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사회는 혈연 지연 학연 통혼 당파가 연결된 연고망 사회이다. 정구는 김굉필의 외증손으로 종이모부인 덕계 오건(1521-1574)이 성주 향교 교수일 때 배웠고, 21세 때 퇴계에게, 24세 때 남명 조식에게 배웠다. 동강 김우옹은 남명의 外孫壻로 곽재우와 동서이다. 병호시비와 한려시비,청회시비(동강과 한강 후손들 간에)가 있었지만 각 학파와 문중이 경쟁적으로 학문을 계승하여 발전한 긍정적인 면도 있다. 도산서원에 퇴계 왼쪽에 종향하는 것을 두고 김성일과 유성룡 제자 문중 간에 경쟁이 있은 후 월천 조목은 북인 이산해의 후원으로 도산서원에 종향되었다. 이로써 예안과 안동유림의 분열이 일어났다. 屛虎是非(여강서원-서애 수제자인 우복 정경세(퇴계 從姪壻)가 서애파로 1623년에 서애 유성룡을 퇴계 왼쪽에 배향하였다. 200년이 지난 1805년에 대산 이상정(밀암 이재의 외손자, 고조부가 서애 외손자이나 학봉파)의 제자들이 영남4현(유성룡,김성일,정구,장현광)을 문묘에 배향시켜 달라는 상소에 김성일을 먼저 위치시키자 병파들이 서애 위패를 병산서원으로 옮긴 2차 병호시비가 있었다. 영남지역의 유림사회가 분열되는 앙금을 남겼다.
대구와 인동 성주지역의 영남남부지역 유림들은 김성일과 유성룡을 제외하고 정구와 장현광을 문묘에 배향하려고 하면서 누구를 먼저 하느냐는 寒旅是非(장현광은 한강의 姪壻)가 있고 난 후 장현광은 한강문인에서 제외되고 한강의 수제자가 미수 허목-성호 이익-정약용으로 기호남인으로 학통이 계승된다. 전통사회에서는 학문적 계승은 혈연ㆍ지연ㆍ학연ㆍ 혼인을 통하여 가학(家學)으로 계승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퇴계문인의 거주지 분포 서울 59, 예안 55, 안동 47,영주 14,예천 10, 풍기 6,성주 6, 선산 5, 영천 5, 해남4, 의성 3, 밀양 3, 영해 용궁 함창 대구 호남 광주 원주 각 2명 영남 21,경기도 6, 충청도 4, 호남 5, 강릉 1, 미상 41; 총 309명
한강 정구는 성리학 예학 뿐 아니라 천문풍수지리에도 많은 업적을 남겨서 수령으로 재직한 고장에 대한 읍지를 많이 남겼으나 1587년 편찬되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찬읍지인 함주지 만이 전해지고 있다. 전해지지 않는 읍지는 창산지(창령),1581/동복지,중원지(충주),임영지,관동지,통천지 복주지 등 7개 고을의 읍지가 있었다. 또한 안동부사로 있을 때 영가지 편찬에 관여하였다. 정구의 수제자인 미수 허목은 척주지를 1662년과 1745년에 편찬하였고, 함주지提要, 탐라지, 의춘지제요(춘천)는 전해지지 않는다. 허목은 성호 이익을 거쳐 畿湖ㆍ 近畿 남인의 경세치용학파 실학으로 계승되었고, 이중환은 택리지를 남겼다.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은 상주 외서면 우산리의 입재 정종로를 사사한 응와 이원조(1792- 1872)가 조카인 한주 이진상(1818-1886)에게 학문을 전하였다. 이진상은 心卽理說로 대표되는 독창적인 학설을 발전시켜 조선 성리학 6대가(서경덕 이황 이이 임성주 기정진 이진상)에 포함되는 학자이다. 아들인 대계 이승희(1847-1916)와 수제자인 면우 곽종석(1846-1919), 후산 허유, 회당 장석영 등이 학문과 파리장서사건 등의 독립운동을 계승하였다. 심산 김창숙(1879-1962)과 중재 김황이 퇴계학파의 마지막 불꽃으로 남았다.
19세기 중엽 개항기로부터 100년 동안 성주 인동 등의 경북 남서지역과 산청 거창 등 서부경남지역은 낙동강을 기준으로 경상우도지방은 응와 이원조와 한주 이진상의 직전(直傳)ㆍ재전 제자들은 퇴계학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남명학통으로 부터도 영향을 받으며 영남 성리학, 조선 성리학을 총결하는 거대한 학파를 형성하게 된다. 성리학 뿐 아니라 파리장서사건 등의 독립운동과 현실적 활동에서도 다양함과 진취성이 돋보이는 학파이다. 성주지방의 지리적ㆍ학맥적 특징은 절충적ㆍ포용적ㆍ 종합적이다. 한주학파가 활동한 성주는 고령 선산 칠곡 일대는 낙동강 중류지방으로 퇴계학파의 경상좌도 안동지방과 남명학파의 경상우도 진주지방을 연결하는 중간지대로 절충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지역으로 구분하는 것도 가능하다.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의 동강 김우옹은 남명 조식의 외손서로 한강 정구와 함께 兩岡으로 불리어지며 동강의 13대 종손인 심산 김창숙이 유림단사건, 파리장서사건 등의 독립운동과 해방 후의 반독재투쟁으로 영남 사림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정구는 현풍 못골(池洞) 김굉필의 외증손으로 외가인 칠봉리 유촌에서 태어나 수륜면 간말(枝村)에서 부모 묘를 시묘하며 이주하였다. 조선 중기까지의 친손과 외손이 混住하며 외가동네로 이주하는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회연서원과 무흘구곡도 유교적 문화경관의 좋은 사례이다. 응와 이원조는 가야산 북쪽 계곡에 포천구곡을 명명하고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따 도를 이루는 과정을 자연경관으로 상징화하였다. 晩歸亭과 萬山一瀑亭을 건립하여 학문과 심신수양을 하였다. 조선 중기 사찬읍지 편찬에 서애 유성룡과 한강 정구의 영향은 지대하며 정구의 학맥은 근기 남인의 경세치용학파 실학으로 계승되어 읍지와 지리지, 지도 편찬이 계속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