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는초전리(草田里, 일명 초밭),서쪽으로 쌍계천(雙溪川), 남쪽에는 명덕리(明德里), 북으로는 오동산이 위치하고 잇습니다.
오계서당은 구련1리에 있으며, 강와 임필대선생이 지역 유림들과 함께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1735년건립을 결의하고 각자가곡식과 자금을 일부 내고 도백에게 아뢰어 지원을 받아 1942년 착공하여 1744년에 준공하였으나, 건립계획에서부터 준공까지는 10여년의 세월을 흘렀습니다.
강와 임필대 선생은 서당을 준공한 후 전체적인 경과를 작성한 오계서당기가현존하여 전해오는데, 오계서당기에 나타난 서당의 배치를 보면 남향을 향하여 가운데는 4칸의 정당을, 동쪽과 서쪽 역량 역시 4칸으로 구성하고 정당에는 회보당, 동재에는 존성재, 서재에는 홍밀재, 소당에는 양정당이라는 편액을 걸어 건축물의 구성이공립교육기관인 향교의 축소판이라고 보여지고 지금은 본당인 정당건물만 현존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모성당 임세장 선생도구련1리 출신입니다.
모성당 선생은 초시 등 향시에 합격하여 과거에입격한 인재이나, 당시 조정의 사정에 의해 출사하지 못한불운한학자입니다만, 향리에서 후진 양성에노력하신 분
입니다. 그리고 임세장선생은의성 문소루 중수기문을 쓰시는 등 근동에서 널리
알려진 유학자입니다.
그리고 구련1리는 여헌 장현광 선생과도 인연이 있는 마을입니다.
여헌선생이 청송, 영양 등 유람할 시절에 구련1리에 들러 지역 유림들과어울리는
등의성현령 부임전부터 빙계계곡 등을 유람한 사실이 있어, 의성지역실정에 매우
밝은분입니다. 이 같은인연은 여헌 선생의 누이의 시댁이구련리로 머무를곳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구련1리(윗구지미) 마을 앞에는 오래전부터 연지(蓮池)가 있었고, 뒷 산세가거북처럼 생겼으며, 거북이 연꽃을 좋아한다하여 구련동(龜蓮洞)이라 전해옵니다.
아랫마을에 대응하여 이 마을은 웃구지미(윗구지미) 또는 귀상(龜上)이라부른다. 마을입구에는 둥그스름한 돌에‘구련1리 윗구지미’라고 써 놓았습니다.
윗구지미 마을 안, 민가 입구에는이 마을의 전통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아주 큰 은행나무가 한 그루가 우뚝 솟아 있다. 은행나무는 일명학자수(學者樹)라 하는데,은행알이 많이 열리듯이 학자가 많이 배출되기를 염원하는 뜻에서 심었다고 합니다.
이 은행나무는 1982년 9월 23일에 의성군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고, 수고(樹高)는 20m, 흉고(胸高) 둘레는 5.5m, 수관(樹冠)의 폭은 20m, 수령은 500년이나 된 것이라고 합니다.
보호수라고 적힌 빗돌에는 수령을 370년으로기록하고 있는데. 워낙 오랜 세월을 살다보니 예전에 벼락을 한 번 맞은 적이 있다고 하며, 현재는 외과수술을 하여 나무의 모양이 유지되고 생육이 다시 왕성해졌다고 합니다.
오계서당과 귀은재가 위치하는 윗구지미 마을은 풍천임씨(豊川任氏) 외에는 다른 성씨가 살고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면 인근에 위치한 아래구지미(구련2리) 마을에는 경주김씨(慶州金氏)가 많이 거처하는데, 아래구지미 마을 입구에는 둔와 김선 생유적비(遯窩金先生遺跡碑)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이 비석의 주인공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던 둔와(遯窩) 김내옹(金乃雍, 1514~1559)이란 분입니다.