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휘가 채(埰)이고 자가 자경(子卿)이며, 호는 인재(忍齋)이다. 선대에 판도사 판서(版圖司判書) 신윤유(申允濡)와 안렴사(按廉使) 신우(申祐) 부자가 잇달아 고려조에 현달하였다. 안렴공(按廉公)이 부친상에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쌍죽(雙竹)이 솟아나는 이적(異蹟)이 있었다.
6대를 내려와 호부 우시랑에 증직된 신원록(申元祿)에 이르러 역시 지극한 효성으로 소문났으니, 이분이 공의 증조이다. 조고 신흘(申仡)은 좌승지에 증직되었고, 선고 신적도(申適道)는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을 지냈는데 천품이 매우 고고하여 관직을 버리고 한가로이 수양하였다. 선비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경술년(1610, 광해군2) 6월 1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단정하였으며 뜻을 독실하게 가져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문예가 탁월하고 일찍 성취되어 인재(訒齋) 최현(崔晛) 공이 일찍이 함께 경사(經史)를 강론하다가 감탄하며 “경을 전문(專門)하는 이름난 학자도 미치지 못할 바이다.”라고 하였다.
병술년(1646, 인조24)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였는데, 몸가짐이 엄숙하여 동료들이 공경하고 감복하였다. 성균관에서 거벽(巨擘)을 꼽을 때면 영남의 세 아무개라고 칭하였으니, 대개 같은 시기에 두 명의 이씨(李氏)가 있어 공과 이름이 같았는데 문장과 행실을 앞다투었다고 한다. 조정에서 육행(六行)으로 관유(館儒)를 선발할 적에 공이 으뜸이 되어 화려한 명성이 더욱 빛났는데도 공은 오히려 스스로 부족하게 여기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훌륭하게 여겼다.
경자년(1660, 현종1)과 계묘년(1663)에 거듭 양친의 상을 당하자 슬픔으로 몸을 손상함이 예제(禮制)보다 지나쳤다. 복을 마친 뒤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문을 닫고 조용히 정양하여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서사(書史)에 빠져 지내며 느긋하게 여생을 마치려는 뜻을 지녔다. 관찰사가 집에 찾아와 경의를 표하였고 경재(卿宰)들이 대부분 그가 세상에 등용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임자년(1672) 9월 8일에 졸하니 향년 63세였다.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호양 처사(湖陽處士) 권익창(權益昌)의 따님이다. 유순하고 정숙한 덕이 있어 부도(婦道)를 잘 수행하였는데, 공보다 두 달 먼저 졸하였으니 실로 같은 해 7월 3일이었다. 현의 북쪽 계란치(雞卵峙)에 합장하였다가 후에 팔지산(八智山) 병향(丙向)의 언덕에 개장하였다.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우석(禹錫), 문석(文錫)은 모두 그 문장과 행실을 이었으며, 두 딸은 금문조(琴文操), 박문흥(朴文興)에게 시집갔다. 우석은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덕윤(德潤)은 의모(義模)를 후사로 삼았다. 차남 덕해(德海)는 아들 의모, 기모(器模), 예모(禮模)가 있다.
막내 덕위(德湋)는 아들 익모(益模), 분모(賁模)가 있다. 두 딸은 권득태(權得泰), 송후(宋煦)에게 시집갔다. 문석은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덕일(德溢)은 아들 언모(彦模), 정모(正模)를 두었는데, 정모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차남 덕호(德浩)는 예모를 후사로 삼았다. 삼남 덕순(德洵)은 정모를 후사로 삼았다. 세 딸은 이영중(李英中), 권성(權惺), 이후겸(李厚謙)에게 시집갔다. 현손 이하로 또 몇 명이 있다.
공이 돌아가신 지 백여 년이 되었는데 묘도에 비석이 없었으므로 여러 후손들이 빗돌을 마련하여 글을 새겨서 후세에 분명히 보여 주고자 하여 나에게 부탁해 명을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