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義城)의 아주신씨가(鵝州申氏家)는조선중기 이래 명망있는 가문으로 발돋음하여 지금까지 누백년 동안 의성읍과 봉양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읍파(邑派)라불리는 내부령공파(內府令公派)와 구파(龜派)라 불리는 봉주공파(鳳州公派)는 의성읍과 봉양 구미리를 중심으로 세거하면서 많은 걸출한 인물과 전적을 남겼다. 이번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간하게 된 의성 아주신씨편 『고문서집성』은 바로 이 두 가계가 소장하여 왔던 고문서들이다.
아주신씨의 본관인 아주는 본래 고려말에 거제속현(巨濟屬縣)이었던 아주현(鵝州縣)註1)현재는 거제시(巨濟市) 아주동(鵝州洞)으로 그 지명이 남아있다. 을 말한다. 의성에 오랫동안 세거해온 아주신씨는 아주현의 권지호장(權知戶長)이었던 영미(英美)의 후손들이다. 이들이의성에 세거하게 된 것은 4세ㅏ 윤유(允濡) 때부터이다. 윤유는 초명이 원유(元濡)로 고려말 판도판서겸군기시사(判圖判書兼軍器寺事)를 역임하였고、일찍이 거창(居昌)에세거하다가 상주(尙州) 망경산(望京山)註2)망경산은 의성군 단밀면에 위치한해발 499m의 산이다. 신윤유가 고려의 망함을 보고 애통해하여 초하루 보름에 그 산에 올라가 개경을 바라보고 충절을 지켰다 하여 망경산이라고 하였다한다. 뒤에만경산(萬景山)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남아있다. 아래 지금의 의성군(義城郡) 단밀면(丹密面)으로 이주하면서 아주신씨의 의성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그의아들 우(祐)는 고려말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를 역임하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일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채 학문에 전념하였다. 효행이 지극하여 그가 살던 마을이 효자리(孝子里)가 되었고、그의 효행이 『삼강행실록』에 실렸다. 지금의 의성군 단밀면주선리(注仙里)에 그 효자비가 남아 있으며、속암리(速岩里)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우는 광부(光富、內府令公派)와 광귀(光貴、 鳳州公派)를두었는데、여기에서 읍파와 구파로 나눠지게 되어 내부령공파는 읍파로 봉주공파는 구파로 불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