체화되어 있다. 별저는 저자가 남긴 독립 저서를 말한다. 『효경장구』는 주희의 『간오본효경(刊誤本孝經)』을 기초로 『효경』의 장구를 분명히 체계화한것이다. 『효경외전』 역시 주희의 뜻을 받들어 사서(四書)․삼전(三傳) 및 『대기(戴記)』․『가어(家語)』 등에서 『효경』의 본지(本旨) 를 이해하고 부연하는 데 도움이 되는 문자를 뽑아 모은 저작이다. 『사례수용』이하는 모두 8․15광복 이후날로 급변하는 세정(世情)을 우려해 우리 민족의 사회 및역사를 후생들이 자각하고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쓴 글들이다. 『사례수용』은 관혼상제 사례에대해 알고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서식(書式)과 축식(祝式)을 제시한 응급적 간략 예서이다.
『동사략』은 단군 조선으로부터 대한제국에 이르는 약사(略史)이고, 『동국역년도첩록』은중국 사서(史書)의 예를 참고해 우리나라 통사를 역세계통도(歷世系統圖), 즉 도와 사실 서술인 첩록을 병용해 간략하게 기술한사서이다. 『독립제강』은 1894(고종 31)년에서 1910년에 이르 는 한 말 17년간의 사실을 강목체(綱目體)로찬술한 사서인데, 1897년의 대한제국 선포를 찬 양하는 뜻에서 책명을 ‘독립제강’이라 정하였다. 『역대기년』은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왕 의 기년을 조목식(條目式)으로기술한 간략한 연표 성격의 사서이다. 『환영대조』는 ‘동서제국역년대사일람표(東西諸國歷年大事一覽表)’라는 별명이 있듯이, 동서양의 중요 사실을 대비해 작성한 세계사 연표이다. 중국 요(堯)임금의 즉위년인 서기전 2357년으로부터시작하여 1945년 우리나라 광복에 이르러 끝나고 있는데, 육대주에걸친 세계의 역사와 지리까지 두루 섭렵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 세계가 요연하게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